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고전

얼마 전에 작고한 세계적인 신학자 겸 종교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은 이웃 종교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없으면 종교 간의 대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국의 양대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에서 상호 간의 원만한 이해와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불교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져 불교의 입장에서 읽는 성경 이야기를 개진해보고자 한다. 

 

1. 성경의 구성

불교에 불경(佛經)이 있듯이 그리스도교에는 성경(聖經)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서(聖書)라 부르기도 한다. 영어로는 바이블(Bible) 혹은 홀리 바이블(Holy Bible)이라 하는데 본래 ‘비불리아(biblia)’에서 나온 말로 그냥 ‘책들’이라는 뜻이다. 불경은 팔만대장경처럼 엄청난 분량이지만 성경은 구약(舊約, Old Testament) 39권, 신약(新約, New Testament) 27권,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66권이라고 하여 지금의 책 권수를 연상하기 쉬우나 66권이 일반적인 책 한 권의 두께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개역 한글판 성경으로 보면 가장 긴 것이 《시편》처럼 130쪽짜리도 있고, 보통 몇십 쪽짜리, 짧은 것은 몇 쪽, 심지어 한 쪽짜리도 있다. 전체적으로 구약이 1331쪽, 신약이 421쪽이다.

1) 구약

이른바 ‘구약’이라 하는 것은 본래 유대교의 경전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구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이 구약이 아니다. 유대교에서는 내용의 분류에 따라 ‘율법(Torah)과 예언서(Nebi’im)와 문서(Khetubim)’라고 하는 긴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타나크(Tanakh)라고 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은 몇 군데를 제외하면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성경(Hebrew Bible)’이라고도 한다. 

구약의 처음 다섯 책을 ‘토라’라고 하는데, 이를 모세 ‘오경(Penta-teuch)’이라고도 한다. 첫째 책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신(들)이 6일간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마지막 날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자기(들)의 형상대로 지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계속되는 인간의 타락으로 신이 의인 노아와 그 일가족 여덟 명을 제외하고 모두 물로 멸했다는 홍수 이야기,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부조(父祖)들의 이야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야곱의 자손들이 기근으로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하에 이집트에서 탈출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을 위한 규례와 제사법 등을 말해주고, 《민수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 조사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들의 광야 생활을 이야기하고, 《신명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이 맺는 언약을 주로 다루고 있다. 

모세 오경에 이어서 《여호수아서》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 《역대 상,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등 역사서 12권이 등장한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가나안 땅,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하나의 왕국으로 등장하게 되는가 하는 이야기와 하나님께 순종하면 흥하지만 불순종하면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등 6권의 시가(詩歌) 문학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다양한 종교적 경험을 서사시나 잠언이라는 경구나 시로 표현한 것이다. 그 뒤로 책의 분량에 따라 배열된 예언서들이 등장하는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4권의 대예언서와 《호세아》 《요엘》 《아모스》 등 12권의 소예언서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자들은 미래를 미리 말하는 것이 주 업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들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외에 유대교 전통에서 내려오긴 하지만 유대교가 자기들의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은 《바룩》 《토빗》 《유딧》 《마카베오 상, 하》 등 10여 권으로 구성된 이른바 ‘외경(外經, apocrypha)’이라는 것을 정경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구약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물론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지만, 특히 그들의 신관(神觀)을 주목하게 된다. 초기에는 신이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신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는 민족마다 각기 자기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른바 부족신(tribal god) 개념이다. 그러다가 아시리아에도 멸망당하고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면서 자기들의 신이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생각이 생겨났다. 이른바 보편신(univer-sal god) 개념이다. 

2) 신약

신약은 고전 그리스어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보통으로 쓰던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로 쓰였다. 신약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을 기술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4복음서이다. 처음 세 복음서는 비슷한 시각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여 공관(共觀, synoptic)복음이라 부른다. 이 세 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초대 교회에서 발달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와 구별된다. 

4복음서 다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 특히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해 활동했던가 하는 것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한 《사도행전》이 나오고, 뒤를 이어 바울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등지에 자기가 세운 교회들에 써 보냈다고 전해지는 14편의 편지서들이 길이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그다음으로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 등이 썼다는 일반 편지서들이 들어가 있고, 끝으로 제자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썼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요한 계시록》으로 마감되어 있다. 이렇게 신약은 모두 27권, 구약 39권과 함께 ‘신구약 66권’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신약 27권은 지금 성경에 배열된 순서대로 쓰인 것이 아니다. 제일 먼저 쓰인 것은 서기 50년대에 그리스도교 믿음 내용을 설명하고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해주기 위해 쓰인 바울의 편지서들이다. 그다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점점 죽어가고, 특히 서기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사라지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기록한 것이 복음서들이다. 4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서기 70년대에 제일 처음으로 쓰이고, 다음으로 《마태복음》 저자와 《누가복음》 저자가 《마가복음》에 쓰인 내용을 대거 인용하고 또 각각 자기들 나름대로 구할 수 있던 다른 재료들을 덧붙여 대략 80년경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썼으리라 짐작한다. 마지막으로 서기 100년 전후로 《요한복음》이 쓰였으리라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2.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그리스도교에서는 불교와 같이 1차, 2차, 3차 결집 같은 것이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경전이 ‘정경’으로 성립되었다. 구약이나 신약의 문헌들은 물론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드디어 문자화되고 그렇게 문자화된 문서들은 일정 기간 각각 독립된 문헌으로 돌아다녔다. 히브리어 성경(구약)의 경우 물론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유대교 자체 내에서 유대인 학자들이 서기 90년경 팔레스타인 얌니야(Jamnia)에 모여 지금과 같은 내용의 경전으로 확정 지었다. 

신약은 서기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그때까지 떠돌던 복음서 등 여러 문서 중 27권을 선정해 그 권위를 인정했는데, 이것이 그 후 그대로 신약의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정경으로 확정된 후 5, 6세기까지도 ‘일반 편지서’ 등 몇 가지 책은 달갑지 않은 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경우 10세기까지도 그리스도교 전체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책이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지금의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복음서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라고 하는 곳에서 어느 농부가 땅에 묻힌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 여러 종류의 문서들과 함께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등이 들어 있었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었을 뿐 아니라 정경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이었다.

 

3. 성경에 대한 태도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啓示)’의 책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다.

1) 문자주의적 태도

이른바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근본주의적(Fundamental) 혹은 복음주의(Evangelical)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성경에는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성경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다. 심지어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縮字靈感說)’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든가, 여호수아가 해가 지기 전 쫓기는 적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하나님께 태양이 멈추도록 해 달라고 하니 태양이 멈췄다든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 나왔다고 하는 등 구약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걷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보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 등등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두 문자 그대로 역사적 ·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하는데, 이런 문자주의를 받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참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전능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우주를 엿새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히브리어 성경 처음에 나오는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이고, 복음서들도 그 이름대로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바울의 동역자 마가와 누가가 쓴 것이고, 바울의 편지서도 14권 모두 바울이 직접 쓰고, 일반 편지서도 그 이름을 가진 저자들이 손수 쓴 것이라 믿는다.

2) 문자주의의 거부

한편 18세기 계몽시대 이후 발달한 이른바 ‘역사비평학적 접근’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현대 성서학자들 대부분은 창조나 출애굽이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등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이 어느 한때 정말로 있었던 역사적 · 과학적 사실이라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또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지 않더라도 그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여전히 성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계시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진보적 학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예를 들어 ‘모세 오경’도 모세가 직접 쓴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모세 오경 중 《신명기》 끝부분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모세 자신이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모세 오경은 내용이나 문체나 용어 등에서 각각 특유한 몇 가지 종류의 문헌이 나중에 편집되어 이루진 것이지 모세라든가 어느 한 사람이 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두 가지로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와 2장 4절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가 각각 P문서와 J문서라고 하는 다른 종류의 문서였는데, 후대 《창세기》 편집자가 이 두 문서를 적절히 짜깁기해서 붙여 놓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복음서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복음서들이 처음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후대에 가서 지금과 같이 저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본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썼다면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 될 것인데 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마가가 쓴 《마가복음》에 그 정도로 의존해서 거기서 그렇게 많은 구절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식이다.

또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썼다면 그가 《요한복음》을 쓸 당시 그의 나이는 100살에 가까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등의 의문을 제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와 있는 말씀도 사실 모두 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verba ipsissima)’이라기보다 거의 다가 후대의 사상을 예수님의 입을 통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심지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 나사로 같은 인물이나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나 신이 인간이 되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저자들의 상상에 의한 결과물이라 보기도 한다. 

바울 서신 등도 바울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사상이나 문체 면에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쓴 것이라고 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직접 쓴 것이 7편, 논쟁거리가 된 것이 3편,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한 것이 3편, 따라서 바울이라고 하지만 ‘급진적 바울’ ‘보수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세 명의 바울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4, 해석의 문제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신학자로는 20세기 최대 신학자 중 하나인 독일의 성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을 들 수 있다. 그는 《신약 성서와 신화》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등의 저작을 통해 이른바 ‘비신화화(de-mythologizing)’를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화적 서술이기 때문에 신화를 이해할 때 그것이 마치 우주의 어떠함을 말해주는 무엇인 것처럼 ‘우주론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실존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신학자로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비신화화’라고 하면 신화를 없애는 작업이라 오해하기 쉽고 성경에서 신화를 없애면 남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비신화화라는 말 대신 ‘탈문자화(deliteralization)’ 혹은 ‘신화의 껍질을 깨기(breaking myth)’라는 말을 제안했다. 틸리히는 종교적 서술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상징이 지적하고 있는 상징 너머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고, 신학의 임무는 상징을 그 시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재신화화(remythologizing)’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역사비평적 접근이라든가 탈문자화라든가 신화적인 표현의 껍질 깨기 방법 등이 불교의 텍스트를 읽는 데도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불교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5. 불교와의 관계에서 성경 읽기

성경을 읽으면서 불교를 연상시키는 진술이나 사건들 몇 가지를 예거해 본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제들일 수 있기 바란다. 

(1) 성경 첫째 권인 《창세기》에 보면 야훼 신이 6일 동안 세상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땅을 정복하여라……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였다. 서양 역사는 대체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땅을 마구잡이로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닥치는 대로 착취하고 살육하는 일을 계속해 온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 말은 자연을 함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잘 ‘보호하고 보살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새로운 이해는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살생(不殺生)의 가르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2) 창조 이야기와 연관해서 야훼 신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을 조성하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좋지만 그중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른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하며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그 과일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었다. 둘은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야훼 신은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았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순종 · 불순종의 입장에서 보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므로 쫓겨난 것이니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 된다는 식의 윤리적, 율법적 해석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의식의 발달사를 다룬 켄 윌버(Ken Wilber)는 이 이야기가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것도 모르던 동물적인 주객 미분의 의식(pre-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를 객관화해서 볼 줄 아는 주객 분리의 의식(subject/object consciousness)으로 넘어온 단계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윌버는 물론 의식 발달의 완성은 이런 이분법적 분별 의식을 초월하는 초주객 의식(trans-subject/object consciousness) 단계라 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인간이 분별식(分別識)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를 넘어서서 분별식을 초극하는 단계로의 완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3) 성경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친 기별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회개’라고 번역한 것은 본래의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이다. 메타(넘어서다)와 노이아(의식)의 합성어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 하겠다는 뜻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메타노이아 체험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체험은 다 같이 ‘새로운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4)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했다. 여기서 ‘내가’라는 것은 역사적 인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기보다는 ‘우주적 나(cosmic I)’,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우주적 생명력’ ‘본원적인 인간성’ ‘나의 참나’를 말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 여겨진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친 말이 연상된다. 여기서 ‘나(我)’란 누구인가? 역사적 고타마 싯다르타를 의미할까?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나, 참나인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언과 부처님의 외침에 어느 정도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 아니겠는가?

(5) 《마태복음》에 보면 최후 심판 장면이 나온다. 임금님이 의인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25:35~36)고 한다. 의인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임금이 다시 입을 열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것은 물론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고 결국은 하나라는 화엄 철학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원리나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碍) 사상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사람과 임금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임금에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6) 다시 화엄 사상을 원용하면, 예수님이 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19:19)는 말씀도 쉽게 이해된다. 이웃과 내가 따로 떨어진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결국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이웃만 하나가 아니라 나와 자연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 8:12)고 했다.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면 현재 자연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태학적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다를 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7)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 일중다 다중일(一中多多中一), 모든 것이 결국 하나 안에 있고 하나가 모든 것 안에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요 모든 것이 곧 하나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은 《요한복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17:21)라고 하였다. 사실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인류의 죗값을 탕감하기 위해 피흘리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이 아니다. 하나님과 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이 ‘하나’라는 ‘신비적 합일’ 사상이다. 그러기에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1931~2021) 신부는 《요한복음》 해설서의 제목을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Tales of a Jewish Mystic)”라고 했다. 신비주의란 절대자와의 합일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더욱이 류영모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외우는 위의 성경 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낸 독생자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심어준 하느님의 씨앗, 신성(神性)이라고 하였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우리 안에 있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8) 위에서 잠깐 언급한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gnōsis)을 통해 내 속에 빛으로 있는 신성(神性), 나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는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도마복음》 풀이 책 서문 마지막 문장으로 “한 가지 좀 특별한 소망을 덧붙인다면 깨달음을 강조하는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가면서

성경을 필자의 어머니처럼 일 년에도 몇 번씩 읽는 이도 있고, 필자의 사촌 형처럼 국한문 성경을 완전히 필사하고 이제 다시 한글 성경을 필사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마치 일반 불교 신도들이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같은 것은 외우지만 《화엄경》이나 《법화경》 같은 경을 직접 읽는 이들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불교인들은 자기들이 지금 믿고 있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에서 나온 진리 그대로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해석’과 ‘교리’를 성직자들이 전해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제 그런 전통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텍스트를 직접 읽고 그 문자 너머 심층에 있는 속내를 나름대로 의미 있는 방향으로 간취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그 깊이에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1) ■

 

오강남 soft103@hotmail.com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학사, 석사.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대학교 종교학과 Ph.D. 캐나다 리자이나(Regina)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역임.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도덕경》 《장자》 《예수는 없다》 《세계 종교 둘러보기》 등 저서 다수. 현재 리자이나(Regina)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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