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잦으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무슨 일이 있기에 앞서 그 일이 일어날 만한 조짐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현상에서 비가 오려면 대기의 변화가 있어야, 기압골의 변화로 찬 공기가 더운 공기를 만나든가 하여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오게 된다. 대기의 변화가 발생하는 이유는 지구가 멈춰 있지 않고 쉼 없이 운동하기 때문이다. 

자연만이 아니라 사람살이에도 그런 조짐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자연과 달리 사람이 모여 이룬 사회라는 곳은 그 조짐이 단순치가 않다. 자연에는 주관적 의지가 작용하지 않지만 사회는 인간의 의지가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사회도 변화 발전하는 운동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가 역사로 남아 뒷날까지 전해진다.

1985년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이 만들어졌는데 창립 이전 불교계에는 몇 해 전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했다. 1983년, 개혁적인 소장 스님들이 조계종 총무원을 접수하고 ‘비상종단’을 세웠지만 며칠 만에 꿈을 접어야 했다. 이때 참여했던 스님들이 서울 광화문 인근에 민족불교연구소(소장 성문)를 설립하였고, 불교와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던 불교사회문제연구원(원장 여익구)이 체제 개편을 하고 서울 인사동에 사무실을 마련하면서 각각 소장 승려와 재가불자들이 결집하였다. 기존의 한국대학생불자연합회를 비롯, 각 사찰 청년회에서 활동한 청년 불자들 등이 뜻을 함께하여 실로 조직건설의 하부가 탄탄하게 마련되고 있었다. 

여기에 뜻하지 않은 지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당시 서독 언론인이 세운 제3세계 빈민, 아동, 여성운동을 돕는 국제지원재단이었는데, 우리말로 ‘인간의 대지’라는 이름을 단 재단이었다. 단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재단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최○○이 주선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재단으로부터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한국불교의 빈민운동에 쓰이도록 하고 그 결과를 매년 보고하는 조건이었다. 

1984년 11월이던가, 이 기금으로 서울 구로3동에 상가 한 층을 얻어 자비포교원을 개원하였다. 대표적인 빈민촌으로 꼽히던 곳에 불교운동과 아울러 빈민 지역 실태조사와 연구사업을 수행했다. 물론 불자로서 소양과 품성을 기르는 정기법회 등 신행도 게을리하지 않았다.(그러나 지원은 1회로 그쳤고, 법당은 1986년 ‘5 · 3 인천민주항쟁’으로 당시 집행부가 구속, 수배되면서 운영을 멈췄다.)

1984년 겨울, 새로운 조직체 건설이 한창 달궈지던 시기에, 때맞춰 빈민운동 지역거점이 마련되면서 조직 건설은 한층 구체화되었다. 동참하는 활동가도 속속 늘어나서 민불련 결성이 코앞에 다가왔다. 당시 사회 각 부문엔 민주, 민중 또는 민족을 집안의 성처럼 쓰는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었는데, 불교계도 그런 영향을 받은 셈이다. 민중불교운동연합도 조직의 이념적 지향을 단체명에 담아냈는데, 추상적인 불교가 아니라 역사의 알맹이이자 생산의 주체인 민중의 불교이며, 이들에 의한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는 운동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내가 민불련의 초기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 사실은 나 이전에 거론된 인사가 있었다. 고려대 출신의 걸출한 대중 선동가 안희대였다. 1974년 민청학련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나중에 출가하여 성철 스님을 모시고 있다가 1984년 속퇴하였다. 법명은 원파였다.

경북 예천 사람인 그는 1973년 고려대를 수석 입학한 수재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종신 집권체제를 구축하는 유신헌법을 만들자, 이때부터 그는 반정부투쟁의 전사가 되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고 제적되었다가, 민주화의 봄이 처절하게 짓밟힌 1980년 계엄위반으로 또다시 수배되었다. 결국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1982년에 출가하였다, 자신을 성찰하며 세계를 다시 보고자 정진하였지만 학살과 폭압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해 다시 ‘운동권’으로 돌아왔다.

그는 승복을 벗은 그해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마땅히 민불련 결성에도 참여했고 준비를 함께한 동지들은 그가 집행부를 맡기를 바랐다. 그런데 민불련 결성을 앞둔 1985년 3월부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와 연락이 끊어졌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민불련 창립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순전히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아서였다. 대타로 들어와서 주전이 된 셈이었으니 고맙다고나 할까.

안희대의 바람도 역시 민불련이 이루고자 한 바와 같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이 자본의 억압과 수탈에서 해방된 땅, 곧 정토로 바뀌는 것이었다. 인류가 이뤄내야 할 보편적 가치에 눈감고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면 그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1986년 5월, 인천 주안시민회관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가두시위 ‘5 · 3 인천항쟁’으로 또 수배와 구속을 겪은 뒤 1990년대 들어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향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낙방한 뒤, 재도전하려고 노심초사하던 중 1998년 10월, 한강 변 노들길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발견되기 이틀 전 집을 나간 이후 그의 종적이나 사건의 진상, 범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다. 

20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서울 흑석동 달마사에서, 민불동지모임이 주관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후원하여 안희대 동지처럼 불교계 인사로서 정토 세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법회를 해마다 음력 시월 초에 열어왔다. 그런데 달마사 주지가 갑자기 바뀌면서 그 법회도 잇지 못하고 있다. 소박한 추모법회나마 열지 못하고 있는 처지가 새삼 부끄럽다. 

 

서동석  / 전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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