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 지적 종교에 대한 갈구

먼저 이 글 ‘왜 지성불교인가’에 들어가기에 앞서 약간 감상적인 회고를 해야 할 듯하다. 그것은 젊은 시절 이래 어쩌면 필자에게 화두와 같았던 것이 지적(知的) 종교에 대한 갈구였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가장 오랜 정신문화를 간직한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종교 가운데서도 지적 종교에 대한 갈구는 청춘 이래 오래된 필자의 열망이었다.

다시 말해 종교가 인간 삶의 중요한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래, 어느 때인가부터 믿음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해로 납득되는 삶의 진리가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비록 종교가 삶의 비밀을 알려주는 진리를 설하고 있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믿음이 아니라 상식적인 이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진리를 설하는 종교의 형태를 필자는 지적 종교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종교에 대한 갈구는 젊은 날의 필자에게 중요한 화두였음은 지금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이러한 지적 종교에 대한 갈구와 열망은 불교를 만남으로써 해소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지적 종교에 대한 관심이 인도철학과 불교를 연구하는 길로 이끈 듯하지만, 특히 불교와의 만남은 그러한 열망을 충족시킨 듯이 생각된다. 따라서 그러한 지적 종교로서 불교를 지성불교(知性佛敎)라 이름하고 오랜 기간 그 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가 필자의 《지성불교의 철학》이다. 필자가 불교철학의 성격을 지성불교로 규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지성불교! 이 말은 필자가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했던 말로 ‘종교로서의 불교의 성격 가운데는 인간의 지성적인 요소의 발로 즉 철학적 성격이 짙게 담겨 있다’는 의미로서 필자가 붙인 말이다. 이 지성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불교가 대승불교의 철학을 거쳐 본격적 그 체계가 정립된다는 의미로서 붙인 이름이 본서의 제목인 ‘지성불교의 철학’이다. 

즉 필자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고타마 붓다의 지성이 표현된 불교를 지성불교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지성불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 지성불교가 대승불교에 이르러 그 체계가 온전히 완성되었다면, 대승불교의 체계와 붓다의 가르침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논리적 목표였다.

이 글은 필자의 이러한 생각을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알기 쉽게 대중적이면서도 약간은 학술적인 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그간 필자의 가슴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을 태워주던 불교적 체계를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광대하고 심원한 불교의 세계에서 인간의 지적 일면을 드러내는 듯한 용어로 불교를 함축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에서 인류에 의해 전승되는 종교문화 속에 고타마 붓다만큼 인간의 지성이 극도로 발현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왜 그러한 종교적 입장을 지성불교라고 표현하고 사용하는지 구체적 이유를 다음에서 밝히기로 한다. 


2. 지성불교의 정의

먼저 필자가 명명한 지성불교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성(知性)이라는 말은 인간이 외계의 대상을 받아들여 판단하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인식능력 일반의 의미를 지칭하며, 특히 어떤 현상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필자도 이러한 인간의 총체적인 판단능력의 의미에서 지성이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다양한 종교의 관점에서 불교의 특수성을 근거로 지성불교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곧 우리 인간의 정신문화를 반영하는 종교문화의 역사에서 그 종교의 핵심 개념 내지 근본 대상은 인류에게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수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서구 종교의 핵심개념으로 신(神)이나 하느님과 같은 대상, 이슬람의 알라 존재 또 이들 개념에 버금가는 것으로 붓다의 재세 시에 일반적이었던 바라문교의 브라만이나 아트만 등과 같은 개념은 오랜 기간 인류가 발견하고 존중해 온 종교적 진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브라만, 아트만과 같은 개념이 서술된 인도의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이것들에 대한 정확한 인식 내지 파악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탈(解脫)의 길로 이끈다는 찬사가 뒤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브라만, 아트만의 개념은 당연히 붓다가 재세하던 시대의 중요한 종교적 철학적 테마로서 다양한 논구(論究)가 이루어졌다.

그러면 왜 필자가 지성이라는 말을 불교라는 종교에 붙이는가? 그것은 불교가 파악하는 진리의 관점이 앞에서 언급한 종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한 그 진리의 파악에는 극도의 인간 지성이 드러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개조 고타마 붓다는 여타 종교에서 강조하는 궁극적인 존재나 실체적인 존재 등을 비판하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곧 붓다는 당시 주류의 종교로서 바라문교나 새롭게 대두한 사문(沙門)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르침을 진리로서 설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붓다는 당시 종교적 진리로 간주된 다양한 개념들을 비판하고, 그러한 개념과 전혀 다른 연기(緣起), 무아(無我), 중도(中道), 무기(無記) 등과 같은 철학적 개념을 설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진리를 믿음의 대상으로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고하고 사유해야 할 철학적 대상으로서 파악한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사유의 지적 표현으로서 불교의 등장은 동서고금을 통해 일찍이 볼 수 없는 종교로서 인류의 지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드러난 독특한 개념들이 여타의 종교적 가르침과 대비해 아주 특이하고 파격적이라는 의미에서 지성불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곧 필자는 붓다가 설한 가르침은 인류의 지성이 극단적으로 발현한 것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 무아설(無我說)이라 생각한다. 무아설이란 자아(自我) 즉 아트만(ātman)이 없다는 것으로, 영원불멸하는 자아와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자아란 개별 존재의 변치 않는 본질과 같은 것으로, 바라문교에 의하면 이 자아는 궁극의 절대자인 브라만 즉 범천(梵天)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자아에 대한 부정으로서 무아설은 범천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의 절대자인 범천에 대한 비판과 거의 같은 형태의 비판으로 중아함경에서는 3도처(度處)의 하나로서 존우화작인론(尊祐化作因論)에 대한 비판이 나타난다. 범천과 유사한 개념의 우주의 창조자인 존우가 세상을 만들어 내었다고 하는 것이 존우화작인론으로, 붓다는 그러한 존우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창조자로서 존우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의 무신론(無神論)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러한 논의는 붓다의 시대나 오늘날이나 인류의 정신적 사고는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오늘날에도 진리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러한 진리에 대한 문제점을 직시한 붓다는 동서양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설해진 적이 없는 독특한 가르침을 설한다. 그것이 붓다가 설한 연기, 무아, 중도, 무기 등의 가르침으로, 이러한 독특한 성격을 갖는 불교를 필자는 지성불교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불교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3. 지성불교의 성격

불교의 개조 고타마 붓다는 인간의 내면적 지성 곧 지적 사고의 극단적인 발로로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곧 인간을 해탈로 이끄는 깨달음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 이러한 내면적 지적 통찰에 근거해 붓다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성의 표출에는 붓다의 6년이라는 오래 시간의 수행과 번민이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바탕 위에 내면의 선정(禪定)을 통해 그 지적 통찰의 깨달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드러난 진리의 가르침이 연기법, 무아설, 중도설, 무기설 등이라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무엇인가를 믿으라는 것이 거의 없고, 스스로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 깨달아 알게 된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설하고 있다. 그리고 붓다는 자신의 말대로 따르면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설했는데, 이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붓다가 전하는 깨달음의 내용으로서 연기법, 무아설, 중도설, 무기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연기법(緣起法)은 붓다가 깨달은 내용으로, 불교 가르침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연(緣)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는 의미인 연기는 인간의 삶을 관계적으로 이해하는 불교의 기본적 사유가 담겨 있다. 곧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어떠한 조건 즉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으로, 붓다는 이러한 관계적인 원칙을 연기법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붓다가 발견했을 뿐 붓다 이전이나 이후에나 존재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 연기법은 붓다가 만든 것인지 타인이 만든 것인지를 묻는 제자인 비구에게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붓다는 비구에게 일러 말하길,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법계(法界)는 상주한다. 그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중생들을 위해 분별, 연설, 개발, 현시하신 것이다. 곧 이것이 있는 까닭에 그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는 까닭에 그것이 일어난다. 소위 무명(無明)에 연하여 행(行)이 있고, 내지 거대한 고(苦)의 집합이 있다. 무명이 멸하는 까닭에 행이 멸하며, 거대한 고의 집합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연기법은 붓다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상주하는 법칙이자 원리로서, 붓다는 이것을 발견하고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법을 통해 인간의 삶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찰하여 분석하고 제시한 초기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설이 12연기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적인 무지(無知)인 무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괴로움의 현실을 12개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12연기는 붓다의 가르침 중 현실적인 삶을 분석적으로 설명한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가르침이다. 이렇듯 초기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근본으로 간주되는 연기법은 붓다 지성의 원천으로서 여기에는 영원불멸의 절대적 존재는 없다는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곧 인류의 근원적인 사고로서 절대적인 존재를 긍정하는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문교의 브라만이나 아트만, 다른 학파들이 주장하는 변치 않는 실체와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기법의 원칙에 근거해 바라문교의 아트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무아설이다.

무아설(無我說)은 불교의 근본 특징인 법인(法印)으로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표현되는 것으로, 영원불멸의 아트만 즉 자아란 없다는 것이다. 붓다 재세 시 인도의 주류 종교로서 바라문교에서는 이 아트만을 해탈의 근거로 하여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 아트만에 대한 논의는 그 근거가 되는 브라만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이러한 아트만과 브라만에 대한 논의는 후대 인도의 철학에서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개념으로 정리된다. 곧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만 즉 범천에 의해 만들어진 이 현상세계의 존재에는 아트만인 자아가 본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류적인 관념에 대해 붓다는 무아설을 주장한 것으로, 그 근거는 우리의 삶이 연기법에 의거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아임을 논증하기 위한 우리 삶의 분석에서 나온 것이 일체법의 개념으로서 5온(蘊), 12처(處), 18계(界)와 같은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온무아(五蘊無我)나 육입무아(六入無我) 등으로 인간 삶의 현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논증하는 것은 바라문교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아설로서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가르침을 비판한 붓다는 자신 본연의 입장으로서는 중도설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중도설(中道說)이란 양극단의 입장을 떠나 올바른 길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고타마 붓다의 입장을 잘 대변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곧 기존의 바라문교가 주장하는 영원불멸하고 상주(常住)하는 아트만을 부정해 무아설을 명확하게 밝힌 붓다는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을 것이 없다는 단멸론(斷滅論)이나 일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론(虛無論) 등과 같은 견해도 올바르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일체의 윤리적인 근거를 부정하는 견해를 경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붓다는 바라문교와 같이 모든 것이 영원불멸의 절대적인 존재에 의존한다는 상주론이나 일체에는 어떠한 근거가 없다는 단멸론 등은 모두 지양(止揚)한다는 의미에서 중도설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중도의 개념이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된 것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양극단을 떠난 유무중도(有無中道)의 개념이며, 이러한 중도의 개념은 나아가 단상중도(斷常中道), 일이중도(一異中道), 고락중도(苦樂中道),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 등의 다양한 중도론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중도설을 통해 당시의 다양한 사상적 논의를 불교적 입장에서 통합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연기설, 무아설, 중도설 등은 체계적인 가르침으로서 고타마 붓다의 지성이 잘 드러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만, 더욱더 그 지성의 발로가 명료하게 보이는 것이 붓다가 설한 무기설(無記說)이라 생각한다. 무기설이란 우리 인간들에게 큰 관심거리로서 의미를 주지만 실질적으로 알기 어렵고 확인하기 어려운 삶의 비밀스러운 면으로서, 이것에 대해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14무기, 10난무기(難無記)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우주와 삶의 비밀스러운 문제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아마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붓다를 제외하고 명쾌하게 답을 하지 않은 종교지도자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우주의 비밀을 안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어서 어떻게든 우주와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그것이 오늘날의 과학적 진리와 합치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도 고타마 붓다는 그러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것을 꺼리고 그와 같은 문제가 현실적 고(苦)의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답변하지 않은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신중함이 인간 지성의 극단적인 발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깨달았다고 무엇이든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선이고 중요한지를 신중하게 가름하여 설하는 불교적 가르침을 필자로서는 지성불교의 진정한 모습으로 생각한다. 

4. 지성불교의 전개

고타마 붓다의 지성에 근거한 독특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립된 불교는 붓다의 재세 기간 인도 사회에 크게 터전을 잡고 가르침이 전해진다. 인간 내면의 지적 이해를 근거로 하는 불교적 성격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철학적 성격을 갖는 독특한 종교의 모습으로서 인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믿음의 대상을 특별히 내세우지 않고 내면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철학적인 모습은 인도 종교사회에 깊이 있는 논쟁을 가져오게 되었다. 곧 연기설에 근거해 무아설을 주장하는 불교의 입장은 브라만을 인정하고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바라문교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오랜 기간 철학적 논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대승불교의 성립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부파불교에 대한 비판은 물론 바라문교의 사상적 입장도 비판하며 불교 정신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기에 이른다. 곧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고타마 붓다의 지성적 발로인 불교적 진리가 모든 사람이 함께 체득할 수 있는 진리임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다시 말해 이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비로소 지성불교가 확립되는 토대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불교 역사에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로서 다양한 부파교단의 존재 속에 성립한다. 이렇게 새로운 불교로서 대승불교가 성립하는 데에는 당연히 기존의 부파교단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이란 고타마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이 올바로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야말로 붓다의 참뜻을 실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대승의 입장이 기존의 불교 교단과 가장 대비되는 점은 대승불교가 모든 사람의 성불(成佛)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다양한 가르침은 출가자나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것으로, 곧 모두가 붓다와 같은 인격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출가자만이 아니라 재가자가 불교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그러한 예를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한 사람들을 보살(菩薩)이라 부르고, 특히 재가의 보살을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 등으로 불렀다. 다시 말해 붓다가 설한 가르침으로서 연기설, 무아설, 중도설 등은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도 알 수 있다는 것으로, 대승의 보살들은 깨달음의 경계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은 기존의 불교 교단 속에서 그 존립의 당위성을 인정받고, 그로 인해 대승불교는 다양한 대승 경전을 제작하며 오랜 기간 불교를 대표하는 교단으로서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일찍 만들어져 대승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반야경전(般若經典)으로, 이 가운데 동아시아 불교도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대승 경전으로서 온전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대본(大本)의 《반야심경》을 살펴보면, 핵심 개념인 반야바라밀다가 선남자, 선여인을 위해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반야심경》에서는 존재하는 삶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로서 제법을 들며, 이 법들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제법성상공(諸法性相空)’ 내지 ‘오온자성공(五蘊自性空)’이라 표현하고 있다. 존재하는 현상으로서 일체를 의미하는 오온으로서 제법이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서 자성공을 통찰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 반야바라밀다의 행을 선남자, 선여인이 배우고 닦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법공상의 경계를 체득하는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은 선남자, 선여인을 포함해 보살, 부처 등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으로 닦고 배워 진리의 경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제법의 공이라는 의미는 붓다가 설한 무아설의 내용과 상통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무아설인 인무아(人無我)에 대비해 법무아(法無我)로 표현된다. 곧 붓다가 설한 무아설이 불교의 역사적 전개와 함께 대승불교에 이르러 인무아, 법무아의 2무아의 개념으로 정립되는 것으로, 이 법무아의 개념 역시 붓다의 연기법의 이념이 전제되어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야심경》을 비롯한 초기의 대승불교 이념이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대승불교 최초의 사상가인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ca.150~250)이다. 

나가르주나는 동아시아에 전개된 모든 불교 종파의 시조라는 의미로서 8종(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사에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는 새롭게 전개된 대승불교의 철학적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러한 체계를 그의 유명한 《근본중송(根本中頌)》에서 드러내 보인다. 

나가르주나의 가장 대표적인 저술인 《근본중송》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쳐 중관학파(中觀學派)가 성립되는 계기를 만들며, 실제 초기 대승 경전, 특히 반야경전의 핵심 개념인 무아설과 중도, 공의 개념이 연기법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곧 그는 《근본중송》의 귀경게(歸敬偈)에서 여덟 개의 부정으로 연기를 설명하며, 이 연기법을 설한 정등각자인 붓다에게 큰 존경을 뜻을 표하고 있다. 그리고 나가르주나는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공성의 가르침이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에 근거하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연기한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 말한다. 그것은 의존하여 시설된 것이며, 실로 그것이 중도이다.

어떠한 법이라도 연기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실로 어떠한 법이라도 공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대승불교의 사상가인 나가르주나는 《근본중송》 전체에 걸쳐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아, 공, 중도의 사상이 붓다의 연기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 속에 후대 중관학파의 중요한 교설로 등장하는 것이 승의제(勝義諦)와 세속제(世俗諦)의 이제설(二諦說)로서,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 두 가지 진리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설은 나가르주나 이후 중관학파의 역사적 전개 속에 가장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 이제설이 앞의 24장 제18게송과 결부해 정립되는 것이 승의공(勝義空), 세속유(世俗有)의 개념이다. 곧 나가르주나의 이제설에 의거하면 일체의 삶의 세계는 연기한 세계로서, 언설로 표현된 세속의 진리는 실체가 없는 제법이 서로 관계해 성립하는 가유(假有)의 세계를 나타내고, 승의의 진리는 실체를 떠난 공성(空性)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것이 세속유와 승의공의 진리를 드러낸 세계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중도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나가르주나의 《근본중송》은 붓다의 사상체계를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새롭게 정립한 것은 물론, 이러한 체계에 근거하여 아트만, 자성, 본질 등 변치 않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는 실체론을 논리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나가르주나 사상체계에서 나타나는 승의공과 세속유의 연기의 개념은 대승불교의 구현자로서 보살의 사상적 입장을 반영하며 실천적 행위의 근거가 되고 있다.


5. 지성불교와 대승보살

고타마 붓다의 지성에 의거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대승불교의 철학자 나가르주나에 의해 그 철학적 체계가 정립되며, 이렇게 정립되는 철학 체계는 대승불교 보살의 실천적 근거이기도 하다. 특히 승의공과 세속유의 이제설의 관점은 대승보살의 실천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근거임을 보여준다. 대승보살의 삶과 실천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 《대승보살장정법경(大乘菩薩藏正法經)》의 〈보살관찰품(菩薩觀察品)〉에서 보살은 기본적으로 ‘깊고 견고한 대보리심을 일으키는 자’라고 말한 뒤 보살의 정신적 자세를 밝히고 있다.

곧 보살은 12연기지 각각의 법이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조그만 법도 나거나 멸하는 실로 얻을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일체의 법은 인연으로 생기는 것으로서 주재하는 것도 없고 짓는 이도 받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곧 연기법에 의거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12연기의 각각을 살펴보면 그 행위의 주재자(主宰者)나 작자(作者), 수자(受者) 등은 없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의 주재자나 작자 수자 등은 당연히 연기법에 어긋나는 변치 않는 실체나 본질 등을 의미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이 이러한 실체적인 존재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상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은 현실적인 삶 속의 중요한 문제로서 이러한 고통이 전개되는 세계 속에서 보살은 승의공의 관점을 분명히 가져야 할 것을 〈보살관찰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계의 시설은 번뇌에 따라 구르는 것이요, 괴로움을 따라 구르는 것이기 때문에, 시설(施設)이 있는 것이나, 일체는 다 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여기서 여실히 관찰하면 조그마한 법도 지은이가 없으며, 지은이가 없으면 곧 지어진 것도 없어서 승의제(勝義諦) 가운데는 전혀 얻을 바가 없나니 이렇게 말하는바 구를 법도 없고, 구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곧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의 하나하나는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그 행위를 주재하는 행위자가 있어서 행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행위자나 행위 자체를 살펴보면 실체가 없는 공으로서 그렇게 공으로 체득되는 경계가 승의의 입장인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보살관찰품〉에서는 보살이 실체가 없는 공성을 인식하는 경계 즉 앞서 《반야심경》에서 나타나는 제법이 실체가 없다는 공상을 체득하는 반야바라밀다의 경계가 승의제의 경계인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승의공성의 경계를 체득한 보살은 실제 삶의 행동에서 붓다를 만나고 언제나 바른 법을 만난다고 〈보살관찰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리자여! 보살이 만일 이런 믿음과 이해에 머무르면 언제나 부처님을 뵙게 될 것이요, 언제나 바른 법을 듣게 될 것이며, 언제나 대중에게 봉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떠나지 않고 법을 떠나지 않으며, 청정한 대중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에서 세상에 나오시는 부처님을 만나고, 언제 어디서나 정진하여 선법(善法)을 부지런히 구할 것이다.

곧 승의의 공성을 이해하고 세속의 다양한 연기적인 삶을 올바로 이해하는, 바른 관찰에 근거한 심신의 행위가 보살이 정법을 실천하는 근본 자세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세속에서 정법을 실천하는 보살은 다양한 현실적인 삶에서 정사(正邪)의 올바른 판단을 바탕으로 선법의 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의 실천적 행위는 초기불교 이래 붓다에 의해 강조된 연기, 공, 중도의 가르침이 보살의 정신적 자세와 함께 실천적 행위의 근거로서 보살의 삶 속에서 완성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 보살의 모습은 고타마 붓다에 의해 제시된 독특한 교리적 체계가 대승불교에 이르러 그 실천적 완성을 본 것이라고 생각된다. 곧 지성적인 종교가로서 완성태를 보여준 붓다의 모습이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보살의 삶 속에서 종교적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승불교는 출가자나 재가자를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지성불교의 구현자로서 보살의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의 종교사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이는 불교는 일체중생의 성불을 근간으로 하는 대승불교의 보살에 이르러서 붓다가 의도하는 진정한 불교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대승불교의 보살을 지성불교의 구현자라 불러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6. 나가는 글: 지성불교의 의의

필자는 《지성불교의 철학》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성불교란 필자의 입장에서는 고타마 붓다의 정신세계에 대한 존중이자 대승불교의 보살 승가에 대한 공경, 그리고 대승불교의 중관철학에 대한 깊은 공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 보살의 정신과 그 실천적 자세가 지성불교가 모범으로서 배워야 할 인간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거듭 반복되는 말이지만, 중도와 연기의 개념이 불교의 핵심적 교의로서 대승불교의 보살 역시 그러한 교의에 근거하여 수행, 실천하였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도 변함은 없고, 지성불교의 입장은 앞으로도 불교의 바른 정신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불교적 안목이라고 생각한다. 단 여기에서 다시 한번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언급할 것이 있다. 필자는 지성불교의 관점이 고타마 붓다의 근본 입장으로서 불교 이해에 매우 중요한 것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측면만을 중시하여 다양한 불교의 전통을 배척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힌다.

특히 대승불교의 전통으로서 중관사상과 더불어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유식(唯識) 철학이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에서 보이는 의식에 대한 분석이나 마음의 철학을 통해 표현되는 지적 전통은 우리 불교도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곧 이러한 불교의 지적 전통은 우리 인간에 대한 세밀한 설명으로서 경청하고 이해해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지적 전통을 바탕으로 전개된 다양한 불교의 역사적 전통은 중요한 정신문화의 토대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다양한 불교사상이나 역사 전통에 대한 존중은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더라도 지성불교로 표현한 불교적 특징은 늘 소중하게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듯 고타마 붓다의 시대나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의 시대나 인간의 사유방식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러할 때일수록 불교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보다 더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특히 재가 생활을 하며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는 불교도가 있다면, 대승불교의 보살과 같은 삶은 더욱 중요한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타마 붓다의 지성적 발로로 시작된 불교가 대승불교의 보살에 이르러 누구나 진리에 뜻을 둔 사람이면 붓다와 같은 정신적 경계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불교도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역사적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 

 

이태승 tslee@uu.ac.kr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 일본 고마자와대학 박사. 한국불교연구원 원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을유불교산책》 《인도철학산책》 《샨타라크쉬타의 중관철학》 《지성불교의 철학》 《폐불훼석과 근대불교학의 성립》 등과 역서로 《근본중송》 《티베트불교철학》(공역) 《근대일본과 불교》(공역) 등 다수. 현재 위덕대학교 불교문화학과 교수, 인도철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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