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법스님
명법스님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바이러스의 습격으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학교가 폐쇄되고 직장은 재택근무로 전환하였고 종교시설도 문을 닫았다. 일상이 멈추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듯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급격한 변화의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평상시였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신체적 제약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고, 어디서나 마스크를 쓰고 체온을 재는 일이 일상화되었으며, 대학 강의와 각종 모임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는 등 어느새 뉴노멀에 적응해가고 있다. 불과 2년 사이에 우리의 삶은 혁신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는 지금, 또다시 돌아보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억눌렸던 소비 충동이 보복소비로 되살아나고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사회적 갈등들이 떠오르고 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성장제일주의 신화는 폐기되지 않았으며, AI와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로 융합이 심화하고 더 광범위하게 연결되고 고도의 지능화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인간의 물리적 한계와 지적 능력이 확장됨에도 불구하고 2,600여 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욕망과 그에 뒤따르는 고통은 변함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양의 물질만능주의 비판하며 동양의 영성을 찾았던 베이비부머들에 의해 서양 사회에 본격적으로 이식되기 시작한 불교는 이제 채 백 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미국 전역과 유럽, 동유럽, 남아메리카까지 전파되었다. 과연 불교가 전 세계에 이식된 뒤 세상은 변했을까? 더 많은 사람이 고요히 명상을 즐기고 있는 만큼 갈등이 사라지고 평화가 도래할까?

서양에 이식된 후 불교는 빠르게 현대적 삶에 맞게 변용되었다. 처음에는 사상가와 작가, 예술가 등 새로운 것에 민감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철학과 예술로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다음으로 자본주의 문명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새로운 자기표현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아시아 각 지역에서 분리된 채 발전했던 모든 불교 전통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만으로도 불교는 풍부해졌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지붕을 맞대고 늘어선 불교 사원들 중 한 곳을 선택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고,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아시아로부터 건너오는 수많은 고승들이 이 도시 저 도시를 순회하며 여는 대중법회에 티켓만 끊으면 언제든지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 불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불교가 하나의 취향, 내적 체험, 또는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탈맥락화되는 과정은 서양 기독교의 세속화 과정, 다시 말해 사회나 문화 전체가 기독교 신앙과 행위로 고취된 상태에서 사회적 귀속과 종교적 귀속이 연결되어 있었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권위에 의해 외부에서 부과된 규범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 현대인의 목표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 불교는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찾고, 자신을 실현하며,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나타내도록 돕는 치료법”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기성세대를 거부하고 자본주의를 반대한 반항적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동양의 영성에 대한 열광이 자본주의 문명에 균열을 내기는커녕, 쵸감 트룽파가 ‘정신의 슈퍼마켓’이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구매하듯 고를 수 있는 취향이 되었다. 불교는 노력 없이도 얻을 수 있는 기분 좋은 느낌과 피상적인 만족감을 제공하는 개인화된 영적 경험으로 오해되었다. 이러한 자동성의 환상이 비트 세대와 히피 세대에게 진지한 불교 수행을 마약과 알코올, 섹스로 치환하게 된 배경이다.

또한 서양 불교학의 가치 중립적 태도 역시 불교의 서구적 변용을 도왔다. 전통의 무게에 눌려 있는 아시아의 불교학자들과 달리, 정교분리의 정치문화와 문헌학적 실증성을 추구하는 학문적 성향은 서양인 불교학자들에게 불교 문헌을 아시아 종교문화로부터 탈맥락화하여 읽고 해석하는 자유를 허용했으며, 서로 다른 불교 전공자들과 연구결과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불교를 하나의 지식으로 성립시켰다. 다른 분과와의 융합, 특히 심리학과의 결합은 불교를 실험 가능하며 임상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한 지식으로 변형시켰다.

이제 심리학과 결합된 하이브리드 불교는 명상센터를 넘어 임상실험실, 심리치료실, 정신과 진료실에서, 그리고 교실과 운동장, 교도소, 경찰서, 군대 병영 등 일상의 현장에서 누구나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하이브리드 불교는 전통적인 불교에서 종교를 빼고 과학을 입힘으로써 전통적인 불교의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측면을 제거한, 새롭고 현대적인 불교로서 아시아 불교국가로 역수입되고 있지만, 최근 맥마인드풀니스(McMindfulness) 논쟁에서 보듯 상업화의 문제뿐 아니라 윤리의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그런데 윤리적인 것은 하이브리드 불교가 애써 배제한, 낡고 권위적이며 제도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있는 계율을 소환한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된다.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가?”라고. 영국의 좌파 사상가 테리 이글턴이 명료하게 정리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를 활동하게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내면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맥마인드풀니스의 약속을 의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단순명료한 명제 때문이다.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맥마인드풀니스에 의해 내적 통찰과 자아의 효능감이 강화될 수 있겠지만 우리를 활동하게 하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판단이고 이 판단을 통해 우리는 구체적인 사태에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바디우가 주장하듯이 그것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이글턴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믿을 때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된다.” 그러니까 지식은 실천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면 더 잘 알 것이고, 더 잘 안다면 더 깊게 사랑할 것이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무언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에밀 뒤르켐이 말했듯이 종교의 주요 기능은 도덕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감염병의 위험과 생명공학과 디지털 기술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인지적 능력에 기대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하게 하는 인내와 결단이라는 역동적인 에너지이다.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고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내거는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겨야 하고 진리에 대한 헌신과 공동체와의 연대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법승 삼보이다. 삼귀의계, 즉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를 통해 불교의 종교적 차원을 복원해야 한다.

불교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성과 없는 세월을 보냈다. 간헐적 팬데믹을 예고하는 현실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간화선이나 위빠사나, 티베트 수행법, 또는 마인드풀니스 따위의 특정한 선법이 아니다. 세계가 요구하는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의 기여, 다시 말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결단과 불교적 실천이다.

그런 점에서 서역의 불교를 중국적 현실 속으로 변용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 중국적 풍토를 바꾸었던 옛 스님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불교의 세계화, 더 정확히는 불교의 재지역화를 고민해야 한다.

 

 

2021년 12월

명법(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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