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교육문제와 불교

코로나 팬데믹과 교육문제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생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인식된 교육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막연히 전망했던 원격교육과 디지털 학습이 강제로 앞당겨지면서 지난 2년간의 교육계는 대면과 비대면을 오가는 블렌디드 학습의 실험장이 되었다. 잘 설계된 실험장이기보다는 혼란과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일종의 생존 시험장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2년 동안 화상으로만 강의하다 보니 이제는 전면적인 대면 강의로 전환될 경우 강의 현장이 상당히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인간의 적응력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새삼 느낀다.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 상황이 이러하다면 초중고 공교육 현장은 더 힘들고 혼란스러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제출된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10대 청소년 공황장애는 4년 전보다 2배 증가했고, 우울 관련 환자는 이전 해보다 64% 늘었다고 보고된다. ‘코로나 블루(우울증)’로 인해 자해나 자살까지 생각하는 청소년을 정부의 마음건강지원 서비스만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인관계 단절로 인한 우울감, 고립감,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기의 심리적 어려움은 전 생애에 걸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심리적 방역이 필요한 대상은 학생만이 아니라 교육계에 종사하는 교직원들과 학부모도 예외일 수 없다. 

코로나19로 교육 기능이 정지된 학교현장에서는 학습결손이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1〉 보고서는 교육 불평등이 가속화된 양상을 현실적인 지표로 보여주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울수록 초등학생의 경우 디지털기기를 학습 이외의 용도로 쓰는 경향이 컸으며, 중학생은 온라인 수업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냥 넘겨버린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고등학생은 사교육에 의존하는 비율이 가정 상황에 따라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비대면 수업으로 학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예견되었다 하더라도 체감되는 현실의 무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 사회의 학력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과 같은 학습결손과 격차는 이전과 다른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가정의 경제적 지위에 따른 사교육 비율이 큰 차이를 보였어도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그나마 공교육 역할이 어느 정도 틈을 메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대면 상황에서 공교육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고 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따라잡지 못한 채로 방치되거나 소외되고 있다. 전 지구적인 보편적인 재난을 이유로 돌리기에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른 나라보다 더 심각하다는 데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이 사회문제로 떠오를 때마다 사교육 이슈가 의례적으로 부각된다. 한국에서 사교육은 교육정책의 무기력을 교묘하게 덮는 필요악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쓴 희생양이나 맹목적인 마녀사냥의 대상처럼 여겨진다. 사교육이 모든 교육문제의 해악이라고 규정해도 좋은지는 그동안 축적된 논의에서도 결론을 내기 쉽지 않다. 누구나 사교육을 비난하면서도 누구도 사교육 폐단의 공범이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오류와 모순의 상황이 오래되다 보니 불교의 관점에서 문제해결을 찾는 것도 그다지 수월하지는 않다. 불교의 지혜를 만능 처방전처럼 제시하기 전에 사교육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와 진단이 더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사교육의 빛과 그림자

6 · 25전쟁 이후 초등교육 의무화가 추진되면서 1957년 초등학교 취학률은 90% 이상에 달했다. 문맹 퇴치를 위한 기본교육의 성취일 수 있으나 이때부터 중학교 입시를 일류학교 진학의 발판으로 여기면서 중학교 입시가 과열되었다. 과열된 중학교 입시 해결을 위해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1968년)를 마련했으나 이것이 입시를 완화하기보다는 과도한 경쟁을 고등학교로 전가하게 되었다. 일류 고등학교를 진학하려는 중3병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자 고교평준화 정책(1973년)이 해결책으로 도입되었다. 이때부터는 대입에 유리한 좋은 학군 중심의 학원과 과외 사교육이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강남 학원가와 동네 학원이 사교육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로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을 내놓을수록 생존경쟁으로 파생되는 사교육 문제는 풍선효과처럼 새롭게 증폭되는 셈이다.

사교육 정책의 흐름만으로 본다면 1980년대는 사교육 금지 시기로서 규제 중심의 정책이 1990년대에 일부 완화기를 거쳐 2000년대에 전면 허용의 과정을 거쳤다. 사교육의 문제에 억제와 금지보다는 공교육을 정상화하여 자연스럽게 사교육이 불필요하도록 하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공교육의 정상화를 통해 사교육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개선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교육의 ‘정상화’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누가 그것을 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공교육이 정상화된다고 해서 교육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다거나, 다양한 교육적 수요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공교육의 실체나 주체가 있는 것인지도 혼란스럽다. 사교육 금지-완화-허용의 시뮬레이션을 모두 거쳤어도 어떠한 정책이 적절하고 효과적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공교육 자체를 정의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인 공교육의 의미는 학교교육 혹은 제도교육으로 대체된다. 사교육은 학교교육 밖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교육도 쉽게 정의되지는 않는다. 공교육이 다루지 못하는 특기 적성 교육을 사교육이라 한다면 공교육과 ‘공생하는’ 보완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문제로 삼는 사교육은 공교육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기생하는’ 보충적 역할이다. 공생하는 보완적 사교육은 교육의 다양성 측면에서 바람직할 수 있으나 기생하는 보충적 역할은 오히려 공교육과 사교육의 획일적이고 일차원적인 관계를 강화시킨다. 사교육은 학교에서의 성적을 올리기 위한 학원교육과 동일시되면서 언제든 안전하게 교육문제의 책임을 전가하는 감정적 쓰레기통 기능을 하게 된다.

공교육이 부실해져서 사교육이 비대해진 것인지 아니면 사교육이 번성하면서 공교육이 기능하지 못하는지를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공생과 기생의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갈등과 경쟁의 관계로 규정할지 보완과 조화의 관계로 설명할지 판단이 어렵다. 교육서비스 구매자인 일부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더 만족하고 있으며 학업성취와 관련해서는 학교 교사보다는 학원 강사에게 더 신뢰를 보인다. 사교육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서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과 후의 학원에 더 의존하게 되어 학교 수업에 소홀하게 되는 악순환이 형성된다. 차라리 학원에서 학습을 전담하게 하고 인성이나 사회성을 학교에서 담당하게 하는 역할 분리를 요구하는 학부모도 적지 않다. 어차피 학교에서 개별화된 학습이나 심화된 수업역량을 바랄 수 없다면 공교육에 대한 기대수준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다. 

사교육에 대한 평가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한국 교육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외부 시선도 일관되지 않은 것에서 찾을 수도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한국의 학생들이 학교와 학원에서 10시간 이상을 미래에 필요하지 않을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허비한다고 했다. 반면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주기적으로 한국 교육의 효과성을 칭송하며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의 학업성취를 서열화할 때 우리나라는 항상 상위권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OECD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문맹률은 1%이지만 실질 문맹률(문해력)은 75%에 달한다. 글자는 알지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지표도 OECD 회원국에서 한국 청소년 자살률이 부동의 1위라는 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사교육이 모든 교육문제의 근원인지, 오히려 문제해결의 수단인지 정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사교육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높아질수록 사교육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사교육의 교육적 효과가 커지더라도 그것은 전체 교육 체계에서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된다. 엄밀하게 보면 사교육에 대한 신뢰는 사교육 강사에 대한 신뢰이다. 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는 서로를 교육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학교 교사는 학원 강사의 탐욕을 비난하고 학원 강사는 학교 교사의 무능을 탓한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거창한 교육의 정상화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아이 성장에 적합한 신뢰할 수 있는 선생을 만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 학교 교사이든 학원 강사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육환경의 개선도 부수적인 바람이 된다. 

교육의 질은 결국 교사의 질을 능가할 수 없다는 오래된 교육적 격언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흔히 교사의 능력은 학원 강사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에 공감한다. 엄청난 임용고사 경쟁률을 뚫고 교직에 들어선 인재들이 학원 강사보다 못하다는 현실은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임용고사를 넘어서지 못한 인재들이 학원으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상당히 역설적이다. 결국 교사와 강사의 차이가 타고난 능력의 차이가 아닌 생존을 위한 절박한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가 분별과 차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예시가 될 것이다.

 

3. 공교육 정상화의 판타지

공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 혹은 착각과 환상에는 무언가 정상화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상화’ 고지가 있고 이 고지에 오르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수단을 강구한 것처럼 정책을 도입한다. 마치 교육의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정상화의 이데아가 있어서 끊임없이 이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공교육이 선이고, 사교육은 악이라는 이분법이 부수적으로 따른다. 이분법의 논리로서 사교육이 악이라고 규정되는 한 공교육만을 선으로서 실현하려는 것은 가당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공교육과 사교육의 생태계가 다르고 생존방식이 구분된다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공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공교육의 주체는 누구이고, 사교육의 주체는 누구일까. 어차피 학생이 양쪽에 다 개입된다면 공교육의 실질적인 주체는 학교 교사이고 사교육에서는 학원 강사로 규정된다. 학원 강사만이 사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크고 작은 규모의 과외선생도 해당한다. 이들은 우리 삶과 유리된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 모두가 우리 자신이고, 우리 주변인들이다. 다시 말해 다 같이 힘겹게 살아가는 무명의 중생들이다. 수험생을 독식하는 대형학원을 문제 삼을 수 있겠으나, 사교육에 힘겹게 종사하는 사람들을 공교육 정상화를 막는 악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 선의 실체도 악의 실체도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고통받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이나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 추상적인 언어로 진단하려 한다.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불경기 때문이라 하고, 몸에 병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을 알 수 없으면 스트레스 때문이라 한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허수아비 때려잡기식으로 사교육 비난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교육을 비난하면서도 그 누구도 사교육에 의존하는 모순적 태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공교육과 사교육의 개념을 지금과 같은 이분법의 논리로서 공교육 정상화를 주장한다면 결국 공교육과 사교육 병리론을 벗어날 수 없다. 공교육 정상화를 외치는 순간 사교육 병리론뿐만 아니라 현재의 공교육 병리론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공교육 정상화 대책은 학습자 누구도 입시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고 공정하고 평등한 입장에서 교육의 다양성이 구현되어야 함을 뜻한다. 학습자 모두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창의성과 인성을 갖춘 인재로서 행복한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상적인 학습자상을 정해놓고 정상화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과연 어떠한 실효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갖추고 낙오되지 않으면서 인성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길이 없다. 마치 정상화라는 주술을 걸어 마법처럼 교육문제가 해결되는 신화를 믿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교육 현상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것이 이토록 명확하다면 그동안 왜 이렇게 정상화가 어려웠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정상’이 평균적인 일반화된 상태를 뜻하는 것인지,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상태인지조차도 선명하지 않다. 건강하지 않을 경우에 질병이 생기는 원리로만 공교육과 사교육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건강해도 질병에 걸릴 수 있고 건강하지 않아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공교육의 기능이 그동안 정상적이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공교육의 부실함을 보완하는 사교육은 백신이 되거나 치료제 역할을 한다는 역설도 가능해진다. 사교육을 굳이 변호하거나 옹호할 필요도 없겠으나 사교육을 문제시하는 우리의 일반적 인식이 과연 어느 정도 정당한지는 반성이 필요하다. 

연기(緣機)의 진리를 떠올리지 않아도 공교육과 사교육이 상호의존적 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상호의존 관계인 것을 분리시켜 논의할 경우 모순과 역설의 발생이 불가피해진다. 사교육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한다고 해서 공교육이 저절로 정상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사교육 금지 시기의 역사적 실험을 거쳤다. 병에 걸리지만 않으면 몸이 저절로 건강해진다는 논리처럼 사교육 망국론만으로 공교육 정상화를 기대할 수도 없다. 사교육이 사라진다면 공교육은 그 모든 교육적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부담과 공포가 오히려 가중될 수 있다. 공교육이 사교육을 극단적으로 금지하거나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은 이미 중도(中道)의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공교육이 사교육을 면피용 도구로 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불어 공생할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4. 고통의 근원, 제도인가 욕망인가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일관된 목적은 고통[苦, dukkha]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는 초기 경전에서 30여 가지 항목으로 정리되는데, 이를 네 가지로 묶는다면, 첫째 욕망과 그 변형, 둘째 무지와 그 변형, 셋째 인간 존재 자체, 넷째 무상(無常)함으로 정리된다.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욕망에서 기원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욕망에 대한 개념은 그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경전 안에서 욕망은 크게 두 가지 다른 의미로 활용되는데, 하나는 ‘감각적 기쁨의 대상(vatthu-kāma)’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감각적 기쁨을 위한 욕망(kilesa-kāma)’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욕망을 의미하는 kāma는 욕망의 대상과 욕망 그 자체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초기불교는 외부 대상보다는 주로 내면의 심리 상태로서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은 주로 감각적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집중되고 있다.

욕망의 개념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삼법인의 가르침과도 관련된다. 인간은 세상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고 변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욕망은 채워질 수 없다는 한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생명을 가진 중생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이처럼 무상함을 깨닫지 못한 것이 무지에 의한 것이라면 무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주로 소유에 대한 집착과 관련된다.

고통이 잘 설명되는 사성제(四聖諦)는 붓다가 최초로 설법한 핵심적 교의이다. 그중에서도 고는 고집멸도(苦集滅道)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진리에 해당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세상에 나와 생명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가장 원초적으로 ‘이 생명을 잃고 싶지 않다, 유지하고 싶다’는 집착이 형성된다. 벌레와 같은 미물도 이러한 집착이 무용하다는 것을 알고 본능적으로 자손 번식을 통해 유한한 생명을 극복하려 한다. 모든 식물과 동물이 알고 있는 지혜를 인간만이 부정하면서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 집착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함일 수도 있고 동물보다 더 강렬한 집착 때문에 생기는 어리석음일 수 있다.   

붓다는 이러한 집착에 의해 고통이 생긴다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대비바사론》에서 집착을 일으키는 8가지 원인으로 고통의 종류를 설명한다. ①태어남[生], ②늙음[老], ③병듦(病), ④죽음[死], ⑤사랑하지 않는 대상과 만나는 고통[非愛會苦], ⑥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⑦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⑧오취온의 고통[五取蘊苦]이다. 앞의 네 가지는 생명을 가진 육신에 대한 집착이 원인이 되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다. 일곱 번째의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은 물리적 혹은 정신적 소유욕으로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결과로 생긴다. 

사교육에서 오는 고통은 일곱 번째의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제도로서의 교육은 축적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수하여 개인과 집단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는 합의로서 유지된다. 인간이 만든 문물과 제도는 생명을 안전하게 보장받고 오래 잘 살고 싶은 욕구의 결과라는 점에서 교육제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교육을 통해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체감하는 교육제도는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기여야 할 대다수 청소년기를 불행과 좌절로 얼룩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인식된다. 청소년기 입시로 인한 고통은 청소년 자신들이 구하려 한 것을 얻지 못한 고통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구해야 한다는 요구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좌절에 가깝다. 자기 것이 아닌 욕망으로 인한 괴로움이 큰 것이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도록 한 것은 입시제도가 만든 구조이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박탈감을 느끼고, 좌절된 욕구로 남는 심리적 상처는 인생 전반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진다. 제도만을 탓한다면 제도에 영합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앞서 제도의 문제를 충분히 탓했으므로 우리 자신의 마음도 정당한지 살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학벌과 출세에 대한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혜롭지 못한 무명(無明)의 중생이 결국 세속적인 욕망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고 제도만을 탓하는 것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욕망의 관점에서 모든 가치가 왜곡될 수 있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교육 현실에 참여하는 우리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과연 공교육의 정상화인지를 살펴야 한다. 공교육 정상화보다 더 시급한 것은 내 자녀의 진로이고, 우월적인 경쟁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임은 인지상정이다. 이러한 당연한 바람을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매도하거나 무명에 의한 탐욕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내면화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외적 현실과 제도의 문제로만 시선을 돌리기 때문에 현실적 가치와 이상적 가치가 모순된 형태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자각하기 어렵게 된다. 제도와 정책의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우리 안에 존재하는 왜곡된 욕망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5. 욕망은 내 것이 아니다.

 

욕망은 사전적 의미로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 싶어 간절히 바라고 원함’을 뜻한다. 비슷한 어휘로 욕구, 요구, 욕망으로 구분되어 학문 영역에서 각기 다른 필요에 따라 정의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는 라캉(J. Lacan)의 관점을 차용하여 욕구(need), 요구(demanad), 욕망(desire)의 의미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욕구는 주로 생물학적, 감각적 결핍에서 오는 필요로 볼 수 있다. 반면 요구는 감각적인 것보다는 심층적인 심리적 결핍에서 온다. 예를 들어 사탕을 조르는 아이는 표면적으로는 사탕을 먹고 싶은 욕구로 보이지만, 엄마한테 매달리는 이유는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요구에서 온다. 사탕을 거절당한 아이가 발버둥 치면서 우는 것은 단맛의 욕구 좌절도 있겠지만 더 심층적인 엄마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의 요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구는 생리적 욕구보다 더 깊은 근원적 애착에 해당한다.

욕구와 요구가 각기 다른 생리적, 심리적 결핍에 있다면 욕망은 이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욕망은 내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다. 욕망은 나의 결핍에서 온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결핍이 나에게 이식된 것이다. 내가 본래부터 좋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의욕을 낸 것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부모의 결핍과 열등감이 나에게 이식된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납득하기 전에 부모에게 먼저 강요된다. 어떤 직업을 내가 원하는지 알기도 전에 좋은 직업이 결정되어 있다. 결핍에서 온 부모의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대체되어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결국 나 자신은 결핍을 느끼기도 전에 부모의 욕망을 전수한다. 가정에서 시작된 타자의 욕망은 성장 과정에서 무한히 증폭된다. 학교에서 주입된 출세의 욕망, 사회와 매스컴에서 주입된 명품 욕망 같은 물질적 욕망들은 파생되고 왜곡된 타자의 욕망들이다.

누구나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으나 이 욕망도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잘 살고 싶다고 말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는 ‘남부럽지 않게’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수도 있다.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방법으로 해결된다. 첫째로는 남보다 더 부자가 되거나 출세하여 남이 나를 부럽게 만드는 일이다. 둘째로는 스스로 더 이상 남을 부러워하지 않으면 된다. 달리 표현하면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의 욕망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요즘 말로 정신 승리이거나 뇌피셜이 동원될 수도 있다.

평소에 아무 불만 없이 살다가도 우연히 좋은 집과 차를 가진 사람을 보고 부러움을 느낀다면 나에게 없던 결핍과 욕망이 새로 생긴 것이다. 없던 욕망이 생겼다는 것은 엄밀히 보면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고상한 취미를 가지려는 욕망이 생긴 경우 취미 그 자체보다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주변 사람의 욕망을 자신도 가지고 싶다는 이차적 욕망인 경우도 볼 수 있다. 라캉은 이를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어떤 욕망도 있는 그대로 본다면 본래 나에게서 시작된 욕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욕망은 나 아닌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거나 이식된 것이라는 논리이다. 

라캉의 언어를 빌렸지만 실체가 없는 욕망은 이미 붓다가 숱하게 강조한 진리이다. 

          

사람은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때문에 근심한다. 자기가 가진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것은 단지 변하고 없어질 따름이다. …… 사람이 이것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죽으면 역시 잃어버리는 것이다. …… 세상의 모든 상태를 깊이 살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안에 머물고, 고뇌 없이, 욕망이 사라진 사람, 그는 생명과 늙음을 넘어선 사람이다. 

— 《숫따니빠따》 중에서

 

소유를 끝까지 부정해도 마지막에 자기 몸의 소유까지는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착각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소유의 권한은 처분의 자유에 있다. 실질적으로 우리에게는 우리 육신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유가 없다. 예를 들어 이 몸이 내 것이라면 이 몸을 어디에선가 가져와서 어디론가 가져갈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태어나고 죽을 때 내 몸을 가져오지도, 가져가지도 못한다. 내 몸의 소유와 처분이 불가능한데 그 이외의 유형과 무형의 것을 소유하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의미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바라는 것은 욕망이 가진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 우리의 욕망은 닿을 수 없는 목표를 갈망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안타까워한다. 무지개를 좇는 것처럼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소유 욕망, 그것이 앞서 말한 여덟 가지 고통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려는 일곱 번째 고통에 해당한다. 집착에서 비롯된 욕망은 궁극에는 고통으로 귀결된다는 붓다의 지혜인 것이다.

교육 현실에 참여하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모든 주체는 개별적인 욕망과 사회적 가치가 어떠한 방식으로 모순을 이루고 역설을 지향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라캉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욕망의 주체인 것처럼 오인하지만, 결국은 욕망의 노예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실체가 없는 욕망의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욕망에서 저절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욕망의 불꽃을 꺼버리는 것을 열반이라고 할 만큼 욕망을 극복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과정으로 여겨진다. 

   

 

6. 남는 과제들

 

교육의 문제를 제도의 문제로만 환원한다면 문제해결의 길은 요원하다. 제도로써 우리의 의식이 저절로 바뀌기를 기대할 수 없고 우리의 욕망을 채울 수도 없다. 우리의 모든 교육정책은 결국 대학입시라는 블랙홀로 빨려든다. 교육제도를 개선한다는 입장은 입시제도 변경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무한경쟁의 승자독식이라는 변하지 않는 욕망의 구조에서 입시제도의 룰을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마치 병목현상의 톨게이트에서 소수만이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를 두고 이번에는 안경 낀 사람만 나간다, 다음번에는 머리 긴 사람이 나간다는 식으로 선발기준만 바꾸는 것이다. 기준이 바뀌어 운 좋게 진출한 소수만이 기쁨을 누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을 안고 사는 구조적 모순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교육정책을 개선해도 소수의 선발자를 제외한 다수의 국민은 불만과 고통에 시달리는 불변의 구조는 유지된다. 

이를 교육정책의 패러독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더 큰 부작용과 반작용이 따르는 것이다. 한때 대학을 못 가서 소외되거나 자살하는 수험생이 없게 하겠다는 논리로 지방에 대학을 많이 세웠던 시기가 있었다. 동네에 대학이 없어서 수험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상위권 대학에 가지 못해 생긴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부동산 정책의 양상도 유사하다. 집 없는 설움을 없애기 위해 전국에 아파트를 많이 짓는다고 해결이 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은 수도권 안의 자산 가치가 있는 아파트이다. 교육과 부동산은 우리가 가진 소유 욕망의 두 가지 양태이다. 학벌이라는 정신적 소유와 부동산이라는 물질적 소유 욕망이다.

예전부터 교육부가 일을 잘할 때는 아무것도 안 할 때라는 말이 있었다. 이러한 논리로는 훌륭한 교육부 장관은 아무것도 안 하는 장관이 된다. 최소한 교육정책을 섣불리 바꾸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비난을 듣지는 않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조직 내에서의 생존 원리와 같다. 지난 정부의 교육정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에 인성교육진흥법 제정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이러한 논리로 이번 정부의 교육부 장관이 최장수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제도의 논리로 욕망을 규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덧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교육이 주는 고통은 사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 수요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사교육에 종사하는 교육 공급자의 고통까지 배려되어야 한다. 사교육과 관련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이 성립될 여지가 없다. 욕망에서 비롯된 고통이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고 나의 고통과는 무관하다고 방관할 수도 없다. 사교육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을 좀 더 자비로운 시선으로 따뜻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배제와 억압의 방식으로 교육정책의 방향을 정하기보다는 배려와 돌봄의 공생 원리로써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다.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체중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慈]과 일체중생의 고통을 함께 슬퍼하며 벗어나길 바라는 보살의 마음[悲]이 절실하게 사교육 정책에 반영되길 기대한다. ■

 

박범석 vinetar@naver.com

서울대학교 종교학 박사. 동경대학 연구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불교교육학의 종교교육적 성격과 과제〉 〈인권 개념의 불교교육적 쟁점〉 〈욕망의 관점에서 본 불교의 교육론〉 등이 있음. 현재 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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