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은 일찍이 그의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시대에 뒤떨어진 조선불교의 개혁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해방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역경, 포교와 함께 3가지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추진하였다. 현재 시점에서 3가지 사업을 평가해본다면, 역경은 팔만대장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등 성과를 이루었고, 교육은 출가자의 경우는 교육 체계를 어느 정도 정비한 듯하다.

물론 아직도 최선의 교육 체계를 마련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나, 재가자에 대한 교육 체계에 비하면 출가자의 교육 체계는 상당한 정비와 진척이 있었다. 그리고 재가자 교육을 불교를 믿는 신도와 믿지 않는 일반인 대상의 교육으로 구분해 보면, 먼저 신도에 대해서는 조계종 포교원에서 2020년 7월 《불교 5대 수행법 길라잡이》를 발간하여, 계율, 간경, 염불, 참선, 보살행의 5가지를 신도 교육의 이념적 지향점으로 설정하였다. 교육현장에서 5대 수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과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기복 중심이던 신도의 신행 생활에 대한 반성과 개선 의지는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불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에 대한 불교 교육의 현황을 본다면, 아직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교육에는 내용과 함께 방법도 중요하지만, 물적 기반으로서의 학교 설립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개신교나 가톨릭에서 설립한 학교보다 불교에서 설립한 학교의 숫자는 턱없이 적다. 2006년 교육부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개신교는 중학교 118개, 고등학교 167개이며 가톨릭은 중학교 28개, 고등학교 38개인데, 불교는 중학교 14개, 고등학교 13개에 불과하다. 전체 중등학교의 67.4%가 개신교 학교이고, 15.6%가 가톨릭 학교이며, 불교는 6.4%에 불과하다. 나머지 10.6%는 통일교, 안식교, 기타 종교에서 설립하였다. 중등학교 숫자를 보면, 불교는 개신교의 10분의 1, 가톨릭의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학교는 원불교에서 설립한 학교를 제외하고 대학원대학교를 포함하여 계산하면 불교에 6개 대학교가 있지만, 개신교는 62개가 넘고, 가톨릭은 15개의 대학교가 있다.

초등학교는 불교가 1개에 불과하지만, 개신교는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에 속한 초등학교만 8개이며, 이 단체에 속하지 않은 초등학교를 합하면 10개 이상으로 짐작된다. 가톨릭은 8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또 가톨릭 교구 사이트를 보면, 가톨릭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206개가 있으며 특수교육, 대안학교, 피정 및 수련 기관도 전국에 수십 개가 산재해 있다. 불교와 개신교의 경우 정확한 통계를 찾기 어렵지만, 개신교의 경우는 가톨릭보다 많은 유치원, 어린이집, 특수학교, 대안학교, 기타 교육기관이 있다. 따라서 대체로 불교계 학교 숫자는 개신교의 10분의 1, 가톨릭의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불교계의 학교 숫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개화기 이후부터 교육을 통한 선교라는 일념으로 전국에 각급 학교를 세웠으며, 해방 이후에도 계속 학교를 세워왔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 교육기관을 많이 건립하지 못한 것은 교계 내외의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돌아보면, 지혜를 기를 수 있는 학교 세우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불교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연구와 학습을 통한 합리적인 믿음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에는 권위에 따른 맹목적 믿음보다도 이성에 근거한 믿음을 강조하는 가르침이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말하기를 “도반들이여, 나는 이것을 세존의 눈앞에서 듣고 받아 지녔습니다. 이것은 법이고 이것은 계율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법입니다.”라고 하면, 일단 그런 비구의 말을 인정하지도 말고 공박하지도 말아야 한다. 인정도 공박도 하지 않은 채로 그 단어와 문장들을 주의 깊게 들어서 경과 대조하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대조하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지 않고 계율과 맞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구가 잘못 받아 지닌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해서 이것은 물리쳐야 한다. 그의 말을 경과 견주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서 만일 경과 견주어지고 계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받아 지닌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큰 권위이다."

이 경의 내용은 세존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해지는 말들조차도 엄밀하게 조사하고 확인을 한 이후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에는 장로들과 유명한 스승이 계시는 승가 그리고 경, 율, 논에 능통한 많은 장로 비구들이나 어떤 장로 비구로부터 전해 들은 말도 모두 엄밀하게 조사하고 확인하고 난 이후에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권위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올바른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을 버리고 연구와 학습을 통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맹목적 믿음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출가자에게만 설해진 것이 아니다. 재가자에게 설해졌던 앙굿따라 니까야 《깔라마 경》에는 현실에 맞는 지혜로운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깔라마인들이여,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성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한 것이라고 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그리고 이 경에는 유익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이익과 행복을 주는 법들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법들은 버려야 한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어떠한 전승이나 권위에도 의지하지 말고 현실의 이익과 행복에 도움이 되는 법인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에는 기원후 5세기부터 인도의 나란다 대학에서 1만 명이나 되는 학생이 불교와 의학 등을 공부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불교에 이러한 학습과 이성적 믿음의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부처님 이래로 불교는 언제나 상식을 벗어난 불합리한 모든 주장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비판하였고, 수행을 위해서는 정도(正道)를 걸을 수 있는 정견(正見)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러한 정견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이 올바른 법인지를 듣고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학습이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불교는 무엇보다 교육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육대상자의 근기에 맞는 교육 내용과 방법의 개발과 함께 교육의 공간이 되는 학교를 건립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보시로 인정되는 법보시의 실천이 된다. 그래서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종교의 세력은 포교로 이루어지고 불교의 가르침도 포교에서 실현된다고 하였다.

출가자는 물론이고 재가자와 일반인에게도 불교의 바른 법을 알리려는 관심이 현실에서 구현될 때, 전법과 포교라는 불교계의 오랜 숙제가 풀릴 수 있다. 불교적 지혜로 갈고 닦은 교육의 힘은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2022년 3월

장성우(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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