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일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1. 질병이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화려한 문명 한편에는 패역에 가까운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새로운 시대 구분을 가능하게 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문명 질서의 오작동은 노골적이다. 그러므로 현대문명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하여 근본에서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들에 대하여 불교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비판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를 관조할 필요가 있다. 

질환(疾患) 또는 질병(疾病)이란 무엇인가. 설문해자(說文解字) 방식의 한자 풀이를 하면 이렇다. 질(疾)은 하늘(天)로 솟구치며(丿)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矢)과 관련되어 병들어 기댄(疒) 모습이다. 그래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되며 화살 같은 금속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통증이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전염되는 병을 뜻하는 돌림병의 경우 질(疾)을 사용한다. 이에 비하여 환(患)의 경우는 심장(心)을 꿰뚫는(串) 듯한 고통과 관련이 있다. 이는 전염되지 않는 아픔이나 통증 또는 마음의 불편함이나 심리적 걱정을 의미하는 장애에 해당하는 것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병(病)이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남쪽을 의미(丙)하는 상태와 관련되어 병들어 기댄(疒) 모습을 의미한다. 즉 발열과 관련이 있는 질병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서구의 병리학에서 말하는 염증에 대한 정의와도 거의 일치한다. 현대의학의 하부단위에 해당하는 병리학(病理學)은 말 그대로 질병(病)의 이치와 원리(理)를 밝히는 분야이다. 병리학에서 염증은 발열, 통증, 부종, 발적 등의 복합적 상태를 의미한다.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동양적 사고에서 질과 환은 서로 구분되어 사용하였으나, 서구 의학에서의 염증은 질병 상태와 연관 지어 통합적으로 묶어낸 개념이다. ‘disease’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질병은 말 그대로 ‘dis’와 ‘ease’의 결합으로서 쉽지 않은 상태인 난경(難境)을 의미하며, 의학적 의미에서 그 구체성은 유기체의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비정상적으로 된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 말은 질병(disease)이란 생물학적 개념으로 병리학이나 생리학의 관점에서 생체 내의 구조적, 기능적 변화가 의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며, 심신의 전체 또는 일부가 일차적 또는 지속적으로 장애를 유발하여 정상적인 기능이 불가능하게 되는 상태이다. 

 

2. 불교적 병인론과 수명론

불교의 질병론을 밝히기 위하여 이 글에서는 코로나19를 염두에 두고 먹거리의 문제에 집중하여 접근하고자 한다. 그 이유로는 코로나19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천산갑이나 박쥐 등 야생동물의 섭취와 직결되어 발생한 것이며, 이는 음식물과 관련지어 금기와 위반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특징적 질병으로는 비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이 비만이나 식탐과 관련지어 《불위수가장자설업보차별경(佛為首迦長者說業報差別經)》(이하 《업보경》)이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을 검토해보면 불교의학적 병인론에 접근할 수 있다. 《업보경》은 질병의 원인을 설파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미각 또는 비만의 문제를 확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중생들로 하여금 병이 많은 과보를 받게 하는 열 가지 업이 있다. 첫째는 중생 때리기를 좋아하는 것이요, 둘째는 남을 시켜 때리는 것이며, 셋째는 때리는 것을 칭찬하는 것이요, 넷째는 때리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부모를 괴롭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성현을 괴롭히는 것이며, 일곱째는 원수가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원수의 병이 낫는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며, 아홉째는 원수가 병이 났을 때 낫지 않는 약을 주는 것이요, 열째는 먹은 음식이 소화되기도 전에 또 음식을 먹는 것이다.

《업보경》은 대체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것으로 인하여 질병이 발생한다고 파악한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다양한 오락거리의 주제들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미디어와 영상물에는 폭력과 경쟁에 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사례를 반영하고 있는 한류 드라마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불교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의 바탕이 무엇인지 가늠하며 반성할 소재를 주는 것들이라고 할 만하다. 《업보경》은 자비심 없는 행위와 잔인한 악행들은 악업을 짓는 것이기에 그 업보로서 질병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비만을 영양 과잉 상태로 보던 전 근대적 입장에서 벗어나 주요 질병의 한 형태로 파악하는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업보경》은 물론 《불설불의경》(이하 《불의경》)의 설명 방식은 아주 실증적 태도에 속한다. 질병의 원인이 되는 10가지 종류에 대하여 다소 신선하게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병을 얻게 되는 열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 오래 앉았기만 하고 밥을 먹지 않는 것, 둘째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는 것, 셋째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 넷째 피로가 극도에 달하는 것, 다섯째 마음껏 음탕하게 노는 것, 여섯째 성을 내는 것, 일곱째 대변을 참는 것, 여덟째 소변을 참는 것, 아홉째 상풍(上風)을 제지하는 것, 열째 하풍(下風)을 제지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인연으로 병이 생기는 것이다.

《불의경》에서는 음식 섭취 및 미각과의 연관성을 1, 2위의 병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업보경》이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으로 설명하는 인도 대륙 특유의 종교적 사유와 연결되고 있다면, 《불의경》은 의료적 전문성을 보이며 미각 및 식탐의 문제를 거론한 다음, 근심과 걱정 등 심리적 불안정의 문제들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소화기 장애와 직결되는 대소변 습관까지 거론하여 현대적 관점에서도 보아도 손색이 없는 병인론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음식의 문제를 단명과 연결지어 설명하는 《대반열반경》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숨은 비록 다하지 않았으나 아홉 가지 인연을 만나면 목숨이 단명하는 것이다. 무엇이 아홉인가? 첫째는 먹어서 편안하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먹는 것이며, 둘째는 많이 먹는 것이며, 셋째는 먹은 것이 채 소화되기 전에 또 먹는 것이며, 넷째는 대소변이 때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병이 났을 때 의원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여섯째는 간병하는 이가 시키는 것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억지로 참고 토하지 않는 것이며, 여덟째는 밤에 다니고, 밤에 다니므로 나쁜 귀신이 침노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방사(房事)가 너무 과도한 것이다.

방사(房事)의 과도함이나 귀신의 침노 등과 같은 《대반열반경》의 설명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불의경》은 종교적인 표현 방식에 의거하여 계율을 거론하여 완곡하게 9종의 인연을 다음처럼 설파한다.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비명횡사하는 아홉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는 것, 둘째 음식의 양을 조절하지 않고 먹는 것, 셋째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 넷째 소화되기도 전에 또 먹는 것, 다섯째 소화된 것을 참는 것, 여섯째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 일곱째 악한 벗을 가까이하는 것, 여덟째 때 아닌 때에 마을에 들어가고 법답지 못한 행실을 하는 것, 아홉째 피해야 할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 인연으로 사람의 목숨이 돌연 끊어지게 된다.

비명횡사에 대한 9종의 인연 가운데 음식 관련 소화기 계통의 문제로 제시한 것은 대소변의 문제, 구토의 문제를 포함하여 다섯 가지이다. 이는 미각과 관련지어 식욕을 통제하지 못한 결과, 많이 먹음 즉 과식으로 인하여 질병을 초래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 방식은 비만이나 영양 과잉 상태를 지적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대반열반경》이 일반적 의미로 ‘잘 팔리는’ 경전이 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업보경》과 《대반열반경》의 인용문을 비교해보면, 일반 대중들이 선호하여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는 경전의 권위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부처님의 친설 혹은 위경이나 의경 여부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지닌 충실함이 기준이 될 것이다. 말의 무게와 관련지어, 경전들이 확언하는 10종의 질병 원인과 9종의 단명 원인을 곰곰이 들여다볼수록 그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온다. 

 

3. 불교적 질병 대치관 

불교의학에 대한 경전의 지적으로는 “붓다는 의왕(vaidyarāja) 같고 법은 양약(bhaiṣajya)과 같으며 승가는 간병인과 같다.”는 《사분율행사초간정기(四分律行事鈔簡正記)》의 구절이 대표적이다. 이 내용은 “용한 의원과 좋은 약과 간병할 이를 만나[得遇良醫好藥瞻病]”야만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대반열반경》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불법승 삼보를 의료적 현상과 관련지어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대지도론》의 서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일체의 중생들이 결사(結使, saṃyojana)라는 병으로 괴로워하지만, 무시의 생사 이래 아무도 이 병을 고쳐주는 이가 없었다. 항상 외도나 그릇된 스승에 현혹되고 있기에 “나는 이제 세상을 벗어나는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온갖 법의 약(法藥)을 다 모았으니, 그대들은 이 약을 먹어보라” 하셨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용문에서 보듯 결사의 질병, 즉 집착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이들에게 부처님 스스로 대의왕(大醫王)이 되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여의보주와 반야바라밀을 견주며 질병에 대한 분류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하고 있다.

여의보주는 404가지 병(病)을 없애 주며 그의 근본은 4가지의 병이니, 풍병(風病)과 열병(熱病)과 냉병(冷病)과 이 3가지 병이 합친 병[雜病]이다. 반야바라밀도 또한 8만4천의 병을 없애 주며 그 근본이 되는 병은 4가지의 병이니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과 이 3가지가 함께 합친[等分] 병이다. 음욕의 병을 분류하면 2만1천 가지의 병이 있고, 성내는 병도 분류하면 2만1천 가지의 병이 있으며, 어리석은 병도 분류하면 2만1천 가지의 병이 있고, 3가지가 합친 병[等分病]도 분류하면 2만1천 가지의 병이 있다. 

《대지도론》은 온갖 법에 대한 약(法藥)인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하여 대치실단(對治悉檀) 개념으로 정리하여 불교의 의학적 관점을 다음처럼 토로하고 있다. 

대치실단이라 함은 존재하는 것[有法]은 대치(對治, pratipakṣa)할 때는 곧 있거니와 실제의 성품은 없다. 비유하자면, 무겁고 뜨겁고 기름지고[膩] 시고 짠맛이 뒤섞인 약초나 음식 등이 풍병(風病, vāyuvyādhi)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가볍고 차고 달고 쓰고 떫은 약초나 음식 등은 열병(熱病, tejovyādhi)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으며, 가령 가볍고 쓰고 떫고 더운 약초와 음식은 냉병(冷病, śītavyādhi)에는 약이 되지만 다른 병에는 약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불교의학은 대치실단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장에서 제시하는 불교의학의 현장성은 불교의 질병에 대한 관점이 실용성에 바탕을 둔 심신의 통합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일체의 병고들이 몸과 마음을 동시에 괴롭힌다는 것이다. 다음 경문은 질병의 고통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나열하여 심신의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마음이 병에 시달리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다. 통증이 일어난 까닭에 병에 시달리는 것이고, 열이 나서 그 마음이 병에 시달리는 것이며, 설사병이 도진 까닭에 그 마음이 병에 시달리는 것이며,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발작하는 까닭에 그 마음이 병에 시달리는 것이며, 계절의 기후가 맞지 않아 그 마음이 병에 시달리는 것이다.

《십송율》의 지적은 마음의 병이 사실은 신체적 불편함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진리를 위하여 육신의 안락을 기꺼이 버린다는 구법망구(求法忘軀) 방식의 불교 담론은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에 대한 격려이지 일반론으로 제시되기에는 치우친 논의일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심법 중심의 불교 수행관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신체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4. 불교의학의 유효성 문제

불전은 질병의 원인에 대하여 다양한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의학이라는 분야가 다소 복잡한 체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거론하는 학문의 ‘정상성’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현재 의학은 기본적인 원칙들이 완전히 재구성되는 중이다. 우리의 질병 모델은 대부분 어중간한 혼합 모델이다. 과거와 현재의 지식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이러한 혼합 모델은 질병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우리의 이해는 불완전하다. 한 개의 행성이 지평선에서 뒷걸음질 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장엄할 정도로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정상’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규칙들을 만들어 냈지만 아직도 생리학과 병리학을 깊이 있고 일관성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

위의 표현은 의학 부문에서 유의미하게 유통되는 지식들의 속성을 규명한 것이다. 의학적 정보들은 유통되는 그 시점까지로 한정하여 정상적 지식에 속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각각의 병인론은 다양할수 밖에 없다. 불교의 병인론이나 질병 분류 방식은 여러 수행집단으로 구성되어 분파화된 부파불교와 관련이 있으며, 특정한 경전들의 전통에 의지하여 전승되었음을 전제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경문이 제시하는 질병의 다양한 양태들은 불교의 의학 체계 연구에 있어 해당 경전의 원천으로 작용하였을 전승들을 밝혀내는 연구가 필요하다. 또 각각의 경전들을 소의경전으로 삼아 수행한 집단에 대한 체계적 분류 역시 중요한 연구과제에 속한다. 이와 관련하여 불전이 제시하는 질병을 바라보는 시선의 다양성은 다음과 같다.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바깥 인연의 병이요 둘째는 속 인연의 병이다. 바깥의 인연이란 추위, 더위, 주림, 목마름, 군대, 무기, 칼, 몽둥이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무너져 갇히는 일 등이니, 이런 갖가지 바깥 근심거리들을 번뇌라 한다. 속의 인연이란 음식이 고르지 못하거나 앉고 누움에 절도가 없음 등 404가지 병이니, 이러한 갖가지들을 속의 병이라 한다. 

몸과 마음의 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업보요, 둘째는 악한 상대를 여의지 못함[不得速離惡對]이요, 셋째는 시절이 바뀜[時節代謝]으로 이런 인연과 이름과 받는 분별[受分別]을 내는 것이다. 

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로 갖가지 병을 얻는 것과 금생의 냉, 열, 풍 등 때문에 역시 갖가지 병을 얻는 것이 있다. 금생의 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속의 병이니 오장(五臟)이 고르지 못한 채 굳게 맺혀[結堅] 묵은 병[宿疹]이요, 둘째는 겉의 병이니 달리는 수레나 말에 치이거나 구덩이에 떨어지거나 무기, 곤장 등에 의한 갖가지 병이다. 

사람의 몸속에는 네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지(地)이며, 둘째는 수(水)이며, 셋째는 화(火)이며, 넷째는 풍(風)이다. 풍이 늘어나면 기운이 일어나고, 화가 늘어나면 열이 일어나고, 수가 늘어나면 추위가 일어나고, 토가 늘어나면 힘이 왕성해지는 것이니, 본래 이 4가지 병으로부터 404가지 병이 일어난다. 

병의 인연은 바람 따위의 병이요, 이름이라 함은 가슴이 답답하고 허파가 부풀고 상기되고 해소로 구역질하고 마음이 놀라고 이질이 나는 것들이요, 받는 분별이라 함은 두통 · 수족 등의 아픔이니, 이런 것을 병이라 하느니라. 

전생에 채찍질하고 매질하고 고문하고 약탈하고 가두고 결박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중생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금생에 병을 얻는다. 또한 금생에 몸조심하기를 알지 못한 채 음식을 조절하지 않고 앉거나 눕기를 때 없이 하면 이런 까닭에 갖가지 병을 얻으니, 이와 같이 해서 404가지의 병이 생긴다. 

 

5. 불교의학의 특징

불교의 수행 공동체에서 필요했던 의학 지식과 기술은 승원 내부에서 발생한 환자에 대한 보살핌을 넘어서서, 일반 대중들을 위한 의술로서 자리 잡게 되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가 표방하는 자비행의 실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질환과 질병 등에 대한 관심은 자비행의 한 방편으로 전환하여 불교의학의 입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된다. 불교의학은 이처럼 의학적 지식을 이용하여 병자의 괴로움을 경감하려는 대자비심의 발로이자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의학은 포교의 수단으로서 의술이기 이전에 중생구제의 복지에 해당한다. 

현대적 의미에서도 보건 문제는 복지와 직결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보건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로 행정부서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점과 관련지어 불전에서 질병 및 보건의 문제가 복지 차원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으로서 태어나면서 눈이 먼 이[生盲]는 보게 되고, 귀먹은 이는 듣게 되고, 벙어리는 말하게 되고, 미친 이는 정신이 돌아오고, 산란한 이는 안정되고, 벗은 이는 옷을 얻고, 주리고 목마른 이는 배부름을 얻고, 병든 이는 치유되고, 모습이 흉하게 무너진 이는 형체가 갖추어졌다.

인용문이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완성될 때, 그리고 여래의 출현과 관련지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이 내용을 검토해보면,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장애의 문제가 빈부에 대한 사회적 문제나 질병에 대한 보건의 문제와 동일한 선상에서 검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가 표방하는 자비행의 실천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적 복덕은 다음처럼 표방된다고 할 수 있다.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독약에 중독되었을 때 어느 한 사람이 치료해서 낫게 하거나,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을 어느 한 사람이 구제해서 벗어나게 하거나, 모든 사람이 계를 깨뜨리고 바른 견해를 깨뜨렸을 때 어느 한 사람이 가르쳐서 맑은 계행과 바른 견해를 얻게 하거나 하면 이러한 것들을 한 복덕이라 한다.

이러한 대승적 복덕 개념의 설정에는, 불교적 교학 체계가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과 직결되고 있다. 즉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통에 대한 이해 방식이 질병의 개념을 색법과 심법 차원의 괴로움으로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경문은 다음에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몸의 괴로움이란, 몸이나 머리의 통증 등 404종의 병으로서 이것을 몸의 괴로움이라 한다. 마음의 괴로움이란, 근심, 걱정, 성냄, 두려움, 질투, 의심 등이니, 이런 것들이 마음의 괴로움이다. 이 두 가지 괴로움이 합쳐서 안의 괴로움이 된다. 밖의 괴로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왕[王者] · 자신을 압도하는 자 · 악적, 사자, 호랑이, 독사 등이 핍박해서 해치는 일이요, 둘째는 바람, 비, 추위, 더위, 우레, 번개, 벼락 등이니, 이 두 가지 괴로움을 밖의 느낌이라 한다.

위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불교적 질병의 분류체계로 제시되기에 합당한 신체적 404가지 병과 번뇌의 문제로 상정할 수 있는 심리적 장애들에 대한 것들이 제시된 것이다. 이는 불교의 질병에 대한 해석이 철저히 사성제의 교학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살의 바라밀 실천 과정은 중생들의 질병에 대한 이해와 관찰에 있음을 다음에서처럼 극명하게 선언하기도 한다. 

보살이 여섯 가지 종류의 바라밀다를 실천할 때에 모든 중생이 몸과 마음에 병을 지니고 있음을 살펴보니, 몸의 병은 풍병, 열병, 담병, 바람 등 잡다한 병의 네 가지가 있다. 마음 병 역시 네 가지로 탐하는 병, 성내는 병, 어리석음 병, 오만함 등 모든 번뇌의 병이 있다.

일체의 병고를 수행의 과정으로 파악하라는 경문은 《대반열반경》에서 압도적으로 표현된다. 또한 《대반열반경》을 “제호와 같아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묘하고 먹기만 하면 모든 병이 모두 소멸되며, 온갖 약이 그 속에 들어 있다.”고 칭찬한다. 이에 대한 비유적 설명은 저 유명한 제호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비유컨대 마치 소에서 우유가 나오고 우유에서 낙이 나고 낙에서 생소가 나고 생소에서 숙소가 나고 숙소에서 제호가 나는데, 제호는 가장 훌륭하여서 먹기만 하면 모든 병이 소멸되며, 온갖 약이 모두 그 속에 들어 있음과 같으니라.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제호에 대한 거론은 확연히 대승적임을 알 수 있다. 《대반열반경》은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의 바탕이 수행적 태도여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6. 코로나19에 대한 불교의학적 견해

우리 주변에 코로나바이러스는 깊숙이 들어와 있다. 사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의 경우, 동물들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감염되는 질환의 일부이다.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 zoonosis)으로 지칭되는 질환들은 동물과 사람 사이에 상호 전파되는 병원체에 의하여 발생한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조류인플루엔자 인체감염증(AI) 등이 대표적이다. 이 코로나바이러스는 그 형태가 왕관이나 태양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야생동물들을 매개로 인간에게 전파된 것이다. 즉 야생으로부터 문명 세계에 들어온 이질적인 것이다. 이 질병들이 야생과 문명 사이의 격차를 넘어 우리 삶으로 들어온 것으로 인간들의 욕망과 무절제한 탐욕의 결과이다. 

이들 질환에 대한 대처방법의 첫 번째 조치는 집합금지 명령이다. 이는 인간의 고유한 속성인 사회성을 통제하고 격리를 생활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즉 호모 사피엔스 종의 특징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고유한 속성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절되고 고립된 인간으로서 격리와 고립이 권장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문명의 단절된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는 아날로그 방식의 일상을 폐기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새로운 디지털 방식의 사회적 관계를 권장하고 있다. SNS라는 괴이한 사회성을 취득하기를 요구하는 인간상은 이름하여 호모 디지털리스이다. 구체적으로는 호모 코로니쿠스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의 도래 이후 우리는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그 권위는 코로나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왕관의 형태 또는 태양의 형상으로 등장한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향하여 이전과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권위는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인간은 물질적 탐욕의 결과로서 무분별한 개발을 일삼았다. 그 개발의 여파는 세계적 빈부격차의 심화, 환경의 파괴와 오염, 기후의 급격한 변동과 물의 부족, 지역 간의 갈등 심화, 그리고 디지털 게임을 닮아 있는 전쟁, 사막화되는 지표면 등을 결과하였다. 이로 인하여 우리 시대는 이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난경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의 질서와 문명은 진지한 반성과 멈춤이 없었기에 새로운 권위가 필요한 것이었다고 현 상황을 해석한다면 지나친 일인가? 결과적으로 이 모든 난제들로 인하여 야생의 순수와 문명의 질서 사이의 경계선이 파괴된 것이다.

 

7. 코로나19의 시대성과 질병

시대정신과 질병의 상호관계를 염두에 두고 시대의 흐름을 분석하여 본다면 전근대 사회는 규범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규범사회의 질서는 규범에 순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범죄자나 비정상인으로 낙인을 찍으며 통제하고자 하였다. 질병에 걸린 환자들은 일종의 범죄자로 여겨지곤 하였다. 그리하여 환자들을 위한 병동은 감옥의 형태로 건설되어 운영되었다. 이렇게 감시와 처벌의 명목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규제되었다. 근대 사회 이후의 질서는 성과사회로서, 인간의 능력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에 힘입어 과도한 개발과 성장을 구가하였다. 이 흐름에서 인간들은 과도한 경쟁 구도 속에 능력의 유무에 따라 적합한 자와 무능력한 자로 나뉘어 분리되고, 함께 어울려 밥상을 차려 먹고 서로 나누는 인간의 미덕은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성을 서서히 박탈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근대 이후 디지털 문명의 성과 중시 사회에서는 적합성을 상실한 인간들을 요양원으로 보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즉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잉여인간으로 규정되며,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복지사회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질병들은 규범과 성과의 이중적 처분이 가능하도록 작동되고 있다. 감옥을 닮은 요양병원의 운영에서 전근대 사회의 감시체계가 작동하며, 일상에서 집합금지 명령과 곳곳에 설치된 CCTV는 적합성 여부를 계산하며 개인적인 성과를 강요하고, 인간들 상호 간의 대면을 금지하고 있다. 일상생활의 감시는 심지어 등산하면서도 마스크 착용 여부를 서로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또 백신 개발과 관련한 성과의 강요는 속도경쟁을 유발하며, 제약회사들에 부작용과 관련한 책임을 면해주는 정책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규율사회의 감시와 성과사회의 속도라는 이중의 통제 방식은 이렇게 코로나19의 도래와 함께 유입된 것이다. 

 

8. 코로나 사태와 간병의 문제

불교적 시선으로는 애욕의 결과로 가족이 구성된다고 설명할 수 있으나. 전통적인 가족은 친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 가족관계조차도 불온함을 넘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고 의심되는 상황이기에 이제는 명절이나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불교적 가르침은 가족이나 이웃들과 함께하는 것을 넘어 환자를 돌보는 공덕에 대하여 자비와 관련지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병자를 돌보아 주는 이는 곧 나(부처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이는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지금 몸소 병자를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어떤 사람이나 하늘, 세상, 사문, 바라문의 보시 중에서도 이 보시보다 가장 훌륭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보시를 행하여야 그것은 비로소 참다운 보시가 되어 큰 과보와 공덕을 얻어 좋은 이름이 두루 퍼지고 단 이슬의 법 맛을 얻게 될 것이다. 이른바 여래, 아라한, 등정각이 이들이니라. 모든 보시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것은 이 보시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 알고 이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곧 참다운 보시가 되어 큰 과보와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24)

위의 인용문에서는 간병의 공덕이란 결국 부처님과 아라한에 대한 보시의 일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부처님 스스로 간병을 한 기록이 율장에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병자들을 간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살펴보면, 간병이 곧 보시이자 공덕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질병을 담당하고 병든 이들을 인도하며 간호하는 공덕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간병의 주체는 대승의 태도로 보시하고 공덕을 성취하려는 수행자들 즉 승단의 일원들이다. 이들은 의학적 지식이라는 간호의 기본적 소양을 갖추어야만 하였다. 이 간병에 대한 설명은 또한 구체적으로 불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병을 간호하는 사람으로서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병은 곧 나아 병인은 병상에 눕지 않게 된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간호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의사를 분별할 줄 알고 게으르지 않아 먼저 일어나고 뒤에 자며, 항상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잠이 적으며, 마음으로 공양하여 음식을 탐하지 않고, 기꺼이 병인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이른바 간호하는 사람으로서 다섯 가지 법이며, 이를 성취하면 병이 곧 낫는다.

불교의 의료적 입장은 환자를 불온시하지 않으며, 자비행의 실천으로 연결시킨다. 인간소외의 국면에 대하여 근본에서부터 저항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의 우리 현실은 관혼상제의 전통적인 통과의례들조차 금기시되고 있다. 태양처럼 강력하며 왕관처럼 빛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위상은 우리 시대가 자초한 새로운 군주이며 현 질서가 옹립한 강력한 권력이며 과학기술이 초대한 무지막지한 속성을 지닌 거인과 같다. 

살펴본 것처럼 불교의학적 관점은 코로나19에 내재한 인간의 탐욕과 현시대의 상황을 시대정신과 견주어 분석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부 권력 중심은 여전히 코로나19의 기원이 어디인지, 무엇인지를 따지며 묻고 있다. 전 지구적 재앙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이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두 번째 화살을 자초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9. 코로나19의 극복, 욕망 제어가 답이다

불교가 제시하고 있는 건강 또는 질병에 대한 관점들은 욕망추구의 시대, 과식의 사회, 먹방이 찬탄되는 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하고 있다.  

많이 먹으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게 된다. 첫째 잠이 많아지고, 둘째 병이 많아지고, 셋째 음욕이 많아지고, 넷째 경전을 소리 높여 읽을 수 없고, 다섯째 세간에 대한 집착이 많아진다. 왜냐하면, 탐욕과 음욕이 많은 사람은 빛깔의 맛을 알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제멋대로 하는 맛을 알며, 어리석은 사람은 밥을 먹는 맛을 알기 때문이다.

경전은 과식에 대한 다섯 가지의 허물에 대한 열거를 통하여 인간의 도리를 알려준 것이다. 인간의 도리라는 것은 《금강경》의 경전 설립 이유와도 직결된다. 즉 사위성에서의 음식 탁발과 공양 이후 수보리의 찬탄이 있었으며, 그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설불의경》은 식생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세부사항도 가르침을 주고 있다.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는 것이란, 뜻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하며, 또한 네 절기에 알맞은 음식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이미 밥을 먹었는데 또 밥을 먹는 것이다. 이것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음식의 양을 조절하지 않고 먹는 것이란, 절제할 줄 모르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것이다. 이것이 양을 조절하지 않고 먹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이란, 때에 맞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다른 지방이나 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풍습도 모르면서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조금씩 먹어보지 않고 함부로 먹는 것이다. 이것이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이다. 소화되기도 전에 또 먹는 것이란, 먹은 음식이 아직 소화되지 않았는데 다시 그 위에다 또 먹는 것을 말한다. 만일 약을 먹고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이어서 밥을 먹는다면 이것도 소화되기 전에 또 먹는 것이다. 소화된 것을 참는 것이란, 대변ㆍ소변이 마려울 때 바로 가서 누지 않고, 트림이나 하품 또는 방귀가 나오려고 할 때 억지로 참는 것을 말한다.27) ■ 

 

공일 jyotisa33@daum.net 

서울대 수의학과, 동국대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학위 논문은 〈치선병비요경의 불교의학 연구〉. 백담사, 봉은사 등에서 수행했다. 주요 논문으로 〈불교 관점에서 바라본 인체 발생론〉 〈설악무산 ‘달마십면목’의 새로운 독법〉 등이 있다. 현재 서울 봉은사 교육지도법사, 동국대학교 객원교수.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