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당구를 치고 있는데 원고청탁을 받았어요. 불교식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지만 정작 불교생각을 안 하고 살고 있다 했더니, 그럼 당구 얘기도 좋다 하길래 당구 얘기를 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다 키운 주부들한테 당구 어떠냐 하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제목을 뭐라고 쓸까. 시쳇말로 ‘당구 홀릭’이라 붙이려 했더니 너무 영어식이고, 그럼 ‘당구 예찬?’ 이건 또 한자말이네요. 그럼 우리말로 하면 뭘까 생각해보니 ‘당구에 미치다?’ 헐, 그냥 ‘당구 홀릭’이라 하기로 하지요.

요즘은 여자들도 당구를 치긴 하지만 여전히 동네 당구장에는 레이디가 거의 없어요. 제가 당구를 치고 있으면 당연히 아저씨들의 눈길이 한 번 혹은 그 이상 스치고 지나가지요. 그리고 꼭 물어요. 언제부터 당구를 쳤냐, 잘 친다, 몇 년 쳤냐 하고요. 그럴 적마다 꽤 오래된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해서 어물어물하다가 이번에 메모를 찾아보았더니, 그새 햇수로 8년이나 되었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 해가 딱 환갑 되던 해였어요. 젊어서 서른 즈음에는 공 쫓아서 뛰어다니는 테니스를 치다, 사십에는 공 따라 걸어 다니는 골프를 치고, 육십에는 테이블 위에서 공 굴리며 걷고 있어요. 당구가 어찌나 재밌는지 치과의사 노릇 접고 잠시 놀 때는 당구장에서 나를 좀 알바로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종일 당구 치고 싶어서요. 물론 당구장에서 할머니를 알바로 써주지 않았지만요.

그런데, 그런 영화도 있더군요. 당구장 청소 3년에 당구 여왕이 된 64세 할머니 이야기인데, 왕년의 스타 원미경이 주인공으로 나왔어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개 3년이면 라면 끓이는 거 맞죠? 그 나이에 시작해서 영화처럼 찍어치기(마세)까지 가능하다면 천재가 틀림없겠지요.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얘기는 이렇습니다. 그녀는 당구장을 청소하면서 틈나는 대로 당구공 굴려 보다 뜻밖에도 재미가 있어집니다. 양파 썰 때도 반두께, 3분의 1 두께로 분할하며 썰고, 포도알 세 개 놓고 젓가락으로 굴려봅니다. 그녀가 빨래를 개면서 당구 중계를 보면 남편이 나와서 가소롭다는 듯이 TV를 꺼버리는데, 그녀는 입을 삐죽삐죽, 구시렁구시렁하면서 또 켜고 봅니다. (실제로 당구공 지름이 6.4센티인데 4분의 3, 3분의 2, 2분의 1, 4분의 1 때로는 8분의 1 두께까지 분할해서 맞춰야 합니다. 16분의 1 두께도 가끔 필요해요.) 그녀는 그렇게 당구에 빠져 드디어는 아마추어 당구 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합니다. 아! 그렇군요! 제목으로 ‘당구에 빠지다’가 좋겠네요. 

저와 당구와의 인연도 돌아보니 당구공처럼 둥글둥글합니다. 저와 불교아카데미에서 같이 공부한 친한 친구가 어느 날 당구 얘기를 하는 거예요.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마침 제 치과에 당구장 사장이 치료받으러 왔어요. 그래서 ‘당구 배우고 싶은데 레슨을 해 줄 수 있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가 여자가 무슨 당구를? 이런 표정으로 웃었어요. 

암튼 그렇게 당구를 시작했죠. 그리고 지금은 당구 안 치면 무슨 재미로 살까 싶게 당구를 즐깁니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했는데 저는 하루라도 당구를 안 치면 손에 가시가 돋는 듯합니다. 제가 당구를 너무 좋아하니까 그때 그 친구가 거봐, 내 덕분에 당구 배우기 잘했지? 하며 생색내곤 합니다. 우리 가족은 제가 당구 치느라 바빠 시시콜콜 잔소리 안 해서 좋아합니다. 오히려 적극 협조하지요.

당구 초보 때는 신호등 빨간불도 당구공으로 보이고, 동그란 것만 보이면 저걸 어떤 두께로 쳐야 맞출 수 있을까 생각하느라 길거리를 가면서도 심심할 틈이 없었어요. 외람된 비유지만 뭐랄까 참선하는 스님들이 화두를 들 때 한다는 집중이 이렇지 싶었어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으나 행주좌와가 모조리 당구 생각뿐이니 화두에 비유할 만하다 할까요. 

그러고 보니 서산대사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선가귀감》을 보는데, 참선공부 하는 사람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忿心)과 대의심(大疑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대신심이란 비유하자면 정말로 당구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대분심은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 화가 나는 거예요. 대의심은 그러니 어떻게 하면 잘할까 연구하는 거지요. 

요즘 저는 3쿠션을 치는데 꿈속에서도 파이브 앤 하프(당구 3쿠션 기본 공식) 값을 계산하기도 합니다. 저녁이면 피곤해서 잠도 잘 자고요. 이런 것을 ‘당구 수행’이라 한다면 스님들한테 혼나겠지요?(ㅋㅋ) 

심심한 레이디들은 당구장으로 오세요. 여기서 잠깐! 운전도 그렇지만 당구를 남편한테 배우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마지막으로 당구의 좋은 점 얘기할게요. 녹슨 머리도 쓰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고, 실내에서 노니 겨울에 추워도 걱정 없고, 여름엔 집에 에어컨 안 켜고 당구장에 오니 더위도 걱정 없고 돈도 그리 안 드는 좋은 스포츠입니다. 물론 잘 치려면 스트레스받겠지만 잘 안 늘어도 그냥 당구 자체를 즐기면 되어요. 

덕분에 당구장에 여자 친구가 많아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김윤이 / 종로경치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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