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만불교의 어제, 오늘, 내일

1. 들어가는 말 

서대원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
서대원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

대만은 얼핏 보기에 우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다르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다. 단지 중국 지역의 광대함과 각 지역의 차이를 고려한다 해도 대만은 나름의 특색이 매우 많은 지역이다. 

모든 지역이 그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대만은 매우 독특한 지역이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동아시아 다른 지역보다 좀 더 독특한 지역으로 여긴다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지역과 역사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모든 지역의 특색은 대부분 지리적 위치 및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역사가 그러하고 현재 남북한의 특징도 그러하고 좁게는 각 도 그리고 각 지역의 특색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우리는 분단 전 각 지역의 상이한 특색보다는 공통점이 다소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라 통일 이후 하나의 국가로서 동일한 혹은 유사한 환경과 문화 속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대만의 종교지형과 불교의 위치’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대만의 과거와 현재와 관련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만의 종교지형’ 안에는 불교가 포함될 것이다. 불교는 종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만의 종교지형을 자세히 설명하게 되면 그 안에는 불교의 상황과 위치도 일부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대만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만의 역사는 대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는 오늘날 대만의 종교지형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선 짧게나마 대만의 간단한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의 논제인 ‘대만의 종교지형과 불교의 위치’는 대만의 현황을 서술하라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불교의 위치는 현재 대만에서의 불교 위치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현재의 대만은 과거의 대만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론에도 부합된다. 그러므로 대만의 역사와 현재를 함께 혹은 연결 지어 서술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될 것이다.

단지 이 글에서는 서술의 편의에 따라 대만의 역사와 종교 일반을 서술하고 불교에 관해서는 보다 전문적으로 장을 달리하여 서술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만불교의 형성 과정과 현황도 분리하여 서술할 것이다. 이렇게 서술하는 것이 보다 명료하게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연구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한국불교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으려 하는 것일 것이다. 《대집경(大集經)》에서는 “일체귀심(一切歸心): 만법유아(萬法由我)”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심(心)’은 ‘아(我)’이다. 다시 말하면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로 회귀하는 것이다. 대만불교는 우리가 보는 대만불교이고 우리를 위해 회귀하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나가며’ 부분에서는 약간의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취사선택할 것에 대해 서술해 보았다. 물론 이것은 전반적인 분석이 아니다. 단지 필자가 보기에 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부를 나름대로 서술해 본 것뿐이다. 

2. 대만 간사(簡史)와 종교

고대의 대만은 중국의 영토였는가? 물론 어떤 ‘고대’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여기에선 역사를 주로 논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좀 모호한 개념의 ‘고대’를 사용해 보겠다. 필자가 보기에, 대만은 모호한 상태로 중국의 영토에는 포함되기는 하지만 중국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는, 즉 독립된 상태라고 말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동북의 간도 등과 어떤 의미에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만의 본토민 즉 고래의 본토민은 현재 대만의 소수민족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만에는 고산족 등 매우 여러 소수민족이 있는데 이 소수민족들이 고래의 본토민이다.

과거 즉 명청 시기 대만은 중국의 영토 중 복건성의 일부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건성과의 지리적인 근접성을 의미한다. 과거 일부 복건성 어민들이 대만을 출입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임시 거주지를 마련하고 단기간 머물기도 하였다고 한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후일 대만에 들어온 중국인도 복건 특히 복건성의 남부 지방인 민남(閩南) 지역의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현재 대만에서는 중국의 표준어인 국어 이외에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민남 지역 방언인 민남화(閩南話)인 것만 보아도 이런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이 지점에서 대만 종교의 기본적인 성격을 살펴보자. 대만의 소수민족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필자의 과문 탓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광의의 샤머니즘 등에 해당하였을 것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대만 학자들은 원주민의 신앙을 ‘범령신앙(凡靈信仰)’이라 말한다. 이것은 천지간 모든 곳에 영(靈)이 존재하며 특히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조상령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즉 만물유영론과 조상숭배사상의 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여러 민족이 존해하였고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은 상태였기에 각기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죽음을 선사(善死)와 악사(惡死)로 나누며 자살과 타살 등에 의한 악사는 죽은 뒤에 영계에 이르지 못하며 선사자는 죽은 뒤 영계에 가서 후손을 돌본다는 것이 일반적이고 인간계와 영계를 이어주는 존재―즉 영매―가 대부분 존재하였지만 영계에 대한 서술과 영매 등은 종족마다 달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재 그에 대한 자세한 상황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적지 않은 의식이 축제나 관광 혹은 일부 생활 등의 모습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무속과도 어느 정도 유사한 신앙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대 신앙 즉 상대(商代)의 종교현상과도 유사해 보인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대의 대만은 비록 중국의 영토였지만 중국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었다. 소수민족들이 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형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인구 변동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인구변동에 가장 극적인 변화를 준 것은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만을 통치하며 중국화를 시도하였다. 과거제 등을 시행하였으며 유학(儒學) 등의 학문을 보급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상당수의 내지 한인(漢人)들이 대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때 어떤 신앙들이 들어왔을까?

공적으로는 이미 앞에서 서술한 유학이 들어왔을 것이며 유학은 근대화 이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현재에도 은연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대만의 기본 정서 중 강력한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우리와도 유사하다. 이 외에, 아마도 도불(道佛)도 들어왔을 것이다. 단지 당시에는 도교가 보다 강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대만의 도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 보자. 중국의 도교는 크게 남북이종(南北二宗)으로 나눈다. 즉 금대(金代)에 성립되어 원명청 시기 정통 지위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전진교(全眞敎)와 남방의 정일교(正一敎)가 이것이다. 천사교(天師敎) 혹은 천사도(天師道)라고도 부른다. 대만은 당시 복건성 천주와 장주 지역의 천사교가 전래되어 지금도 성행하고 있다. 필자는 전진교는 아직도 대만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천사교는 축귀(逐鬼) 등을 능하게 하며 신령숭배 등이 비교적 많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만 소수민족의 신앙과 천사교가 유사한 신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들 수 있다. 당시 소수민족의 신앙이 천사교와 실제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는 현재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서인지 대만의 본바탕은 일반적으로 도교라고 한다. 즉 대만은 기본적으로 도교 지역이다. 그것도 전진교와는 다른 경향을 가진 도교 지역이다. 이점은 비교적 분명하고 매우 여러 학자가 지적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정성공이 대만을 통치하기 얼마 전, 대만은 일본과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 교역하고 있었으며, 얼마 후 네덜란드는 대만을 무력 점거 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대만 점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가 기독교 전파였다. 네덜란드의 선교사들은 원주민 지역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으며 원주민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기록한 문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즉 기독교의 영향력이 비교적 일찍 성립하였으며, 중국 대륙 혹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보다 직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정성공 통치 후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모두―는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므로 비록 일찍 전래되기는 하였지만 현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단지 대만사회는 비교적 일찍부터 기독교를 접하였고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 대만의 종교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장개석의 대만 접수 및 통치일 것이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중국 본토에서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밀려나 대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장개석과 군대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반공 인사들이 함께 들어왔는데 거기에는 고급 지식인 그리고 승려들이 함께 들어왔다. 대만의 근현대 문화 지형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대만의 불교도 기본적으로는 이때 대륙으로부터 들어온 불교가 근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보다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가 접한 책을 근거로 살펴보면, 장개석의 기본 정서는 유가적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다. 손문의 소개로 송미령과 결혼할 적에 송미령 집안의 요구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송미령은 사업가이자 전도사였던 송가수(宋嘉樹)의 딸이다. 매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며 본인도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신자였다. 

이런 이유로 대만 통치 시기 기독교를 지지하고 지원하였다. 필자가 대만불교에 대해 고찰하였을 때 어떤 대만 노스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대만 초기에는 정부에서 불교를 싫어하고 기독교를 지원하였다. TV 등 매체에 승려 등은 나갈 수 없었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렇다면 근대 초기 즉 장개석 정부 당시 대만의 종교를 개괄하자면 ‘도교적 바탕 위에 정부의 기독교 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대만의 기독교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현재 대만에서 기독교―가톨릭과 개신교 총합― 인구는 대략 4% 정도이다. 즉 100만 명 정도이다. 그러나 영향력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 · 재계의 상류층 인물 중 기독교 인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대만의 국민당 집권 및 서구화 추세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단지 대만의 서구 유학파 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아―물론 정확한 분석은 아니고 필자의 생각이지만― 국민당 집권 등이 보다 주요한 원인이라 보인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현재 다수의 소수민족이 기독교 신자라는 점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즉 일본 패망 이후 소수민족들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재 소수민족의 기독교 상황을 보면 소수민족의 기독교 신도 중 70% 정도가 장로교를 신앙하고 그 이외에는 대부분 가톨릭이거나 기타 종파라고 한다. 이것은 청말 함풍(咸豐) 시기(1859년 5월 18일) 본토로부터 3인의 필리핀 전도사와 5인의 중국인 전도원이 대만으로 들어온 이후 일본 통치 시기에 점차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일본이 패망하자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소수민족에게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였다. 그런 결과로 다수의 소수민족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보충 설명하여야 할 것이 있다. 과거 대만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가 학교를 통해 학생회 등을 조직하고 교육하여 교세를 확대하였다. 여러 번 사회문제가 되자 대만 정부에서는 교육에서 종교를 퇴출시켰다. 그 이후 공립학교에서는 종교 학생회 특히 기독교 학생회 등이 사라지게 되었고 사립학교에서는 지하화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사건은 기독교 발전에 제동을 걸게 되었다. 아울러 최근 소수민족 기독교 신도 중 기독교를 벗어나는 현상도 적지 않다고 한다.

 

3. 대만불교의 발전 과정과 현재

대남시(台南市) 안평구 (安平區)의 정성공(鄭成 功) 동상(Wikimedia 사진)

일반적으로 대만불교 즉 현재의 대만불교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이미 앞에서 말한 장개석 정부와 함께 들어온 대륙의 인사들과 사대문파(四大門派)를 이야기한다. 상당한 일리가 있으며, 대략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단지 실제 대만에 가보면 이것이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있다.

우선 장개석 통치 이전의 불교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전에는 대만에 불교가 없었는가? 18세기부터는 대만에 불교의 흔적이 보인다. ‘암(巖)’이란 이름의 절 등이 대량 존재하였고, 18세기 후반부터는 이미 유도(儒道)와 융합되었다고 한다. 특히 도불(道佛)의 융합 현상은 현재의 대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며 중국 내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청나라의 할양으로 인해 대만은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이때 일본은 신도(神道)와 함께 불교를 활용하였다. 신교보다는 불교가 대만에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최소한 당시 대만사회에 불교가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증거가 있다. 당시 포스터 가운데, 경찰이 연화좌에 칼을 들고 앉아 있는 그림에 “악질예방(惡疾豫防)” 등의 문구와 그 위에 큰 글자로 “나무경찰대보살(南無警察大菩薩)”이라 쓰여 있는 것들이 있다.

만일 당시 대만에 불교가 없었거나 약체였거나 서먹한 관계였다면 이와 같은 포스터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의 포스터는 분명 대만에 편재해 있는 불교의 분위기를 활용하여 대만 사람들을 경찰에 귀의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현재 많은 연구가 대만 현재 불교의 근원을 장개석 시기에서 잡고 있으며 그것도 상당히 일리 있지만, 사실상 대만불교의 기초는 최소한 18세기에 시작되었으며 일본 통치 전에 이미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양보해 말한다 해도, 장개석 시기 대만 본토인에게 불교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친숙하였을 것이며 더 나아가 우호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에서 말한 큰 상황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즉 도교적 바탕과 정부의 기독교 지지라는 상황 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친근감 혹은 우호적인 정서를 가진 불교가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불모지에서 불교가 발전하였다는 장엄한 표현보다는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이미 널리 알려진 대만불교의 사대문파에 대해 요약적으로 살펴보자.

① 고웅(高雄) 불광산(佛光山)

성운 법사(星雲法師)가 창시인이다. 그의 속명은 이국심(李國深)으로 중국 강소(江蘇) 사람으로 대륙에서 출가한 임제종 승려이다.

필자가 불광산을 방문하였을 때, 신도와 행자들의 긴 행렬을 지어 식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매우 규율이 엄격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불광산에서 수행하던 한국 보살을 만나 불광산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조직 등이 매우 엄격하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만불교의 포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② 금산(金山) 법고사(法鼓寺)

법고산(法鼓山)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학술적인 불교 문파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불교와도 상대적으로도 유사하다. 법고산은 성엄 법사(聖嚴法師)가 창립하였다. 성엄 법사는 강소 사람으로어린 나이인 14세에 출가하였으며 임제종과 조동종의 전수자이다. 

법고산은 교학을 중시한다. 필자가 보기에, 비록 선종을 계승하지만 천태학의 영향도 상당히 있는 듯하다. 

현재로는 세계에 중국불교를 홍양하는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으며,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을 체계적으로 전수하고 연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만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영향력이 적지 않다.

③ 중대선사(中臺禪寺)

중대선사는 유각 화상(惟覺和尙)이 창립하였다. 1970년 영천사(靈泉寺)를 세워 중생을 제도하였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신도가 많아 영천사에서 법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중대선사를 창립하였다.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중대선사는 선사(禪寺)란 이름답게 참선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④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자제공덕회는 비구니인 증엄 상인(證嚴上人)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는 스스로 인순(印順)의 제자라고 한다. 

자제공덕회는 단순한 불교단체라기보다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봉사 단체이다. 엄청난 재력을 움직이고 있으며 대만과 대만 이외의 지역에서 매우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만의 사대문파가 현대 대만의 불교를 형성하였다고 평가된다. 대략적인 면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대만에 가서 호텔 등 숙소에서 TV를 보거나 천천히 대만을 돌아다니다 보면 대만불교는 이 사대문파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밖에 불교의 상황 중 활발한 일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靈鷲山 無生道場 임제/조동종 

基隆 靈泉禪寺 조동종 월미산파

五股 凌雲禪寺 임제종 관음산파

太湖 法雲寺 조동종 법운사파

岡山 超峰寺 임제종 태강산파

台南 開元寺 임제종 개원사파

白化 大仙寺 임제종 대선사파

北投 普濟寺 眞言宗

東和禪寺 日曹洞宗

千佛山 菩提寺 임제종 천불산파

霧峰 萬佛寺 임제종 만불사파

이 외에도 일본불교와 여러 종파의 사원 즉 정토종 율종(律宗) 등 여러 교파가 활약하고 있다. 즉 선종 중심이기는 하지만 여러 종파가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만큼 사대문파가 절대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점은 필자가 대만불교를 고찰할 때 느낀 것이기도 하다.

위의 사대문파를 분석하기 위해, 일본 통치 시기의 4대법맥을 살펴보자.

① 月眉山派(曹洞宗) ② 觀音山派(臨濟宗) ③ 法雲寺派(曹洞宗) ④ 大崗山派(臨濟宗)

여기에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장개석이 대만에 들어오기 전에도 선종 중심의 불교가 대만의 대세였음을 알 수 있다. 조동종 임제종은 모두 선종 불교이다. 그리고 모두 중국불교 종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본래의 4대법맥과 구별하기 위해 사대문파를 신(新)4대법맥이라 부른다면 적지 않은 계승 관계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를 살펴보자. 신4대법맥이라 할 수 있는 사대문파의 창립인을 살펴보자. 불광산의 성운 법사, 법고산의 성엄 법사, 중대선사의 유각 화상은 모두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분들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분석처럼, 장개석이 대만에 들어온 이후 대륙의 불교가 대만에서 발전하였다는 분석도 일리가 있지만 ‘기륭(基隆) 영천선사 조동종 월미산파’ ‘오고(五股) 능운선사 임제종 관음산파’ ‘태호(太湖) 법운사 조동종 법운사파’와 같이 일본 통치 시기의 법맥도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음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이외, 자제공덕회의 증엄 상인은 대만 본토인이다. 이것은 대만불교의 발전과 변화를 보여준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증엄 상인이 인순 법사를 스승으로 말하는 것은 당시 대만불교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앞에서 말한 장개석 정부 당시 대만의 종교 상황 즉 ‘도교적 바탕 위에 정부의 기독교 지지’ 속에서 앞의 사대문파의 지대한 노력과 기타 문파의 분발로 현재의 대만불교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불교 고찰을 해 보면, 대만의 스님들은 자주 다음과 같은 말하곤 한다.

우리는 도교 지역서 정부의 비협조를 받으며 불교의 不毛之地에서 현재의 불교를 창출했다.

필자가 보기에, 위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좀 더 거칠게 살펴보자면 완전히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만은 장개석 이전에 불교에 대한 우호적인 부분이 존재하였으나 장개석 정권 이래 어려운 상황에서 발전을 일군 것이다. 이것이 현대 대만불교의 간사(簡史)이다. 그리고 비록 본래의 선풍(禪風)과 불교가 존재하였으나 외지인들의 노력으로 현대의 불교가 성립되었다는 것도 상당 부분 사실에 부합한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4. 대만의 종교지형과 불교의 위치

그렇다면 현재 대만의 종교지형과 불교의 위치를 살펴보자. 현재 대만의 종교인 상황을 살펴보자. 다음 내용은 2005년에 미국의 중앙정보국에서 대만의 종교 상황을 조사한 것이다. 그 후 대만 당국에서는 다시 대만의 종교인구를 조사하지 않았는데 사실상 당시 상황에서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대만 인구 중에 불교도는 대략 800만 명으로 전체의 35%를 차지하고 도교는 대략 755만 명으로 33%를 차지한다. 이 조사에서 민간신앙은 도교로 분류하였다. 이 이외 80.5만 명 즉 3.5%가 一貫道를 신봉하였고, 59.8만 명(2,6%)은 新敎徒이고 29.7만 명(1.3%)이 천주교 신도이며 개신교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많은 군소의 종교들이 있다. 대략 20% 정도는 신앙이 불명하거나 특정한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보충 설명을 해야 할 것이 있다. 불교와 도교의 신도는 경계가 모호한 면도 있고 중복되는 수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민속신앙(?)이라 할 수 있는 조상숭배, 유학 그리고 심지어 토테미즘 등과도 중복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면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우리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무속과 불교의 경계가 모호하거나 중복 신앙하는 경우도 많으며 유학과도 은연중 중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대만의 유학도 우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한다. 유학 신봉자는 많지 않은 반면 생활과 문화 그리고 사유 방식에서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단지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유학의 영향력은 우리가 대만보다 강해 보인다. 그리고 불광산의 인간불교에서는 적지 않은 유교적인 내용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며, 자제공덕회의 강력한 사회참여 활동에도 적지 않은 유가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불교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면을 그리 많이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세세한 면을 차치하고 보면, 우선 형식적이고 숫자적인 면에서 대만의 불교 세력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숫자상으로 제일 우세하여,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하고 있다. 도교까지 더한다면 68%인데 중복 등을 감안한다 해도 60% 정도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불교 우호 인구가 최소 50%는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이외 대만의 수많은 군소 종교 중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예를 들면, 20만 명 이상의 신도를 가진 미륵대도(彌勒大道)는 기본적으로 불교와 도교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이며, 일관도(一貫道)는 도교의 영향이 강하고 삼계교(三階敎)는 본래 도교의 일파이나 3교(유불도)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다. 이런 것을 감안한다면 불교 우호 인구는 50%를 훨씬 넘으리라 생각한다. 이것만으로도 대만에서 불교의 세력과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장개석 집권 시기 장개석 정부는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럼에도 현재 이 정도 수준이라는 점은 매우 의외일 뿐 아니라 특이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동아시아에서 기독교가 가장 성공한 곳은 한국일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을 꼽자면 홍콩 정도이다. 그렇다면 대만이 특이한 것인지 우리가 특이한 것인지는 후일 곰곰이 고찰해 보아야 할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장개석 정부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당시 정부의 비협조에도 불교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도 대만에서 기독교가 저조한 이유 중 하나는 어려움 속에서 발전한 불교 때문일 것이다.

또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다. 필자가 대만에 가서 고찰한 결과에 의하면―매우 재미있는 현상인데― 우리나라의 불교와 기독교의 분위기와 대만의 불교와 기독교의 분위기는 완전히 상반된다. 우리나라의 불교 신도들은 대부분 종교적으로 조용하고 기독교 신도들은 활동적이며, 불교 신도들은 상대적으로 불교를 잘 모르며 기독교 신자들은 최소한 성경의 내용을 일부라도 인용하고 설명하는 듯하다. 그런데 대만은 불교는 시끄러운 반면에 기독교는 매우 조용하다. 바꾸어 말하면 대만불교는 활동적이지만 기독교는 정태적이다. 이 두 종교 간의 신도를 비교해 본 적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대만의 불교 신도들은 불교에 대해 우리보다 많이 알고 있는 듯하였으며, 제한적인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대만 출가자 특히 비구니들의 불교 수준은 상당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대만불교의 위상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신도 면에서 보면 35%를 차지하여 대만 내부 최대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종교이다. 만일 우호적인 사람을 계산하면 50%를 훨씬 넘을 것이다. 어쩌면 70% 정도에 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대만의 도교는 나름대로 신도를 보유하고 있고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만 지역 내 편차가 클 뿐 아니라 대부분 대만 국내에 국한되며 활동도 불교보다 다소 소극적이다. 기독교는 불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만불교는 대만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으며, 대만인 생활의 여러 방면에 침투되어 있다. 단순히 종교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생활과 경제도 그러하다. 특히 ‘불광산’과 ‘자제공덕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대만의 신앙 생활뿐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에서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 이런 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면모라고 생각한다.

셋째, 필자가 보기에, 대만불교는 이미 대만 정계나 재개 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이른바 화인권(華人圈)에서 교량 혹은 창구 역할을 하는 듯하다. 미국의 코리아타운은―필자가 알기로― 기독교가 매우 우세하다. 그러나 미국의 화교들에게는 불교가 강세이고 이 역할의 상당 부분을 대만불교가 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교들과 대만의 관계를 연계하고 또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으로 상호 도움을 주는 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만의 사대문파를 방문하여 기부자들을 살펴보면 이런 정황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으며, 대만의 불교학자가 만년에 미국 등에 가서 화인(華人)을 상대로 불교 강의를 한 기록도 적지 않고 그들이나 그들의 전수자가 편집한 불교 교재도 적지 않다. 이런 것은 대부분 대만의 불교 혹은 항대(港臺, 홍콩과 대만)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대만에서 불교의 위상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과장하면 종교로서는 이미 상대가 없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 나가며

필자는 대만불교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어떤 대만 비구니의 일갈이 있다. 필자가 두 번째 대만불교 고찰을 할 때 만난 어떤 비구니와 대화하던 중 들은 일갈이다.

대만은 본래 도교 지역이다. 그리고 정부도 불교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불교의 不毛之地에서 천신만고의 노력을 통해 오늘의 대만불교를 가꾸었다. 한국은 천 년 이상의 찬란한 불교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황도 우리보다는 훨씬 유리하였다. 그럼에도 현재 한국불교는 쇠퇴하고 있으며 활기가 없다. 이것은 한국의 불교도와 출가자들의 책임이다. 한국의 불교는 그 좋은 환경에서 분발하여야 한다.

물론 이 발언이 구구절절 정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 상황에 대한 인식이 올바른지는 고려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큰 틀에서 보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과 대만의 불교에서,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였을까? 무엇이 이런 차이를 조성하였을까?

필자는 이에 대해 매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고 해법을 연구하려 한다면 몇 편의 논문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단지 필자는 여기에서 약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매우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우선은 대만 출가자들의 지계(持戒) 상황이다. 우리보다 훨씬 청정한 생활이었다. 단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서술하였기에 여기에서는 보다 중요하고 본질에 가까운 다른 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대만불교를 고찰하며 우리와 다른 특징을 목격하였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자면 불학을 공부하는 크고 작은 장소가 많았다. 대부분 불경을 강독하고 있었다. 즉 신도들도 어렵지 않게 불경을 접하고 공부할 수 있으며 불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관심이 있으면 쉽게 이런 곳을 찾아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대만의 적지 않은 스님들은 비불교 집안 출신으로 어느 날 이런 곳에서 공부하다가 출가한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대만불교에는 불학(佛學)이 있다. 그것도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산중과 시내에 크고 작은 공부처가 매우 많다.

필자는 현재 한국불교 위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불교에 불교(부처님 가르침) 즉 불학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사원에서 불교 활동은 많아지는 듯하고 불교대학도 많이 생기는 듯하다. 단지 그 내용을 들어가보면, 역시 불학이 부족하고 수준 있는 불경 강독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신도 탓일까, 우리의 불교 교단 탓일까?

이런 이유로 비불교적인 신도 더 나아가 출가자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건 나만의 경험인가? 당장 눈앞을 보면, 재미있는 활동이 우리 불교를 살릴 듯하다. 정말 그럴까? 

필자가 보기에, 현재 한국불교는 진지한 공부가 필요하다. 사부대중이 다시 불경을 읽어야 하고 불학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흔들림 없는 진정한 불교인을 배양하는 것이며 오래도록 불교가 흥성할 수 있는 거름이다.

많은 사람이 대만불교의 성공 원인을 이야기하지만, 대만불교의 불경 강독과 공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별로 하지 않는 듯하다. 필자는 이것이 대만불교 성공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서대원 dayuans@hanmail.net 

연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석사). 중국 북경대학에서 왕필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연세대, 원광대 등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언어와 실제의 관계’ 등의 주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유불도 철학과 그 교류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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