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2,500년 불교 역사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화두이자 논란거리가 아닌가 싶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수많은 수행자가 깨달음을 추구해왔고, 깨달음에 대한 해석과 이해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 증산도의 증산 강일순 같은 분들도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종교적 실천을 제시했다. 이는 깨달음에 대한 이해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과정이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도 깨달음에 대해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다. 깨달음을 얻으면 평범한 일반인의 삶을 벗어나 초월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알고, 깨달음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책에서 설명한 대로 따라 해 보기도 했고, 주위에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분들을 찾아뵙기도 했다. 

깨달음을 얻으면 몸을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도 있고, 다가올 미래의 일들도 환히 알고, 마음만 먹으면 산도 옮기고 물도 건널 수 있는 초능력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 슈퍼맨이 되는 것으로 알고 선망해 왔던 것이다. 달마의 이야기나 이차돈의 순교, 《삼국유사》의 고승대덕에 대한 기록, 진묵대사나 사명대사의 이야기 등 수많은 깨달았다는 분들의 이야기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과 행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깨달음을 선망하며 깨달음의 그림자라도 밟아보고 싶어 쫓아다닌 지 얼추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나는 전국의 유명 사찰에서 시행하는 단기출가 수행에 참여해보기도 하고, 단식과 철야정진 등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신심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됐는지 깨달음의 언저리에도 닿을 수 없었다. 단기출가 수행이나 철야정진 등을 집중적으로 할 때는 단전 주위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입에 맞는 음식을 마음껏 먹거나 술을 좀 과하게 마시면 없어졌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은 경상대학교 명예교수인 K 교수 덕분이다. 아마 5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K 교수는 나에게 ‘깨달음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다.’라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았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깨달으면 끝나는 것인데, 깨달음이 명사가 아니고 동사라니 선뜻 이해가 안 됐다. 

K 교수는 학문하는 자세나 생활 등 어느 면에서도 성실하고 반듯한 학자였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교 내외에서도 존경받았고,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깨달음은 동사다.’라고 말했다면 그럴 만한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K 교수의 말을 틈틈이 다시 따져보게 되었다. 

이후 나는 그와 자주 만나 수행과 불교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의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K 교수는 정년을 앞둔 3년 전부터는 하루 대부분을 참선 수행으로 보내는데, 집중이 잘되고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돋아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일에 잡념 없이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K 교수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수행하게 된 데는 우연히 알게 된 한 재가 수행단체와의 인연이 바탕이 되었다. 

K 교수에 따르면 이 단체에는 오래전부터 효봉 스님과 종달 이희익 거사의 지도를 받은 진지한 재가 수행자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깨달음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다. 오로지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여 일상에서 바른 삶을 실천해나가는 것을 강조한다고 했다.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K 교수를 따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선도회 수련장을 찾아갔다. 

나는 그 모임을 이끌고 있는 법사님께 다짜고짜 “법사님은 깨달았고 하는데 깨달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자기는 ‘깨달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라며 웃었다. 깨달은 사람은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진 사람이 실망하기 딱 좋은 평범한 대답이었다. 

자리를 파하고 일어날 즈음 그는 다만 “단전호흡을 열심히 해서 단전에 힘을 기르세요”라는 말만 했다. 하지만 그 모임을 다녀와서도 나의 ‘깨달음’에 대한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머리로만 궁리하지 말고 몸으로 느껴야 한다.’라고 했던 어느 수행자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새벽에 108배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108배를 하고 1시간 정도 명상을 하고, 1시간 정도 동네 주위를 산책하며 깨달음을 비롯한 평소 궁금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았다. 

3개월 정도 지나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몸에 익숙하게 되고, 산책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환상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근세 한국불교에는 출 · 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았다는 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분들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따져보면 실망스러운 데가 많다.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 시기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은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민중들이었다.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 변화는 이 지점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런 깨달음이 무슨 소용일까. 과연 부처님도 그랬을까를 생각해보니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일에 잡념 없이 집중하는 것’이라는 K 교수의 말이 크게 와닿았다.

내가 이러한 생각에 이르기까지는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베네딕토 성인과 테레사 수녀를 비롯해 많은 가톨릭 성인들의 전기와 기록물들도 큰 영향을 주었다. 베네딕토 성인이 행한 기적은 《삼국유사》의 내용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나 한 가지 일에 몸과 마음을 집중하면 일반인이 할 수 없는 결과를 낸다는 것과,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정도와 시간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진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자기 일에 잡념 없이 집중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한두 가지 덧붙인다면 테레사 수녀처럼 겸손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조구호 / 경상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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