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 평화를 위한 틱낫한의 제안

여는 말: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다. 하지만 불교는 평화의 때, 평화의 땅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에는 경쟁하던 도시왕국들 사이의 전쟁이 격렬했다. 특히 무기와 전술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전쟁은 이전보다 더 파괴적 양상을 보였다. 전쟁 동안 인간을 죽이는 물리적 폭력은 전쟁 후에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제도적 폭력으로 이어졌다. 리처드 곰브리치는 초기 베다 사회의 노예는 ‘전쟁포로’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에 폭력이 자주 언급된 것도 그런 시대상을 반영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존재가 폭력에 떤다”는 《법구경》의 구절은 존재론적 고통의 통찰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의 관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전쟁과 폭력은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이념 적대가 격화되고 대량 살상과 파괴 수단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세계의 불자들은 붓다 시대보다 더 끔찍한 폭력 앞에 떨어왔다. 불교가 주요 종교로 존재해온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불교국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미얀마, 캄보디아, 스리랑카, 베트남 등에서 참혹한 전쟁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은 평균 이상으로 전쟁과 폭력의 고통을 겪은 불자들의 땅이다.

1966년, 아름다운 5월의 어느 날, 틱낫한(Thich Nhat Hanh)이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을 만나기 위해 겟세마니 수도원을 방문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두 위대한 수행자의 만남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들의 평화에는 전쟁의 검은 포연이 스며들어 있었다. 토머스 머튼이 틱낫한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베트남 전쟁 상황은 어떻습니까?” 틱낫한이 비통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틱낫한의 ‘참여불교’는 붓다 시대의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는 전쟁과 폭력의 현실에서 생겨났다. 그다음 해인 1967년 틱낫한이 망명 중에 출판한 책 제목은 《베트남, 불타는 바다에서 핀 연꽃: 평화를 위한 불교적 제안》이었다. 어쩌면 틱낫한이 생각한 ‘불타는 바다’는 은유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폭발 순간 섭씨 900~1,300도의 고열을 내며 폭격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네이팜탄을 무수히 사용했다. 틱낫한의 평화는 안전하지도 평온하지도 않다. 그의 평화는 불타는 바다 같은 전쟁터에서 피워낸 연꽃이었다. 그래서 틱낫한의 평화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프다.

틱낫한이 경험한 전쟁과 평화는 한국인에게 멀고 낯선 경험이 아니다. 식민지배에서 남북 분단과 이념 전쟁까지, 베트남과 한국의 역사는 서로 너무 닮았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종전되었지만, 한국전쟁은 마지막 냉전 지대인 한반도에서 지금도 남과 북, 남과 남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지난봄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오랜 적대의 역사가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폭력의 시대를 뒤로하고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틱낫한의 전쟁과 평화를 성찰해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베트남불교의 사회참여

흔히 불교는 정치에 무관심한 세계 부정적, 세계 도피적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불교를 ‘비정치적, 반정치적 종교’라고 정의했다. 이처럼 불교는 사회의 외적 변화가 아니라 개인의 내적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라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하지만 현대 베트남의 불교는 ‘전투적 불교(militant Buddhism)’로 불릴 만큼 정치적 행동성이 강하다. 이는 불교의 전통적 이미지와 매우 다른 모습이다. 현대 베트남불교의 정치적 행동성은 다음의 세 가지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첫째, 세속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근대 이전의 역사적 경험이다. 2세기경 중국과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는 초기부터 베트남 사회에 널리 퍼졌고, 10세기 말 레호안(Le Hoan)이 새 왕조를 세울 때는 정치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그 후 14세기까지 불교 승려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을 맡는 등,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었다. 그러다 15세기 이후 유교에 밀려 정치적으로 약화하기도 했지만, 불교는 민중의 삶 속으로 깊고 넓게 스며들었다. 이처럼 베트남 사회에서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발휘해 온 불교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은 현대 불교 부흥의 동기와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근현대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경험이다. 근대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직간접적 식민지배와 침략을 연속적으로 겪었다. 그만큼 저항도 활발히 일어났고, 여기에 많은 승려와 불자들이 참여했다. 예를 들면, 1898년 베트남 푸옌 지역에서 선사(禪師) 보쭈(Vo Tru) 주도로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선 봉기가 발생했을 때, 식민당국은 그것을 ‘승려들의 전쟁(Monks’ War)’이라고 불렀다. 1960년대 베트남불교의 정치참여를 주도한 틱찌꾸앙(Thich Tri Quang)도 1940년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비엣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에 참여해 프랑스와 싸운 경험이 있다. 이런 반식민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현대 베트남불교의 정치적 행동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종교적, 정치적 차별을 받은 경험이다. 베트남불교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15세기 이후 근대 이전까지 유교 지배체제에 의해 차별을 받았고, 근현대에는 가톨릭 배경의 식민지배체제에 의해 차별을 받았다. 특히 1954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으로 분단된 후, 남베트남의 초대 총통이 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가톨릭을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북베트남에서 약 80만 명의 난민이 남베트남으로 넘어왔는데, 그들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였다. 응오딘지엠은 선거에서 승리할 목적으로 가톨릭 피난민들을 편파적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 베트남 가톨릭은 급성장했다. 일례로, 푸호아 지역 가톨릭 인구는 1958년에는 692명이었는데 한 해 뒤 1959년에는 2천 명으로 급증했다. 불교에 대한 직접적 차별도 있어서, ‘부처님오신날(Vesak)’을 국가 지정 공휴일에서 제외했고 공권력을 이용해 불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가진 베트남불교가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1930년대부터 시작된 ‘불교 현대화’였다. 틱낫한은 이를 ‘불교 부흥’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 불교학자들은 불교의 사회참여 필요성과 방식에 대해 토론했고, 진취적 젊은 승려들은 중국, 태국, 일본, 스리랑카, 인도, 미국 등지로 유학을 떠났다. 탕응우엔은 1930년대 불교 현대화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훗날 1960년대 불교사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고 한다. 1940년대에는 불교청년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등 불교 배경의 사립학교들도 설립되었다. 불교는 사회복지에도 눈을 돌려 고아원, 유치원, 병원도 설립, 운영했다. 불교 조직도 발전해서, 1951년에 여섯 개의 주요 종단이 모여 ‘베트남불교협회’를 만들었고 기관지 〈베트남불교〉를 창간해 보급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초종단적 조직체인 ‘베트남불교연합(Unified Buddhist Church of Vietnam, 이하 UBC)’을 결성하여 베트남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의 격변기에 남베트남을 방문해 틱찌꾸앙 등 불교 지도자들을 인터뷰했던 케네스 모건은 당시 베트남불교가 직면한 물음은 ‘사회에 참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였다고 전했다. 사회참여는 이미 선택사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 전쟁의 비극과 베트남불교의 사회참여를 전 세계에 충격적으로 알린 사건이 일어났다. 76세의 노승 틱꾸앙득(Thich Quang Duc)이 응오딘지엠의 종교차별에 항의해 사이공 시내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다. 분신의 동기와 목적은 정치적이면서도 종교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친가톨릭 응오딘지엠 정권의 불교 차별은 불자들의 반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해 5월 부처님오신날에 베트남의 구(舊) 수도였던 후에 시 행정당국은 사원에서 불교 깃발을 내걸 수 없게 조치했다. 이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종교에 해당하는 조치였지만, 실제로는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같은 해 봄, 응오딘지엠의 형이 가톨릭 대주교로 취임했을 때는 바티칸 깃발을 내걸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후에 시 당국의 명령을 종교차별로 인식한 불자들이 5월 8일에 시위를 벌였고, 이때 경찰의 발포로 어린이 두 명을 포함 아홉 명이 죽었다. 성난 군중의 시위가 계속되자 응오딘지엠 정권은 후에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런 상황에서 틱꾸앙득이 분신한 것이다. 이후 몇 달 동안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면서 1,400여 명이 사망했고 다섯 명의 비구, 비구니 승려들이 분신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틱찌꾸앙이 주도하는 UBC는 반정부 시위를 조직적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1일,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렸다.

여기서 틱낫한의 사회참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틱찌꾸앙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틱찌꾸앙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마크 모이어는 1964년 틱찌꾸앙의 측근이 포함된 불교 지도자들이 틱찌꾸앙을 베트콩을 위해 일하는 승려로 비난했고, 그가 1965년 공산당에 대한 UBC 차원의 비판을 반대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틱찌꾸앙과 공산당의 연계를 추정했다. 또한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미국의 주류 언론도 틱찌꾸앙을 ‘전투적 승려’ ‘공산주의자’로 묘사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관점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틱찌꾸앙을 주시하며 가장 경계했을 미국 CIA의 베트남 현지 보고서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시각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이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이 이미 알려질 대로 다 알려진 1966년에 작성된 한 보고서는, 틱찌꾸앙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프랑스군에 두 차례 체포된 전력이 있고 베트민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분단 이후 북베트남에 남아 있던 틱찌꾸앙의 형제가 공산당에 의해 투옥된 것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 공산주의와 불교의 양립 불가능성을 주장한 것, 심지어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까지 지지한 것 등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실, 틱찌꾸앙과 미국 정부의 관계는 한동안 우호적이었다. 틱꾸앙득의 분신 후 응오딘지엠 정권의 탄압을 받던 틱찌꾸앙은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보다 결정적인 사후적 증거는 전쟁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틱찌꾸앙을 감시하고 탄압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그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의견은 전쟁 당시에는 매우 상반되어서, 남베트남의 사이공 라디오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불렀고 북베트남의 하노이 라디오는 ‘펜타곤의 주구’로 불렀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틱찌꾸앙은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자였고, 불교 지도자로서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는 ‘공산사회’가 아니라 ‘불교사회’였던 것 같다. 다만, 역사의 특정한 경로에서 공산당과 UBC가 가고 있던 방향이 일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 전쟁 당시 공산당, 민족해방전선, UBC는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데서는 입장을 같이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UBC와 틱찌꾸앙도 미국의 정치적 견제를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틱낫한과 틱찌꾸앙은 반전 입장은 같이했지만, 베트남불교와 사회를 재건하는 방향과 방식에서는 관점이 달랐던 것 같다. 틱찌꾸앙은 정치적 방도를 통해 불교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던 반면, 틱낫한은 사회적, 문화적 방도를 통해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틱찌꾸앙이 틱낫한을 경계하거나 견제한 것 같지는 않다. 응오딘지엠 정권을 무너뜨린 후 더 큰 정치적 힘을 얻은 틱찌꾸앙은 오히려 틱낫한의 협력을 요청했다. 당시 베트남불교는 지식인, 청년, 학생의 지지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새로운 불교적 정권을 만들어 낼 역량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틱찌꾸앙이 당시 미국에 있던 틱낫한을 긴급히 호출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1963년 겨울, 틱찌꾸앙은 미국에 있던 틱낫한에게 베트남으로 돌아와 UBC를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UBC 내부의 위계구조가 불교 현대화와 사회참여를 가로막고 있다고 여겼던 틱낫한은 주저했다. 며칠 후 틱찌꾸앙은 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또 하나의 전보를 보냈다. “이 큰 책임을 지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너무 구식이네. 제발 돌아와 도와주게.” 틱찌꾸앙이 ‘구식’일 수는 있지만, 틱낫한에게 자신은 너무 늙었다고 말한 것은 과장이다. 사실 틱찌꾸앙과 틱낫한은 불교 내 지도자로서의 위치는 달랐지만 비슷한 연배였다. 틱찌꾸앙은 1924년생이고 틱낫한은 1926년생이니 세대 차이를 말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대 차이보다는 불교 현대화와 사회참여의 관점 차이가 더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틱낫한은 틱찌꾸앙의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여 그의 요청에 응했다. 1963년 12월 16일, 틱낫한은 미국에서 학자로서 종교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개인적 안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불타는 바다’인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틱낫한의 ‘제3의 길’

틱낫한은 베트남으로 돌아오자마자 UBC에 베트남 평화와 불교 현대화를 위한 ‘세 가지 제안’을 제출했다. 첫째, 베트남에서의 모든 적대행위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청할 것, 둘째, 관용과 열린 정신을 실천할 지도자들을 길러낼 불교 연구와 수행 단체를 만들도록 지원할 것, 셋째,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비폭력적 사회변화를 위해 일할 사회운동가들을 길러낼 센터를 세울 것이었다. 이중 첫 번째 제안은 UBC도 수용했지만, 나머지 제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결국 불교 연구 및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위한 계획은 고스란히 틱낫한의 책임이 되었다.

틱낫한은 1964년 2월 사이공에 반한대학교(Van Hanh University)를 설립했다. 서양식 학제를 본뜬 이 대학교는 불교학과 인문학 두 분야의 학제로 시작했다. 틱낫한은 틱민차우(Thich Minh Chau)를 불러 학장 역할을 맡겼다. 틱민차우는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한 뛰어난 불교학자였다. 그런데 그는 불교 현대화의 목표에서는 틱낫한과 일치했지만, 사회를 보는 관점은 달랐다. 틱민차우는 나중에 반공 입장을 취하면서 틱낫한과 길을 달리했다. 아무튼, 틱낫한은 반한대학교를 세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베트남 불자들은 베트남 사회의 재건에 불교의 잠재력을 사용하길 원하고, 불교가 문화, 경제, 정치, 사회복지와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되기를 원한다.” 이는 그의 두 번째 제안을 행동에 옮긴 것으로, 불교 정신에 따른 사회를 만들어낼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틱낫한은 그의 세 번째 제안을 실행하고자 반한대학교의 사회참여 프로그램으로 사회봉사청년회(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이하 SYSS)를 창립했다. SYSS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베트남 사람들을 돌보고 지원할 자원활동가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었지만, 그들의 교육 장소는 학교 강의실이 아니라 마을 현장이었다. 현장에 뿌리를 두고자 했던 SYSS는 마을로 들어가 평화와 재건을 위해 활동했던 것이다. 종단의 보수적 교조주의와 소극적 태도 때문에 SYSS는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고, 대신 베트남 민중의 자발적 후원을 받아 유지되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그럴수록 젊은 불자들은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

1966년, 틱낫한은 수행과 생활의 공동체인 접현종(接現宗, Tiep Hien Order; the Order of Interbeing)도 창립했다. 그해 2월, 젊은 세 남성 재가자와 세 여성 재가자가 계를 받아 회원이 되었다. 접현종의 목적은 “보살정신에 따라 불교를 연구하고 실험하고 현대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접현종 회원들은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적용한 ‘참여불교 14계율’을 지켰다. 최초 여섯 회원 중 한 명인 찬공(Chan Khong)은 접현종을 시작하기 전부터 틱낫한을 도와 함께 활동했고, 전쟁 시기는 물론 지금도 제자이자 도반으로서 참여불교의 확산과 심화에 기여하고 있다. 접현종의 사상과 수행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틱낫한은 집필과 강연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가 1963년에 펴낸 《참여불교》는 출간 3주 만에 5천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다. 틱낫한이 참여불교에 대해 강연할 때는 4, 5천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남베트남 정부는 《참여불교》를 금서로 지정했다. 그러자 틱낫한의 안전을 염려한 불교 지도자들과 동료들은 당시 미국 방문 중이던 그의 귀국을 연기할 것을 요청했다. 1966년 6월 1일, 틱낫한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다섯 가지 평화제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1) 미국은 베트남 사람들이 원하는 정부를 갖도록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힐 것, 2) 미국은 모든 폭격을 중지할 것, 3) 미군은 군사적 활동을 방어 임무에만 제한할 것, 4) 미국은 특정한 기간에 군대를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확실히 밝힐 것, 5) 미국은 이념적, 정치적 조건 없는 재건 지원을 제공할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섯 항목 모두에서 ‘미국’ 또는 ‘미군’을 명시함으로써 미국의 전쟁 책임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날, 남베트남 정부는 사이공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틱낫한을 ‘반역자’로 공표했다.

전쟁 중에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평화를 실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틱낫한과 SYSS가 남베트남과 미국 정부의 견제와 억압을 받게 되자 불안해진 반한대학교의 틱민차우 학장은 틱낫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찬공(贊共)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반한대학교와 SYSS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1967년 6월에는, 반한대학교는 틱낫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발표까지 했다. 그를 믿고 불러 학장의 자리를 맡긴 틱낫한에 대한 배신이었다. 이 일로 인해 SYSS는 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SYSS 활동가 중 여덟 명이 납치되어 그중 여섯 명이 살해되는 등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불타는 바다’는 연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967년 5월 16일, 다시 한번 세계에 베트남의 고통을 알린 사건이 발생했다. 틱낫한의 제자이며 접현종 회원인 낫치마이(Nhat Chi Mai)가 분신한 것이다. 낫치마이는 미국 정부에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둠을 없애고, 사람들 가운데 사랑을 일깨우고, 베트남에 평화를 주기 위해 내 몸을 횃불로 바칩니다. 평화를 위해 제 몸을 사릅니다.” 또한 분신 당시 낫치마이는 자기 앞에 마리아상과 관세음보살상을 놓았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과 불자들에게 남긴 시와 편지에서 예수의 사랑과 붓다의 자비를 세상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평화를 위해 함께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 낫치마이는 스승 틱낫한에게 보낸 편지에는 “타이, 너무 걱정 마세요. 평화가 곧 올 거예요.”라는 작별 인사를 남겼다. 비통에 잠긴 틱낫한은 승려들의 분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서양 언론은 자살이라고 보도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자살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위도 아니었다. 승려들이 남긴 편지에 적혀 있는 것은 오직 압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멈추기 위해 틱낫한은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전쟁에서 평화를 위한 중립지대를 만들려고 했다. 이는 베트남의 운명은 외부 세력의 개입 없이 베트남 사람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UBC의 정치적 입장과도 일치했다. 1969년 UBC는 해외에 망명 중이던 틱낫한에게 파리에서 불교평화사절단을 구성하고 대표로 활동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찬공도 틱낫한을 도와 함께 평화 활동을 펼쳤다. 이를 기반으로 틱낫한과 불자들은 베트남의 평화를 위한 국제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하지만 ‘제3의 길’은 다른 두 길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틱낫한과 UBC는 남베트남과 미국만이 아니라 북베트남의 의심과 공격도 받았다. 1975년 공산군의 승리로 베트남 전쟁이 끝났을 때 틱낫한은 새로운 공산체제로부터 입국을 거부당했다. UBC도 공산정권에 의해 불법화되고, 틱찌꾸앙 등 주요 불교 지도자들은 투옥되거나 가택연금을 당했다.

1966년부터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틱낫한은 주로 프랑스에 머물며 오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베트남을 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된 때는 거의 40여 년이 지난 2005년이었다. 종전 후 틱낫한은 베트남에서 탈출해 나온 ‘보트피플’을 지원하는 등 전쟁 상처를 치유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파리 남쪽 지방 퐁바네즈의 한 농장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다가, 1980년대 초에는 보르도 근처에 평화의 문화를 가꾸는 ‘플럼 빌리지’를 만들었다. 이후 틱낫한은 활발한 집필과 순회 설법을 통해 참여불교 정신을 세계로 퍼뜨렸고, 그에 따라 접현종도 국제적 종단으로 발전했다.

 

틱낫한의 참여불교와 평화사상

참여불교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지만 틱낫한 자신의 직접적인 진술을 참고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틱낫한은 2008년 5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참여불교의 역사에 대해 설법했다. 이 설법에서 틱낫한은 1963년에 《참여불교》를 낸 것을 회고하며, 참여불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참여불교’를 뜻하는 베트남어 ‘Dao Phat di vao cuoc doi’에서] ‘cuoc doi’는 ‘삶’ 또는 ‘사회’를 의미한다. ‘Di vao’는 ‘들어가다(to enter)’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트남어로 참여불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di vao cuoc doi’라는 말은 ‘삶 속으로, 사회적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틱낫한은 모든 불교는 참여불교이며, 참여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참여불교가 새로운 불교가 아니라 불교를 실천하는 새로운 해석과 실천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핵심은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틱낫한은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를 현대의 일상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한다. 우선 그는 괴로움의 가르침(苦諦)을 생로병사(生老病死)로만 기술하는 것은 낡은 방식이라고 지적하며, 오늘날의 괴로움은 스트레스, 불안, 폭력, 자살, 전쟁, 테러리즘, 생태계 파괴 등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틱낫한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존재론적 괴로움만이 아니라 사회적 괴로움에도 눈을 뜨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괴로움의 상태를 ‘웰빙(well-being)’의 반대인 ‘일빙(ill-being)’으로 정의하면서, 사성제의 나머지 가르침을 일빙의 이해(集諦), 일빙의 종식(滅諦), 그리고 긴장, 스트레스, 불행을 줄이게 하는 수행의 방법(道諦)으로 풀어 설명한다. 한마디로 도제는 ‘웰빙의 길’이라는 것이다.

‘틱낫한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지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적용한다. 불교에서 무아와 연기의 지혜는 분리될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같은 존재의 실상을 무아는 부정적으로 연기는 긍정적으로 표현한다. 무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독립적인 자아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나’라고 의식하고 부르는 것도 실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나 아닌 것’과의 연기적 관계다. 틱낫한은 ‘나’라고 하는 자아는 오온(五蘊)의 집합이라는 불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현대의 일상 언어로 쉽게 풀어 설명한다. 예를 들면, “탁자는 탁자 아닌 모든 것”의 집합이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무아와 연기의 관계성을 ‘상호존재(inter-being)’로 표현한다.

상호존재의 지혜는 필연적으로 자비로 나아간다. 상호존재의 지혜에 따르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서로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틱낫한은 “남의 고통이 우리 고통이고 남의 행복이 우리 행복”이라고 한다. 이는 틱낫한의 독창적 사상이 아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한 비말라키르티의 가르침이나,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있다”는 나가르주나의 가르침 등이 모두 상호존재의 지혜와 자비를 나타낸다. 틱낫한의 새로움은 전통적 불교의 지혜와 자비를 개인적 삶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적용한 데 있다. 참여불교는 사회적 지혜와 사회적 자비를 실천하는 운동이다.

불교의 지혜는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다. 틱낫한도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회에 참여하는 불자들은 존재의 실상만이 아니라 사회의 실상도 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틱낫한의 사회적 지혜는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사회분석’도 포함한다. 실제로 그의 《베트남, 불타는 바다에서 핀 연꽃》은 베트남 전쟁 당시 불교와 정치의 관계, 미국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반감과 부정적 태도의 원인,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공통적 이해 등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사회분석을 제시한다.

틱낫한이 실천한 사회적 자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비는 특히 전통적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관련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다. 틱낫한은 관세음보살을 “온 세상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의 목소리”로 풀어 설명한다. 틱낫한의 사회적 자비 정신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모델은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은 가장 절망적인 곤경, 가장 큰 고통의 상황에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가고자 서원했다.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와 자비와 인간의 존엄성이 없는 곳으로 서원했다. 지장보살은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과 전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지장보살은 지옥으로 가고자 한다. 지옥이야말로 그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틱낫한이 강조하는 것은, 보살이 찾아가야 하는 ‘지옥’은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지혜와 자비를 삶에서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해 틱낫한은 접현종을 창립했다. 틱낫한은 접현종을 ‘영적 저항운동(spi-ritual resistance movement)’이라고 불렀다. 접현종의 목적은 단지 하나의 사회운동이 아니라 ‘영적’ 사회운동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접현종의 사상과 실천에는 불교의 영적 지혜와 자비가 깊이 배어 있다. ‘참여불교 14계율’의 첫 번째는 “그 어떤 교리, 이론, 이념도, 심지어 그것이 불교의 것이라 해도 우상화하거나 얽매이지 마라.”이다. 여기서 틱낫한이 강조하는 것은 견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틱낫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의 기본 정신은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는 견해가 아니다. 통찰은 견해가 아니다. 참된 통찰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기꺼이 놓아버려야 한다.” 틱낫한의 이런 관점은 단순히 불교 사상에 대한 지적 관조의 산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전쟁이 견해와 광신에 대한 집착의 결과임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온몸으로 체험했다. 그러므로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같은 견해에 대한 집착을 끊는 지혜를 평화의 출발점으로 제시한 것이다.

틱낫한은 고통받는 이들과의 ‘접촉’을 강조한다. 불자는 누구보다도 먼저 고통받는 이들의 곁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불교 14계율’의 네 번째는 이를 잘 보여준다. “고통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거나 고통을 보고도 눈감지 마라. 세상의 고통을 의식하라. 개인적 접촉, 방문, 이미지, 소리를 포함해서, 고통받는 이의 곁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그런 방법을 통해 당신 자신과 사람들이 세상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눈뜨게 하라.” 틱낫한과 SYSS 활동가들은 베트남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감으로써 이 계율을 실천했다.

틱낫한의 평화사상과 실천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로움(being peace)’의 가르침일 것이다. 이는 평화롭지 않은 평화운동에 대한 틱낫한의 관찰과 자각에서 비롯했다. 1960년대는 전쟁의 시대인 동시에 반전(反戰)의 시대였다. 전쟁과 반전이 맞불처럼 일어났다. 그 불길이 너무 거셀 때는 반전운동도 또 하나의 전쟁 같았다. 틱낫한이 미국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전쟁 중단을 호소하는 강연을 할 때, 한번은 한 성난 평화주의자가 일어나 소리쳤다. “당신은 지금 왜 여기 있습니까? 베트남으로 당장 돌아가십시오. 전쟁은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싸우십시오.” 틱낫한은 그 순간, 그 평화주의자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분노가 곧 전쟁이었던 것이다. 또한 강자에 맞서 약자를 편드는 것이 옳다고 믿었던 당시의 평화운동가들은 베트남 민중을 편들고 미국 정부에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틱낫한은 바로 그런 편들기가 전쟁을 불러일으켰음을 알고 있었다. 틱낫한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는 현실 베트남의 고통에서 “한쪽을 편들면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화해의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틱낫한은 분노 대신 이해를, 편들기 대신 곁이 되는 평화의 길을 내고자 했다. 전쟁 같은 평화운동을 경험한 그는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운동가들부터 평화로워져야 함을 설파했다.

틱낫한의 평화사상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철저한 비폭력의 실천이다. 그는 9 · 11 테러 직후에 낸 한 성명에서 ‘모든 폭력은 불의’라고 주장했다. 폭력은 폭력일 뿐, 어떤 이유로도 ‘정의로운 폭력’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비폭력주의는 너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틱낫한의 비폭력은 무저항이나 무행동이 아니다. ‘참여불교 14계율’의 12항은 다음과 같다. “죽이지 말라. 또한 다른 사람이 죽이게 하지도 말라. 생명을 보호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라.” 여기서 앞의 “죽이지 말라”가 철저한 비폭력을 가리킨다면 뒤의 “죽이게 하지도 말라”는 철저한 행동을 가리킨다. ‘비폭력 행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빠뜨려서는 안 될 한 가지는 참여불교의 수행법이다. 참여불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일치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법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마음챙겨 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기에 사회적 실천도 마음챙겨 한다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런 불이적 마음챙김의 실제 체험을 틱낫한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수많은 마을이 폭격당할 때, 사원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계속 사원에 머물며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선방(禪房)을 떠날 것인가? 주의 깊은 성찰 끝에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기로 결정했다.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돕되, 그것을 마음챙겨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참여불교’라고 불렀다. 마음챙김은 반드시 세상에 참여해야 한다. 고통의 현실을 알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산스끄리뜨어 사띠(sati)에는 ‘잊지 않음(non-forgetfulness)’의 의미가 있다. 마음챙김의 핵심은 늘 깨어서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 모든 것이 수행이 된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잊지 않아야 한다. 평화로워야 한다. 평화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틱낫한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선택한 제3의 길, 평화의 길이었다.

 

맺는말: 베트남을 넘어, 불교를 넘어

인간의 사회적 삶이 이기는 것과 지는 것 둘 뿐이라면 평화의 길은 지는 길처럼 보인다. 틱낫한의 평화도 지는 길이었다. 제3의 길을 걸었던 그는 남베트남에서는 ‘반역자’가 되었고 북베트남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조국 베트남을 떠나 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참여불교와 평화사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더 많은 세계인의 영적, 지적, 윤리적 자양분이 되었다. 베트남을 떠난 그에게 세계가 사원이 된 것이다. 이제 참여불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어디에나 있다. 참여불교는 오늘날 가장 국제적인 불교다.

또한 참여불교는 종교의 경계도 넘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틱낫한을 지지하고 지원한 미국의 반전평화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 전통을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 조직적 관계 외에도 틱낫한은 그리스도인 영성가, 사회운동가들과도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마틴 루서 킹 목사와 토머스 머튼이다. 1966년 미국 시카고에서 만난 틱낫한과 마틴 루서 킹은 서로 깊이 교감했고, 킹은 그다음 해 틱낫한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킹의 동료였던 앤드루 영에 따르면, 킹은 틱낫한으로부터 영적 영감과 함께 정치적 관점도 영향받았다고 한다. 특히 틱낫한이 제시한 ‘제3의 길’은 킹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41) 같은 해,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틱낫한을 만난 토머스 머튼은 〈낫한은 나의 형제〉라는 글을 통해 틱낫한의 평화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했다.42) 자신을 불사르며 낫치마이가 호소했던 대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자매가 되어 붓다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할록 호프만은 1968년 틱낫한의 시집 《베트남의 외침》에 대한 서평에서 “틱낫한의 조국은 세계이며 우리는 그의 형제”라고 쓰면서 그의 시를 인용했다. “나는 목소리 높여 이 더러운 전쟁을 고발한다. 이 전쟁은 형제살인이다.”43) 틱낫한의 외침은 비슷한 ‘형제살인’의 역사를 가진 우리 한국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틱낫한이 베트남을 넘어, 종교의 경계를 넘어, 열전(熱戰)과 냉전(冷戰)의 땅 한반도의 불자와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평화를 만들려거든 평화가 되라는 것이다. 평화로우라는 것이다. 1967년 죽기 직전까지 틱낫한과 연대하여 베트남 평화를 위해 행동했던 평화주의자 A.J. 무스테의 말처럼,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

 

정경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한국민중신학회 총무. 주요 논문으로 “Just-Peace: A Buddhist-Christian Path to Liberation” 〈사랑, 지혜를 만나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참여불교 탐구〉 〈램프는 다르지만 그 빛은 같다: 정의를 위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협력〉 등이 있고, 공저로 Terrorism, Religion, and Global Peace, 《사회적 영성》 등과, 역서로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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