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만불교의 어제, 오늘, 내일

1. 서언

김응철
중앙승가대 교수

대만불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연구 자료는 1919년 일본 대만총독부에서 실시한 종교조사, 1996년 발간된 《대만불교백년사지연구(臺灣佛敎百年史之硏究)》 등이 토대가 되고 있다. 엄종정(嚴正宗) 저 《중독대만불교(重讀臺灣佛敎 : 戰後臺灣佛敎(正編))》(2004), 하면산(何綿山) 저 《대만불교(臺灣佛敎)》(2010) 등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광연구원 편저 《대만불교의 5가지 성공 코드》(2012) 등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불광연구원에서 간행했던 《전법학 연구》에서 대만불교에 대하여 다양한 주제와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이 분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약 10여 년 동안은 대만불교 현황과 관련된 연구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불교계에서는 현대 대만불교가 보여준 모습을 매우 이상적인 발전 모델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특히 신흥 사대종문이라고 할 수 있는 불광산사, 자제정사, 중대선사, 법고산사 등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다수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으며, 이들 사찰은 한국 불교계의 많은 스님과 불자들이 직접 방문하는 성지순례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20년대 들어서면서 대만불교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약 50여 년 동안 보여주었던 지속적 발전상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대만의 신흥 사대종문이나 전통불교 종단들의 활동은 지속되고 있으나 대만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현재까지도 대만사회에서 불교는 중요한 종교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만 정부에서 발표하는 통계자료 등을 분석해 보면 대만 불교계의 성장세가 다소 위축되는 등 여러 가지 한계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대만불교의 전개 과정을 청대 불교, 일제강점기의 불교, 광복 이후의 현대 불교 등 세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2022년 현재의 모습을 통계자료를 통해서 분석하였다. 그리고 신흥 사대종문은 현재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2. 대만불교 전개 과정 

1)대만 불교사의 시대 구분

대만불교의 시작은 중국 대륙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함께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대만으로 유입될 때 불교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대만불교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경우에는 최초로 사찰이 건립되고 신행 활동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던 명청(明清) 교체기를 출발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대만불교의 변곡점은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이에 반발하여 대만으로 이주했던 본토인들이 이주하는 시점, 일본이 대만을 강제로 점령하면서 일본불교를 전파한 기간, 그리고 독립과 함께 발전을 도모한 대만 불교계의 노력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대만불교의 역사는 청나라, 일제강점기, 독립 이후 현대 등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대만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시기는 최초의 사찰로 알려진 죽계사(竹溪寺)가 건립된 1662년부터,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청(淸)으로부터 일본에 할양될 때까지의 청대(靑代) 불교 시대이다. 두 번째 시기는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약 50년간 일본 식민지 시대이며 이때는 일본불교가 대만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현재까지의 현대 불교 발전기로 중국 공산화에 따라 대륙의 전통불교가 유입되고, 새로운 신흥 사대종문이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1996년 발간된 《대만불교백년사지연구》에서는 1895년부터 1995년까지의 기간을 두 시기로 구분하였다. 이 책에서는 1895~1945년의 기간을 ‘일거시대(日據時代)’, 1945~1995년의 기간을 ‘전후흘금(戰後迄今)’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199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만불교의 변화를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대만 불교학계에도 현재 대만불교를 조명한 전문적인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다만 가장 최근의 대만불교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대만 종교성의 종교조사와 통계자료 등이 있다.

2) 대만의 불교 전래

대만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파된 것은 17세기 중반의 일이다.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일가는 대만을 거점으로 명청 교체기에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치를 내걸고 청에 대항하였다. 이 시기에 푸젠성의 주민들이 다수 대만에 이주하면서 불교도 함께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에 건립된 최초의 사찰은 17세기 초에 창건된 죽계사(竹溪寺)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1662년경에 창건된 용호암(龍湖庵)과 미타사(彌陀寺) 등이 더 먼저 건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이미 대만의 일부 주민들 사이에 불교가 적극적으로 신봉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만불교 전파 초기에 지어진 사찰들은 주로 관청이나 정부 관원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청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찰로는 황벽사(黃蘗寺)가 있는데 강희 27년(1688)에 건립되었으며, 해회사(海會寺)는 강희 29년(1690)에 건립되었다. 그렇지만 강희 58년(1719)에 지어진 마조묘(媽祖廟)는 마조와 관음을 함께 모셨으며, 승려가 거주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교와 도교가 함께 신봉되었음을 보여준다.

대만의 불교는 대륙에서 건너온 스님들이 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스스로 불교를 믿고 사찰을 건립하는 경우들도 생겨났다. 또한 불교만 믿는 것이 아니라 도교와 유교, 전통 신앙이 함께 수용됨으로써 복잡한 형태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형태의 불교단체가 재교(齋敎)라고 할 수 있다. 건륭 18년(1748) 재교 단체는 청 조정에 의하여 사교(邪敎) 단체로 규정되어 탄압받았다. 이 시기에 대만에는 이와 관련된 단체와 재당이 많이 지어졌다. 재교는 불교를 신봉하지만 출가주의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전통불교로부터도 외도(外道)로 간주되었다.

대만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죽계사(竹溪寺) 옛 산문(Wikimedia commons 사진)
대만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죽계사(竹溪寺) 옛 산문(Wikimedia commons 사진)

 

청대의 불교는 명대의 불교 통제 정책을 계승하였으며 이로 인해 출가주의 불교계는 쇠퇴한 반면에 백련교(白蓮敎), 나교(羅敎) 등과 같은 변형된 거사불교가 자리 잡았다. 나교는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단체로 청대의 조운선(漕運船) 운항에 참여한 선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후대에 비밀결사 조직인 청방으로 변형되었다. 명청 교체기에 청나라에 반대하던 일부 세력이 대만으로 유입되면서 전통불교의 승려들과 재가불교 단체들도 함께 이주했다. 

대만에 선종 계통의 전통불교뿐만 아니라 나교(羅敎), 재교(齋敎) 등과 같은 신흥 재가불교 단체들이 형성되게 된 것도 청대의 불교정책에 기인한 바 크다. 청의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재위 1661~1722) 때의 기록인 《대청회전사례》에 따르면, 당시 청나라의 사묘(寺廟) 수는 황제 칙령으로 건립한 대사묘(大寺廟) 6,073개소(승도 10인 거주), 소사묘(小寺廟, 승도 8인 거주) 6,409개소, 사적으로 건립한 대사묘 8,458개소(승도 6인 거주), 소사묘 58,682개소(승도 2인 거주) 등으로 전국적으로 79,622개소에 달했다. 여기에 거주하는 승도는 최대 10명에서 2명까지였기에 전국적으로 승도의 수는 약 4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후 청의 황제들은 대외적으로 불교를 탄압하였으며, 제5대 황제 옹정제(雍正帝, 1678~1735, 재위 1722~1735)는 부녀자들이 사찰에 가서 진향(進香)하는 것을 금하였고, 제6대 황제 건륭제(乾隆帝, 1711~1799, 재위 1735~1796)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출가를 제한하였다. 

출가자가 감소하면서 그 빈자리를 재가불자들이 대신하는 사례들이 나타났다. 청대의 대표적인 재가 거사로는 팽소승(彭紹升, 1740~1796)과 양문회(楊文會, 1837~1911) 등이 있다. 팽소승은 염불신행을 중심으로 불교학 연구와 저술활동, 생명방생, 빈민구제, 반승공양, 경전인각 등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양문회는 불전 간행과 보급, 불교교육, 《거사전》 간행 등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이들의 활동이 대만불교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재가불교 세력은 유교와 도교를 혼합하는 복합 종교적 특성을 띠면서 확대되었다. 이들은 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엄격한 계율과 채식을 실천하면서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1748년(건륭 13) 중국 복건성에서 나교(羅敎)가 관련된 폭력시위가 발생하자 사교(邪敎)로 지정되면서 이들은 대만으로 향하였다.

당시 대만에는 죽계사(竹溪寺), 용호암(龍湖庵)과 미타사(彌陀寺), 소서천사(小西天寺)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스님들도 함께 건너왔으나 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재가불자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는 불교단체들이 생겨났다. 1887년 대북(臺北)이 대만의 성도로 지정되면서 급격한 인구 증가했는데 그 여파로 인해 불교 인구도 함께 급증했다. 

3) 일제강점기의 대만불교

《대만불교백년사지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무렵 대만불교는 월미산파(月眉山派), 능운사파(凌雲山派), 법운사파(法雲山派), 대강산파(大崗山派) 등 전통 사대문파가 중심이 되어 포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중 대강산파는 대남 개원사(開元寺)의 분파로 고웅(高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월미산파는 기륭(基隆) 월미산에서 영천사(靈泉寺)를 창건한 선혜(善慧, 1881~?) 법사가 이끌었다. 선혜 법사는 중국 복건성 고산(鼓山) 용천사(湧泉寺)의 선지(禪智)와 묘밀(妙密)의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여 대만으로 넘어왔다.

이 시기에 대만의 재교(齋敎)는 용화파, 금동파, 선천파 등 세 문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용화파와 금동파는 명청라교(明淸羅敎)의 분파에 속한다. 중국 명청대에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등지에서 활동했던 나교(羅敎)는 무위해탈을 추구하는 선종의 전통을 계승한 비밀 종교결사체로 나청(羅靑)이 창시했다. 나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종교단체가 청련교(靑蓮敎)였으며, 이후 일관도(一貫道)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1948년 중국에서 일관도의 활동을 금지하면서 대만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대만에는 일본불교가 유입되었다. 당시 일본의 진종 본원사파와 대곡파를 비롯해서 일련종, 정토종, 조동종, 진언종 고야산파 등이 대만에 사원과 포교소 등을 건립하면서 활동했다. 그리고 이후 임제종 묘심사파와 천태종 등도 사원을 건립했는데 그 당시 일본불교 사암은 총 50여 개에 달했다.

태허(太虛, 1889~1947)는 1913년 중국불교회가 나아갈 세 가지 혁명적 방안으로 교리혁명, 제도혁명, 재산혁명 등을 제시했다. 교리혁명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고 인간불교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며, 제도혁명은 불교대학을 설립하고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여 사찰을 운영하게 하는 것이며, 재산혁명은 불교 재산의 공유화 및 승가교육비 지급, 사회자선사업 실천 등이다. 태허의 이와 같은 혁명적 사상은 이후 인순, 동초, 성운 등의 스님들을 통해 대만에서 인간불교의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대만 재가불교의 전통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불교와 융합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것은 대만에 전래된 일본불교와 기존의 재교 사이에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불교 단체 중에서 진종 본원사파, 진종 대곡파, 일련종, 정토종, 조동종, 진언종 고야산파 등이 대만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 종파들은 대만의 재가불교운동 단체들을 끌어들였으며, 대만 불교도 중에서는 자발적으로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1915년 대만의 위칭팡(余清芳)을 비롯한 재가불교 단체들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대남(臺南)에서 발생한 것으로 서래암(西来庵)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857명이 검거되고 86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이 나타나자 일본의 대만총독부는 대만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종교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대만의 일부 승려와 재교도가 조동종과 임제종에 가입하여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1919년 발표된 종교조사 결과를 보면 대만의 전통사찰은 77개소, 재교 사묘는 172개소 등으로 집계되었으며, 다수의 사찰은 관음사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에는 재가불교 단체들이 참여한 대만불교용화회가 창립되었는데 이때부터 계율의 수지와 채식을 중심으로 했던 나교(羅敎)의 전통이 사라지고, 식육대처를 허용하는 재교(齋敎)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총독부는 1922년 대만 전체를 아우르는 남영불교회(南瀛佛敎會)를 조직하여 대만불교를 억압하고 왜색불교화, 황민화 운동을 도모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총독부는 일본어 교육, 일본식 생활방식,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였고, 1938년에는 사묘정리운동을 전개하고 법회 형식, 가사, 독경 등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1943년부터는 가장(街庄) 단위에 하나의 사원만을 허용함으로써 대만불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일본불교의 영향력은 급속히 소멸되었다. 그렇지만 일본불교가 시도했던 승려교육은 광복 이후 불학원(佛學院) 건립으로 계승되었다.

 

4) 1945년 광복 이후의 대만불교

독립 이후 전개된 대만불교의 변천 과정은 1945~1979년까지의 전통불교 부흥기, 1980~2000년까지의 신흥종단의 성장과 국제화기, 그리고 200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인간불교 실천기 등으로 세분화해 볼 수 있다. 

대만 불교계는 전통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1945년 독립한 이후 대만성불교회를 조직하였고, 1947년에 중국 본토에서 결성된 중국불교총회의 지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천도하면서 중국불교회는 대만에서 재건되었다. 이때 중국 대륙에서 고승대덕 스님들이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중국의 전통불교가 대거 유입되었다. 중국불교회는 1949년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대만 불교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본 식민 치하에서 형성된 왜색불교를 청산하고 승풍을 진작시켜 중국의 전통불교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1950년대부터 대만에는 토착불교 세력과 본토에서 건너온 스님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본토에서 이주한 스님들은 일본 식민 치하에서 건립된 사찰들을 차지하면서 전통불교를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승풍을 새롭게 진작시키기 위하여 모든 스님을 대상으로 재수계식을 거행하였다. 1953년 백성(白聖) 스님의 주도로 ‘칠조규정(七條規定)’을 제정하고 대선사(大仙寺)에서 정기적으로 수계식을 거행하였다. 

‘칠조규정’의 주요 내용은 출가주의 불교 정신 회복, 출가자의 의제 규정, 승보로서 승가의 위의 확립, 거사계를 받은 자들의 활동 금지, 음주 · 흡연 · 육식의 절대 금지 등의 계율 실천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대만불교는 일본불교의 유습을 제거하고 정법 불교, 청정 승가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대만 스님들의 사회적 지도력이 확립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와 같은 불교계 내부의 자율적인 정화운동이 오늘날 대만불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대만 독립 당시 전통 4대법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통 4대법맥은 월미산파(月眉山派)의 영천선사(靈泉禪寺), 관음산파(觀音山派)의 능운선사(凌雲禪寺), 법운사파(法雲寺派)의 대호법운사(大湖法雲寺), 대강산파(大崗山派)의 초봉사(超峰寺) 등의 사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900년대 이후 대만 불교계를 이끌었던 출가자의 다수는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스님들이었다. 대만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륙의 출가 지도자는 태허(太虛, 1890~1947)였다. 그는 1922년 난징에 우창불학원을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매진했다. 태허는 중국 거사불교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양문회(楊文會, 1837~1943)의 출가 제자였다. 양문회의 문하에서 수학한 많은 불교학자와 출가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태허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진다. 그는 중국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교리(敎理), 교제(敎制), 교산(敎産)의 3대 불교혁명’을 제시하였으며, 그 혁명의 시작은 교육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태허가 전개한 여러 가지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바로 대만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원동력이 되었던 인순과 동초, 자항 등과 같은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것이다. 

태허의 인생불교(人生佛敎) 이념은 인순(印順, 1906~2005)에 의하여 인간불교(人間佛敎)로 재조명되었다. 인순은 ‘부처님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다’라는 점을 근거로 불법(佛法)의 실천을 강조하는 인간불교를 제창하였다. 그는 중국불교의 핵심인 《대승기신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여기에 내포하고 있는 진심(眞心)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중심으로 한 진상유심론(眞常唯心論)을 설파하였다. 인순은 대만불교의 교학 연구와 학술 풍토를 쇄신한 스님으로 《중국선종사》를 저술하고 승가교육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설립한 복엄불학원(福嚴佛學院)은 비구승을 교육시키는 주요 승가 교육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동초(東初, 1907~1977) 역시 태허가 설립한 우창불학원 출신으로 인간불교의 이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목적을 ‘인류가 정지정각(正知正覺)의 지식을 구비하고 진리를 도덕적 생활과 계합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동초는 ‘대승불교가 문화적 종교, 지혜적 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학사전의 편찬과 불교미술을 포함하는 각종 자료를 정리 편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 불교 관련 사상 및 학술, 문학 연구회의 설립, 불교도서관과 문물관 건립, 그리고 불교 국제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대만불교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스님 중에서 대륙에서 이주한 자항(慈航, 1895~1954) 대사를 빼놓을 수 없다. 자항은 입적 후 등신불로 조성하여 봉안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17세에 출가하여 1912년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중국 대륙의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였다. 태허의 제자가 되어 불학원에서 교학을 연구하였으며, 36세에 홍콩으로 건너가 앙광중국불학회(仰光中國佛學會)를 창립한 바 있다. 자항은 46세가 되었을 때 태허의 ‘중국불교 국제방문단’ 일원으로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등을 방문하였고, 말레이시아에 머물다가 성주(星州)로 돌아와 7년간 성주보리학원, 빈청보리학원, 성주불학회, 쉬저우불학회, 이바오불학회, 빈청불학회 등을 창설했으며, 월간 《불교인간》과 불교사회단체 등도 설립했다. 그리고 54세 때 대만 중리 위안광사로 초빙된 후 대만불학원 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55세부터 1955년 60세로 입적할 때까지 정수원(靜修院)에 주석하였다. 자항은 불자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가지 가르침을 자항십훈(慈航十訓)으로 남겼다. 십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반드시 밝은 스승을 친히 가까이 하라[要親近明師].

둘째, 반드시 착한 도반을 의지하여 따르라[要依附良伴].

셋째, 반드시 삼장을 정밀히 연구하라[要精硏三藏]. 

넷째, 반드시 금한 계율을 엄격히 지켜라[要嚴持禁戒]. 

다섯째, 반드시 성인의 명호를 항상 염하라[要常念聖號]. 

여섯째, 반드시 예배를 부지런히 행하라[要勤行禮拜]. 

일곱째, 반드시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라[要念衆生苦]. 

여덟째,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켜라[要發菩提心]. 

아홉째, 반드시 중생의 이익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라[要濟物利生]. 

열째, 반드시 성불하겠다는 원을 세워라[要志願成佛].

 

2000년대 이후 대만불교는 인순(印順, 1906~2005) 대사의 인간불교 사상을 실천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인순의 인간불교 사상은 “인간의 성품 속에 내재하고 있는 지혜의 힘, 덕의 행위, 용맹한 실천적 의지 등을 바탕으로 대지(大智), 대비(大悲), 대용(大用)으로 나아가 궁극에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인순의 종교관은 “인간 개개인이 자기 강화와 자기 정화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이것을 통해 평등과 자유를 구현할 수 있다” 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인순의 인간불교 이념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대만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인순의 영향을 받은 신흥 사대종문은 증엄 스님의 자제정사(1966), 성운 스님의 불광산사(1967), 유각 스님의 중대선사(1967), 성엄 스님의 법고산사(1978) 등이다. 이들 사찰은 불자들의 교육과 조직화, 선 수행, 국제구호와 봉사활동 등 각자 고유한 활동 영역을 구축하면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특히 1980년대부터 대만 각 지역에 분원과 지원, 산하단체 등을 갖추면서 전국적인 교세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에도 지원과 분원을 개설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살고 있는 화교 세력을 중심으로 급속한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1990년대부터 대만에는 국제적인 명상단체들이 유입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티베트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가 처음으로 대만을 방문했다.

 

3. 대만불교의 현황

1) 대만불교의 전체 개요 

인간불교를 제창한 인순(印順) 법사(全國宗敎資訊網 사진)
인간불교를 제창한 인순(印順) 법사(全國宗敎資訊網 사진)

대만불교 현황은 대만 통계청에서 매년 발표하는 통계자료를 통해서 대강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대만 통계청의 가장 최근 자료인 2020년도 통계에 따르면 대만 전체에 불교 및 도교의 사묘(寺廟)와 기독교 교회 등을 모두 합치면 총 15,216개소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불교와 도교의 사묘는 12,303개소이며, 도교가 9,705개소, 불교 사찰은 2,318개소로 집계되고 있다. 

2022년 현재 대만정부에서 운영하는 종교 관련 홈페이지인 전국종교자신망(全國宗敎資訊網, https://religion.moi.gov.tw)에서는 종교조직의 형태를 재단법인, 사찰, 사회단체 등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종교재단법인은 전국법인 190여 개, 지역법인 1,500여 개 등이며, 그중 불교 재단법인은 159개가 활동하고 있다. 등록된 사묘는 총 12,000여 개에 달하는데 이 중에서 불교 사찰은 2022년 현재 2,152개가 등록되어 있다. 종교사회단체의 경우도 전국 종교사회단체 1,000여 개, 지역종교사회단체 약 900여 개가 등록되어 있다. 불교 관련 사회단체는 별도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불교 사찰의 수는 2020년도 통계에 비하여 2022년도에 162개가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0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사묘에서 활동하는 총 신도 수는 944,938명인데 이 중 도교가 810,254명이고, 불교는 115,324명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말하는 신도는 일반인이 아니고 신도증을 발급받아 사찰에서 수행하며 거주하거나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종사자, 또는 핵심 신도들로 볼 수 있다. 일반 신도 분포는 2005년도의 통계자료가 있는데 불교인구 비율이 전체 국민의 35.1%인 약 8,086,000명이고, 도교가 33%인 7,600,000명, 일관도 3.5%, 810,000명, 기독교 개신교 2.6%, 605,000명, 가톨릭 1.3%, 298,000명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대만의 종교인구 분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자료는 찾지 못했다. 따라서 이후부터 현재까지 다소의 변화는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의 종교인구 분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불교와 도교, 토속종교 등이 서로 융합되어 있어서 특정 종교의 정체성을 가진 순수한 종교인들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대만인은 불교사원, 도교 사묘 등을 구분하지 않고 참배하는 경향이 많다. 이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만의 종교인구 통계자료는 추정치에 불과할 뿐 대만의 종교적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대만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종합병원은 3개소, 진료소는 2개소가 있으며, 대학 5개교, 중학교 6개교, 소학교 6개교, 유아원 28개교, 그리고 기타 교육기관 79개소를 운영 중이다. 공익적인 자선사업을 하는 기관은 양로원 4개소, 심신장애시설 1개소, 청소년보호시설 1개소, 복리기금회 18개, 사회복지서비스센터 12개소, 기타 시설 18개소 등이다. 교육기관은 도교에 비하여 약간 많은 편이고, 공익자선사업 기관의 수는 불교가 도교에 비하여 약간 적은 편이다.

대만사회는 2019년도 이후에 반도체 기업의 발전에 힘입어 급격히 발전했다. 2022년 1인당 GDP가 3만6천 달러에 이르러 한국 및 일본과의 격차가 크게 줄어들 정도로 경제적 위상이 커졌다. 이러한 경제발전은 종교적 역할을 약화시키고,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에서 공공의 영역이 확대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따라서 대만 불교계도 이러한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1인당 GDP가 3만 달러 이상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무종교인의 증가 등을 막지 못할 수 있다. 

2) 전통 사대종문 사찰들

현재 대만불교는 전통 4대문파, 신흥 4대종문, 그리고 도교 등의 전통 종교와 결합된 재가불교 단체 등이 혼재하고 있다. 2000년대로 넘어갈 때까지만 해도 재가불교 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났으나 현재는 다수가 전통불교 종단이나 신흥 종단으로 흡수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전통 4대문파로 불리는 월미산파(月眉山派), 관음산파(觀音山派), 법운사파(法雲寺派), 대강산파(大崗山派) 등의 활동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일제강점 초기에 시작된 월미산파(月眉山派)는 선혜(善慧, 1881~ 1945) 법사가 영천선사(靈泉禪寺)를 근본도량으로 형성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일본 조동종에 가입하였다. 선혜 법사는 재교와 재당의 용화파들과 어울리면서 영천사를 창건하여 주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0년 일본 동경에서 대장경을 연구하고 조동종 포교사 품수를 받았으며, 1945년 입적했다. 영천사는 1909년에 건립했던 목조건물이 퇴락하여 1974년에 철거하고 개축, 1977년 완공하였다. 현재 미륵존불좌상, 위위존천보살입상(威为尊天菩薩立像), 사천왕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2003년 대만 기륭시립문화센터 역사건축물 심사위원회에서 영천선사 부속 개산당을 역사건축물로 지정하였다. 월미산파 산하의 사찰로는 기륭 영천사를 본산으로 하여 보명사(寶明寺), 선동암(仙洞巖), 흥륭사(興隆寺), 대북(台北) 보은사(報恩寺), 대남(台南) 법화사(法華寺), 화련(花蓮) 동정사(東淨寺)와 영녕사(永寧寺) 등이 있다.

관음산파(觀音山派)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본원(本圓, 1883~ 1945) 법사가 능운사(凌雲寺)를 근본도량으로 설립하면서 시작되어 대만 4대법맥의 하나가 되었다. 본원 법사는 용천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10년 능운사를 창건했다. 1925년에는 대만불교를 대표하여 일본 불교계를 돌아보았으며, 1934년에는 동남아를 비롯해서 인도 등지를 순례하였고, 1945년 세수 64세로 입적했다. 관음산파 산하에는 능운사를 본사로 하여 대북소명사(台北昭明寺), 내호원각사(內湖圓覺寺), 회룡사(迴龍寺), 북항미타사(北港彌陀寺), 호미용선사(虎尾龍善寺) 등이 있다. 

법운사파(法雲寺派)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각력(覺力, 1881~1933) 법사가 법운사를 근본도량으로 창건하면서 대만 4대법맥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1933년 각력 법사가 입적하면서 묘과(妙果) 화상이 주지로 취임하고 일본 조동종에 가입했다. 묘과 화상은 1937년 일본 천왕을 알현하고 가사와 법구 등을 하사받아, 법운사파의 법맥이 당시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법운사파는 대호법운사(大湖法雲寺)를 중심으로 중화원통사(中和圓通寺), 대북용천사(台北湧泉寺), 북투법장사(北投法藏寺), 대북평광사(台北平光寺), 중력원광사(中壢圓光寺), 비로선사(毘盧禪寺) 등이 있다. 

대강산파(大崗山派)는 일제강점기 초기에 의민(義敏) 법사와 영정(永定) 법사가 초봉사(超峰寺)를 근본도량으로 정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 가입했다. 초봉사는 1731년 건립된 고찰로 1905년 의민 화상 등이 중창하고 삼보전 등을 새로 건립했다. 삼보불탑과 관음전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강산파 산하에는 초봉사를 중심으로 연봉사(蓮峰寺), 용호암(龍湖庵) 등 15개의 사찰이 소속되어 있다.

이와 같은 대만불교의 전통 4대문파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불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4대문파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스님들의 다수가 일본불교와 연관이 있었고, 이들 사찰도 일본불교의 종파에 가입하였기 때문이다. 

1996년 강찬등(江燦騰)이 4대법맥, 4대법장을 주장하면서 대만불교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4대법맥의 경우에도 관점에서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다. 이후 대만불교의 구대문파(九大門派)를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구대문파는 앞서 언급한 대강산파, 월미산파, 관음산파, 대강산파 등과 더불어 개운사파(開元寺派), 대선사파(大仙寺派), 만불산파(萬佛山派), 청량산파(清涼山派), 동화사파(東和寺派) 등이 포함된다. 다만 이들 전통사찰이 현재 어느 정도의 교세를 운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조사 연구를 통해서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대만불교의 전통사찰들 중 일부는 청대와 그 이전에 설립되었으며 다수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만이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고 난 뒤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스님들이 머물 수 있는 사찰을 구하기 어려워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전통 사대종문과 구별되는 신흥 사대종문이 형성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3) 대만 불교학계의 연구 동향

대만 불교학계의 불교 관련 연구는 매우 다양하고 활발하게 성과를 축적해 가고 있다. 대만대학교 전자불교도서관의 불교 관련 연구자료를 분석해 본 결과 11개 분야, 68개 세부 주제별로 다양한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가장 활발한 연구는 경전, 법문과 수행자, 각국의 불교 비교, 제불보살과 보살행, 불교예술 등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연구 영역으로 들어가면 연구자 부족으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연구 성과가 전혀 축적되지 못하는 분야도 있다. 

대만에서 발간되는 불교 관련 중국어 학술잡지는 총 35종이며, 영문 학술잡지는 7종이 있다. 이 중에서 2020년 이후 현재까지 발간 기록이 있는 학술지는 중국어 학술지 약 17종, 영문 학술지는 4종이다. 현재 간행되는 잡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는 《향광장엄(香光莊嚴)》으로 1985년부터 141권을 발간하였으며, 게재된 기사는 총 2,736건에 이르며 학술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중화혜거불학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혜거(慧炬)》는 1958년 창간하여 2022년 4월 현재 633호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를 창간한 혜거불학회는 매년 2회 불학논문을 선정하여 연구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출판사를 설립하여 140종 이상을 간행하여 보급하고 있다. 

최근 가장 활발한 전문 학술지 중에는 불광산 인간불교연구원에서 격월간으로 발간하는 《인간불교학보(人間佛敎學報)》가 있다. 2016년 창간하여 2022년 3월 현재 총 38권을 간행했다. 이 논문집은 주로 불광산사 성운 대사의 글을 소개하거나 경전 관련 논문과 인간불교, 대만불교사, 불교 운동 관련 논문을 집중적으로 게재하기 때문에 연구 주제와 연구자의 참여가 확대되는 데 다소 제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파적 한계를 극복하고 전문 학자들이 다양한 주제로 투고할 수 있는 학술지로는 《법고불학학보(法鼓佛學學報)》가 있다. 이 학술지는 2007년 창간하여 2021년 말까지 연 2회 총 29권을 발간하였다. 논문의 주제는 선사, 화두 등의 수행 관련 내용부터 불교사, 현대 대만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발간되는 불교 관련 학술지는 모두 8종이 있는데 이 중 2021년까지 발간된 학술지로는 《미술사연구집간(美術史研究集刊)》이 있다. 이 논문집은 1995년부터 부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는데 논문 중에는 불교미술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나 참여 저자가 매우 적다. 《대대불학 연구(臺大佛學研究)》는 2007년 창간하여 연 2회 발행하며, 2021년 현재 총 41권을 발간하였다. 최근 게재된 논문들 중에는 태허와 인순의 판교(判敎)사상 비교, 《화엄경》 게송의 언어 현상과 당송 고승의 해석, 조동종과 묵조선의 비교, 정념수행과 MBSR, 《성유식론》 《대반야경》과 같은 경전 분석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원광불학 연구소에서 연 2회 발행하는 《원광불학학보(圓光佛學學報)》는 1993년 창간하여 2021년 12월 현재 38권을 출간하였다. 주로 학술논문을 게재하는 이 학술지에는 경전 관련 논문을 비롯하여 사상과 철학, 불교문화, 언어학, 포교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참여 학자들도 다양하다. 

대만의 불교학 연구는 대학, 개인이나 사찰이 설립한 연구소에서 불교 학술지, 혹은 학술잡지를 발간하고 연구기금을 지원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자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기고 논문의 수도 크게 증가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발견된다. 연구 주제는 다양하지만 주로 중국 대륙이나 일본 학자들의 저술과 논문들이 많이 소개되는 편이다.  

 

4. 결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대만사회에서 불교가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보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대만불교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과제도 산적해 있다. 불광산사, 자제정사, 중대선사, 법고산사 등은 자체적으로 이러한 과제를 극복하면서 발전하였다. 반면에 전통 사대문파를 포함한 종파 소속 사찰들 중 다수는 관심을 둘 정도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대만불교가 직면한 가장 핵심적 과제를 분석해 보자면, 정법에 의지하는 법주의 배출, 출가자 감소에 대한 대응, 독자적인 비구니 승가의 형성, 사부대중 공동체의 실현과 사찰 운영체계 구축 등이라 할 수 있다. 대만불교는 전통불교, 대륙불교, 일본불교, 신흥불교, 재가불교 등이 혼재하고 있으며, 여기에 도교, 유교, 무속 등이 혼재하면서 정체성 확립에 어려움이 있다. 

다만 대만불교 스님들이 계율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사회적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매우 큰 강점이다. 그리고 전체 국민 중에서 불자들의 비율이 높고, 신심이 견고하기 때문에 불교가 전체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또한 좁은 국토에도 불구하고 사찰들의 규모가 크고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장점이다. 

현재까지 대만불교의 성공적 발전에는 불광산사의 성운 스님, 자제공덕회의 증엄 스님, 중대선사의 유각 스님, 법고산사의 성엄 스님의 수행력과 지도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사찰의 스님들이 세대교체가 된 이후에도 대만불교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법에 의지하며 수행력과 설법력을 갖춘 법주 스님들이 다수 출현해야 한다. 그리고 사자상승으로 이어지는 비구니 승가의 형성과 발전도 필요하다. 이와 더불어 현대인들의 종교 욕구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전법교화 방안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불교의 발전은 종단과 사찰의 포교 역량과 실천력, 학술 분야에서의 이론적 연구와 방향 제시, 출가와 재가 사부대중의 협력 등이 요구된다. 이러한 조건을 조화롭게 잘 활용한 대만 불교계는 최근까지 다른 종교단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포교 성과와 전법교화 효과를 거두었다. 대만의 전통불교계와 신흥 불교단체들이 선의의 경쟁 속에서 상호 협력을 통해 대만불교의 지속 가능한 발전상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  

 

김응철 sam1528@hanmail.net 

경기대학교 행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행정학 박사). 주요 저술로 《재가불자가 되는 길》 《둥근 깨달음 천수경》 《부처님 직제자들의 수행과 포교 이야기》 등과 논문 다수. 현재 중앙승가대학교 교수, 문화치유명상단체 동명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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