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학위 논문 심사가 있었다. 대학원 강의실 한 곳의 문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았다가 책상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기저기 물수건으로 훔치고서 다시 자리하게 되었다. 종강을 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주인이 떠난 강의실에는 벌써 티가 나고 있었다. 

캠퍼스의 주인은 바로 학생들이다. ‘코로나19’ 사태로 1년이 훨씬 넘게 주인을 잃어버린 학교 교정의 모습은 가끔은 쓸쓸하기도 하고 한편 황량하기도 하다. 지난 학기부터는 실험 · 실습이 있어야 하는 학과들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대면 수업을 진행했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이 학교 교정을 왔다 갔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한 학기가 또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여름 방학을 맞이하고 있다.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에 있는 학교 캠퍼스인지라 방학이면 교정을 오가는 학생 수가 급감한다. 지역주민들이나 평생교육원에서 수강하는 수강생들이 대신 오가고 있지만,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그나마도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 이렇게 1년 반 동안 학교 교정은 주인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교정 여러 곳에는, 특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구석진 몇몇 곳들은 더욱 표가 난다. 잔디로 예쁘게 단장되어 있어야 할 곳은 이름 모를 잡초들이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다. 강의동 건물 뒤 나무들이며 특히 회양목 주변에는 관리되지 않은 듯 삐죽삐죽 삐져나온 이름 모를 잡풀들이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모습들이다. ‘맴∼맴∼맴∼’ 울어대는 한여름의 매미 소리가 왠지 답답하고 무덥게 들리는 듯하다. 

후손이 돌보지 않아 방치된 상태의 묘소를 골총이라 부른다. 잡풀들이 우거져 있어서 그 모습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조상에 대한 인식이 낮아지면서 자신 조상의 산소를 잊고 잡풀이 무성한 골총으로 남겨두는 산소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요즘은 이렇게 주인을 잃어버린 무덤들이 많다고 한다. 한여름 삼복더위와 우기를 거치고 나면 잡풀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성하게 자라난다. 

잘 다듬어 놓은 정원은 단정하고 보기도 좋다. 반대로 주인 없이 가만히 내버려둔 정원에는 온갖 잡풀들이 무성하고 나뭇가지들은 삐죽삐죽 볼품없이 자라나기 일쑤이다. 아무도 없는 방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어느덧 먼지가 뽀얗게 쌓여간다. 이것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자 이치이다. 

얼른 내 마음도 바라다본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나도 모르게 찌든 때나 먼지가 뽀얗게 쌓여간다. 볼품없는 잡풀들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자라나 있다. 내 마음속 삐져나온 미움들, 마음 한편의 응어리진 한 움큼의 서운함과 원망스러움, 한없이 널브러진 잡초 같은 서러움과 슬픔들. 쓰레기더미처럼 지저분하고 똥 무더기처럼 냄새가 난다. 

원래의 깨끗하고 단정했던 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어느덧 잡풀들이 무성한 골총처럼 되어버린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벌초를 하듯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매일같이 나도 모르게 쌓여가는 내 마음속의 먼지 알갱이와 묶은 찌꺼기를 청소하는 시간들을 가져야 한다. 

다행스럽게 진리 세계는 참으로 평등하다. 내 마음 밭 잡초 제거와 청소는 누구한테 맡길 수도 시킬 수도 없다. 돈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벌초는 힘이 든다. 그래서 벌초를 하다가 다치기도 한다. 그래서 돈만 주면 벌초를 대행해주는 업체도 생겨났다. 청소도 힘이 든다. 청소대행 업체에 청소를 맡기기도 하고 청소하는 사람을 사서 대신 청소를 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내 마음 밭 잡초 제거와 청소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내가 직접 해야 한다. 

글 쓰는 작가가 한 편의 글을 만들어내기까지에는 수십 번을 ‘고치고 또 고치는’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렇게 공(功)을 들이는 시간들이 수련과 수행의 과정이다. 글을 써 놓고는 들여다보고 고치고, 들여다보고 고치고, 그렇게 ‘고치고 또 고치는’ 행위들을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수없는 반복과정을 거치면서 ‘고치고 또 고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쓰더라도 품위 있고 멋진 글들이 된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그 모든 수련의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움에 회피만 한다면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는 인연은 만날 수가 없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일체중생은 ‘탐(貪) · 진(瞋) · 치(癡)’의 삼독이라는 세 가지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기를 힘쓰라 하셨다. 탐진치는 주인을 잃어버린 마음에 치성하는 법이다. 탐진치는 중생심의 마음 밭 한구석에 쌓여 있는 쓰레기더미이고, 삐죽삐죽 삐져나온 볼품없는 잡풀들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만 가는 먼지와 찌든 때이다. 

중생심의 잡초만 가득한 그 마음에는 본심의 꽃이 피어날 수 없고, 중생심의 악취가 가득한 그 마음에는 진여의 향기가 피어날 수 없다. 불교의 참회 수행은 정신정화의 과정들이다. 자신의 마음 밭을 정화하는 수행이다. 진정한 수행은 마음 밭에 참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참주인은 늘 자신의 마음 밭에 머무르는 사람일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 농사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은 늘 그리고 항상 마음 밭에 머무르는 존재이다. ‘일체중생(一體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듯 우리 모두는 보살(菩薩)이고 각자(覺者)이다. 

그런데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부처님은 상보살(常菩薩)이고 상각자(常覺者)라면, 우리는 어쩌다 보살이고 때때로 각자이다.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는’ 수련의 과정처럼 마음 밭의 참주인은 ‘참회하고 참회하고 또 참회하는’ 수행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정화의 참회 수행을 통해서 ‘어쩌다 보살(각자)’에서 ‘때때로 보살(각자)’로 ‘때때로 보살’에서 ‘문득문득 보살(각자)’로 더 나아가 구경에는 ‘늘- 보살(각자)’로 조각하듯 다듬어져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 마음의 주인이 되어, 부처님처럼 상보살, 상각자로 변화해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본심의 꽃’이, ‘진여의 향기’가 넘쳐난다.
 

구동현 / 위덕대 불교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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