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본능과 금지된 욕망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파괴와 열정의 욕구, 광기 어린 영감과 패륜적 창작에의 끌림은 예술가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덕목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의 안주를 저버리고 본능적으로 아니 필사적으로 삶을 탕진하듯 유랑하는 인물은 남다르다. 일체의 세상 규범과 최소한의 인륜 따윈 다 내던지고 탈출을 과감하게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때로는 죽음 언저리까지 바싹 다가가 생도 사도 아닌 그곳에까지 천연덕스럽게 발을 척 내딛는, 그런 용기 내지 천분을 지닌 이들은 비범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삶은 드물다. 사회의 통념과 관습을 능멸하는 그 대안적 삶을 현실은 결코 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월, 혹은 죽음, 혹은 죽음 너머에 대한 희구는 희망의 갈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의 갈망에 더 가깝다. 일상의 세계와 단절된 별개의 세계에 대한 염원은 그 간절함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가혹한 자기 모멸과 자기 파탄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야 탐진치로 가득 찬 욕망과 유린의 욕계의 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인간들과는 성성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그렇다. 욕계의 세계에서 자아를 폐기하는 것, 다시 말해 폐인이 되는 것, 죽음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행위는, 이 세계에서 제 본래의 꼴[本性]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진정성 있는 실현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에 작가 송기원✽이 있다. 

문학은 내가 여전히 더러운 피를 간직한 채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와도 같았다. 

문학 인생 반세기에 가까운 칠십 중반의 문단 거목 송기원 작가가 8년 만에 ‘명상소설’ 《숨》을 출간했다. 

1974년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로 나란히 등단한 그는 이미 범상치 않은 천재임을 예고하면서 이후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신동엽창작기금 등 굵직한 문학상들을 휩쓸었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집스럽게 자신이 직접 체험한 육것으로만 작품을 지어가는 쟁쟁한 리얼리티와 한 송이 두 송이 제 피로 피워 올린 해당화 같은 진정성이다. “목소리에도 칼이 달려, 부르는 유행가마다/ 피를 뿜어내던 어린 작부/ 붉게 어지러운 육신을 끝내 삭이지 못하고/ 백사장 가득한 해당화 터져나듯/ 밤바다에 그만 목숨을 던진 어린 작부”(송기원의 시 〈해당화〉 전문)처럼 말이다. 

작가 송기원의 인생 궤적은 출발부터 남달랐다. 건달의 사생아로 장돌뱅이 어머니의 자식이었던 그는 태생에서부터 자기혐오와 출분으로 내몰았다. 민주화운동 한복판에서 네 차례나 투옥되었을 당시 슬픔을 가누지 못한 어머니가 자진하셨을 때 그는 마음속 천길 벼랑의 독방에서, 두 눈에서 시뻘건 피를 하염없이 쏟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1990년대 들어 국선도와 단전호흡을 거쳐 명상의 길로 들어선 송기원은 그때부터 이미 세상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인도와 히말라야 언저리, 미얀마의 명상센터, 계룡산 무문관 등에서 속세의 선을 넘는 구도를 이어갔다. 그러나 운명은 그 정도로는 이 비범한 영웅을 세상에 그냥 두기가 성에 차지 않은 것일까. 느닷없이 찾아온 막내딸의 죽음은 그나마 경계 끝에 서 있던 그의 나머지 인생에 잔인한 철퇴를 휘둘렀다. 단말마의 고통으로 벼락이 정수리에 내려꽂히듯. 

이 소설은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화자가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사마타(삼매)’와 ‘위빠사나(지혜)’ 명상을 통해 자기혐오와 죄의식, 상실의 고통을 뛰어넘어 완전한 평온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명상하는 아버지의 시선과 이승을 떠나 영혼으로 떠도는 딸의 시선이 교차하는 구조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른을 갓 넘긴 딸이 치료약이 흔하지 않은 악성 바이러스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생명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벼락을 맞은 듯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더러운 피가 바이러스가 되어 딸에게 전이되었다.’

그가 말하는 ‘내 더러운 피’의 정체란 무엇인가. 자신의 피가 더럽다고 확신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 “내가 처음으로 유서를 쓴 것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그 유서의 첫 문장이 ‘내 피는 더럽다’였다.” 그때부터 송기원은 자신의 피를 혐오하는 것을 넘어, 하늘이 내리는 천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더러운 피’가 딸에게까지 전이되고, 죽음으로부터 딸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극한으로 몰고 갔다.

이전의 그의 인생유전에는 그래도 추레한 고독과의 반려심이라던가 세속적 환락 혹은 유혹 따위에 슬며시 자신의 에너지를 맡기는 일말의 방종의 자유가 허락되었다면, 이후의 삶에는 문학을 위한 문학성 따위는 흔적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삶과 죽음, 유와 무,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라는 절체절명의 명제만 남았다. 끝없는 욕망과 탐욕으로 무한 생사유전하는 이 차안의 세계에서 어떻게 미혹과 번뇌의 흐름을 넘어 저 깨달음의 피안으로 이를 수 있을지, 그 ‘도피안(到彼岸, pāramitā)’만이 화두로 그 앞에 오롯이 남게 된 것이다. 딸을 뒤따라 죽지 못한 아비가 그나마 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이렇게 송기원의 삶은 딸의 죽음 이전과 딸의 죽음 이후로 무참하게 나뉜다. 

딸의 유골을 다 뿌렸을 때, 어느새 남해안 일대에는 이른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 낮은 언덕마다 샛노랗게 피어나는 유채꽃이며 수선화를 뒤로하고, 딸의 유골과 헤어졌다. 당장 딸을 따라서 죽는 대신, 섬망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죽음을 직면하는 데 이론 따윈 필요 없다. 오직 두 눈 부릅뜬 채 그것과 한 덩이가 되면서 죽음은 결코 추상적일 수 없음을 깨달을 뿐이다.

딸의 유해를 수습한 그는 주저 없이 미얀마 파욱명상센터를 찾았다. 송기원이 많은 수행센터 중에서 유독 사마타 위빠사나를 함께 가르치는 파욱명상센터를 선택했던 이유는 바로 사마타라는 ‘선정’ 때문이었다. 

파욱 사야도가 ‘사마타 위빠사나’라는 이른바 선정수행과 지혜수행을 병행하는 수행법을 들고나오기 전까지 미얀마에는 위빠사나 수행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붓다가 실제 깨달음에 이른 뒤에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병존하는 삼매를 통한 지혜의 깨달음이었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사마타로 깊은 선정에 든 붓다는 마침내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하고 닙바나(Nibbhana)에 이르렀으며, 사바세계와 인연이 다해 마침내 육신을 벗을 때에도 붓다는 색계 사선정에 들어 입멸했다. 

파욱명상센터에 도착한 그는 아나빠나삿띠(호흡 수행)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니밋따를 길라잡이로 색계 사선정과 무색계 사선정을 한 단계 한 단계씩 거침없이 나아갔다. 

색계 사선정은 어떤 고통도 없이 아늑한 평온만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선정의 걷잡을 수 없는 황홀과 이선정의 넘치는 기쁨, 삼선정의 지극한 행복에 몸과 마음을 몰아넣고, 삼선정의 행복을 지나 사선정에 이르면 지금까지의 선정에서 느꼈던 황홀이며 기쁨이며 행복은 눈 녹듯 사라지고, 깊고 아늑한 평온만이 남았다. 

모든 감각이나 생각을 넘어서 마음의 활동마저 멈추고, 그렇게 의식마저 사라져버린 몸과 마음의 텅 빈 공간에 오롯이 평온만이 깃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 평온만이 언제까지나 깊고 아늑하고 아득하게 이어지는 것이 사선정이었다. 

그는 그때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선정의 상태에서 딸이 간 섬망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사마타 명상의 세계를 출발점으로 살아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딸이 들어선 섬망의 세계를 그는 찾아 나섰다. 그 막막하고 두려웠을 섬망에 어떻게 딸이 홀로 들어섰는지, 그리고 그 섬망에서 어떻게 다시 죽음으로 건너갔는지, 흔적이나마 찾기 위해서…….

딸을 뒤따라 죽지도 못한 아비가 그나마 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자신도 그렇게 섬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선정에 들어 마침내 딸의 섬망과 죽음을 감지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세계는 다행히 통증은 물론 일말의 공포감이나 두려움 따윈 없었다. 병실에서 섬망에 든 딸에게 어떤 고통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는 사마타 선정의 세계가 섬망의 세계와 뿌리가 같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딸을 만나고 다시 딸을 가없는 시공간으로 떠나보냈다. 무한천공의 순흑 속에서 까시나가 사라지듯 딸은 천천히 소멸하고 있었다. 

“비록 그 뿌리가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빛과 그림자 혹은 선과 악이라는 명암으로 뚜렷하게 나누어질지라도.”

그리고 미련 없이 그는 그곳을 떠났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 진리이며, 터럭만 한 분별심으론 그것이 비록 도(道)라 하더라도 취해선 안 되는 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파욱명상센터를 떠난 그는 마치 옛날 40대의 출분 시절처럼 미얀마를 위시해서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을 한 해 가까이 만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오스의 한 폐허 도시에서 그가 환영으로 만난 사람은 한산 선사였다. 당나라 때 천태산 일대에 살면서 ‘미친 중’이라 일컬어졌던 한산자가 거짓말처럼 메콩강 강바람에 봉두난발을 휘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송기원은 섬광 같은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순간 무명의 어리석음에서 깬, 자아를 폐기한 그 빈자리에, 여전히 남아 밝게 빛나는 그 무엇이, 두 줄기 눈물 사이로 선명하게 보였다.

무명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면, 지금까지 나라고 여겼던 뼛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린 뒤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 무엇이 있다고 해도 전에 있던 것과 같은 상태는 아니다. 뼛조각들이 부서져 흩날린 뒤 그 빈자리에 무엇이 나타났을 뿐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바로 진주다. 그러고 보면 찢어진 옷을 걸치고 유랑하던 나도, 실은 진주가 비추어내고 있던 나다. 나 이외의 다른 진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진주는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다만 두 눈은 옆으로 째졌고, 코는 길이로 세워져” 있는 자신을, 무자성(無自性) 공(空) 무아(無我)로서의 자신을 마침내 온전히 만났다. 제법공성(諸法空性)의 모든 실체를 확철한 그는, 비상비비상비 무소유의 토대 위에서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외쳤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비워진다!”

그리고 얼마 후,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부질없는가를, 한 개인이 상정한 초월적 삶의 목표라는 건 또 얼마나 불확정적이며 허망한 것인가를 낱낱이 철견한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광활한 우주 속을 떠도는 방종하고 영웅적인 먼지처럼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여전히 천형의 피가 몸속을 돌아도 이젠 그 누구에게도 전이시키지 않고 그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착한 더러운 피가 되어. ■

 

박규리 biyayo@naver.com 
시인. 동국대 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1995년 《민족예술》로 등단.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와 학술서 《경허 선시 연구》가 있다. 제비꽃서민시인상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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