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교육문제와 불교

— 불교, 새로운 공동체, 그리고 대안교육

1. 전법선언에 담긴 교육적 지향

어떤 가치와 그 지향은 선언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가치의 실천은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된다. 붓다가 지향하고자 한 고귀한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서술은 아마도 전법선언일 것이다.

35세에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는 27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이르렀다. 거기서 정각을 이루기 전에 함께 수행한 다섯 수행자에게 중도와 팔정도, 사성제를 설했다. 다섯 수행자에게 여러 날에 걸쳐 법을 설하는 붓다의 시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다섯 수행자가 번갈아 탁발하면 남은 수행자에게 자세하게 법을 설했다고 한다. 붓다는 매우 자세하게 여러 가지 예를 들어가며 설했을 것이고 치밀하게 논증했을 것이다. 교육자로서 붓다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직접 같이 생활하면서 곁에서 법을 설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즘 일상화된 비대면 강의가 아닌, 대면 강의라 할 수 있다. 비대면 강의에서는 표정, 태도, 말씀에서 전달되는 진심의 효과가 낮다. 붓다의 교육은 이렇게 함께 생활하면서 이루어졌기에 이해와 공감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이후 붓다는 승가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출가와 재가의 제자들에게 다양한 방편으로 법을 전했다. 법을 들은 그들은 올바르게 이해했고, 기존의 잘못된 생각을 버렸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났다.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붓다는 최고의 교육자라고 할 수 있다. 여래십호 중에서 ‘천인사(天人師)’의 의미가 드러난다. 붓다의 생애에서 전법의 과정과 방식을 살펴보면, 지식과 정보의 전달과 습득만이 교육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오늘날에, ‘무엇이 교육이고 교육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마침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아라한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 야사라는 청년이 붓다의 법을 듣고 이해하고 출가수행자로 입문했다. 야사의 출가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 매우 부유한 집안의 청년이었다. 당연히 세속의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재물과 지식이 충족되었지만 그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뇌하고 방황했다. 그런 그에게 붓다는 마음의 문을 열었고, 적절한 말로 고뇌를 해소해 주었고, 길을 열어 주었다. 붓다의 생애는 교육자의 길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승가는 교육장이었다. 붓다라는 출중한 교사가 있었고, 아라한이 된 출가 제자들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듣고, 동료 수행자들과 법을 토론했다. 요즘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바처럼 전원이 교사였고, 전원이 학생이었으며, 모든 도량이 학교였다.

야사의 귀의와 함께 그의 부모가 재가불자가 되었고, 야사의 친구 50명이 붓다에게 출가 귀의 하였다. 그들은 붓다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루었고 아라한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튼튼한 교사 집단을 이룬 붓다는 가르침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법선언이다. 전법선언의 전문을 살펴본다.

비구들이여, 나는 천상과 인간 세계의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대들도 천상과 인간 세계의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해, 세상을 연민히 여겨 천상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길을 떠나십시오.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십시오.

비구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하며,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십시오.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십시오. 본래부터 티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지 못해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깨달을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나도 가르침을 펴기 위해 우루벨라 장군촌으로 가겠습니다.

전법선언은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교육 선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시대와 당대의 사람들에게 맞게 당대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해석할 때 본원의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수행법 또한 그러하다. 전법과 중생구제라는 용어를 교육으로 등치해도 본래의 의도를 상실하지 않을 것이고 다양한 수행법 또한 교육 방법론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법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 이익과 안락이란, 올가미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올가미란 그릇된 세계관에 기초하여 불평등한 계급이 만들어지고 현실 삶의 갈등을 낳는 모순된 구조이다. 또한 사견과 희론으로 조작되고 구성된 사회와 문화 현상은 개개인에게도 그대로 내면화되어, 중생은 참삶의 가치가 전도되고 감각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생산해내고 있다. 붓다의 탄생 선언 중 ‘삼계개고(三界皆苦)’에 해당한다. 붓다는 분명 당시의 개개인과 사회를 그릇된 세계관과 그에 따른 고통으로 가득한 올가미로 보았던 것이다. 

붓다는 무명과 탐착, 착취와 투쟁으로 고통받는 사회상을 통찰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을 제시하고 있다. 해탈의 길은 자신의 모습과 세계의 통찰이고 확립이다. 그리고 청정한 삶이다. 이는 현대 대안교육에서 ‘앎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앎이 되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교육철학과 같다. 내용과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이란 곧 올바른 ‘앎’이다.

그리고 전법선언에서 ‘본래부터 티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면 깨달아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교육은 곧 개발이라는 점과 일치하고 있다. 붓다가 성도한 이후 범천의 권청에서도 교육의 필요성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중생들이 무명과 탐착에 빠져 심오한 가르침을 말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입멸에 들고자 하는 붓다를 보고, 범천은 진리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세상은 파멸에 빠지게 될 것으로 판단하고 붓다에게 법을 청한다. 그러자 붓다는 중생의 상황을 오염된 못에 다양한 형태로 피어 있는 연꽃에 비유하여 생각한다. 번뇌와 탐착에 많이 오염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예리한 지적 능력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가르침을 영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통찰하고, 이들에게 마음의 눈을 열어 주리라고 결심한다. 붓다가 교사의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붓다는 당대의 교사였고, 가르침은 교과서였고, 출가수행자는 학생이었고, 승가는 학교였다. 이는 결코 견강부회하는 해석이 아니다. 승가는 법을 숭고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고 앎을 삶으로 완성하고자 다양한 가르침을 듣고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가지고 수행한다. 교육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일이다. 승가의 수행과 학교의 교육은 이음동의(異音同義)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교계가 삼보를 왜 교육의 관점과 틀에서 해석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붓다의 가르침과 교육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며[不二], 교육이 곧 붓다의 가르침 실현[相卽]이고, 붓다의 교설을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해석하고 교육의 방법론으로 변주할 때[相入] 대안교육과 불교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로 만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육의 관점으로 붓다와, 붓다의 교설, 붓다의 지도력을 해석할 수 있다. 승가의 생활 또한 교육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우리 시대에 맞는 대안교육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붓다에 대한 해석은 늘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다양한 서사가 없는 교리와 사상은 본원력을 상실하고 한 집단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붓다 시대의 붓다를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붓다는 ‘대안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삼종외도(三種外道)로 명명되는 실재론적이고 주재론적인 사상을 부정했고, 불가지론과 회의론을 부정했으며, 인간에게 죄의식을 세뇌하는 운명론과 결정론을 부정했다. 그리고 무아와 연기의 법으로 인간을 주체적 의지의 실현자로 해석했다. 또한 고행주의, 쾌락주의, 선정주의의 위험과 무의미를 통찰하고 중도의 길을 제시했다. 붓다는 미혹의 문명에서 깨달음의 문명을 지향하는 전환 문명의 선구였고, 깨달음의 문명을 시대와 일상의 현장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대안교육 운동가였다. 이런 관점과 맥락에서 불교와 오늘날의 대안교육을 고찰해보자.

2. 인드라망생명공동체와 실상사 작은학교

“실상사는 인드라망 세계관의 실현지이다.” 

이 문구는 ‘실상산문 사부대중의 발심과 다짐’의 첫 번째 항목이다. 사찰이 대중이 붓다의 정신을 실현하는 공동체이고 교육과 실천의 장임을 천명한 것이다. 실상사는 사부대중의 개념과 범위를 시대에 맞게 규정하고 해석하고 있다. 단순하게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라는 불자로 한정하지 않는다. 생명평화의 가치를 지향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사부대중으로 받아들인다. 사찰이 승가의 수행처를 넘어 뭇 생명의 귀의처이고 안락처인 공동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실상산문의 가치와 지향은 사부대중이 공부하고 뜻을 모아 만들어진 각종 글에 나타나 있다.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드라망 헌장,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청규, 한생명인의 기도, 좋은 모임을 위한 서원문, 생명평화 서약문, 생명평화경, 생명평화를 위한 기도, ‘붓다로 살자’ 발원문, 실상산문 사부대중의 발심과 다짐, 우리 삶의 중창불사를 위한 기도, 약사여래 천일기도,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명상 등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글에 담긴 내용과 정신을 시각적으로 집약한 ‘인드라망 생명평화 무늬’가 있다. 

이들 글의 핵심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으로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세계관이다. 이는 화엄사상에 기반한 법계연기론을 이 시대의 안목과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음은 ‘본래 붓다’의 정신이다. ‘본래 붓다’의 정신은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가 존엄한 한생명임을 확인하고 있다. 인드라망 세계는 곧 공동체이며 그런 그물에 살고 있는 뭇 존재들은 생명평화의 존재이고 구현자임을 통찰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동체대비의 삶이 곧 붓다의 구세대비(救世大悲) 정신으로 귀결됨을 천명하고 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 통일신라 시대 구산선문의 최초 가람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인 화엄사상과 ‘본래 붓다’의 정신을 시대에 조응하고자 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현재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 가람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 지리산 마을절’을 표방하고 있다.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실상사가 추구하는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드라망 세계관의 실현지이다. 이는 인류가 직면한 고통이 자기중심의 비연기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통찰이다. 실상사는 이런 세계관을 배우는 생명평화 수련장이고 실현지로 가꾸어 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둘째, 지금 당장 본래 붓다로 사는 곳이다. 우리 모두가 본래 붓다라는 진리를 삶의 좌표로 삼고 일과 수행이 조화로운 삶을 가꾸고 공동체 도반들을 붓다로 섬기는 도량이다. 셋째, 화합하는 사부대중 공동체이다. 출가와 재가가 상호 존중하며 함께 수행하고 함께 논의하고 실천하는 장이다. 넷째, 단순 소박한 살림살이를 가꾸는 터전이다. 현대사회의 생명 · 생태계 오염과 파괴가 무지와 탐욕에 기반한 다량의 소유와 소비에 있음을 알고, 알맞은 소유로 생명의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고 있다. 다섯째, 공동체 도반을 위한 든든한 울타리이다. 생명평화의 가치와 단순 소박한 삶을 위해 서로가 탁마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살림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한다. 여섯째, 마을 속 진리의 숲이다. 단순하게 재가불자의 한계를 넘어 마을과 함께 진리를 수행하고 나누고자 한다. 이는 절이 농촌과 지역에 있으면서도 대도시의 재가불자 중심으로 운영하는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다. 마을절로 가꾸고자 하는 뜻은 실상사가 귀촌 귀농의 역할에 기인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곱째, 세상을 향해 열린 학교다. 절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승가의 수행처에 한정되지 않는다. 절은 상처받고 지친 이들에게 쉼과 치유의 안식처이고 삶의 희망을 설계하는 ‘인생 학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실상사가 귀농학교를 만들고 불교계 최초이고 유일한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를 만든 뿌리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취지 아래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내면의 모든 영역의 법우들은 전반기 4개월과 후반기 4개월 동안 매주 수요일 업무를 접고 공부하고 있다. 오전에는 주제가 있는 학습을 하고 오후에는 농장에서 일 수행을 하고 있다. 전반기 2개월과 후반기 2개월은 해제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때는 영역의 법우들이 모듬을 만들어 원하는 주제를 정해 공부하고 있다. 일과 수행, 그리고 세상을 향한 보살행을 구현하고 있다.

실상사 공동체는 현재 실상사 회주로 있는 도법 스님의 발의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도법 스님은 전통 선원에서 선 수행을 거치고 화엄사상을 만나 새로운 불교를 구성하고자 했다. 그 첫걸음으로 조계종 승가 결사체인 ‘선우도량’을 발족했다. 1990년 정혜사에서 시작한 선우도량은 1993년에 실상사를 근본도량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뭇 생명의 안락과 이익을 위해 결사를 한 선우도량은 바람직한 승가상 정립과 승풍 진작을 기치로 걸었다. 그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주요 사업이 승가 학풍의 쇄신과 진작이었다. 선우도량 부설로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행자교육과정과 각 승가대학(강원)의 교과과정과 교육내용을 쇄신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승가 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이 한문 불전과 선어록, 대승 불전에 편향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승가대학 과정에 필요한 《아함경》을 한글본으로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그리고 각종 연찬을 통하여 행자교육, 승가대학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기성 승려의 재교육도 논의하여 대안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기초-기본-전문-재교육으로 이어지는 승가교육의 틀을 마련하였다. 선우도량의 ‘한국불교 승가교육개혁안’은 1994년도 종단비상기구인 조계종 개혁회의에서 법제화됨으로써, 체계를 갖춘 현재의 조계종 승가교육과정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실상사에서 승가교육을 쇄신하고자 했던 선우도량의 목적은 ‘승가의 대안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를 읽어내지 못하고 조선시대 교과과정과 교재를 사용하며 박물관 교육에 머물러 있는 데 대한 대안 제시였다. 

이어 실상사에서는 승가교육과정 중 전문과정에 해당하는 ‘화엄학림’을 개설하였다. 필자는 화엄학림 1기생으로 2년 동안 《화엄경》을 연찬하였다. 화엄학림은 《화엄경》과 관련 문헌을 한문 강독하는 수준을 넘어 토론하고 대화하는 학풍을 마련했다. 《화엄경》을 바로 알기 위해 초기불교, 반야중관, 유식사상을 먼저 학습하였다. 강사와 학인이 쌍방향으로 발제하고 토론하면서 학습하는 화엄학림은 승가의 대안학교이다. 화엄학림 이후 여러 사찰에서 승가의 전문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작지만 조용한 변화와 쇄신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실상사는 불교귀농학교를 서울에 개설했다. 이어 불교도농공동체운동을 위한 기획단을 구성하고 실상사 장기귀농학교를 개설하였다. 이어 1999년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했다. 산하에 생협을 만들었고 서울 교육도량이 만들어졌다. 이런 일련의 발걸음은 인드라망 세계관에 기반하여 불교를 넘어선 불교를 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인드라망 운동의 제1 실현지인 남원시 산내면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동체 영역이 탄생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근본도량 실상사: 서울, 광주, 남원 등지에 있는 인드라망 각 영역의 근본도량이다. 실상사를 귀의처로 각 영역이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수행하는 도량이다.

▲ 한생명: 실상사가 자리하고 있는 남원시 산내면에서 인드라망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산내들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산내면에 귀촌 귀농자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이집과 산내초등학교는 다른 지역에 비해 학생 수 부족 현상이 없다. 마을과 공동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산내초등학교 학생들의 배움터이자 쉼터인 방과후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여성문화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친환경 매장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생산한 농산물과 각종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나눔꽃이라는 아나바다 장터를 상시로 운영하고 있고, 여성농업인과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산내여성농업인센터와 연계하고 있다.

▲ 실상사 농장: 1998년 장기귀농학교가 개설된 이래 많은 학생이 이곳을 거쳐 산내면과 여러 농촌 지역으로 귀농하였다. 이를 토대로 농장이 만들어졌고, 유기농 친환경 농법을 실현하고 있다.

▲ 사회적 쉼터 귀정사 수련원: 인드라망의 수련원으로, 몸과 마음이 힘들어진 사람들이 최소 6개월 동안 치유와 회복을 하고 있다. 

▲ 생명평화대학: 사회로 나가는 긴 시간을 홀로 버티고 있는 청년들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만들어 가는 청년 대안대학이다. 2007년부터 6년을 준비해서 2014년 인드라망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역사와 철학 등의 인문학 공부, 마음 치유, 기타 공동프로젝트 등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

▲ 목금토 공방: 실상사 영역에 속하며 은퇴자를 위한 목공 교육을 하는 곳이다. 

▲ 자자창고: 청년들의 공부와 놀이, 작업 공간이다.

▲ 인드라망생협: 1998년 불교생협연합회로 시작하였다. 귀농한 소농으로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이들에게 판로를 열어주고 있다. 

▲ 광주도량 선덕사: 광주와 전남 지역의 인드라망 도량이다. 2012년부터 시작해서 마을 카페, 마을 도서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인드라망 교육도량: 서울에 있으며 회원 교육을 담당한다.

▲ 대안학교 실상사 작은학교: 2000년 대안학교인 작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교사공동체 연수를 시작으로 2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쳤다. 2001년에는 실상사 경내에 컨테이너 건물 3동을 마련하고 15명의 학생을 받아들이면서 작은학교 1기를 시작했다. 1997년 산청군에서 전일제로 비인가 대안학교인 간디학교가 개설되어 시작한 대안학교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현재 국내 불교계의 유일한 대안학교이다.

학교가 내걸고 있는 기치는 ‘우정과 배움의 공동체’이다. 작은학교는 기꺼이 벗이 되어 함께 배우는 우정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학생, 학부모, 교사의 교육 3주체가 모여 깨달음이 나무처럼 자라는 교육을 실현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대단히 높다. 실상사 귀농학교가 싹이 되어 대안적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현재 산내면 지리산 마을에는 500여 명 정도가 귀촌 귀농자가 있다. 귀농자들은 이곳에서 결혼해 생겨난 아이들에게 대안적 삶을 안내해 줄 교육이 절실했었는데, 작은학교가 이에 부응한 것이다. 

작은학교는 ‘작은 가정’과 ‘큰 가정’으로 나눠, 아이들과 교사가 함께 사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식사와 세탁 등을 함께 해결하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자치적으로 자립적 삶을 살아갈 힘을 키우고 있다. 중등과정으로 시작한 작은학교는 2016년 ‘전환과 모색위원회’를 거쳐 현재 2년제 언니네(고등과정)와 5년제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작은학교도 다른 여타의 대안학교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3. 대안을 넘어 ‘혁신’을 향하여

고금 동서양의 모든 교육은, 그 목적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었으며 언제나 공교육과 사교육이 존재했다. 고구려는 불교가 전래한 372년(소수림왕 2년)에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였다. 귀족의 자제들만 입학이 가능했으며 경학과 문학, 무예를 가르쳤다. 통일신라는 ‘국학’, 고려는 ‘국자감’, 조선은 ‘성균관’이 국립 교육기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산업사회를 거쳐 근대국가의 출현 이후 각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행정 등의 각 분야에 필요한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근대적 학교를 설립했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다양한 직업의 발생과 분화가 이루어지고, 특히 현대에 들어 정보화, 테크놀로지 사회가 도래하면서 학문은 더욱 분화되고 이에 따라 교육기관도 분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레 자본주의에 맞는 ‘기능형 인간’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육은 그러한 요구를 배출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교육목적의 변화는 진리 탐구, 자유와 정의의 실현, 인간성 존중과 함양, 우정과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라는 숭고한 정신을 매몰시켰다. 현재 대학의 설립 목적이 진리, 자유, 사랑, 평등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야말로 허울에 불과한 현실이다. 초등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목적과 목표는 오로지 ‘취업’에 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학교가 취업을 위한 양성소로 전락했다. 우정과 배움은 이미 출세와 성공의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대학의 관문에 들어오기 전과 후 모든 교육의 변질과 왜곡은, 2010년 학력 중심 사회인 대한민국에 파문을 일으킨, “나는 오늘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김예슬 선언’으로 나타났다. 선언문은 오늘의 대학을 ‘자격증 장사 브로커’,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 제품을 만들어 올려보낸다고 교육의 현실을 진단한다. 그래서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 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학교의 우울과 절망을 토로한다. 그리고 대학을 그만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 삶이 한 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대안학교는 참된 삶을 위하여,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 땅의 ‘김예슬들’이 저항하고 거부하고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생각하며 살아가겠다’는 부모와 교사와 학생들이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과 유럽에서 근대학교 제도와 교육내용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진단하고 ‘신교육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내용이 지금은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남녀공학, 체벌 금지, 교사와 학생의 평등하고 인간적인 관계, 학습자 위주의 흥미 유발 교육 등이었다. 그때 선구자들은 서구식 학교교육의 한계와 허점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신교육 운동이 대안교육의 출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970년 초 이반 일리치(1926~2002)는 ‘탈학교’ 개념을 제시했다. 제도권 학교를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건물과 조직이라는 ‘사물’이 아닌, 마을과 사회의 모든 삶이 곧 교육이라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스쿨링(schooling)’은 삶이 곧 앎이고 다양한 삶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교육이며, 사회가 학교라는 관점이다. 서머힐, 발도르프, 도쿄슈레, 무반덱 등은 오래전부터 설립되어 운영되는 서양의 대안학교 이름들이다.

우리나라 대안교육 현황

우리나라의 대안교육, 한정하여 대안학교 운동은 현재 20여 년을 넘어서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97년 산청군 간디학교를 시작으로 2천년대부터 다양하고 많은 대안학교가 생겨났다. 초등, 중등, 고등 과정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홍천의 밝은누리와 같은 몇 곳은 고등과 대학을 통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대안교육 진영에서 말하는 대안학교 20년의 주요 흐름은 다음과 같다.

① 설립 및 팽창기: 2001년에서 2006년 동안 해마다 11개에서 14개에 이르는 학교가 생겼다. 

② 안정기: 대안학교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시기이다. 첫 번째 도약의 기회였지만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내부 반성이 있다. 법제화/제도화를 추진했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안정기였으나 ‘놓쳐버린 8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③ 정체기: 현재의 상황을 정체기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학생 수 감소가 해마다 두드러지고 있다. 

대안교육이라는 말과 함께 대안학교가 생겨난 이유는 앞서 말한 ‘김예슬 선언’으로 집약된다. 학력 중심으로 사회체제가 구성된 현실에서 교육의 본질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문구가 이런 교육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획일화되고 경쟁적인 학교, 입시 위주의 편향된 교육,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학생들이 분류되어 배제되고 소외되는 교육, 배움과 우정의 공동체 정신을 상실한 교육 현실을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대안’으로 대안학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초기 대안교육이 호응을 얻고 학교가 생길 수 있었던 요인은 ‘의식 있는 386세대 부모’들의 힘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본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의식 있는 교사’들의 움직임이었다. 그런 교사와 부모의 생각에 동의한 주체적인 사고의 학생들이 대안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대안학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비인가 사립 대안학교, 공립형 대안학교가 있다. 대부분 기숙형 전일제 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또 2004년 ‘도시 속 작은학교’를 시작으로 도시형 전일제 학교도 있다. 또 ‘대안교육연대’에 소속되지 않은 학교도 있다. 대안교육의 목적과 취지에 맞지 않는데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대개 종교의 선교자를 길러내고 외국 유명 대학을 목표로 기숙형으로 운영하고 있는 곳들이다. 

대안학교의 설립 취지와 목적은 다양하지만, 그 가치와 지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안교육연대’ 홈페이지나 카페에 나타난 교육철학, 교육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태, 환경, 생명, 자연을 가치로 한다. 관계, 대화, 소통, 협력의 삶을 이루고자 한다. 그리고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위해 자유와 자립, 마을과 지역, 차이의 다양성, 민주적인 삶, 사회적 실천을 학교에서 익히고자 한다. 사회적 인간을 지향하며 공동체성 인류애를 강조하고 있다. 학습은 자기주도의 공부, 자기 개성에 맞는 재능을 찾고 익히는 공부를 한다. 일상의 삶은 느리고 낮은 삶, 가치와 감수성,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고자 한다. 요약하자면 대다수 비인가 대안학교에서는 생태, 환경, 자연 존중을 교육철학으로 하면서 관계의 공동체성을 중시하고 있으며, 흥미와 자발성에 바탕한 다양한 학습을 자기주도적으로 하고자 한다. 

대안학교의 정체 원인

대안학교가 정체된 이유는 다양하다. 크게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학력 중심의 사회체제를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학교의 출발이 의식 있는 386세대 교사와 부모들이 선구적으로 주도하였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부모들의 생각과 추구하는 것들도 달라졌다. 초기와 달리 지금은 거의 대안학교 졸업 이후 대학을 진학하는 추세다. 대안교육이 대안적 삶의 사회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부 인가를 받은 공립형 대안학교의 설립, 대안교육의 교육 내용을 수용한 각종 혁신학교 등의 탄생 또한, 굳이 학비가 많이 들어가는 기숙형 전일제 비인가 대안학교를 보내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안학교 출범 이후 대안교육 진영이 교육철학에 입각한 교육내용과 성과에 집중하지 못한 원인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안교육을 제도권 학교에서 이탈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교육부는 주류 교육의 보완재로 보고 있다. 일본은 ‘교육기회확대법’을 통과시켜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들도 학교에 가는 학생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대만은 ‘실험교육법’을 통해 다양한 교육적 실험이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다행히 대한민국도 최근에 ‘대안교육기관에 대한 법률’과 그 시행령이 통과되어 대안학교에 대한 국가 지원의 길을 열었다. 문제는 다양한 교육들이 학생들이 선택하고 이를 인정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교육의 본질 회복과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4. 불교는 대안교육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앞에 말했듯이 불교계의 대안학교는 실상사 작은학교가 유일하다. 원불교는 성지학교를 비롯해 많은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문제를 겪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적극 품고 있다. 기독교도 많은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대안교육의 철학과 취지에 어긋나는 ‘대안’이란 이름을 가진 기독교계 학교도 많은데, 홍천의 밝은누리 공동체의 중학과정 ‘생동학교’와 고등대학 통합과정의 ‘삼일학림’은 굳이 기독교 신앙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대안교육의 내용을 훌륭하게 실현하고 있다.

현재 불교계는 대안교육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도 없는 편이며, 그 필요성도 그리 공감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불교철학과 세계관, 대안사회의의 가치와 지향, 생태적 삶의 추구, 마음의 평화 등의 사회문화적 흐름을 살펴보면 대안교육에 불교가 기여할 수 있는 토대와 토양은 무엇보다도 유리하다. 

불교계가 대안교육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첫째, 서두에서 말했듯이 붓다의 탄생 선언과 전법선언, 그리고 45년의 붓다의 삶이 ‘교육’의 실현이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대안교사였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발심과 발원, 중생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고 적절한 수행법은 그대로 교육이다. 또한 당대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과 수행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과 수행법으로 제자들의 눈을 열어준 사실은 오늘의 언어로 보자면 ‘대안교육’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둘째, 불교 교육철학의 모색과 확립이다. 경전의 다양한 교설과 수행법, 교화의 방법 등을 교육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늘날 대안학교의 정체(停滯)는 다분히 교육철학의 끈질긴 탐구를 소홀히 하고 현장 중심으로 접근했던 요인이 크다. 불교와 교육을 접목하는 불교철학의 접근은 무엇보다도 오늘에 맞는 교육적 언어로 불교의 교설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가령 삼보(三寶)에 대해서도 붓다와 출가 수행자를 교사로, 교설은 교육내용으로, 승가는 교육장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또 지정각 세간(智正覺 世間), 중생 세간(衆生 世間), 기세간(器世間)의 융삼세간(融三世間)의 사상을, 교사(지정각)와 학생(중생)과 학교와 마을(기세간)로 해석하고 유기적 관계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특히 대안교육을 불교적 시각에서 구성할 때 화엄사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열 가지 관계망[十玄緣起]을 말하고 있는 화엄사상은 대안교육의 새로운 시선과 구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 선종의 어록, 다양한 명상법, 붓다와 제자의 상담 사례 등은 그야말로 교육철학과 방법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불교와 교육의 접목과 교육철학의 재구성을 위해서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셋째는, 사찰을 공동체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얼마 전 입적한 틱낫한 스님은 ‘미래의 부처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찰이 관성적이고 관습적으로 출가 승가가 재가불자를 향해 기도와 불공, 법회와 사찰 불교대학, 템플스테이를 하는 등의 문화로는 시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불교의 정신은 형태와 형식에 묶이는 것을 거부한다. 마을과 사회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해석하는 21세기 승가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교육적 관점에서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교육의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방편 바라밀에 해당한다. 사찰의 공간, 수행, 문화 등의 토대와 토양은 대안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자원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와 시민성을 뛰어넘는 불교철학의 공동체성을 확립하고 대안교육에 적합한 방편을 개발하고 실험할 수 있다.   

대안교육의 진정한 실현은 ‘대안’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는 교육이다. 대안교육이 보편교육이 되는 세상을 위한 발원이 불교인에게 필요한 시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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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출가. 실상사 화엄학림 졸업.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보살의 원과 행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 역임. 현재 실상사 작은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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