병실 창밖으로 새잎이 돋은 봄나무들이 보인다. 일 년 중 며칠 동안 세상은 온통 연두로 물든다. 빛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저 나뭇잎들이야말로 생명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어제 서둘러 병원에 오려고 택시를 탔을 때, 도로변에 환하게 핀 벚꽃들을 보면서 기사 아저씨가 말했다. “나무는 봄이 오면 저렇게 다시 꽃을 피우는데, 사람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잖아요?” 목적지가 병원인 손님을 태워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나 싶었다. 

병실 안을 둘러본다. 신경외과 병동에서도 꽤 위중한 상태의 환자들을 모아 놓은 병실이라, 네 명의 환자 가운데 의식이 분명하고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나의 어머니와 건너편 침상에 뇌수술을 받고 들어온 할머니 한 분뿐이다. 몇 가닥의 목숨줄에 의지한 채 난간으로 둘러싸인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노인 환자들의 모습은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보호자로 들어와 병동에서 만 하루를 지냈을 뿐인데 마음은 바닥이 없는 울적함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얼마 전 어머니가 거실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발이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닐 것이라 여겼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종합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를 받았다. 척추 골절이라고 했다. 워낙 고연령이고 골다공증이 심해서 약한 충격임에도 뼈에 금이 가서 내려앉았고, 그것이 근처의 신경을 누르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내려앉은 뼈를 제거하고 인공 척추를 삽입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통증이 심해지고 있어서 가능한 한 빨리 수술 날짜를 잡았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전신마취를 하고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식구들 모두 걱정이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으나, 후유증이 왔다. 고연령 환자가 전신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하면 섬망과 치매가 오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을 수술 전에 이미 들었다.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섬망이 너무 심해서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코로나 상황 때문에 보호자로 병실에 들어오는 과정도 복잡했다. PCR 검사를 받고 일단 병동에 들어온 보호자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교대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원래는 보호자가 병실에서 상주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으나, 2주 동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척추 수술 환자이기에 예외적인 경우였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 침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간호사에게 불평했다.

“저쪽은 딸이 와서 살뜰히 시중을 드는데, 왜 우리 딸은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

마흔에 혼자 되어 자식들 키우느라 안 해 본 일 없이 고생이 막심했다는 95세의 할머니다.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씩씩하고 똘똘한 분이다. 할머니는 어젯밤 내내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누……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누……’라고 잠꼬대를 했다. 그 시간에 나의 어머니는 혼몽한 상태에서 ‘아이고 다리 아파……. 아이고 다리야.’라고 계속 신음했다. 과거의 고통과 현재의 고통 모두 두 사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하고 안락한 궁중의 삶을 누리던 싯다르타 왕자는 동문 밖으로 나가 노인을 처음 보았다. 서문 밖으로 나가서는 병든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고, 남문 밖으로 나가 주검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혜롭고 영성이 충만하던 싯다르타 왕자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늙고 병들어 무너져가다가 마침내 숨을 거둔 인간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글로 읽고 말로 들어서 아는 것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나 또한 병실에 들어와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할당된 각자의 비참을 눈으로 직접 보니, 싯다르타 왕자가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인간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다가 그 뒤로는 계속 손상되고 무너진다. 노화와 죽음을 겪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유일한 평등일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불편과 장애를 경험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심지어 성장하고 있는 어린아이나 젊은이라 할지라도 몸은 끊임없이 불편하고 때때로 고장이 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몸과 마음이 정상이고 아무 문제도 없는 삶은 어쩌면 플라톤이 말하는 완벽한 원처럼 그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봄나무들 뒤로는 육교가 보이고, 그 아래로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가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다. 어쩌면 나는 병실 밖으로 펼쳐진 저 평범한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잠긴다. 잠깐. 잠깐이라는 말은 대단하다. 며칠 전 친구와 공원 벤치에 앉아 호떡과 붕어빵 커피를 나눠 마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잠깐의 순간이 참 편안하고 좋았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얼마 안 있으면 예순 살이 넘는 내가 지난 시간을 생각해도 ‘잠깐’에 불과하다. 스무 살의 내가 과거를 생각할 때도 그저 ‘잠깐’이라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지금 창밖을 내다보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오롯이 ‘잠깐’일 뿐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잠깐의 순간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조차 소중하게 느껴지나 보다. 

부희령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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