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성본 스님이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중국 선종의 성립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막 한국 불교학계에 입족(入足)했을 때, 필자는 당시 〈불교신문〉 기자로 있던 홍사성 선생과 함께 처음 만났다. 홍사성 선생은 필자에게 “성본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즉석에서 그러겠노라고 화답했다. 지금도 이 책은 민족사를 대표하는 저작물이다. 

성본 스님의 《중국선종의 성립사 연구》는 초기 중국 선종사를 탐구한 보기 드문 책이다. 선종의 조사인 보리달마에서 능가종과 동산법문(4조 도신, 5조 홍인), 신수의 북종선과 혜능의 남종선, 그리고 마조도일에 이르러 조사선이 성립하는 전후 약 300년간의 중국 초기 선종사를 사상적으로 밀도 있게 고찰한 역작(力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철저하게 자료를 검증 · 고증하고 종적 · 횡적으로 광범위하게 탐구한 이 책은 선종사 연구의 획을 긋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육조단경》 성립 문제(《육조단경》은 혜능의 친작이 아니다), 조사선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였는데, 조계 승단은 물론, 한국 불교학계에 주는 충격은 가히 원폭 수준이었다. 

그 후 성본 스님✽은 본격적으로 선문헌 역주 작업을 진행하여, 《돈황본 육조단경》(2003, 개정증보판 2020), 《임제록》(2003), 《무문관》(2004), 《벽암록》(2006), 《대승기신론(상 · 하)》(2019), 《금강경, 깨지지 않는 법》(2014) 등 선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승 경전과 논서를 역주 · 강설했다. 그 역주서들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은 광범위한 자료 동원과 소개, 문헌 제시, 정법의 안목에 입각한 강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종용록 강설(從容錄 講說)》(전 8권)은 그의 일련의 역주서 작업에 정점을 찍은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성본 스님의 《종용록 강설》은 선어록과 공안집을 보는 안목과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는 ‘개안(開眼)의 서(書)’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 《능엄경》 등 많은 불교 경전과 논서, 주역(周易) · 노자 · 장자 등 제자백가와 중국의 고전의 언구, 문물(文物), 고사성어 등이 대거 등장하는데, 그것이 《종용록》에서는 어떤 의미로 차용되고 있는지도 자세히 설명한다. 

또 구어체 선어(禪語)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선구(禪句)가 가지는 의미와 문화적인 설명, 선승 등 인물에 대한 정보, 전적(典籍)에 대해서도 별도로 사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설명한다. 이런 점이 어떤 선 역주서나 해설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본 역주 《종용록 강설》의 가치이다. 그야말로 ‘중국 고전의 지혜’ ‘불교 경전과 선의 지혜’ ‘삶과 인생의 지혜’가 집약된 강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일반적인 지식이나 알음알이, 중생의 소견으로 선서(禪書)를 보지 말고 정법의 안목(부처의 눈)으로 보아야만 올바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근래 필자는 직접 교정을 본 두 책이 있다. 하나는 성본 역주 《대승기신론》이고 또 하나는 바로 이 《종용록 강설》(전 8권)이다. 편집부가 눈코 뜰 겨를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번에 직접 종용록을 교정(실은 독서 목적) 보지 않는다면 내 평생에는 종용록 구경이 요원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내 교정 실력은 출판사 편집부가 공인하듯이 엉터리지만, 교정을 보면서 무궁무진하고 광활한 강설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광활한 지식의 초원, 반야지혜의 바다, 선과 부처의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정도로 펼쳐졌다. 

‘노년의 인생을 투자해서 독서할 만한 대망의 명저’이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출판사 사장의 과도한 영업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무방한 그저 그런 책을 독서하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무형의 선의 세계를 소요하면서 천하와 호흡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성본 역주 《종용록 강설》은 유명한 고전도 뛰어난 역자, 탐구자를 만나야 시대를 초월한 명저, 불멸의 고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종용록》은 1223년 중국 남송 시대에 조동종의 선승 만송행수(萬松行秀, 1166~1246)가 천동정각(天童正覺, 1091~1157)의 송고 100칙(頌古百則)에 대하여, 시중(示衆)과 착어 · 평창을 붙인 것으로, 원오극근의 《벽암록》(1125)과 함께 중국 선종의 2대 명저로 꼽히는 공안집이다.

만송행수 선사는 시중(示衆, 법문), 착어(着語, 촌평), 평창(評唱, 강설 · 평석)이라는 3가지 방식을 통하여 굉지송고를 평창했는데, 그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 선, 유교와 도교, 제자백가 등 중국 고전에 박학다식한 남송 시대 최고의 선승이었다. 중국 선종사를 통틀어 이런 안목을 소유한 천재적인 선승은 많지 않다. 특히 평창과 착어는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선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피안의 영역이다. 기실 《종용록》의 생명은 만송 선사의 뛰어난 평창과 착어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원오극근의 《벽암록》과 만송행수의 《종용록》은 중국 선불교의 정점이자 완결판이다. 《벽암록》은 북송 끝인 1125년에 간행되었고, 《종용록》은 100년 후인 남송 1224년에 간행되었다. 《벽암록》은 임제 간화선의 종지와 관점에서 제창된 선서이고, 《종용록》은 조동선의 종지와 관점에서 제창된 선서이다. 각각 간화선과 묵조선 수행(悟道 수행)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공안집의 다른 점은 ‘임제할’ ‘덕산방’에서 볼 수 있듯이, 《벽암록》은 거침이 없어서 사구백비(四句百非), 개구즉착의 관점에서 일체를 부수고 박살을 내버리는 반면, 《종용록》은 정적(靜的)이고 문학적이며, 조용하고 차분하다. 평창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종용록》은 만송행수 선사가 북경 보은사 종용암(從容庵, 종용록이라는 책명도 여기에 기인)에서 7년 동안 칩거하면서 평창한 것인데, 그가 7년 동안 굉지송고 100칙을 평창한 것은 뜻밖에도 칭기즈칸의 정치 참모였던 담연(湛然) 거사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야율초재는 《종용록》 서(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종문(조동종)에 천동(天童) 선사란 분이 송고(頌古) 100칙을 지었는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들 한다. 나는 만송 선사께 ‘이 송고에 평창(評唱)을 붙여서 후학들의 안목을 열도록 일깨워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7년을 두고 모두 아홉 차례나 보냈는데, 이제야 그 책(종용록 원고)을 받게 되었다.

야율초재가 만송 선사에게 ‘굉지송고’를 평창(강설)해 달라고 7년 동안 편지를 보낸 시점은 마침 그가 칭기즈칸을 따라 중앙아시아에 있는 알말리크(Almalik, 阿里馬城)에서 서역 원정(遠征) 종군(從軍)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만송 선사의 평창을 보고 싶어서 무려 7년 동안 아홉 차례나 편지를 보냈다고 하니, 그 구도심에 대해서는 무어라 언급하기가 불가능하다. 야율초재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서역에서 고독하게 몇 해를 지냈다. 그런데 홀연히 이 답장(만송의 편지와 종용록 평창)을 받고 보니 술에서 깨어난 듯,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듯 뛸 듯이 환호했다. 동쪽을 바라보고 머리를 조아려 재삼(再三) 재사(再四) 펼쳐놓고 음미하면서 책을 매만지며 감탄하였다. 마치 만송 선사가 서역(중앙아시아)에 오신 듯하였다. 나는 동료 관원 몇 명과 조석으로 이 책(종용록)에 푹 젖어 지냈는데, 큰 보배산에 오르는 듯 화장세계 바다에 들어간 듯하였다. 진귀한 보물들이 광대하게 갖추어져 있어 이쪽을 가도 저쪽을 가도 맞닥뜨려 눈이 풍부해지고 마음도 배불렀으니 어찌 세간의 언어로 그 만 분의 일이나마 형용할 수 있겠는가? 

만송 선사로부터 《종용록》 평창을 받고서는 ‘술에서 깨어난 듯,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듯 뛸 듯이 환호했다’는 표현에서, 참으로 《종용록》에 대한 원초적인 리뷰는 이보다 더 극진한 것이 없을 것 같다. ‘쌩쌩’ 화살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곳에서 《종용록》을 독서한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생사일여! 이상과 현실을 초월한 이사무애의 달관한 경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선(禪)의 힘이고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서역에서 고독하게 몇 해를 지냈다.”는 말은 ‘선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 혹은 ‘선의 문명과 생이별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는 데 대한 고독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서문을 칭기즈간 19년(甲申年, 1224년) 7월 15일(中元日) 아리마성(阿里馬城, Almalik)에서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리마성은 알말리크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동부 타슈켄트 주에 있는 울말리크이다. 사실 《종용록》은 만송 선사가 담연 거사 야율초재 한 사람을 위하여 7년 동안 평창 · 착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필자는 성본 스님과는 30여 년을 만나 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본 스님을 만나고 나면 꼭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게으름 피워서는 안 되지.’ 하고 분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공자(《논어》)의 발분망식(發憤忘食)이 생각나는데, 이것은 성본 스님의 탐구 정신의 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성본 역주 《종용록 강설》은 21세기 ‘신종용록’으로 ‘선(禪), 불(佛)의 세계로 가는 도피안(到彼岸)의 첩경서(捷徑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윤창화 changhwa9@hanmail.net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1999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 주요 논문으로 〈해방 후 역경(譯經)의 성격과 의의〉 〈한암(漢岩)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 대한 고찰〉 등과 저서로 《근현대 한국불교 명저 58선》 《왕초보 선 박사 되다》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등 다수가 있다. 민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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