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아, 세상을 건성건성 살지 말아라.

담장의 풀 한 포기에라도 정성을 들이면 꽃으로 변한다. 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만사가 다 그런 법이다. 내가 눈길을 보내면 상대는 마음이 온다.

남에게 화분 하나를 보낼 때도 화분만 덜렁 보내지 말고 거기에 보내는 당신의 정과 마음을 듬뿍 담아서 보내라.

쪽글 하나라도 워드로 쳐서 보내는 것과 육필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는 것은 받는 사람에게는 느낌의 깊이가 달라진다.

다 같은 초록색이라도 명화 속의 나뭇잎 색깔과 자연생의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아무리 명화라도 그림 속의 나뭇잎은 자연의 그것처럼 투명한 생명의 흐름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그런 것처럼 친 글씨와 쓴 글씨에도 보내온 사람의 온기가 깃들고 깃들지 않은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화분 하나를 다른 분에게 보내는 데도 기왕이면 인사치레만 보내지 말고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담아 보내라. 상대에게 꽃을 보게만 하지 말고 꽃을 느끼게도 하라. 

나는 평소에 받은 꽃이나 화분을 되도록 잘 키우려고 애를 쓴다. 그 종류나 숫자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살려서 기를 수 있는 데까지 돌보려는 습성이 있다. 그것들도 하나의 고귀한 생명이라는 생각과, 그 많은 꽃나무 중에서도 나와의 인연이 지중했기에 우리 집에 왔을 거라는 생각, 보내준 분의 정성과 성의를 생각하여 감사히 잘 길러 키우는 것이 보내준 사람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 등으로 해서 받은 화분은 정성껏 보살피고 잘 돌보아 기르게 된다. 보낸 분과의 얼굴을 대면했다는 느낌으로…….

우리 집에는 십 년을 넘긴 화분은 보통이요, 삼사십 년을 함께 살고 있는 것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관음죽에 핀 꽃도 보았고, 한 그루의 수국나무에서 하얀 꽃, 노란 꽃, 자색 꽃이 해마다 번갈아 피어나는 신기함도 보았다. 화분을 받아 기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내주는 것도 고맙긴 하지만 화분과 함께 꽃나무의 이름, 음지성인지 양지성인지, 사철에 따라 물 주는 방법과 횟수, 두는 위치와 조건 등을 메모해서 함께 보내주면 화분 돌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번거롭겠지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받은 화분을 잘 키우면서 보내준 당신의 마음도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꽃이 피면 당신을 집으로 모셔 차라도 마시면서 인생의 쓰고 단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은 것 아닌가.

아파트촌 사잇길을 걷다 보면 어느 집에선가 내다 버린(내다 놓은) 화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모두는 누군가에 의해서 누군가에게 정성스레 보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처음 얼마간은 받은 사람의 관심 속에 지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집안의 무관심이 되고, 더 지나면 가정의 애물단지가 되고, 끝내는 추방되어 길거리로 나앉게 된 것들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화분들을 보면 독거노인의 말년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많이 아리다. 팽개쳐진 꽃나무들의 아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분을 버리고 꽃을 버리고, 생명을 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런 버릇이 관성화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도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큰 것도 귀하게 생각지 않는 습성이 몸에 배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고, 작은 일을 보면 큰 방향을 알 수 있듯이,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무슨 사람다운 온기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찮은 화분 하나라도 끝까지 지켜 정성껏 살피다 보면 어느 날 마음에 새싹이 돋으리라. 

피터 톰킨스와 크리스토퍼 버드가 함께 지은 《식물의 정신세계》에서는 인간은 바이오플라스마(Bioplasma)를 통해서 우주와 연결되며, 살아 있는 모든 식물과도 교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아, 세상은 대강대강 살 일이 아니다. 

화분 하나를 보낼 때도 정이 깃들고 마음에 담기게 하라. 그리고 받은 화분은 잘 보살펴 꽃의 천수를 누리게도 하라. 그것은 꽃을 가꾸는 일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다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윤길 /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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