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대형 서점의 문구 코너가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특히 새해 수첩을 파는 코너에 젊은 여성들이 많다. 문방구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이라 나도 그 속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훑어본다. 요새 우리나라에도 해외의 명품 플래너, 공책, 수첩들이 들어와 있다. 고급품은 20만 원이 넘는 프랭클린 플래너도 있고 헤밍웨이, 고흐, 피카소가 즐겨 썼다는 몰스킨 공책, 가죽 커버에 고무줄로 허리를 묶어 편리하고 고급스러운 시아크도 있다. 내가 좋아했던 물품들이다.

진지하게 수첩을 고르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새해에 대한 꿈은 어떤 것일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설사 아무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한 해를 보냈더라도, 새해에는 다시 한번 헛바람이라도 넣어 보려는 게 젊음이다. 젊음은 아름답지만 이뤄야 할 숙제가 있으니 고단한 시절이기도 하다.

나는 몇천 원짜리 국산 수첩 하나를 사 들고 문구 코너를 빠져나온다. 취향이 있고 값비싼 수첩에 걸맞은 스케줄이 이제 내게는 없다. 탁상 달력 하나면 족한 백수의 스케줄이 있을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해가 바뀌면 같은 종류를 새것으로 갈아쓰고 있는 수첩이다. 세일도 하는 평범한 수첩이다. 평범하지만 그 적절함이 내 용도에 맞아서 쓴다. 새 수첩을 열면서 지난 수첩을 주르륵 훑어보니, 간단하게 하루 생활을 적을 수 있는 칸에, 하루도 빈칸이 없다. ‘어제와 같다’라고 한 줄이 적혀 있는 날도 있다. 우리의 하루라는 것이 매일 길게 쓸 일이 있는 게 아니잖아, 그것이 정직한 기록이야, 라고 나에게 점수를 주었다.

내가 이렇게 수첩을 채우기로 한 동기는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기억력이 감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루 이틀만 지나면, 내가 어제 뭐 했지? 그저께 뭐 했지? 하고 되돌아볼 때,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어제라는 시간, 그제라는 시간이 바람에 날아가 허공이 되어버린 듯한 허망함. 

어떤 날은 우리 집 거사에게, 내가 어제 뭐 했지요? 하고 물었다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다. 아무리 한집에 산다 해도 어제 내가 한 일을 왜 룸메이트에게 묻나.

자서전을 쓸 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데, 기억을 못 하는 나 자신에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피하고 싶어졌다. 늙었으니까 그렇지 뭐, 하면서 넘어가고 싶은 유혹도 느낀다. 그런데 매사를 이렇게 늙었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고 넘어가는 것은, ‘나는 늙었어’ 하는 것을 내 잠재의식에 입력시키는 행위가 아닐까. 컴퓨터에 자료 입력하듯이 그렇게. 늙었는데 젊은 척하기는 싫지만, 늙은 것을 매일 강조하면서 살 필요야 없지 않나.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수첩에 적는 거였다. ‘그 친구를 내가 언제 만났지?’ 하고 궁금해지면 수첩을 펴면 되니까. 그 순간 기억을 못 하는 내게 기분이 나빠질 일은 없다.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기분이 저조해지는 일은 피하고 싶다. 기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빠르게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결과 얻은 작은 해결책이다.

어느 선승(禪僧)이 그랬다.

“앞산의 경치를 보고 싶으면, 내 집의 앞 담을 낮게 쌓아라.”라고. 

이런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매일 매일 그날의 일을 짧게라도 기록하다 보니, 덤으로 묻어오는 것이 있다. 5분, 10분간 적으면서 그날의 일을 돌아보게 된다. 미워했던 일, 화냈던 일, 짧은 한마디로 상처 주고 상처받은 일, 발밑을 살피면서 가야 하는 산길에서 다른 생각에 골몰하다가 넘어진 일 등등. 일이 벌어진 그 순간에 정리가 안 되었던 마음의 찌꺼기들을 걸러서 버리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날 다 버리지 못하고 다음 날로 끌고 가는 일도 많지만, 그건 내일 또 청소하기로 하고. 내일도 안 되면 모레 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나이에 와 있다. 내일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정 지을 수만도 없는 것이, 재수 없으면 오래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젊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하루하루의 무게가 이즈음에는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몸과 마음을 누른다.

노년을 사는 지혜랄까, 지금이야말로 어떤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노년의 삶이란 극복하는 삶이라기보다는 타협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과 마음에 하루씩을 걸고 타협하는 것, 이즈음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노년에는 이렇게 지내야 한다’ ‘건강에 무슨 음식이 좋다’고 회자되는 그 많은 정보들,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말의 잔치일 뿐이다. 내가 지키고 싶고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몇 가지만을 정해서 그 루틴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매일매일 계속하면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 매일 매일 하는 것의 힘을 믿고, 그날까지 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씩 하루씩 살아가는 것이다.

이창숙 / 불교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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