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시조

1.

산업화와 함께 서구 문명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던 1970년대 문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이는 문학의 사회적 확대로 이어지는 현실참여, 주체 이념화 경향, 민족문학의 방향 정립으로 편성된다. 문단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의식으로 리얼리즘, 순수이성, 전통의식 사이에서 다양한 갈래의 문학적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1960년대 중반부터 대두되었던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는 참여와 순수라는 양분법으로 현실에 대응하지 못했고, 각 진영은 서서히 문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신 현실의 문제와 문학의 지향점이라는 또 다른 메커니즘으로 여러 가지 담론이 생성되었다. 이 담론들은 서구 사상과 함께 형성되는데 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 상업주의론, 농민문학론, 민중문학론, 노동문학론 등으로 그 다양성을 확보하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문학적 패턴은 자유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시조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시조는 산업화의 영향권에서 전통성이 기반한 전통 서정과 순수 서정의 추구는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적 근대성으로 나아갔다. 시조시단은 사회의식을 반영한 현실비판 시와 전통적 감수성을 구사하는 데에서 순수 의식을 지향하는 순수 서정시 등의 문학적 특성을 보인다.

1970년대에는 1960년에 창간한 《시조문학》을 비롯하여 신춘문예나 각종 신진 문예지를 통해서 수많은 신인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지역 문인협회, 단체, 동인 활동이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등 시조 인구의 저변 역시 확장되었다. 이를테면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와 기성 문예지의 신인상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생겨난 지역 일간지인 〈대구매일신문〉 〈부산일보〉와 종교신문인 〈불교신문〉 등에서 시조 신인들을 배출했다. 거기에 문예지 《월간문학》 《시문학》 《현대시학》 《신동아》 등은 물론 전국백일장대회, 전국민족시백일장, 국민시조백일장, 전국학생문예작품공모 등에서 시조 등단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또 1970년대 시조시인들의 특징으로 젊은 신진 그룹, 재등단 경향, 여성 시조시인의 활약, 다양한 직업군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중장년 위주의 창작인들로 구성된 시조단에 20~30대의 신진들이 유입되면서 연령층 또한 낮아졌으며, 젊은 신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둘째,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는 문예지로 재등단하는, 이른바 교차 등단 사례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이는 신춘문예 당선자가 추구하는 문학세계에 따라서 문예지로 다시 등단하거나, 확실한 지면을 보장받기 위해 재등단을 시도하게 되었다. 셋째, 여류 시조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시조시인들의 등단과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부터다. 거기에는 초기 현대 여성 시조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영도의 활약이 여성 창작인 등단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넷째, 직업군으로는 대체로 전통의식을 가진 문학 전공자, 교직, 기자, 출판업, 승려 등의 출신들이 시조시인들의 다수를 차지했다. 그렇지만 산업화의 영향으로 다채로운 직업군이 생겨나는데 회사원, 사업가, 목사, 예술인, 방송인 등 출신을 막론하고 여러 분야에서 시조 창작인이 탄생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40여 명에 지나지 않던 시조시인이 1970년도 들어와 150명을 넘어섰다. 이는 조선시대 시조 부흥기와 마찬가지로 시조 현대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시조단은 현대문학사에서 전통문학이라는 소명 의식으로 자유시 문단과 다른 길을 모색하면서 독자성 확보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시조시인을 나열하면 박시교, 한분순, 선정주, 김상묵, 유자효, 김남환, 김원각, 이한성, 유재영, 서우승, 이우걸, 임종찬, 김영재, 박영교, 조영일, 김정희, 민병도, 김종, 백이운, 조주환, 정해송, 조동화, 김영수, 이승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조시인은 1960년대의 관습적인 정서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정서로 나아가는 언어적 심상을 보였다. 새로운 감성으로 세계를 감각하며 기존의 정서를 확장시키는 데 시인의 체험을 통한 자아의 서정화 현상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전통과 동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적 창의적 정서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1970년대의 시조시인들 가운데 불교적 사유로 시조를 창작했던 시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급변하는 산업화 시대, 유신정권의 정치적 무대와 불균형적인 경제적 성장에서 오는 부조리한 사회적 휴유증은 시인들의 시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산업화 시대를 맞아 불교는 시대의 고통을 견인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고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신앙이나 교리를 포교하는 종교적 목적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하나로 대중에게 다가간 한국불교는, 전국 사찰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를 넘어서 모든 국민에게 안식처와 평안을 주었다.

살펴볼 시조시인들은 나름대로의 심미적 불안감을 불교에 투사하면서 시 의식을 가다듬었고, 암울했던 1970년대를 건너가고 있다. 먼저 산업화 시대에 사찰을 소재로 불교적 사유를 드러낸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김원각(1941~2016)을 내세울 수 있다. 

1968년 〈불교신문〉에서 시로 등단하고, 1972년 〈동아일보〉에서 〈목련〉이라는 시조로 등단한 김원각은 한때 부산 범어사로 출가한 승려 출신 시인이다. 시조 형식에 민족적 정서와 불교적 성격을 가미한 시를 창작해 오면서 첫 시집 《못다 부른 정가(情歌)》와 시조집 《어느 날의 여행에서》를 선보였다. 또한 동국대학교 역경위원으로 불교 연구서와 편 · 역서를 펴냈으며, 한글대장경 윤문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전기를 통한 불교 역사 이야기를 집필하여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풍경소리》 편집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서울 지하철에 마음을 밝히는 문구를 통해 포교 활동을 펼치는 작업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음 괴로운 자는 절에나 가 보아라
되도록 혼자 가면 더욱 분명하리라
끝끝내 뒤따라오는 마음속 괴로움들.

괴로움 끌러놓고 간절히 기도해 보라
금부처가 없애주리라 굳게굳게 믿으면서
때로는 절실해지면 눈물도 흐르리라.

이윽고 하산하는 그대 마음 살펴보라
잠시 흩어졌던 괴로움들 다시 모여
하나둘 뒤따라오며 자기 마음 이루리라.

— 김원각 〈마음〉 전문

이 시 초장부터 “마음 괴로운 자는 절에나 가 보아라”는 언술에서, 사찰은 세속에 있지만 일상성을 벗어난 차원이 다른 곳이다. 이때 절은 현실에서 생겨난 고통을 정화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신비스러운 공간으로 현현된다. “되도록 혼자 가면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인데, 거기에 자신이 짊어진 고통과 시련을 내려놓고 명상에 들 때 “끝끝내 뒤따라오는 마음속 괴로움들”이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괴로움은 탐욕의 주체인 자기로부터 생겨나는데 그것을 화두로 삼고 “괴로움 끌러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서 “금부처가 없애주리라 굳게굳게 믿으”라는 말이다. “때로는 절실해지면” 흐르는 ‘눈물’은 바로 청정해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게다가 정화의 눈물로써 세상의 온갖 번뇌와 갈등이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수에서 이 어리석은 “그대 마음”은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통속적인 “자기 마음”에 대한 탐욕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잠시 흩어졌던 괴로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김원각의 시에서 사찰은 자신의 욕망을 닦고 마음을 정화하는 장소이면서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단수로 된 〈선(禪)〉에서는 “오대산 월정사/ 선방 속에 앉은 나// 내 속에 만상이 잠든/ 마음 거울 하나// 그 거울 닦고 닦다가/ 도로 잃어버린 마음”이라고 읊고 있다. 화자의 마음은 망상이 만들어낸 만물의 얼굴로서 모든 것이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번민이라는 것. 여기서 ‘마음 거울’은 눈으로 읽는 것도,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무심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찾아간다. 따라서 김원각 시인에게 절은 ‘마음 거울’을 닦는 곳이며 거기서 욕망으로 인해 ‘잃어버린 마음’, 이를테면 우리에게 ‘초심의 정원’을 발견하는 피안으로 보인다. 

한편 1970년대 시대상을 잘 나타낸 시조를 쓴 시인으로 박시교(1945~ )를 들 수 있다. 1970년 〈대구매일신문〉과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박시교는 다음 해 6월 국토통일원 현상문예공모에서 〈북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고, 10년 후에 첫 시집 《겨울강》을 출간했다. 거기에 1983년 윤금초, 이우걸, 유재영과 함께 《네 사람의 얼굴》이라는 대표적인 시조 시화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시화집은 1973년 창간된 《현대율》 동인인 시조 4인방의 결실로 1970년대를 표상하는 작품집이다. 현대인을 위한 짧은 글귀들로 이루어진 시조들 안에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고통스럽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연을 통해 소통하려고 했던 박시교는 정형률의 한계와 인위적인 구성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설시조 〈가슴으로 오는 새벽〉 중장은 “와서 무더기로 피어날 저 풀꽃 낭자한 자유와, 또 취하여 제멋에 어깨춤 절로 나는 자욱한 민주와, 이미 분노한 가슴 이제야 활짝 열어젖힌 아, 자지러질 통일”이라고 읊고 있는데, 당시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민중의식이 축약되어 있다. 여기서 자유, 민주, 통일은 1970년대에 점화되어 1980년까지 지속되었던 시대를 대변하는 핵심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숨차게 오르던 산길 문득 벼랑 벼랑 되고
그 너머 큰 형님 같은 도봉이 앉았구나
생각의 여울 펼치면 길은 또 있겠지만

그렇다, 끊긴 길이라도 어디든 잇게 마련

하나, 가슴 속 천만 갈래 수없이 주고 닿았던 연(緣)과 연(緣), 이미 모질게 끊어버린 그 무수한 실타래 같은 길을 다시 이을 수는 없겠지

오, 벼랑 아득하구나 삶의 푸른 현기증

— 박시교 〈어떤 산행〉 전문

2수 사설시조인 이 시조는 평시조와 사설시조를 혼용하면서 중장이 길어지는 실험성을 보이는데, 여러 갈래로 놓인 산의 길과 삶의 길에서 진동하는 불교적 심상을 발견할 수 있다. 1수에서 ‘산길 벼랑과 벼랑 사이 펼쳐진 생각의 여울’은 산의 형상을 통해 굴곡진 인생을 나타낸다. 2수에서 초장 “끊긴 길이라도 어디든 잇게 마련”이라면서 중장 “가슴 속 천만 갈래 수없이 주고 닿았던 연(緣)과 연(緣), 이미 모질게 끊어버린 그 무수한 실타래 같은 길을” 추궁해간다. 불교에서 연은 괴로움의 간접적 원인인 번뇌가 직접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작용을 말한다. 마치 도봉산에서 펼쳐진 벼랑과 벼랑 속 “무수한 실타래 같은 길”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로 현현하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이 얽히고설켜 있는 ‘인연의 끝’을 “삶의 푸른 현기증”으로 감각하게 한다. 

다음의 시편들은 산속 정경에서 볼 수 있는 산사를 소재로 창작한 시조들이다. 절을 배경으로 하는 시들은 제각기 사물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깨달음에 다가서는 방법 또한 상이하다는 걸 알게 한다. 이를테면 산사의 내외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특징적으로 시인이 발견한 나름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시조란 이러한 점에서 시인이 던진 화두에 시인 자신이 답을 하는데 화자로 전치되며 사유적 언어로 배열된다. 이때 화자는 시인이면서 자아로서 질문과 답을 시조 행간에서 주고받는다.

 

기러기 한 쌍만이 어젯밤에 날아갔을
숱 짙은 대숲 아래 지체 높은 어느 문중
남겨둔 월화감 몇 개 등불 마냥 밝구나

장삼 입은 먹바위 햇빛도 야윈 곳에
무심코 흘림체로 떨어지는 잎새 하나
가만히 바라다보면 참 아득한 이치여

사랑도 그리움도 어쩌지를 못할 때
청도 운문 골짜기 구비구비 돌아나온
득음은 저런 것인가, 옷을 벗는 물소리

— 유재영 〈운문사 가는 길〉 전문

 

무거운 누명 벗으며 소백(小白)이 흐느낄 적에도
한 켤레 하얀 고무신 댓돌 위에 포개두고
비탈 선 신갈목(木) 곁에 풀잎으로 앉았던 그

묵장삼 한 허리를 댓닢에다 걸어둔 채
장방등 잔잔히 넘는 중문 밖 바람벽에서
눈짓도 약속도 없는 보살 관음(觀音)을 만난다더니.

뜰에 내린 풍경(風磬) 소리에 별들이 모일 때까지
번뇌라 이름져진 까아만 염주 굴리며
희방사 겨울스님은 빈 하늘을 지킨다.

 — 민병도 〈희방사 겨울스님〉 전문

깊어가는 가을날 시인이 절을 찾아가면서 느끼는 고즈넉함 속에서 지각하게 되는 이치가 행간에 펼쳐지고, 그 속에 불교적 사유를 편철되어 있다. 〈운문사 가는 길〉을 창작한 유재영(1948~ )은 1970년에서 1975년 사이 《시조문학》 《현대시학》 《신동아》 등에 시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출판업계에 종사, 《동학사》 대표를 맡으면서 20여 년 동안 저서 1,500여 권의 표지 디자인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의 시는 미적 감각이 탁월한 만큼 정밀하고도 유기적인 통일성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미지화되었다.

그의 시적 미감은 3수로 3연으로 된 〈운문사 가는 길〉에서도 선명하게 발휘된다.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호거산에 있는 절로서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천년 사찰이다. 첫 수 “숱 짙은 대숲 아래 지체 높은 어느 문중”처럼 깊은 산중에 있는 고찰을 찾아가면서 감나무에 달린 “월화감 몇 개”를 ‘등불’처럼 ‘마냥 밝구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가을 산의 정취는 2수에서 “장삼 입은 먹바위 햇빛도 야윈 곳”으로 수척해 가는 가을이 시각적으로 이미지화되며 “무심코 흘림체로 떨어지는 잎새 하나”로 표상된다. 거기서 “가만히 바라다보면 참 아득한 이치”를 발견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마지막 수에 이르러 “청도 운문 골짜기 구비구비 돌아나온/ 득음은 저런 것인가, 옷을 벗는 물소리”에서는 자연의 이치와 함께 경지에 도달한 가을의 맑고 청정한 세계를 형상화한다.

〈희방사 겨울스님〉의 민병도(1953~ )는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1978년 《시문학》 추천으로 시조시단에 나왔다.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또한 대학 시절 한국화를 전공하면서 이영도를 만나 본격적으로 시조를 공부했다. 미술과 문학이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원형과 실재, 엄숙과 절제, 추상과 구상이라는 역학적 생동감을 미학적 구도로 표현한다. 

3수 3연으로 된 〈희방사 겨울스님〉은 경북 영주 소백산 자락에 있는 사찰과 스님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첫 수에서 “무거운 누명 벗으며 소백(小白)이 흐느낄 적에도” 흔들림 없이 참선에 드는 의연한 자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한 켤레 하얀 고무신 댓돌 위에 포개두고/ 비탈 선 신갈목(木) 곁에 풀잎으로 앉았던 그”로 표명되면서 2연에서 “묵장삼 한 허리를 댓닢에다 걸어둔 채” 소백산과 스님을 동일화한다. 나아가 스님을 “눈짓도 약속도 없는 보살 관음(觀音)”로 치환하고 다음 수에서 “번뇌라 이름져진 까아만 염주 굴리”는 “희방사 겨울스님은 빈 하늘을 지킨다.”고 흐트러짐 없는 불도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 

 

3.

일체의 번뇌를 끊고 무상(無上)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교화했던 석가모니는 부처님 또는 붓다로 불린다. 이는 산스끄리뜨어로 ‘깨달은 자’나 ‘눈을 뜬 자’라는 의미다. 불교에서 모든 생명체는 전생의 업보를 안고 그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윤회한다고 하는데, 해탈에 이르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으며 이 부처 됨이 바로 성불이다. 

이러한 부처님은 시대를 막론하고 초월적인 존재이자 절대적인 대상으로 여겨왔다. 또한 신앙적인 차원에서 믿음의 준거이며 어떠한 고통과 역경의 순간에서도 스스럼없이 호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문학에서도 부처님은 깨달음과 진리 그리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상징된다. 불교는 한민족의 전통과 융화되어 궁극적으로는 민족을 수호하며 민중들의 저력이 스며들어 있다. 이에 부처님은 삶의 현장에서 고통과 시련 등을 극복하기를 빌고 소망하는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친근한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아래의 시편들은 시인들이 마주하는 부처님에 대한 표상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형상을 시조 운율에 담아 자신의 신념을 나타낸다. 유자효(1947~ ) 시인은 1968년 〈불교신문〉과 1972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서울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KBS와 SBS에서 정치, 국제부장 및 해설위원으로 근무하며 시조를 널리 보급하고 독자들을 늘리는 데도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의 시조는 인간 내면과 자연을 탐구하면서 시적 은유로 세계를 바라본다.

부처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이 동네 아낙네들 밤이면 떼어 먹어
그 많은 경주 남산 돌부처 중에
코가 성한 부처님은 하나 없었다.

— 유자효 〈경주 남산 부처님의 코〉 전문

이 시는 방송기자 출신 시인답게 부처님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시절이라 가문의 명예나 대를 위해서 여아가 아닌 남아를 출산하는 것이 여인의 의무였다. 거기에 돌부처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는 절박함에서 오는 구원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시 초장, 중장에서 “부처님 코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이 동네 아낙네들 밤이면 떼어 먹어”라는 미신적인 풍속으로 시대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종장에서 “그 많은 경주 남산 돌부처 중에/ 코가 성한 부처님은 하나 없었다”라고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부처님의 자비를 우회적으로 담아냈다.

한 장 물빛을 열고/ 솟아오른 목숨입니다.// 실밥 따는 아픔이/ 낸들 어이 없을까만// 받쳐 든 구층(九層) 하늘이/ 만 근 쇠로 누릅니다.// 헤아리면 당신 생각은/ 염주보다 무겁습니다.// 일주문(一柱門)열고 앉은/ 부처님 졸음처럼// 내 안에 더운 말씀이/ 연밥으로 익습니다.

 — 임종찬 〈연꽃〉 전문

임종찬(1945~ )은 부산대학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같은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1965년 〈부산일보〉와 〈불교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다음, 1973년 《현대시학》으로 재등단했다. 그의 문학세계는 서정을 소재로 영원한 인간의 그리움을 묘파하면서 시조를 통해 쇠락해가는 인간 정신 함양에 주력했다. 

2수 6연으로 된 이 시는 연꽃을 ‘한 장’의 생명으로 ‘솟아오른 목숨’으로 탐구한다. 이 목숨을 덮고 있는 솥뚜껑은 아득하게 높은 ‘구층 석탑’같이 ‘만 근 쇠’이며 ‘염주보다 무거운’ 생각이지만, 절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일주문(一柱門) 열고 앉은 부처님 졸음’으로 은유한다. 이른바 부처님이 주신 “내 안에 더운 말씀”을 잘 익은 “연밥”으로 치환하면서 화자를 살리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자궁보다 내밀한/ 산협을 들어서면// 쇠뿔 닮은 봉우리가/ 구름 속에 솟아 있고// 물소리 세사에 엉킨/ 머리칼을 빗질한다.// 속념이 끊어지면/ 무량한 안식이 온다.// 천궁(天宮)의 별자리가/ 보관(寶冠)으로 빛나는 밤// 우주는/ 어느 가풍(家風)을/ 드러내는 소식인가.//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어// 마음이 꽃잎처럼/ 벙그는 너 설악이여// 아득한 시간을 넘어/ 시원(始原)으로 닿는다.

 — 정해송 〈설악에서〉 전문

이 시에서 설악산을 부처님의 안식 같은 ‘마음 꽃잎’으로 바라본 정해송(1945~ )은 1976년 〈동아일보〉와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동아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부산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부산시조》를 창간하여 주간을 맡아, 부산을 시조 거점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생명의 다채로움을 선보이는 그의 시조는 탁월한 시적 역동성과 생명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 시 〈설악에서〉는 설악산에 내재하여 있는 유구한 역사를 “자궁보다 내밀한 /산협”이라고 생태적으로 탐문한다. 거기에 “속념이 끊어지면/ 무량한 안식이 온다”고 하면서 “너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네 안에 있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아득한 시간을 넘어” 존재 근원인 “시원”에 가닿기를 염원하고 있다.

 

4.

평시조라고도 불리는 단시조는 시조에서 기본 단위의 정형률이다. 평시조가 구현해 온 획일적인 3장 6구 4음보의 형태적인 정형성은 1970년대 들어와 두 가지 경향이 주를 이루게 된다. 평시조의 형식적 전통을 따르자는 측과 시조 형식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형시키자는 측이다. 후자의 경우 시적 형식의 긴장과 이완을 실험하면서 새롭게 형식을 구성했다. 이것은 평시조가 추구해온 시적 주제의 압축과 긴장보다는 시적 의미의 심화와 확대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된 것을 의미한다. 

시조 형식에서 압축미의 탁월한 미학적 성취는 단시조에서 발휘된다고 할 만큼 단순하지만 고도화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시조라는 시 형식이 시적 내용에 따라서 분장되고 해체됨으로써 압축과 긴장 상태가 무화되는 반면, 그 의미가 심화되고 확대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처럼 단수에 천착한 시조시인은 한 수로써 얼마든지 미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 시조의 본령이라고 주장한다. 아래 살펴볼 시조시인들은 불교적 사유를 평시조로써 구현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방식과 실험적인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미래사 
가는 길에 
내생만 한 꽃을 만나

스치는 
눈인사에 
절이 한 채 
생겨나서 

심부름 
까마득 잊고 
소풍 속에 노닌다.

 — 서우승 〈심부름〉 전문

 

사랑을 버리고 싶다 
버릴 사랑 
어디 있느냐 

백담사 
굽이 오름길 
어둠이 참 맑다 

스님은 
혼자 서 있고 
산은 
여럿 모여 산다

 — 김영재 〈참 맑은 어둠-무산 스님 생각〉 전문

 

위 시편은 단형 형식으로 된 시조로서 각각 1수 3연 구성이다. 〈심부름〉을 창작한 서우승(1946~2008)은 1972년 〈서울신문〉으로 등단한 이후, 충무문인협회 회장과 통영군지 상임편찬위위원을 맡는 등 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다. 박재두에게 영향을 받은 그의 시조는 평시조 연작시가 주를 이루며 시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며 개성적 리듬과 절제된 감성의 형상화를 통해 전통 양식으로서 현대시조를 강조했다.

위의 시 〈심부름〉 역시 평시조 양식을 수용하면서 그 형식에 깃든 불교적 사유로 서정성을 표출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여주듯 심부름으로 통영에 소재한 “미래사/ 가는 길에”서 펼쳐진다. 요컨대 초장에서 미래사 가는 구불구불한 길과 수려한 풍경 속에서 “내생만 한/ 꽃을 만나”고, 중장에서 “스치는/ 눈인사에”서 “절이 한 채/ 생겨”난다는 상상력으로 충만하다. 종장에 이르러 ‘심부름마저 까마득하게 잊고’ 인간의 삶이 잠시 다녀가는 ‘소풍’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상함을 현현한다. 

〈참 맑은 어둠〉이라는 제목에 ‘무산 스님 생각’이라는 부제가 달린 시편을 쓴 김영재(1948~ )는 1974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도서출판 ‘책만드는집’ 대표와 계간 《좋은시조》 발행인이기도 한 그는 출판업에 종사하면서 현대시조를 고양하는 데 애써왔다. 위의 시편에서도 짧은 단시형의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시적 의미를 강조하며 전체 문맥에 대한 패러독스가 두드러진다. 초장 1행 “사랑을 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2행, 3행에서는 “버릴 사랑/ 어디 있느냐”고 한다. 또한 중장 ‘백담사’ 오르는 길에서 “어둠이/ 참 맑다”라는 역설은 종장 “스님은/ 혼자 서 있고/ 산은/ 여럿 모여 산다”라고 역설적인 어법을 통해 사물과 세계의 모순성을 밝힌다.

수국(水菊)이다 문득 돋아난 그 사람 목소리는/ 화엄사 언저리로 한 채 민가의 밤이 오듯/ 꽃잎을 열고 깊어도/파적(破寂)할 수 없는 하늘.

— 이우걸 〈엽서〉 전문10)

 

탈모증(脫毛症)에/ 시달리던/ 중봉(中峰)을/ 넘으면서// 꼬리 접는/ 바람 끝에/ 풍경(風磬) 소리를/ 듣고 있다// 약사암/ 처마 끝에서/ 퍼득이는/ 목어(木魚)/ 한 쌍.

— 이한성 〈목어〉 전문

위의 단시조를 창작한 이우걸(1946~ )과 이한성(1950~ )의 시조는 형식 실험을 통해 불심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1972년 《현대시학》으로 데뷔한 이우걸은 《월간문학》에 신인상으로 당선했지만 이영도의 권유로 《현대시학》에 다시 작품을 응모하여 등단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경남 지역을 거점으로 그는 경남시조문학회를 결성하여 지역 문학 발전에 힘쓰면서 마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내고 창원대 문예창작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이우걸의 시 세계는 현실을 지배하는 자연과 문명 그리고 사물을 매개로 결합한 수평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1수 4행으로 된 〈엽서〉는 엽서에 글귀를 쓰듯이 사설형 평시조로 되어 있다. 무성하게 피어난 화엄사의 ‘수국’ 꽃잎을 통해 “파적(破寂)할 수 없는 하늘”의 이치를 통찰하게 한다. 

1972년 《월간문학》과 《시조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한성은 조선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남 광주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 의식에는 현대문명과 사회적 욕망이 가져오는 인간성 상실과 절망, 고난이 잠재해 있다. 

1수 3연으로 된 이한성의 〈목어〉는 ‘무등산 산봉우리를 넘으면서 듣는 약사암의 풍경 소리’를 묘사한 시조다. 초장 ‘중봉’을 ‘탈모증’에 비유한 대목과 중장 ‘꼬리 접은 바람끝에 풍경 소리’는 은유가 탁월하다. 특히 종장은 “약사암/ 처마 끝에서/ 퍼득이는/ 목어(木魚)/ 한 쌍”으로, 마지막 음보를 ‘목어(木魚) 한 쌍’으로 붙여 쓰지 않고 두 음보 늘려 각행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5. 

1970년대 시단의 변화 가운데는 여류시인이라고 불리는 여성 시인들의 등장과 대중화 경향이 두드러진다. 유일한 여성 시인 이영도를 제외하고 나면 남성 시인들의 전유물로 창작되던 시조가 남녀 구분 없이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실상 남성 시인이 독점하고 있었던 관습화된 인식 속에서 서구 문명의 확산과 함께 평등의식으로 나타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시대가 안고 있는 여성에 대한 부당한 인식과 차별을 타파하고자 하는 여성들과 지성인들의 강한 시대적 요구로부터 기인했다.

산업화 시대의 시조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시조시인으로 김남환(1933~2020), 김정희(1934~ ), 한분순(1943~ ), 이승은(1958~ ) 등을 꼽을 수 있다. 불교적 사유를 시조 형식에 담아 서정적 감수성으로 다가선 여류시인들의 시편들을 살펴본다. 

부처님,/ 나의 가을이/ 바라춤을 춥니다.// 빛바랜 고깔을 쓰고/ 자바라 울리면서// 흐르는 강물 위에서/ 구름 같은 춤을 춥니다.// 청산을 휘감고 도는/ 치렁한 소맷자락/ 파도처럼 출렁이는/ 장단을 타고 가면// 떨리는 이승의 끝도/ 황홀한 신명입니다.// 못다 푼 한을 풀 듯/ 분풀이라도 하는 듯// 날개 큰 춤사위를/ 접을 수가 없습니다.// 백학(白鶴)이 되기 전에는/ 거둘 수가 없습니다.// 성큼 내디디면/ 아수라가 꺼지고// 한 바퀴 회전하면/ 둥근 달이 되는 춤// 부처님,/ 나의 가을이/ 바라춤을 춥니다.

— 김남환 〈가을 바라춤〉 전문12)

1972년 《월간문학》으로 데뷔한 김남환은 이화여대 학보사에서 활약했으며 4학년에 폐결핵이 재발하여 자퇴했다. 영남시조문학회와 한국여성문학인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1983년 첫 시조집 《시간에 기대어 흐르는 사랑을 듣네》를 출간했다. 시조를 자신 삶의 투명한 창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위의 시 〈가을 바라춤〉은 4수 12연으로 되어 있으며, 부처님께 바치는 서사적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 수 초장 “부처님,/ 나의 가을이/ 바라춤을 춥니다”라는 구절이 마지막 수 종장에 반복되는 수미상관 기법으로 부처님에게 자신을 공양하는 헌시의 경향이 짙다. 가을바람과 함께 바라춤을 추듯이 흔들리거나, 출렁이는 이미지로 자신의 마음을 각 수마다 배치하고 있다. 특히 각행의 ‘황홀한 신명’ ‘한을 풀듯’ ‘아수라’ 등의 시어가 ‘바라춤’과 교차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도를 닦는 불교의식이 편철되고 있다.

긴 장마 반짝 트인 날 송도 바닷가에 섰다/ 감람(橄欖)빛 물마루는 영원을 노래하고/ 발등에 부서진 물보라 일순에 사라진다.// 내 집 앞 남강 물도 흘러 왔을 이 바다/ 앞만 보고 숲을 못 본 눈 귀 어둔 나에게/ 초록빛 경전 펼치며 책장 넘겨주는데……//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지/ 늘 깨어 뒤척이며 잠 못 드는 몸짓은/ 눈부신 해인(海印)을 찾아 꿈결에도 설레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파도/ 회초리 내리치듯 소리치며 자지러지며/ 파도가 전하는 말씀 귀를 모으게 한다.

— 김정희 〈파도 법문〉 전문

김정희 시인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마산에서 자랐으며 숙명여대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50년 6 · 25 당시 진주에 정착하여 1974년 첫 시조집 《소심》을 출간했으며, 1975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진주시조문학관 관장으로 있는 그녀의 시조 세계는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을 통해 각인된 인생무상과 삶의 근원적인 허무가 배어 있다. 

4수 4연으로 전형적인 연시조로 된 김정희의 이 시는 제목과 같이 파도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 1수에서는 ‘송도 바닷가’에 서서 1수 “감람(橄欖)빛 물마루는 영원을 노래”를 듣고 있다. 2수 “초록빛 경전 펼치며 책장”을 넘기고 3수 “늘 깨어 뒤척이며 잠 못 드는 몸짓은/ 눈부신 해인(海印)을” 보게 된다. 마지막 수에서“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파도/ 회초리 내리치듯 소리치며 자지러지며/ 파도가 전하는 말씀 귀를 모으”며 바다의 파도를 통해 무상한 삶에 대한 부처님의 죽비와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니오고/ 홀로/ 가슴을 앓네.// 행여 닿을까 싶어/ 손을 뻗치어 보건마는// 타는 듯/ 사위는 눈빛은/ 늘상/ 재로 날리네.

— 한분순 〈인연(因緣)〉 전문

 

차마/ 말로는 못할/ 앙금이 저리 앉아/ 기진한 몸뚱아리, 끓어오르는 황사/ 그 무슨 인연의 죄 있어/ 채찍 들어/ 치시나.

 — 이승은 〈몸살〉 전문

단시조로 된 위 2편의 시는 인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화합의 결과라고 한다. 〈인연〉을 창작한 한분순은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는데,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당시에도 국문학과 출신 여성 문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시조시인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한분순 시인이 처음이었다. 여성으로서 서울신문 부국장을 지내고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단 데뷔 후 남성 시인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펼쳐왔으며, 현대 시조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수 3연으로 된 그녀의 〈인연〉은 인연 때문에 홀로 ‘가슴앓이’를 하는 애타는 화자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빛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인력으로 안 되는 인연의 고리를 통해 불교적 서정을 담아낸다. 

1수 1연으로 된 이승은의 〈몸살〉에서도 인연이 등장하는데 “그 무슨 인연의 죄”와 같이 업보에 대한 사유로 나타나며 그것은 “차마/ 말로는 못할/ 앙금”이라고 묘사한다. 이승은(1958~ )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79년 KBS 문공부주최 전국민족시대회 장원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그 해 1979년 제1회 만해백일장 시조대상을 수상했다. 이승은의 시조는 그녀가 착안해낸 시조 발성법을 통해 전통적 형식에서 현대적 발상의 참신함과 율격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적 언어로 배열하고 자음과 모음을 자유로이 배열하는 등 전통을 혁신하면서 독특한 감각적 재현을 통해 시조의 미학을 더해준다.

 

산업화 시대로 표명되는 1970년대는 정치와 경제라는 두 축으로 전개되었다. 당국의 일상화된 통제와 검열 속에서 우리 사회는 경제개발을 위한 무역과 개방으로 서구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다양한 문화가 자리 잡았다. 또한 급격한 산업화 사회의 변모 양상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대중문화 속에서 물질 중심주의적인 현대적인 가치관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살펴본 1970년대 산업화 시대의 시조는 복잡한 세계 의식만큼 문학적 경향이 다채로웠다. 거기에 불교적 사유로 시조를 창작한 시인들은 불교의식, 사찰, 산사, 부처님, 불교 용어 등의 소재를 함의하면서 보편적 자아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지만 교조적이거나 관습적 형식이 아닌 체험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주제와 대상을 통해 가치 있는 인간 정서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시조에서 보이는 불교적 정서는 개인적 신앙 체험의 보편화로서 1960년대 시조에서 볼 수 없었던 문학적 서정성이 불교적 감수성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불교시의 확장으로 불교가 시조의 보편적 서정화 시대를 열게 됨을 의미한다. ■

 

권성훈 poemksh@naver.com 

문학평론가.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후과정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