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불교, 그 전래의 역사와 현황

불교의 기원과 교설적 발전은 분명 인도 및 아시아 등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불교의 영향력은 더 이상 지역적 구분으로 범위를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 종교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독일에 불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약 150년 전의 일이다. 아시아에서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불교가 전래된 북미나 호주 등의 지역과는 다르게, 독일을 포함한 유럽 지역의 불교는 학자들의 지적 관심에 의해 자발적으로 소개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불교는 종교로서 유럽에서 괄목할 만한 가시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이 가시적 성장이란 다양한 불교 종파에 따른 종교 건축물, 사원, 수행 센터 등의 설립과 같이 신도 공동체가 모여 활동할 수 있는 거점들이 확산된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종교보다는 문화적 트렌드로서의 모습도 공존하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 글은 독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그 발전 양상의 개괄과 독일에 미친 영향을 통해, 현재의 모습과 전망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독일의 불교 전파: 역사적 전개

독일에서 불교가 언급되기 시작한 초창기,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등과 같이 불교 교리를 언급한 철학자들은 불교의 ‘무상’이나 ‘무아’를 허무주의적 관점의 일부로 보았다. 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불교의 단면을 오해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기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를 독일에 불교를 실질적으로 소개한 첫 철학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입장 또한 인도 불교 문헌의 내용을 해석했다기보다는 불교를 자신의 철학을 확인시켜주는 사상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비록 이들의 시선이 단편적이거나 일방적인 측면이 다분했다고 할지라도 유럽 지성인들에게 불교가 어떤 자극제가 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유럽 불교학의 초석을 놓은 뷔르누프(Eugène Burnouf)에 의해 프랑스어로 인도불교의 역사에 대한 저서가 1844년에 출판된 이래, 독일의 동양학자들에게 불교는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개론서와 문헌 번역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이후를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불교 전파와 관련된 중요한 일들을 크게 초창기, 정체기, 회복기, 현대의 시기로 구분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창기: 불교의 소개와 바이마르 공화국(19세기 중반~1933년)

독일에서의 불교 전개는 학문적인 영역에서 출발했는데, 이는 비단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일어났다. 인도학 학자였던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1854~1920)는 빨리(Pāli)어 문헌 연구를 기반으로 역사적 인물로서 붓다의 생애와 철학에 대한 책(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 1881)을 저술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이듬해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카루스(Paul Carus, 1852~1919)는 1882년에 《어느 불교도의 노래(Lieder eines Buddhisten)》(1882)라는 책을 출판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불교 저널을 발행했다. 

수바드라 빅슈(Subhadra Bhikshu)라는 필명을 썼던 짐머만(Fri-edrich Zimmermann, 1851~1917)은 스리랑카의 불교교육용 자료를 활용 ・ 정리해 불교 교리 문답서(Buddhistischer Katechismus, 1888)를 출판했는데, 초판이 발행되자마자 순식간에 팔려나갔을 정도로 인기를 얻어 3쇄까지 출판되었고, 1908년에 발행된 인쇄본까지 치면 총 1만1천 부 정도가 판매되었다고 한다.

불교 사상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이 생겨난 후, 집단적인 종교적 움직임이 시작된 데에는 독일인 인도학자 자이덴스튀커(Karl Sei-denstücker, 1876~1936)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인도학자이자 불교도로서 불교를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한 강연을 기획하였다. 이를 위해 1903년 8월 15일, 라이프치히(Leipzig)에 독일불교선교회(Buddhistischen Missionsverein für Deutschland)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1906년에 ‘독일불교도연합(Buddhistische Ge-sellschaft für Deutschland)’으로 이름을 바꿨다. 독일인 최초로 테라와다 승려가 된 냐나띨로까(Ñāṇatiloka Mahāthera, 독일 이름 Flourus Anton Gueth, 1878~1957)도 이듬해인 1904년에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고, 1906년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 말씀을 정리한 책(Das Wort des Buddha)을, 1907년부터는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를 독일어로 번역,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과 더불어 1918년부터 노이먼(Karl Eugen Neumann, 1865~1915)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와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의 독일어역을 출판했다. 오스트리아 태생 노이먼은 독일에서 인도고전어를 수학하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빨리어 경전의 독일어 번역에 평생을 마쳤다. 그는 불교를 학문만이 아니라 종교로서 받아들인 인도학 학자들 중 한 명이다. 바우만(Baumann)과 같은 현대 종교학자는 카루스와 노이먼 등을 “스스로 불교로 개종한 학자들”로 지칭한다. 경제적 궁핍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빨리어 경전 번역에 몰두한 노이먼의 업적과 삶은 그의 생전보다 사후에 학계뿐만이 아니라 유럽 불교도들에 의해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같이 20세기 초반 생겨난 독일 불교학의 결실인 경전 번역이나 소개서들은 문학 등 광범위한 장르에도 영향을 주었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1922년 발표되었던 헤세(Hermann Hesse, 1877~1962)의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는 독일 젊은이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는데, 여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상황에 심적인 평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데 불교 교리가 호소할 수 있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적 관심은 불교 공동체의 설립과 활동으로도 이어졌는데, 독일의 초창기 불교 신자 한 명이자 화가였던 그림(Georg Grimm, 1846~1887)도 자이덴스튀커와 함께 구불교단체(Altbuddhistische Gemeinde. ABG)를 1921년에 창립했고, 대중 강연을 통해 불교를 일반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공헌했다. 이즈음 독일의 관심은 인도, 스리랑카 불교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의 동아시아불교로도 넓혀진다. 1922년 슈타인케(Martin Steinke, 1882~1966)도 ‘붓다 공동체(Gemeinde um Buddha)’를 설립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계를 받고 다오준(道峻)이라는 법명으로 활동했다. 

다양한 불교협회의 설립과 활동이 일어났지만, 실질적으로 모임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불교 건축물이 만들어진 것은 의사이자 불교도였던 달케(Paul Dahlke, 1865~1928)에 의해서였다. 스리랑카 등지를 포함한 세계 일주 여행 후 불교도가 된 달케는 처음에는 독일 북부 쥘트(Sylt)섬에 스투파 건립을 계획했으나, 관광지인 쥘트가 수행처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획을 변경해 베를린 북부의 프로나우(Fronau)에 1924년에 ‘불교의 집(Buddhistische Haus)’을 세웠다. 이는 불자들의 수행 공간과 사원 형식으로 기획된 독일의 첫 불교사원으로서,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25년에는 독일 영화감독 오스텐(Franz Osten, 1876~1956)이 붓다의 일대기를 다룬 〈아시아의 등불(Die Leuchte Asiens)〉이란 영화를 인도에서 촬영하였다. 또한, 미얀마에서 냐나띨로까를 스승으로 만났고, 인도와 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한 불교 전통을 접하고 가르치던 고빈다(Lama Anagarika Govinda, 독일 이름 Ernst Lothar Hoffmann, 1898~1985)도 티베트불교를 기반으로 1933년에 ‘아리야 마이트레야 만달라(Arya Maitreya Mandala, AMM)’를 설립해 신도를 모집했다. AMM은 이후 차츰 규모가 커지면서 1952년 독일에 베를린 지부를 세웠다. 

독일의 초창기 불교 전래는 식민지 시대 동안 피지배국 문화 연구의 필요성에 의해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와는 달랐다. 독일의 경우는 빨리와 산스끄리뜨 등의 문헌학 연구 위주의 고전주의와 더불어 고대 경전의 연구를 통한 인류 역사의 근원과 정신사 추적이라는 낭만주의적 흐름의 영향을 받아 이뤄졌다. 독일에서 불교학은 고전인도학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의 고전인도학에 대한 높은 관심은 여타 유럽과 미국의 인도학 교수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교수직이 독일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불교학 연구자들이 불교도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불교학의 영역이 점차 확장되어 갔던 것은 분명하지만, 종교로서 불교의 성장은 그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구에서의 불교 발전사에 대한 연구들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미국 등에서 불교에 우호적이거나 신자였던 사람들의 특징을 ‘낭만주의적’ ‘신비주의적’ 그리고 ‘이성주의적’의 세 유형으로 분석했다. 그 틀에 맞춰 말하자면, 초창기 독일의 불교 전파는 주로 세 번째 유형의 주도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정체기: 나치 독일 정권(1933~1945) 

나치 독일(NS-Statt) 기간인 1933년에서 45년 사이에는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의 영향으로 독일에서 일어났던 기존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더 이상 확장되거나 발전하지 못하는 정체기를 겪게 된다. 독일 정치가이자 나치당의 친일대장이었던 힘러(Heinrich Himm-ler, 1900~1945)와 같은 인물은 불교를 나치즘의 옹호를 위한 도구로써 적극 이용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불교 관련 연구와 활동은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아리안(Aryan)이란 기원에서 찾고자 한다거나, 일본식 선(Zen)을 사무라이 문화와 연관 지어 살피는 정도였으니,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아리안에 의한 인도 고대 종교 기원을 티베트에서 찾으려는 〈티베트의 신비(Geheimnis Tibet)〉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이 또한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선전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즉, 이 기간은 독일 불교 전래의 정체기이자, 일종의 왜곡과 퇴보를 하게 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회복기: 분단 독일에서의 불교 (1945~1990)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금지되었던 불교는 다시 회복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독일은 분단을 겪게 되었고, 이로써 동독과 서독의 불교 발전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특히 동독에서의 불교 발전은 서독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었다.

서독에서 대중 강연이 시작되고 관련 서적이 다시 제작되기 시작했다. 데베스(Paul Debes, 1906~2004)는 1948년에 ‘불교 세미나(Buddhistische Seminar)’를 열어 불교의 가르침을 서구에 적극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했고, 1955년까지 《지식과 변화(Wissen und Wandel)》라는 이름의 저널을 두 달에 한 번꼴로 발행했다. 같은 해, 철학자인 헤리겔(Eugen Herrigel, 1884~1955)도 《일본 궁도(弓道) 문화의 선(Zen in der Kunst des Bogenschießens)》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독일어권에 일본불교의 선(Zen)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1950년대부터는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이나 니치렌(日蓮) 불교와 더불어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저작을 통해 미국에서 반향을 일으킨, 젠(Zen)이라 불리는 일본식 선불교가 독일에도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다. 티베트불교 또한 이 시기부터 서독에서 퍼지게 되는데, 1952년에 설립된 AMM의 베를린 지부를 통해 독일에서도 티베트불교 신도들이 생겨났다. 서구의 불교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독일에서 불교식 수행의 유행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유행한 불교 전통은 시기에 따라서, 1950~ 60년대 무렵에는 위빠사나(vipassanā)와 같은 테라와다불교가 크게 퍼졌고, 1960~70년대 즈음이 되면서 좌선(Zazen)을 위시한 소위 ‘젠붐(Zen boom)’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선 문화의 유행이 크게 관심을 받았다. 또한 1970~8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금강승(Vajrayāna)에 속하는 티베트불교의 의례와 상징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보기도 한다. 독일도 이와 유사한 흐름으로 변화를 겪어 왔는데, 티베트불교의 강세는 1973년 달라이 라마의 유럽 순방 당시 독일 본(Bonn)에서 개최된 집회로 말미암아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들을 통해 현재 독일의 불교는 좀 더 다원화된 지형을 갖추게 되었다.

1952년에는 ‘독일불교단체(Deutsche Buddhistische Gesellsch-aft, DBG)’의 설립이 이뤄졌다. 이 단체는 1955년에 뮌헨과 함부르크 등지의 개별 단체들 및 AMM과 연합해 독일에서 가장 큰 불교 연합체로 재탄생하였고, 1958년에 ‘독일불교연합(Deutsche Buddhistische Union e.V., DBU)’라고 이름을 바꾼 후, 현재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DBU의 설립으로 개인들도 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1983년에 불교가 종교단체로서 정식승인을 받자, 이에 자극을 받은 서독도 함부르크에서 정식승인을 받기 위해 ‘독일불교종교단체(Buddhisti-schen Religionsgemeinschaft in Deutschland, BRG)’를 1985년에 설립했다.

동독에서도 인도학, 불교학, 티베트학에 대한 연구와 출판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독일인들에 의한 불교단체의 설립이나 불교로의 개종 인구는 서독에 비하면 그 수가 적었다. 그러다 베트남에서 노동 인력들이 독일로 이주해 오면서 전체 불교 인구가 늘어나는 효과를 주었다. 

1951년에 독일을 방문한 스리랑카 출신 위라라뜨나(Asoka Wee-raratna, 1918~1999)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 사회에 불교 전파를 결심하고, 이듬해에 ‘독일다르마두타협회(German Dharmaduta Society)’를 설립했다. 그 당시 달케가 세웠던 ‘불교의 집’은 종교집회를 금지한 나치 정부 동안에 방치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를 알게 된 위라라뜨나는 모금을 통해 불교의 집 건물과 부지를 인수, 이곳을 유럽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재건하여 유럽의 테라와다 불교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하면서 감화받아 불교도가 되었던 독일인 달케의 건물이 스리랑카인의 손에 의해서 다시 독일의 남방불교사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근현대 독일에서 종교로서 불교(1990년에서 현재까지)

근현대 독일에서 종교로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인구는 분명 증가 추세에 있다. 1970년대의 불교도 수는 4만 정도였지만, 2000년에서 2001년 사이에 16만 정도로 늘었고, 2010~2014년 사이에 약 27만 정도로 추정 집계되는데, 인구 대비 0.2%에서 0.33%로 증가한 수치이다.6) 

독일인의 불교 개종이 증가한 부분도 있지만, 아직까지 독일 전체 불교도의 절반 이상은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로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문화권에서 유입된 이민자의 증가가 전체 불교도 수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티베트,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스라랑카에서 온 이민자들의 불교도 비율은 80~90%를 차지할 정도로 높으며, 일본은 약 75%, 한국과 중국의 이민자 중 불교도 비율은 약 30% 전후이다.

1970년대에 30개에 불과했던 불교단체의 수도 현재는 600개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된다. 독일불교연합(DBU)에 따르면, 불교도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은 테라와다불교이며, 금강승을 기반으로 하는 티베트불교 신도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세라 한다. 그리고, 일본의 선 문화 영향을 받은 니치렌(日蓮) 신도 등이 그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불교 센터의 수에 대한 1991년에 조사에 따르면, 티베트불교 관련 센터의 수는 80개로 독일 전체 센터의 40% 정도를 차지했고, 선불교 관련은 61개 정도로 30%로 나타났다. 테라와다 센터는 28곳, 비종파적 단체는 19곳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선 센터의 숫자는 모두 150개로 늘었으며, 현재 티베트불교 관련 센터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까르마 까규 전통에 속하는 크고 작은 센터만 해도 143곳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2021년 6월 기준, DBU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불교단체는 62개로, 등록 리스트에는 선불교 관련은 17개 단체, 그중 베를린국제선원, 한마음선원과 관음선종의 세 곳이 한국 선불교 관련이고, 나머지는 일본 선불교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테라와다 전통의 불교단체는 5개, 종파에 상관없이 불교 전반에 대한 교리 교육과 수행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은 11개 정도로 집계되고, 티베트불교 센터는 22개 정도가 DBU에 속해 있다. 

최초의 불교식 건물이었던 베를린의 ‘불교의 집’은 1933년 유럽불교회의가 개최되어 유럽 불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장소가 되었는데, 그런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5년부터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독일 정부의 관리와 보호를 받게 되었다. 최초 설립이 1924년이니 곧 100주년이 되는 해를 눈앞에 두고 있다.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불교사에도 중요한 이정표들이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2015년 6월 21일 독일 레텐베르그에 위치한 아넨자 비하라(Anenja Vihara)에서 열린 수계식을 통해 독일 태생 사마네리 디라(Samaneri Dhira) 스님이 독일에서 첫 수계를 받은 테라와다 전통의 비구니 승려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27일에는 작센주 드레스덴에 불교 화장터와 납골당이 세워졌고 2019년 3월, 150명의 스님과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식 화장이 진행되기도 했다. 

현황,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들

유럽에 불교가 소개되기 이전부터 성경 연구를 위해 발전했던 유럽의 인문학은 인도학 및 불교문헌학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한 방법론과 문헌 비평의 바탕 아래 독일은 전 세계 근현대 불교학 연구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동시에 초기의 불교학은 근본주의와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불교 교리의 진위 문제에만 천착하기도 했고, 잠재적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역사에나 명과 암은 공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러한 빛과 그림자가 늘 고정된 것이라도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빨리어로 쓰인 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에 가깝다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유럽의 불교학 방법론도 시간이 지나자 각종 고전 언어로 쓰인 원전을 비교함으로써, 기존 연구의 오류를 찾아내고 나아가 동일 전승 문헌에서도 발전의 층위를 역추적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학문적 영역에서 불교가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다뤄져 왔듯이, 종교로서의 불교도 독일에서 여러 인식의 변화를 거치면서 전해져 왔다. 불교에 대한 유럽의 인식 변화는 제1, 2차 세계대전의 전후로 해서 생겨나는데, 이는 초창기와 다르게 불교가 지적 만족의 측면만이 아니라 믿음과 수행의 측면에서 다가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전쟁을 통해 물질적인 면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독일 사회와 독일인에게 불교는 평온을 주며 세상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서구의 불교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자면, 아시아의 불교 문화권에서 일부 재가 불교도들은 불교를 ‘사원에서 행하는 의례의 참가 및 관련 신앙 활동’과 ‘불교 교리를 공부하고 그에 따라 행하는 수행’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구성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신도와 출가자의 역할을 구분해 온 관습이 고착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서구의 비불교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재가 신도에게 불교란 ‘불교식 수행의 직접 경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이처럼 상반되는 태도는 불교를 접하게 되는 문화적 관습적 배경의 차이, 종교관 등의 다양한 차이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에서 세계 종교로서 불교의 가시적 성장은 근래 반세기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각종 전통 불교 양식에 따라 베트남, 태국, 일본식의 다양한 사원들이 세워지고, 수행 센터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등의 괄목할 만한 변화는 지난 몇십 년간의 일이다. 불교 관련 출판물이나 대중 강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쉽게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어떤 특정 불교 종파를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 우호적인 인구를 모두 포함한다면 독일의 불교 신자 수는 수치상의 숫자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불교도가 아닐지라도 대다수 독일인에게 불교식 명상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독일에서 불교의 저변 확대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불교의 종교적 색채가 배제된 채, 심리치료법이나 유행으로 불교의 이미지가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될 수도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상점이나 발코니 등에 불두(佛頭)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풍경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교도들은 불교권의 국가와 영역을 침입했을 때 그들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상징적인 행동으로서 불상의 머리를 잘라냈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이러한 역사를 상기할 수 없는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부처의 머리는 그저 동양의 신비한 종교적 장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이는 불교가 어느 정도 핵심 교리와 수행법에 있어 탈종교적 형태로써 대중적 흥미를 이끌어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탈종교적 이미지로 인해 어떤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잠깐 언급했듯, 독일의 지속적인 신도 수 증가에는 베트남, 태국, 라오스 등지에서 온 이민자의 비율이 일조했음도 재고해 봐야 한다.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베트남불교식 사원과 불탑(pagoda)이 독일 하노버에 세워져 있다. 이민자들의 불교 공동체는 유럽이라는 이국의 땅에서도 그들 고유의 불교 양식과 의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한 결과로 불교사원과 센터의 양적인 수가 증가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활동은 현지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종교 활동은 도리어 보수화되거나 폐쇄적인 경향을 띠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민자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이민 2세대와 3세대에 속하는 세대들이 조부모나 부모 세대와는 다른 불교 인식을 보이기도 한다.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 이민자 세대들일수록 여타의 독일인처럼 불교에 대한 종교적 믿음과 의례 등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기보다는 교리를 철학적 윤리적으로 점검해 실천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불교 인식에 대한 미묘한 간극은 이민자 세대만이 아니라 불교문화권에서 자란 ‘전통적 신자’들과 새롭게 불교를 접한 ‘현대적 신자’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四諦)와 연기(緣起), 무상, 고, 무아 등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지니는 종교적 가치는 서구에 불교가 전래되는 양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가치를 평가하는 시선과 구현하는 방식이 계속해서 변화를 겪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독일 등의 유럽에서 아무리 불교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할지라도, 유럽의 다수 종교로서 바뀌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게 가능할지는 불확실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이 굳이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이 불교 신도 수의 증가와 단순히 외연의 확장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남아 있는 현실적 과제는 불교 신도가 되는 일이 단지 유행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아시아란 지역적 뿌리에만 묶이지 않는 독일의 불교를 어떻게 세워나갈 수 있는지가 아닐까 싶다. ■

 

방정란 junglan.bang@gmail.com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10세기 전후의 산스끄리뜨 사본 연구와 중기 인도의 샤이바 딴뜨라 문헌인 Tantrasadb-hāva의 비판교정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본 연구와 비판교정본 제작을 통해 문헌 비평적 관점에서 밀교와 샤이바 등의 인도 딴뜨리즘 상호 관계, 발전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일본 대정대학교 종합불교연구소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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