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의 유식불교를 부흥시키다

역사적 · 사상적 배경

중국 근대 시기에 불교가 맡은 역할은 매우 독특하다. 아편전쟁(1840년)과 청일전쟁(1894년)으로 대변되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로 인한 동서 문화의 충돌이라는 상황 앞에서 불교는 서양철학에 대항하는 사상적 무기로서 역할과 동서 문화 교류의 계합점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양 사상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대두하게 되자, 근대 이전의 사회 이데올로기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속해온 주자학에 눌리고 있던 불교가 부흥하게 되었다. 주자학은 세계와 인간을 동일한 영역으로 파악하고 동일한 메커니즘인 이(理)의 실현으로 파악하는 사상이다. 근대에 들어와 서양에서 자연과학이 들어오면서 동양 전통 과학인 역학(曆學) 및 천문학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자연과학 분야에서 밀리게 되자, 세계와 인간을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주자학으로는 서양에 대응하기 부족하다는 인식이 동양의 지식인들 사이에 생겨났다. 그리하여 동양이 서양보다 자연과학 측면에서는 떨어지더라도 심성론 등 윤리학이나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주자학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고, 주자학에 대한 대안으로 대승불교가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 근대에 불교의 부흥과 불교학의 성립은 서양 침탈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이때 중국 근대불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는 유식불교의 등장이다. 서양의 관념론 철학이 중국에 소개되고 중국 전통 사상은 인식론이나 논리적인 부분이 약하다고 비판받는 상황에서, 서양 관념론 못지않은 인식론과 논리로 무장한 유식불교는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유식불교는 체계적이고 논리적, 분석적인 성격 때문에 칸트(Kant)나 헤겔(Hegel) 같은 서양 관념론을 대치할 수 있는 좋은 대안으로 여겨졌고, 유식불교에 대한 관심은 바로 그것이 서양과 중국 전통 사상의 계합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유식불교의 부활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유식불교의 이성적, 사변적인 논리 정신을 근대 이후 서양철학의 유입에 대응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둘째는 전통 중국불교의 옹호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태동해서 중국으로 들어온 뒤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파되었고, 이를 동아시아불교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천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성공적으로 변화한 ‘중국화한 불교’이고, 인도불교와 전혀 다른 성격의 불교로 발전한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연기관의 변화인데, 이는 인도불교의 연기론이 진상심(眞常心),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사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현상계의 모든 현상이 진심, 또는 진여에 의거하여 생겨난다고 보는 이 변화된 관점이 ‘진여연기론’이다. 전통 중국불교는 진여연기론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이것이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동양 우수성의 근거라고 보는 일군의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셋째는 불교의 유학화이다. 유식불교를 추종하는 학자들과 전통 중국불교를 옹호하는 학자들 간의 논쟁은 많은 철학적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독창적인 제3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불교의 유학화를 시도한 현대 신불교, 또는 현대 신유학의 등장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웅십력(熊十力, 1885~968)의 ‘신유식론(新唯識論)’은 유식불교를 비판하되 유식불교의 논리와 용어를 그대로 활용하여 전통 중국불교를 유학화하고, 중국불교의 진여연기론을 발전시킨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제국주의라는 서양의 도도한 악의 물결이 동양을 침범한다고 해도 동양의 바탕은 불교의 불성론(佛性論), 유학의 성선론(性善論)을 통한 인간 긍정과 현실 긍정에 있으며, 동양은 결국 도덕의 측면에서 서양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외세 · 반봉건의 사회적 실천을 더한 것이 현대 신불교, 또는 현대 신유학이다. 

 

유식불교의 부활

이러한 세 흐름 중에서 여징(呂澂, 1896~1989)은 첫 번째 유형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실제로 중국 근대불교는 오직 유식불교를 매개로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식불교는 1900년 이후에 일본에서 다시 역수입되어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초로 유식불교를 부활시켰던 학자는 여징의 대스승이라고 할 양문회(楊文會, 1837~1911)였다. 양문회는 막스 뮐러와 난조 분유(南条文雄, 1849~1927)와의 만남을 통해 한문 대장경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수백 권의 불교 문헌들을 받았다. 그 문헌들 속에는 현장의 《성유식론(成唯識論)》에 대한 규기(窺基)의 주석인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오래도록 일실되었던 것이다. 1901년 규기의 《성유식론술기》가 간행된 뒤, 양문회는 구양경무(歐陽竟無)와 매광희(梅光羲) 등을 격려하여 유식불교를 연구하게 하였고 여기에 태허(太虛) 대사와 한청정(韓淸淨) 등의 학자들이 합류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여징은 물론 강유위(康有爲), 장태염(章太炎),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 양수명(梁漱溟), 웅십력 등 거의 모든 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유식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러나 유식불교는 원래 인도불교이고, 중국불교의 전통은 《대승기신론》 계통의 천태 · 화엄 · 선불교라고 할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 사상적 바탕을 둔 중국불교는 중국 고유 사상인 맹자의 성선설을 흡수하여 인간이 본래 불성을 가지고 있고, 종교적 실천을 통하여 그 불성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불교에서 엄격한 논리체계를 가진 철학적 측면보다 수양과 관련된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근대라는 시기에 불교가 서양철학과 대응할 수 있는 철학적 논리체계에 비중을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전통 중국불교의 깨달음에 기반을 둔 종교성을 강조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도 유식불교의 계보를 이은 현장-규기 계열의 유식불교를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중국적 전통을 이은 《대승기신론》 계통의 이론을 진정한 불교철학으로 볼 것인가 하는 논쟁이 생겨났다. 

이러한 논쟁은 당시의 지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서양문화의 충격으로 동양의 전통 철학을 반성하게 되는 지성적이고 비판적인 분위기에서 지적인 이해가 없는 신앙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은 신앙을 강조하는 《대승기신론》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와 완전히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유식불교가 관심을 끌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대승기신론》이 중국불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중국의 정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비판에 반대하였다. 

실제로 1920년대 이래 중국 불교학계는 《대승기신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1920년대에는 구양경무와 태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뒤에는 지나내학원(南京內學院)과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학자들로 이어졌으며, 1950년대에 여징과 인순(印順, 1906~2005)의 논쟁으로 재현되었다. 즉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구양경무의 입장은 내학원 학자들과 여징의 견해로 계승되며, 이에 반대하는 태허의 입장은 불학원 학자들과 인순의 견해로 이어졌다. 양문회-구양경무-내학원 학자들-여징으로 이어지는 유식불교 부흥의 흐름과 양문회-태허-불학원 학자들-인순으로 이어지는 중국불교 중심의 흐름이 당시 불교계를 양분하였던 것이다. 여징은 유식불교를 부흥시키자는 흐름의 전면에 섰고 티베트어,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등 풍부한 문헌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스승인 구양경무의 작업을 이어갔다. 

 

여징의 생애: 미학(美學)에서 불교로의 전환

여징은 스승인 구양경무의 사후, 지나내학원을 맡아서 운영하였다. 청일전쟁이 종결한 해(1896년)에 태어나 천안문 사태가 있던 해(198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생애는 격동의 근대 시기 전체에 걸쳐 있었다. 그는 14세부터 불서를 읽기 시작하였고, 18세 때 남경의 민국대학 경제학과에 다니면서 금릉각경처를 자주 찾았고 그곳에서 구양경무를 만났다. 구양경무가 금릉각경처 안에 불학연구부를 만들었을 때, 여징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후 저명한 화가가 된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 가서 미학을 공부하였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하면서 유학생들이 대거 귀국하던 때 중국으로 돌아왔다. 상해 미술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서양미술 이론과 미학 이론을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 1918년에 구양경무가 내학원 설립을 준비하면서 부르자 그는 남경으로 돌아갔고, 이후 불교 발전과 연구로 인생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1922년 여징은 구양경무를 도와 지나내학원을 설립하였고, 이후 본격적인 불교 연구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때 여징은 지나내학원에서 강의와 교무부장을 담당하였고, 구양경무의 또 다른 제자 왕은양(王恩洋, 1897~1964)과 함께 유식불교를 강의하였다. 그는 불교를 강의하며 세상에 불교적 가치를 새기겠다는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하였다고 한다.

 

경전 교감과 문헌 연구

여징은 전통적인 불교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일본에서 전개된 근대적 불교학을 소개하고 국내외 불교학 연구 성과를 수용하였다. 예컨대 일본 불교학자 후카우라 세이분의 《불교연구법》과 《불교성전개론》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렇게 근대적 불교학 방법론을 모색하는 여징의 작업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와 맥을 같이하였고, 이 두 학자는 중국에서 근대적 불교학이 성립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징은 경전 교감(校勘)이라는 전통적인 불교 연구 방식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학문적 연구 방법과 논문들은 매우 근대적이었고, 이 점에서 그는 스승인 구양경무와 달랐다.

여징은 지나내학원에서 다양한 경전을 교감 · 편찬하여 발간하였는데, 그의 교감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경전은 《장요(藏要)》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문 불전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현존하는 티베트어, 산스끄리뜨어, 빨리어와 한문의 이역 등 다양한 판본들을 참고하여 《장요》를 교감 · 편찬하였다. 대장경 전체는 아니지만 대장경의 핵심적인 문헌들을 추려서 정밀하게 교감하고 교감주를 달아서 정본을 확정 · 간행한 것이다. 전체 3집으로 이루어진 《장요》는 73종, 400여 권의 불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1집은 1929년, 제2집은 1935년, 제3집은 1985년 간행되었다. 구양경무는 산스끄리뜨어 원본이나 티베트 역본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이러한 교감 및 편찬 작업들은 여징이 주로 수행하였고, 오랫동안 경전 교감과 유식불교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외에도 여징은 《신편한문대장경목록》을 편찬하였는데, 이 목록은 불교 문헌들을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판본을 비교하여 오자를 표시하였고, 한문 불전의 번역적 특징과 부족한 점을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사에서 논란이 되는 몇 가지 문제들, 예컨대 불멸(佛滅) 연대 등을 해결하였다. 《사십이장경》과 《모자이혹론》이 모두 진송(晉宋) 사이에 쓰인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대승기신론》을 중국인의 저작으로 보고, 《원각경》과 《능엄경》 또한 중국인이 쓴 ‘위경(僞經)’으로 보았다. 1924년 창간된 지나내학원 학술잡지인 《내학(內學)》에 문헌학에 기반을 둔 교리의 변천과 전개를 연구한 논문들, 즉 〈《잡아함경》 간정기〉 〈《현양성교론》 대의〉 〈《장엄경론》과 유식 고학〉 〈티베트 전승 《섭대승론》〉 등을 발표하였다. 여징은 유식불교가 인도 초기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식불교 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학자로서 한문 외에 티베트어,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등 여러 언어를 활용하고 서로 다른 판본들을 대조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기한 것이 여징의 학문적 특징이다. 나아가 대승불교의 발전 경로를 추적하여, 산스끄리뜨어본과 티베트어본의 유식불교 경전이 한 계열이고 여기에 유식 고학과 유식 금학의 분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명학의 부활과 티베트불교 연구 

여징은 1926년 《인명강요(因明綱要)》를 간행하였는데, 종(宗) · 인(因) · 유(喩) 삼지작법 등 인명학의 기본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였다. 삼지작법은 주장, 근거, 예증이라는 논리 방식의 세 부분을 말한다. 인명학 연구를 계속하였고, 1928년 집중적으로 인명학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내학》에 티베트어 역본으로 남은 디그나가(陳那 Dignāga, 480~540)의 대표작인 《집량론본》과 《집량론석》을 편역한 《집량론석약초(集量論釋略抄)》를 실었다. 이들 책은 당 대(唐代) 의정(義淨, 635~713)이 한역하였지만 오래전에 일실되어 전해오지 않았는데, 근대에 여징이 다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여징의 작업은 인명학 부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국 근대의 불교 연구는 한문 불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산스끄리뜨어나 빨리어 불전 연구는 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반면에 티베트 불전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는 전통 중국불교 속에 티베트불교가 이미 존속했고 티베트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서구 문헌학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티베트 불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도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징 역시 근대 불교학의 한 부분으로서 티베트불교를 연구하였다. 티베트불교가 근대 시기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밀교의 부흥과 관련이 있는데, 밀교에 대한 관심은 1920년대에 특히 고조되었다. 당시 불교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던 양문회는 당 대에 유행하였던 밀교가 송 대 이후에 단절되었으나 그 전통이 일본에서 지속되었던 점을 지적하며 밀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에스토니아 불교문헌학자인 스탈홀스타인은 1917년 중국에 도착해서 1937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 머물며 산스끄리뜨어를 강의하고 산스끄리뜨 불전과 티베트 불전을 연구하였다. 그의 티베트 불전 연구는 중국 근대 불교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여징의 친구 황수인(黃樹因, 1898~1923)이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및 티베트어를 공부한 것이 여징이 티베트 불전 연구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매년 겨울과 여름 방학에 황수인은 남경으로 돌아와 우리에게 북경에서 산스끄리뜨어와 티베트어를 배우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서 이 두 언어를 독학으로라도 배우리라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스탈홀스타인과 달리 여징은 전통 교감학에 바탕을 둔 상태에서 서구 불교문헌학의 간접적인 영향 아래 티베트 불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티베트 불전 연구를 계기로 티베트불교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시도하였고, 1933년 《티베트불학원론(西藏佛學原論)》을 간행하였다. 여징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황수인에게 부탁해 산스끄리뜨어 사전과 티베트어 사전을 구해서 시간 나는 대로 독학하였다. 황수인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면 그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5년 정도가 지나자 나는 사전을 가지고 산스끄리뜨어와 티베트어 원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장요》 편찬을 위해서 불전 교감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교감을 하고 한편으로는 배우면서 최후에는 산스끄리뜨어와 티베트어 자료를 이용해서 한문 장경과 대조 · 교감하였고, 예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구분: 성적(性寂) · 성각(性覺) 논쟁

철학적으로 볼 때 유식불교는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구분하는 것이 해탈의 목표를 분명히 하게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봄과 동시에, 분석적 · 과학적 방법을 택함으로써 신앙에 의한 구원을 저평가한다. 반면에 《대승기신론》에 사상적 근거를 둔 중국불교는 주로 본체와 현상의 종합이라는 교리, 그리고 진여를 우주의 마음(宇宙心)으로 파악하는 관념론에서 그 사상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대승기신론》은 본체와 현상, 진여와 현상, 법성과 법상을 일치시켜 봄으로써 모든 중생의 불성을 확신하는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며, 이는 신앙에 의해 가능해진다. 유식불교는 엄밀하게 사적이고 개인적인 철학인 반면, 《대승기신론》은 일원론, 또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근대라는 시기에 전체성과 단일성의 철학보다 개인적이고 다양한 철학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여징이다. 여징의 스승 구양경무는 불교의 주된 사상은 공종, 유종의 두 종이라고 보고, 이와 다른 중국불교의 진여연기론을 비판하고 유식불교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불교는 불교의 이론적 측면을 도외시한 맹목적 깨달음으로서, 미신적이고 세속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때 그가 《대승기신론》을 비판하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여가 훈습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종자 없이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진여를 ‘부동(不動)’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옳지만, ‘수연(隨緣)’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진여는 적멸적정하고 부동하며 현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것이므로 결코 훈습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식불교의 아라야식 연기설에서는 염정(染淨) 종자를 따로 분리하여 설정하기 때문에 깨끗한 진여와 더러운 현상을 혼동할 염려가 없는 반면에, 《대승기신론》의 진여연기설에서는 깨끗한 진여가 더러운 현상으로 바로 나타나기 때문에 염정(染淨)이 분명하게 나누어지지 못하고, 더러운 현상이 깨끗한 진여에서 나온다는 모순이 생겨난다. 깨끗한 진여와 더러운 현상이 상호 융합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더러운 현상을 혁파하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목표 설정이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구양경무는 진정한 연기론은 유식불교의 아랴야식연기뿐이라고 결론지었다. 

구양경무의 뒤를 이어 여징 역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의 위서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대승기신론》이 제기한 ‘진심본각설(眞心本覺說)’은 인도불교의 ‘심성본적(心性本寂)’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수양의 방법도 ‘반본(返本)’이 위주가 되어 인도불교에서 ‘혁신(革新)’을 주로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여징은 중국불교의 흐름을 이은 웅십력과 논쟁하며 중국불교를 비판하였다. 그 근거는 웅십력 사상 또한 인도불교의 ‘성적설(性寂設)’과 달리 천태 · 화엄 · 선불교 등 중국불교의 ‘성각설(性覺設)’과 동일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중국불교와 인도불교의 분기는 ‘성각’과 ‘성적’의 분기이며, 중국의 위경(僞經), 위론(僞論)과 진정한 불교인 유식불교의 분기라고 하였다. 실제로 1943년, 웅십력과 여징은 16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불교의 근본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편지글에서 여징은 중국불교의 특성은 성각에 근본을 둔 것이라고 확정하였다.

그대의 논의는 완전히 ‘성각(性覺, 性寂과 상반된 것)’에서 나온 학설로, 중국의 모든 위경, 위론과 한 콧구멍에서 나온 숨이다.1)

그리고 여징은 성적과 성각의 차이를 불교사상 전반 위에서 논의하며, 중국불교를 비판하였다. 

‘성적’과 ‘성각’이라는 두 용어는 인도불교 학설과 중국 위설의 근본적인 변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하나는 자성열반(自性涅槃, 즉 性寂)에 근거를 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자성보리(自性菩提, 즉 性覺)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자에 근거한 주장은 소연경계(所緣境界)에 의지하는 것을 중시하고, 후자에 근거한 주장은 인연종자(因緣種子)에 의지하는 것을 중시한다. 주관(能)과 객관(所)이 위치가 다르고, 공(功)과 행(行)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새롭게 고치는 것(革新)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返本)이므로, 서로 상반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적(性寂)’ ‘성각(性覺)’이라는 용어는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것[心性本淨]의 두 가지 해석이다. 그러면서도 여징이 성각을 위론이라고 보는 이유는 성적만이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는 데 대한 올바른 해석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적’은 오염된 현상을 떠나서 외부의 절대 경지인 진여, 진리에 의지하여 바꾸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진여의 세계는 현상세계와는 분명하게 분리되어 존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유식불교로 대표되는 인도불교의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진여의 세계를 자성열반이라고 한다. 

반면에 ‘성각’은 내면의 각성의 힘을 중시한다. 인간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자각에 의해 스스로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 자체가 진여의 표현이라는 중국불교의 사고방식이다. 이때에는 오염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객진(客塵) 때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자성보리라고 한다. 여징은 성적의 입장은 오염된 것을 오염된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하므로, 오염된 것을 떠나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각은 오염된 것을 깨끗한 것으로 잘못 알고 그것을 그대로 확대해나가므로, 결국 오염된 속에 빠져버리고 말게 된다고 비판한 것이다.

여징이 보기에 이것은 또한 현장 유식과 진제 유식,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나누어지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기도 하다. 이는 불교사상사에서 중국불교의 정통성을 파악하는 중요한 기여이다. 여징은 중국불교에서는 《대승기신론》에서 시작하여 《점찰(占察)》을 거쳐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원각경(圓覺經)》 《능엄경(棱嚴經)》까지 일맥상통하게 성각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본다. 현장 유식에서는 진여를 생멸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아라야식과 진여는 직접 관계가 없으므로 아라야식만이 현상계의 본원이 된다고 본다. 그런데 현장 유식에서는 모든 중생이 아라야식에 본유(本有)의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부처가 될 수는 없다. 이에 반하여 중국불교인 천태 · 화엄 · 선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여기는 진여가 항상 편재하고 있으므로,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무명(無明)이라는 측면을 중시하고 외부의 절대적인 진리인 불성(佛性)에 의지하여 훈습과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수행해나갈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천태 · 화엄 · 선불교에서는 인간 내면의 각성의 힘을 중시하여 번뇌가 바로 보리이고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고 하면서 ‘깨달음’ 자체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유식 사상은 자신 속에 존재하는 더러운 것(染)을 모두 깨끗한 것(淨)으로 바꾸어가야 하기 때문에 ‘혁신(革新)’이라고 할 수 있고, 천태 · 화엄 · 선불교에서는 이미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는 불성, 즉 마음의 근원을 되돌아보고 심성을 되돌아봄으로써 깨달을 수 있으므로 ‘반본(返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불교에서 주로 자기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깨닫는 것을 중시하여 자성보리(自性菩提),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제창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여징은 성적과 성각, 자성열반과 자성보리의 분기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여징의 입장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성각을 위설(僞說)이라고 구분한다면, 위설도 존중받을 만하다”라고 하여 중국불교의 폄하를 반대하였다.

《대승기신론》에 반대하는 여징의 주장은 중국불교의 발전 방향과 역행되는 것이다. 중국불교가 진상심 사상 중심으로 된 것은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경향성 때문인데, 사상적으로는 유학의 영향이 크다. 중국불교와 송명 성리학을 흐르는 정신에 동일한 측면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중국불교가 진심, 또는 자성청정심을 중심으로 한 진상심 사상이라는 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상계가 본체인 진심의 현현임을 말하는 진상심 사상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가의 성선론(性善論) 경향과 일치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진심, 자성청정심, 불성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중국불교의 인식은 사람은 본래부터 선성(善性), 양지(良知), 사단지심(四端之心)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학의 사고방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여징은 1962년 〈《기신론》과 선(禪)〉이라는 글에서 “천몇백 년 동안 마명이 짓고 진제가 번역하였다고 알려진 《대승기신론》은 수당 시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내역이 모호한 책이다”고 판정하였다. “수당 시대 형성된 선종, 천태종, 화엄종 등의 사상 구조와 발전은 모두 《대승기신론》의 진심본각설(眞心本覺說)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입장에 서면 인간과 세계를 모두 참모습으로 보게 되고 현실 세계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초래하게 되므로,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근대의 더러운 현실 세계를 보면 볼수록 ‘완전하고 깨끗한 절대적인 진여’라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도 추측해볼 수 있다. 여징은 진심본각설을 주장하는 《대승기신론》이 위역(魏譯) 《능가경》을 표준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산스끄리뜨어 《능가경》과의 대조를 통하여 위역 《능가경》에 결정적인 오역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 오역에 기반을 두고서 《대승기신론》 등 중국의 찬술 문헌이 등장했음을 주장하였다. 여징은 이러한 입장에서 “진여와 여래장을 하나로 보고” “진여와 정지(正智)를 구분하지 않은” 중국불교의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그는 특히 중국불교의 주요한 전통이 불전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 오역에서 기인했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여징은 《인왕경》 《범망경》 《원각경》 《점찰경》 《능엄경》 《기신론》 등 중국불교는 물론 동아시아불교의 가장 중요한 불전들이 모두 위경이며 진심본각설에 근거를 둔 사상임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위경이므로, 진정한 불교 정신을 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 위경들은 “문장과 어휘는 정교하지만 뜻은 모호하여,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중국 사람의 성향과 잘 맞아서 크게 유행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여징의 논의는 진심본각설의 중국불교를 비판하고, 유식불교로 대표되는 인도불교의 순수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그는 유식불교에 근거할 때 불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고 진정한 근대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보고, 유식불교의 부흥을 위해 전 생애를 투자하였다. ■

 

김제란 redhairran@hanmail.net

고려대학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한문연수과정 수료. 고려대 철학연구소 및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연구초빙교수 역임. 박사학위 논문은 《熊十力 哲學思想 硏究-동서 문화의 충돌과 중국 전통철학의 대응》. 주요 논문으로 〈한 · 중 · 일 근대불교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대응양식 비교〉 〈당군의 철학에 나타난 동서융합의 논리-유학, 헤겔철학과 화엄불교의 융합〉 등과 저서로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 · 별기》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 철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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