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읽은 책의 구절이 종종 떠오른다. “인간의 소화관은 입, 식도, 위, 소장, 대장, 항문으로 연결되며 몸 안을 관통하고 있지만 공간적으로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가운데가 뚫려 있는 어묵의 구멍 같은 것, 즉 몸의 중심을 뚫고 지나는 중공관(中空管)이다(《동적 평형》 후쿠오카 신이치, 2019: 56).” 

내 몸이라고 여겼던 소화관은 사실 외부를 향해 있다. 아니, 이미 외부이다. 내 몸 안에 있는 내 몸의 외부로서의 관, 가운데가 뚫려 있는 어묵의 구멍 같은 관을 생각할 때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나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그 흔들림을 ‘동적 평형’이라는 말로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동적인 평형은 사실상 평형 상태를 얻지 못하는 역설에 놓여 있다. 내 몸의 안과 밖을 묶고 있는 이 역설을 떠올린다. 흔들림에서만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사이에 있는 간격들만이 나 아닌 나를 지칭할 수 있겠구나 싶다. 

파도 위에 흔들리는 배는 일종의 동적 평형의 상태에 있지만 아무 움직임 없이 고정된 평형의 상태에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동적 평형은 평형 아닌 것의 평형을 지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흔들리는 경계라는 점에서 내부와 외부의 동적 평형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우연이며, 이 우연은 두 주체가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 상호의존성으로 다 풀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지칭한다. 우연 앞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는 어디에 기댈 새도 없이 스러진다. 그래서 평형 아닌 것의 평형은 우연 안에서만 작동하고, 사이 안에서만 깜빡인다.

이 우연은 상호의존성의 ‘상호(inter, 相互)’라는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흔들리는 경계를 가리킨다. 상호의존성은 각각 분리된 두 주체를 상정하고 이 독립된 주체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지만 ‘나’와 ‘너’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해 독립된 주체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답하는 것은 물음의 시작이지 끝일 수 없다. 상호가 왜 의존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일기 때문이다. 서로 의존하는 두 주체는 그 안에 분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분리 위에서만 상호성이 성립할 수 있다.

‘사이 안의 우연’은 의존관계를 넘어서 있다. 우연 안에서 의존은 상호성을 잃는다. 상호성 없는 의존이 감지하는 것은 우연에 대한 긍정이다. 좀처럼 개념을 규정하기 어렵기에 감지라고 표현하지만, 이 우연을 우리는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긍정하기에 앞서 언어화의 경계에 있는 이 우연을 무엇으로 감지할 수 있을까? 사이가 만들어내는 간격들은 동적이기에 언어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빠져나간다. 말은 테두리를 만들어 그 의미를 가두고 싶어 하지만 간격들은  테두리 안을 자꾸만 벗어난다. 우연에 대한 긍정은 체험의 영역에서, 지시되지 않은 채 그렇게 움직이면서 간격을 만든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를 어떤 말로 풀어낼까. 불교에 초학인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다. 하지만 아직은 더 사색하고, 더 고심하고 싶다. 생활에 밀착하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나의 말로 풀어낼 수 없기에 남은 것은 ‘어떻게 감지했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경계에 있음을 어떻게 감지했는지 떠올려 보면 자연스레 ‘변화’로 마음이 향한다.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이 안의 우연 그리고 그 우연에 대한 긍정은 변화 안에서 감지된다. 변화 안에서 감지되는 우연은 끝없는 물음의 형태를 가진다. 그 여러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가 등장한다. 

이 물음들은 균열과 간격이 만들어내는 우연과 대면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우연을 감지할 때 변화가 비로소 변화 그 자체로 다가온다. 길 위에 있으면 길을 알아차리는 것이 이 우연을 긍정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변화 속에 있으면서 변화를 보기 위해서 물음들이 떠오를 때 함께 떠오르는 말, 말의 테두리를 따라 나오는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 안의 간격들이 보여주는 부정성은 상호성을 벗어나는 상호성이다. 간격의 부정성만이 그 간격을 볼 수 있게 한다. 나 아닌 것이 나에게 상처를 내고 그 상처는 비로소 나를 보게 한다. 내가 아닌 것으로 있어야 나일 수 있다는 역설은 ‘즉해 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연을 긍정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도 없어질 때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내 안의 ‘가운데가 뚫려 있는 관’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관의 빈 곳을 가만히 응시한다. 물러남이 무언가를 살아 있게 한다는 점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김은미 / 한국교원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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