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3년여에 걸쳐 내 생의 마지막 소설 2권을 완성했다.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40여 년 전에 발표한 《솔바람 물결소리》와 속편 《연꽃을 피운 돌》 그리고 30여 년 전에 발표한 《우담바라》에 이은 장편이다. 《솔바람 물결소리》와 《연꽃을 피운 돌》이 불교의 문턱에 서서 설레는 마음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소설이라면, 《우담바라》는 불교 안으로 들어와 불교와 호흡하며 마음껏 불교를 향유했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우담바라》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7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건 불교의 생명관을 기초로 생명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였다. 생명은 살아 있음을 말하고, 살아 있다는 말은 죽음이 전제됐다는 말과 같다. 죽음의 개념이 없다면 살아 있음의 개념도 성립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난 다음의 사후 세계를 소설로 그렸다. 주인공을 일인칭으로 했으니 나 자신이다. 

그 소설을 끝낸 후 나는 다시 환생 후의 세계를 그린 작품을 완성했다. 이 두 작품을 3년 정도 걸려서 썼다. 그때 그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다. 다시 쓰라면 도저히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소설 두 권을 마지막으로 쓴 나는 나 자신을 향해 소리쳤다.

“난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내가 할 건 다 했어.”

만세삼창이라도 부를 기세로 나 자신을 향해 소리쳤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두 달 정도를 보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난 어느 날, 슬그머니 머릿속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스님들 생애를 한번 정리해 볼까?’

내가 그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그동안 몇 분의 스님 일대기를 쓴 적이 있어서다. 뿐만 아니라 30여 년 전에 전국에 계신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염주를 받아 온 나는 그 염주를 주신 스님들 100분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긴 경험이 있다. 한 분 한 분의 스님 생애를 정리하면서 받았던 환희심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던 것 같다.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해낸 나는 그 생각을 조금 더 구체화시켰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이 땅에 사셨던 스님으로 하면 어떨까?’ 1910년이면 나라의 주권이 통째로 일본에 넘어간 해다. 1910년을 전후해 출생하고, 일제강점기를 몸으로 헤쳐 나와 해방과 대한민국을 경험한 스님들,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살아오신 근현대 스님들이다. 그 격동의 시기에 스님들은 어떻게 불교를 지키고 불교를 꽃피우기 위해 애쓰셨는지를 그려보고 싶었다.

한번 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자 그 일은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일로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마음 한쪽에선 고개가 저어졌다. 일을 끝마칠 때까지 감당해야 할 긴장감이 두려워서였다. 글을 쓰는 일은 긴장감의 연속이다.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진 같은 긴장감 속에서 견뎌내야 한다. 나는 처음부터 장편을 썼기 때문에 책 한 권 분량, 아니면 서너 너덧 권의 분량이 끝날 때까지 같은 긴장감 속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새로운 일을 쉽게 매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스님 일대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내 안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으로 그 일을 함으로써 불교계에서 받았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어서였다. 스님 생애를 써야 한다는 생각과, 누가 쓰라고 권한 일도 없는데 꼭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교차하고 있을 때, 나는 주변에 있는 분들한테 상의를 드렸다.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 상의를 받은 분들은 ‘필요한 일’ ‘중요한 일’ 정도의 미적지근한 답을 주었다. 꼭 필요한 일이니 반드시 하라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분은 없었다. 그런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내다 이동인 스님을 시작으로 첫 삽을 떴다. 그러면서 나는 컴퓨터라는 공간에서 스님 한 분 한 분과 교우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건 환희고 감동이었다. 마치 한 분 한 분의 스님과 한 생을 함께 사는 것 같은 기분, 위대한 스승을 모시고 사는 것만큼 행복을 느끼는 일이 인간 세상에서 또 있을까? 나는 그런 행복감 속에서 봄을 보내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보내고 있다. 그 안에 무릎 관절 수술을 했고, 남편의 생명이 하루하루 소멸해 가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난관 속에서도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55분의 스님 생이 정리되었다. 이동인 스님, 용성 스님, 만해 스님, 수월 스님, 만공 스님, 한영 스님, 한암 스님……

스님 생애를 쓰면서 내가 감동을 받은 건 세 가지다. 지금 쓰고 있는 스님들은 조선 왕조 마지막에 태어나신 스님들이 꽤 많으시다. 몇 분 스님은 철종 때 태어나시기도 했다. 철종 고종 순종, 단군신화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대에 태어나신 스님들이 우리와 거의 호흡을 함께하고 가셨다니!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개념은 얼마나 관념적인 것인가. 조선 마지막 왕조 때 불교의 위상은 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을 만큼 밑바닥이었다. 관응 스님이 스님이 된 사실을 안 오촌 당숙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쯧쯧 머슴을 둘씩 두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사람이 왜 제 발로 걸어가 천민이 되는감.” 모두가 스님을 천민으로 보고 있는데 한 분 한 분은 제 발로 걸어가서 스님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내게 되었을까? 불교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렇게 스님이 된 한 분 한 분은 법랍 50세, 60세, 70세, 심지어는 80세가 되는 분들도 계시다. 법랍 50세라고 한 건 50년 동안을 절에서 스님으로 사셨다는 얘기다. 그다음도 마찬가지다. 절에 들어오신 스님들은 절에서 한 생을 사셨다. 50, 60년 동안, 많게는 70, 80년 동안을. 식량도 모자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아기자기한 재미도 없는 나날을 보내며 그 긴 세월을 사셨다니……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그 긴 세월을 절에서 살게 했을까? 불교 안에서 무엇을 보셨기에……

스님 한 분 한 분은 긴 세월을 절에 살면서 어떻게 하든 불교를 세상에 홍포하여 꽃을 피우려 애썼다. 참선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선(禪) 수행으로, 교학을 공부하는 스님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펴고 전하기 위해, 도량을 가꾸는 스님들은 절약하고 또 절약해 가람을 수호하고 증축하면서. 그리고 뜻 있는 스님들은 일제와 맞서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불교 정화라는 광풍을 온몸으로 껴안고 불교 본래의 청정한 교단을 지키려 몸을 던졌다. 그런 속에서도 후학들을 교육시키고, 포교를 하고, 대사회적인 역할을 하려 노심초사했다.

나는 스님들 한 분 한 분의 생애와 마주하면서 ‘이런 스님들이 계셔서 불교가 오늘 여기까지 이어져 왔구나!’ 하는 감격에 목이 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운 스승들, 우리 곁을 다녀가신 그 스님들은 무슨 말로 찬탄해도 아쉬움이 남는 그리운 스승들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나는 근 40년 동안 불교 이야기만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모 작가는 “그런 글만 쓰면 누가 당신을 문학 한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안타까워했다. 문단에서 작가로 대접받을 수 없다는 염려에서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불교를 소재로 한 이야기만 해 오고 있다. 나는 불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남지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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