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서양으로 가다

1. 들어가는 말

“함께 일어서기 위해 함께 참선한다(Sitting Together So We Can Stand Together).”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는 영어의 ‘참선하다/앉다(to sit)’와 ‘대항하다/일어서다(to stand)’라는 표현의 대조의 맛을 살릴 수는 없지만, 이 표현은 미국불교 현주소의 주요한 모습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종교와 철학은 인간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와 궁극적인 진리에 관한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한다고들 한다. ‘궁극적’이라는 말은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서 ‘보편적’이라는 개념으로도 이해되어 왔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인가? 보편적이라면 그 보편은 특수라는 현실로 나타날 때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이 글은 불교라는 보편이 미국이라는 특수한 현실을 만나서 만들어낸 미국불교에 대한 몇몇 다른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모습은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습, 불교를 수행하는 미국 불자들의 모습의 두 양상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21세기, 서구라는 특정 시공에서 새롭게 발전하는 불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 종교, 문화 그리고 불교

식민주의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된 유럽의 불교와 달리 미국에서 불교의 시발점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시작한다. 1893년에 열린 시카고종교박람회(World Parliament of Religions)는 선불교가 미국에 공식적으로 입성한 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의 문턱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 박람회의 준비위원들은 20세기에는 어떤 종교가 번성하게 될지 관심을 모았고, 이런 의미에서 세계 주요 종교의 지도자들을 종교박람회에 초청했다.

여기에 일본 임제종 선사 샤쿠 쇼엔(釈宗演, 1860~1919)이 불교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초청을 받았다. 샤쿠 소엔 선사는 미국에 선불교를 전파한 최초 선사 중 하나였다. 미국 불교사에서 샤쿠 소엔은 선불교를 미국에 소개한 것만큼,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스즈키 다이세츠 테이타로(鈴木大拙 貞太郎 1870~1966)를 미국에 소개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시카고종교박람회 주관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 카루스(Paul Carus, 1852~1919)가 세계 종교의 주요 저서를 번역하여 함께 묶고자 샤쿠 소엔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제자 스즈키를 소개해 주었다.

이 사건은 20세기 미국불교의 커다란 근원을 이룬다. 스즈키는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영어 번역서들을 출판해냈다. 그는 또한 《선불교와 일본문화(Zen and Japanese Culture)》(1959)와 같이 선불교를 일본의 문화와 연결하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리하여 선불교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영어로 선(禪)은 중국어 발음인 챤(Chan)이 아니라, 일본 발음인 젠(Zen)으로 보편화되고, 그러한 선은 또한 일본문화의 정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 불교학에 미친 스즈키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20세기 말쯤 되면 이제 어지간히 성숙된 미국의 불교학은 자신들의 학풍이 스즈키의 불교 해석 영향하에서 선불교사를 왜곡했음을 인지하는 자체 반성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는 고인이 된 존 맥레이 교수의 《선을 통해서 보기(Seeing Through Zen)》(2004) 같은 서적은 이러한 스즈키류 선불교학에 대한 자체 반성의 결과물이다.

역사적 문헌학에 중점을 두고 있는 유럽 불교학과 달리 미국에서의 불교는 종교 사상적인 접근이 처음부터 우세했다. 세계 종교에 새로운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던 시카고종교박람회가 선불교의 시발점이었다는 것도 이미 그 상징이다. 선불교는 20세기 내내 미국 불교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된다. 과연 선불교란 무엇인가? 참선을 통해서 보는 세상은 어떤 것인가? 깨침이란 무엇인가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불교에 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불교의 이러한 시발점은 1세대 미국 불자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중반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를 수행하기 시작한 미국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3. 선불교와 반문화 운동

선불교가 참선을 통해 이르고자 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선불교가 말하는 인간과 경험, 존재의 문제는 미국 선불교학의 시작부터 주요 주제였고, 미국 불자에게도 이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선사들로는 달마 대사(菩提達磨, 5~6세기), 육조혜능(慧能, 638~713), 일본의 도겐(道元希玄, 1200~1253) 등이 미국의 많은 학자, 수행자들에게 선불교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무아란 어떤 경지인가, 선불교가 이야기하는 불이(不二)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주체와 객체의 차이가 분명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사고와 행위의 근거를 두고, 개개인의 사고는 개체가 형성한 주관성에 의거한다고 믿는 서구적 사고관에서, 그리고 객체는 주체의 사고 양상에 의해 이해된다고 믿는 서구 근대의 사고관에서, 주체를 버리고 주관과 객관의 합일을 통해 자신을 형성한다는 선불교의 가르침은 미국인들에게는 모순적이고 비논리적 사고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선불교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 중 하나가 도겐의 〈현성공안(現成公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불도를 아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법에 의해 실증된다는 것이다. 만법에 의해 실증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타인의 몸과 마음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깨침의 자취가 쉬는 것이다. 자취조차 쉬어 없는 깨침이 영구히 계속되는 것이다."

자아의 이성적 능력을 사고, 판단, 행위의 근거로 보는 근대 서구 사회의 기본 사고는 미국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한 문화 사상적 바탕에서 자신을 잊고 자신과 타인의 몸과 마음을 벗어나, 깨침의 흔적까지 벗어나라는 선불교의 가르침은 미국적 사고방식에서 보았을 때는 전적으로 반상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서구 근대 사회는 인간 개인의 이성적 사고는 행위와 가치 판단의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행위는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며 결국,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행위의 의미가 된다는 논리를 전개해왔다. 도겐이 말하는 깨침과 자아 탐구는 이 직선적이고 목적론적 사고방식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깨침은 수행의 저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버리는 것에 있으며, 마지막 목적으로 저 끝 결승점에 있어야 할 깨침은 그 흔적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선불교의 이와 같은 반상식, 비논리, 비이성적처럼 보이는 가르침은 또한 공안선 서적의 번역 연구를 통해 더 확장된다. 《무문관(無門關)》 《벽암록(碧巖錄》에 나타나는 선문답은 미국인들에게는 반지식, 반이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유럽 불교사상에서 무, 무아가 동양 사회의 이성 결여로 보인 반면, 미국 사회에서 선불교는 1960대 미국 사회에 큰 흐름으로 일어났던 반문화 운동과 함께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월남전 참전을 통해 미국인들은 이성과 논리에 근거한 사회 체계가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며, 사실상 기득권의 유지를 정당화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과 논리는 전쟁의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지성인으로 하여금 반지성, 반이성, 반논리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한다.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미국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작가들의 작품은 불교 사상이 미국의 사회 정치적 상황과 연결되어 어떻게 사회에 녹아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이성, 반논리를 통해 보는 인간 삶이 미국 불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보여주는 한 예로 샌프란시스코 선센터를 창시한 스즈키 로시(鈴木俊隆, 1904~1971)의 책 《선의 마음, 초보자의 마음(Zen Mind, Beginner’s Mind)》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1970년에 출판된 이후 꾸준히 미국 불자들이 애독하는 책이 되어 왔다. 이 책에서 스즈키 로시는 선 수행은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습관화되고 고답화된 우리의 마음을 열게 해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한 사물을 처음 만났을 때 아무 선입견 없이 그 사물을 대하듯이 참선을 통해서, 고정관념과 이기주의로 닫힌 주관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초심자의 마음을 통해 진실되게 타인과 대상을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주관과 ‘대상’이라는 객관의 이원론이 여기서 문을 열고, 주관과 객관이 매개와 틈 없이 서로 만나는 순수경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앞에 언급한 도겐의 현성공안이라는 말 그 자체에서 보듯, 현실이 주체에 의해 왜곡됨 없이 나타나는 것이고 주체는 그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선의 체험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불교학에서 그리고 미국 불자들에게 선불교는 이처럼 주체와 객체의 만남의 새로운 형식, 혹은 진리와의 만남에 대한 가르침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와 같은 선불교 인식은 곧, 그 주체가 존재하는 사회와 선불교가 말하는 순수경험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발전한다.

참선을 통한 주체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 직관적인 이해가 주체의 현실과의 직접적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면, 그 경험은 주체의 타인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에서의 관계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미국불교와 미국 불교학의 특징 중 하나인 불교의 사회참여 문제와 불교윤리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4. 깨침과 사회참여

무아를 깨닫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순수경험을 했다고 하자. 이 경험은 어떻게 타인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가? 주체가 순수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로 이 사회는 잘될 수 있을까? 순수경험을 한 주체는 어떻게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들도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미국불교의 초기부터 미국 불교학자, 불자들에게 주요한 질문으로 떠올랐다.

초기 선불교의 사회참여 이론은 어수룩한 면이 없지 않다. 불교의 사회참여 가능성을 논의하며 미국 학자나 불자들은 불교의 두 날개인 깨침의 지혜(반야(般若))와 자비는 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깨침을 통해 얻은 지혜는 자동적으로 자비적 행위로 이어지고 자비의 행위를 통해 타인의 삶에 도움을 주고, 사회에 공헌한다는 주장이 미국 초기 불교윤리학의 모습이다.

깨침의 지혜에서 자비로의 연결성이 이 주장처럼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깨침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깨침을 얻은 붓다는 곧바로, 자동적으로 자비의 행위를 위해 대중 구제에 나선 것이 아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안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깨달은 진리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들에게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브라마 신의 설득을 통해서야 붓다는 최초의 법의 바퀴를 돌리는 초전법륜의 설법을 하게 되는 것이다.

깨침의 지혜가 자비의 행위로 이어지려면 어떠한 과정이 필요한가? 자비는 과연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가 등의 문제에 대한 고뇌는 참여불교,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미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중 프랑스로 망명하여 활동하고 있는 베트남 승려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1929~ )의 참여불교론은 미국 불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틱낫한은 모든 불교는 참여불교라는 기치 아래 불교와 사회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설명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해왔다. 참여불교를 주장한 1960년부터 틱낫한은 “여기, 이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응하는 불교“라고 참여불교를 정의한 바 있다. 미국 불자들은 이러한 참여불교의 정신에 민감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달라이 라마의 영향이 막대했다. 티베트의 정치적 문제, 달라이 라마의 국제적 명성과 더불어, 이해하기 쉽게 쓰인 달라이 라마의 저서들은 미국 불자들에게는 불교 수행, 불교의 사회적 의미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왔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를 통해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용서, 행복 등에 관한 불교적 해석을 보여주었고, 이를 윤리와 연결시킨 새천년의 윤리학 등을 발표해 윤리, 종교, 그리고 영성(spirituality) 등 미국인의 종교 생활에서 주요한 주제들에 대해 꾸준히 불교적 해석을 출판해 왔다. 불교와 과학의 연결에 관심을 갖고, 선불교와 뇌과학 그리고 최근에는 불교, 뇌과학, 환경문제를 연결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주제들은 대부분의 미국 불자들에게 흡수되어 왔다.

5. 백인 불교, 이민 불교

최근까지 미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미국 불자들을 흔히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민자의 불교’와 ‘백인 불교’이다. 전자는 동양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정착한 동양인들의 불교인 반면, 후자는 불교를 받아들인 백인 미국인들의 불교 수행을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두 불교 수행의 차이는 두 그룹이 사용하는 언어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있는 한국 사찰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를 쓰고 설법도 한국어로 하며, 참여하는 대중들도 한국말을 쓴다. 중국 사찰에서는 중국어를, 베트남 사찰에서는 베트남어, 태국 사찰에서는 태국어를 쓰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의 불교 모임에서는 물론 영어가 사용된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 두 그룹의 차이점이 언어 차이보다 훨씬 깊은 불교와의 관계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인의 불교는 이민자의 불교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인도에서 기원전 5세기에 시작한 불교가 1세기 정도를 시작으로 중국으로 전파되어서 동아시아불교를 형성했다. 동아시아불교는 사실상 인도의 불교와는 다른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우리는 중국 전통 사상, 한국의 전통 사상, 그리고 일본의 전통 사상이 인도의 불교와 만나면서 이루어진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도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은 동아시아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혹은 동아시아불교는 인도불교의 답습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와이대에서 강의했고 인도불교로 유명했던 데이비드 칼루파하나(1936~2014) 교수의 불교철학 책을 보면 불교철학은 인도불교에서 끝난다. 그리고 선불교에 관한 아주 짧은 글이 첨부되어 있다. 칼루파하나 교수는 동아시아불교를 자신의 책에서 다루지 않는 이유를 동아시아불교는 인도불교의 답습이므로 따로 다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가 서구로 전래된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서구 불교가 태어나서 성장해 왔다. 인도 불교학자가 동아시아불교를 마치 인도불교의 답습이라고 보듯, 아니면 정통성이 결여된 불교로 보듯, 동양의 불교학자들은 미국불교를 불교의 한 아류일 뿐, 진정한 불교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와 전통이라는 것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계속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미국불교에 관한 부정적인 태도와 달리 일부 학자들은 불교의 미래는 서구 불교에 있다고도 평가한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동아시아 문화와 만나서 동아시아불교가 형성된 것이 불교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면, 그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불교와 서구 사회의 만남에서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백인 불자들은 많은 경우 기독교에서 불교로 전향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종교로서 기독교를 잘 알고 있다. 미국 불자들은 일요일에 사찰에 가야 한다든가 아니면 설법을 듣는 등, 기독교에서 해왔던 수행을 불교에서 다시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대부분의 경우 미국 불자들의 불교 수행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참선 아니면 사회참여다. 미국 불자들의 주요 불교단체로 샴발라(Shambhala)와 불교평화단체(Buddhist Peace Fellowship)가 있다. 전자는 주로 티베트불교 전통을 따라 참선을 주로 하는 단체이다. 후자는 전적으로 참여불교다. 샴발라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참선을 함께한다. 불교평화단체는 미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불교적인 대안으로 참여하는 참여불교의 모습이다. 미국불교는 또한 대부분이 재가 불교다.

동양 이민자의 불교는 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띤다. 미국 이민자들에게 종교 단체는 단순히 종교 단체만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 단체는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이주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는 사회단체의 일환이기도 하다.

미국불교를 백인 불교와 이민자의 불교로 이분화하는 것은 한동안 미국 불자를 분류하는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이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십여 년 동안 미국 불자들의 담론은 이 이분법에 대한 문제를 분명히 제시한다. 불교가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디고 미국 불자들이 생겨났을 때, 미국 불자들은 주로 지식인층이나, 혹은 유명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미국에서 누가 불교를 수행하느냐고 물으면 학생들을 즉각적으로 ‘여피(yuppies)’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즉, 돈 많은 사람들이나, 혹은 리차드 기어 같은 유명인들의 일종의 호화로운 취미 생활처럼 불교의 명상이 이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불교’라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보면 ‘수입품’이다. 수입품에 대해 안목을 갖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만들려면, 그만큼 삶에 여유가 있어야 하고, 그러므로 부유층의 취미 품목으로 불교가 이해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좌선할 때 방석이 필요하다(Americans need something to sit on)〉라는 흥미로운 논문도 발표됐다. 좌식 생활을 하지 않던 미국인들이 좌선을 하려니 두터운 방석이 필요한데 그 방석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얼마에 팔리는지 등, 미국불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이다.

미국불교를 백인 불교와 이민자 즉 유색인종의 불교로 인종을 기준으로 분리하는 것은 서구 사회가 지닌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백인 불교는 대부분 명상, 아니면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한다. 이에 비해 이민자의 불교는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사찰에서는 여전히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붓다에게 예불을 드리는 의식을 한다. 이런 특징을 통해 암암리에 백인 불교는 현대적이고, 이민자 불교는 전근대적이며, 심지어 미신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학문적 연구를 볼 때도, 미국 불자들에 관한 연구는 지난 35년 동안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이민 불자들의 불교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에서 한국 불자들에 관한 연구로 샤론 서(Sharon Suh) 교수의 《기독교 세계에서 불자 되기(Being Buddhist in a Christian Wo-rld)》(2004)라는 흥미로운 연구서가 있다. 이 저서에서 서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한국 사찰 불자들을 연구해, 기독교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불자로서 불교 수행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고찰한 바 있다. 이 연구에서 인터뷰한 한국 불자 중에는 미국에서 불자가 되는 이유 중 하나로 불자가 되는 것을 한국인의 정체성과 연결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에 관해서는 그 반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미 종교학회에서 젊은 한국인 2세대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이유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한 연구는 이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인이 되면 미국 주류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한국계 혹은 동양계 미국인은 소수자에 속하지만, 기독교인은 주류라는 것이다.

미국불교를 백인 불교와 이민자(유색인종)의 불교로 분리하는 인종주의적 문제에 대한 미국불교의 비판이 젊은 미국 불자들로부터 심각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세대 변화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민자 불교는 미국의 이민법이 1960년대에 개정되면서 다수의 동양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현실과 관계가 없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이민자의 자녀들은 이제 이민 2세대의 성인이 되었고,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자란 미국 시민인 미국인이다. 이들은 백인 불교라고 부르는 불교를 수행하는 백인-미국인들과 다를 것이 없이 미국인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시아 불교를 백인 불교와 가르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백인 불교와 이민 1세대의 불교를 가를 때 이 둘이 서로 다른 불교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민 2세대들이 자신의 부모들과 유사한 양상으로 불교 수행을 할 때, 여전히 백인 불교와 이민자(유색인종) 불교를 가르고 전자가 더 현대적인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인종차별의 결과라는 것이다. 미국불교의 이분법적 이해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유형화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불교 수행을 인종차별이라는 사회문제와 연결시켜 가고 있는 미국 불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미국불교(Buddhism in America)에 관한 첫 번째 학회는 1997년 1월 보스턴에서 열렸다. 이때쯤 되어서 미국 불자들은 이제 미국불교가 인도불교, 중국불교, 남방불교 등의 분류처럼 불교의 한 분류를 이루어 나름의 불교 전통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 것이다. 이 학회에서 발표된 글들과 토론을 보면, 미국 불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정의하고, 미국불교를 정의했는지 알 수 있다.

미국불교를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점 중 하나는 미국의 불교학계 그리고 미국 불자들의 수행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다양한 지역, 다양한 시간의 불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학문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한국불교를 수행하고, 태국에서는 태국불교를 수행하는 것과 달리, 미국불교에는 대승이나 상좌불교라는 커다란 테두리뿐 아니라 중국, 한국, 일본,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몽골, 티베트 등의 불교가 함께 존재하고, 수행되고, 연구되고 있다. 학회에 참석한 불자들은 이러한 다양성을 미국불교의 특성 중 하나로 꼽고 있다. 또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의 동양 불교에 비해 미국불교는 남녀평등의 문제를 중요히 여긴다고 이들은 말한다.

미국 불교학회에서 발표된 글들은 그다음 해에 논문집으로 간행되었다. 이와 같은 해에 출판된 《미국불교의 얼굴들(Faces of Buddhism in America)》에서 케네스 다나카는 미국불교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특징짓는다. “인종적 구별, 민주주의적, 수행 중심, 사회참여, 적응 문제.”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1년, 미국불교의 현장은 다나카 교수가 지적한 다섯 가지가 혼합되어 새로운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 새롭게 불교학 하기  

미국 불자들의 새로운 모습으로 글을 마감하기 전에 잠깐 미국 불교학의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워싱턴 디시에 있는 프리어새클러미술관(Freer Sackler Museum)은 동양 미술 소장품으로 유명하다. 2017년 10월부터 2022년 1월까지 이 미술관에서는 불교에 관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붓다 만나기: 아시아를 가로질러 본 미술과 수행(Encountering the Buddha: Art and Practice Across Asia)〉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2000여 년 동안 존재해 온 동양의 불교를 200점 이상의 미술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전시 제목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전시는 아시아의 다양한 불교 전통에서 만들어진 불상, 보살상, 사리 탑, 불탑 등 불교 미술품을 통해 이 작품들은 왜 만들어졌고, 불교 수행에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 특별전 중 한 전시품으로 8세기 한국 승려 혜초(慧超, 혹은 惠超, 704~708)의 기행을 담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 관한 흥미로운 전시가 있다. 전시 특별 행사가 이루어졌던 2017년 12월 9일에는 미시간대학교 컴퓨터공학 전공 학생들이 관람자들에게 《왕오천축국전》을 스마트폰 혹은 아이패드에 내려받을 수 있는 앱을 설명해 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인문학에서 컴퓨터 앱을 다운로드한다면 흔히 원문이나 번역 서비스라고 생각할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앱은 혜초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불교 사상, 불교사, 불교 미술 등을 듣고 볼 수 있는 앱이다. 티베트불교로 잘 알려진 미시간대의 도널드 로페즈 교수의 저서 《혜초의 여행: 불교의 세계(Hyecho’s Journey: The World of Buddhism》(2017) 집약판을 앱을 통해서 혜초와 함께 여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로페즈 교수 연구팀은 혜초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며 불교 사상, 불교사에서 유명한 성지, 불교 미술, 불교 유적 등등을 설명한다. 이 연구는 불교학자인 로페즈 교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불교학자와 문학, 미술사, 고고학, 그리고 컴퓨터 공학까지를 총괄하는 공동 연구를 통해 인간, 종교, 예술, 과학을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이런 공동 연구를 위해서는 재정적인 지원이 절대적이다. 이 연구는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일 뿐 아니라,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인문학이 다른 학문들과 연관을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제시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로페즈 교수팀의 혜초 기행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서구 불교 연구가 학문의 일정 분야, 혹은 일정 국가의 불교, 혹은 일정 불교 종파에 관한 고립된 연구보다는 불교와 뇌과학, 윤리학, 혹은 종교학, 미술사, 고고학과 컴퓨터 공학, 혹은 한국, 일본, 중국 불교의 연관성 등 다양한 학문 분야, 국가, 지역을 함께 생각하는 학문으로 연구될 징표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에서 많이 말하는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단지 한국 불교사의 특정 인물, 혹은 특정 종단을 내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 수행 방식 등이 어떻게 세계의 다양한 현실과 연결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제시라고도 볼 수 있다.

 

7. 새로운 세대의 미국불교: 함께 대항하려고 함께 참선한다

학제간 연구를 통한 불교의 새로운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불자들의 명상과 사회운동의 결합에서도 삶의 총체성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하겠다. 앞에서 미국불교의 두 가지 주류로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샴발라와 사회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평화단체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백인 불교와 이민자(유색인종) 불교라는 미국불교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부유한 엘리트 계급의 불교로 알려졌던 명상을 사회참여와 연결시키면서, 21세기의 미국불교는 불교를 사회 현실과 한층 가깝게 끌어들이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불교 수행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철학자이면서 작가인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은 한 학회 발표에서 불교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안고 살면서 그 분노를 폭력을 통해 부적절하게 방출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분노를 조절하는 법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존슨의 지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불자들의 불교 수행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수백 년 동안의 인종차별과 노예의 역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단지 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를 거친 아픔의 역사를 각인시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무조건 분노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는 대신 “함께 저항하기 위해 함께 참선한다(Sitting Together So We Can Stand To-gether)”는 정신을 기른다. 불교의 무아의 가르침을 인종 이해에 접목시키면서 이들은 ‘인종’”은 그 자체의 본질이 있을 수 없으며, 사회가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불교의 팔정도 수행을 인종차별에 의해 주변화된 존재가 아닌 진정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찾는 일과 연결시킨다. 또한 이들은 불교 수행을 통한 진정한 자아의 발견을 1920~1930년대 있었던 할렘 르네상스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예술 문화 운동의 정신과도 연결시키면서, 바른 참선의 모습을 반인종주의 운동의 한 원동력으로 본다.

이들은 불교 수행이 단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원에 그 뜻을 두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불자인 라마 로드 오웬은 “만일 당신이 주변인이면, 당신은 흑인입니다.”라고까지 말한다. 백인우월주의 사회의 주변인으로서 흑인이 겪는 차별과 고통, 트라우마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다른 주변인들, 즉 남성 위주 사회의 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자 등등 주변인의 고통을 함께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인종주의, 사회 차별에 의해 주변화된 자아를 이들은 “절단된 자아(amputated self)”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종주의, 사회 차별이 만연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사회는 “절단된 사회(amputated state)”다. 이들은 절단된 자아로는 진정으로 참여하는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불교 수행을 통해 절단된 자아를 깨닫고 진정한 자아를 찾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은 시민사회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들의 참여불교는 명상과 사회운동이 결코 불교 수행의 두 다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 불자들의 명상과 사회운동의 결합, 그리고 모든 주변인의 고통을 함께 이해하고자 하는 모습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승불교의 21세기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8. 나가는 말

로페즈 교수팀의 혜초 연구, 불교의 참선을 통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불교는 미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21세기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오늘의 불교의 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는 또한 한국불교의 세계화, 불교의 사회참여를 말하는 한국불교가 어떻게 한국불교를 세계화하고, 절단된 사회, 절단된 개인의 삶을 진정하고 온전하게 돌리는 데 불교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종교적 세계관이 주변으로 밀려난 사회라는 것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터넷 거대 기업들은 빈부의 격차를 넓혀만 가고, 과학, 컴퓨터공학 등은 우리 사회에서 종교적 수행, 혹은 영적 수행의 의미에 대해 미미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의 겉모습 뒷면에서 우리는 서성거리는 많은 주변인들을 본다. 이 두 모습을 함께 겹쳐 놓았을 때 아마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의미 그리고 불교 수행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종차별에 대항해서 참선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는 미국 불자들의 수행이 미국 사회의 고질병인 인종차별을 개혁하는 데 얼마만큼 영향을 주는지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많은 부분은 각 개인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원동력을 얻고, 이것이 또한 불교의 가르침의 주요 부분이라고 본다면 이들은 오늘도 이를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박진영
jypark@american.edu
연세대학교 및 뉴욕대학교 석사,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철학 박사. 불교철학, 근대동아시아 철학, 불교와 서구 철학 비교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동양철학 및 비교철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 《여성과 불교철학(Women and Buddhist Philosophy)》 《불교와 탈근대성(Buddhism and Postmodernity)》 《근대 한국불교의 형성자들(Makers of Modern Korean Buddhism)》 등 다수. 현재 미 아메리칸대학 철학 · 종교학과 교수(학과장), 북미한국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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