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남녀의 흔한 말다툼 한 대목.

“네가 그럴 수 있니?”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래, 네가 그런 인간인지 모른 내가 바보다.”

3년 정도 사귀면 이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안다. 그래서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할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런데 그 짐작에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보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듯싶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저런 인간인 줄 미처 몰랐네, 하며 자신의 사람 보는 안목이 시원찮음을 탓한다.

“네가 그럴 수 있니?”라는 물음에는, “너는 그럴 수 없어.”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다시 말해 너는 이런 사람이고 또한 그래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답변도, “네가 그런 인간인지 몰랐다.”는 한탄도 모두 한 사람의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상정하고 있다. 청춘들의 말다툼이라고 했지만, 사실 결혼한 지 30년이 훌쩍 넘은 노부부의 경우도 별로 다를 바 없다.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오래 산 만큼 나는 상대방을 잘 알고 있고, 거기에 내 배우자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 기준까지 보태서 내 아내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아상(我相)이다. 내 아내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어야 해! 여기서 벗어나면 나는 당신이 그럴 수 있냐고 묻고 따진다.

기원전 6세기, 고대 희랍(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르고 아무것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그의 이론을 간단히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이라 부른다. 그가 예로 든 것이 저 유명한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조금 전에 내가 들어갔던 강물은 지금 내가 들어가려는 강물과 같은 강물이 아니다. 강물은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흐르는 것이 어디 강물뿐인가?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엄밀히 따지면 같은 사람이 아니다.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른다는, 변화한다는 것이 만물유전설이다.

19세기 말, 현대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다시 불러온다. 니체는 고정된 실체를 중심으로 한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거부한다. 그 일환의 하나가 논리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동일률에 대한 비판이다. A=A라는 너무나 당연한 동일률을 니체는 거부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서로 다른 두 순간에 결코 동일한 것(A)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생명은 동일한 것으로 머무는 순간 죽는다. 생명의 원리는 동화(同化)다. 서로 다른 것을 같은(하나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동화이며, 끊임없는 동화의 과정을 통해 모든 생명은 존재한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광합성)을 보면 동화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식물은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여 탄수화물을 생성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식물에 햇빛과 이산화탄소는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이다. 타자(他者)다. 타자를 자신으로 바꾸는 작업이 바로 동화다. 동화를 멈추면 식물은 죽는다.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타자를 나로 바꾸는 과정이 중지되면 나는 죽는다. 확인해보고 싶으면 10분쯤 숨을 쉬지 않으면 된다. 숨을 쉰다는 것은 타자인 산소를 받아들여 나의 일부로 바꾸고 나의 일부였던 것을 이산화탄소로 내보내는 작업이다. 남(타자)이 내가 되고 내가 남이 되는 과정이다. 이를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自他不二)라고 말하면 어떨까?

강물이 흐르지 않기를 고집하면 더 이상 강물이 아니며, 내 몸이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만을 고집하면 나는 곧 시체가 된다. 내 몸만 그럴까? 내 마음도 항상 마음 밖의 무엇을 마음에 담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항상 무엇에 대한 마음이지 마음 자체는 공(空)이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 생각의 연속일 뿐이다. 그 생각의 연속을 거부하고 원하는 생각만 머물러달라거나 아무것도 붙잡지 말라고 고집하면 그것이 번뇌가 아닐까? 그러니 인연 따라 변하는 생각을 그저 바라볼밖에 무엇이 있을까? 내가 이렇게 끊임없이 변하는데 남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나는 남이 변하지 않기를, 내가 만든(사실은 내가 원하는) 남의 모습이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 그 모습에서 벗어나면 실망하고 다툰다. 그러나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그럼에도 너만은 변치 않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 어리석음이다. 

어릴 적 소개팅이나 미팅을 통해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싱그럽다. 우리는 새로움 앞에서 설레고, 경이를 느끼고, 호기심이 발동하고, 마음을 연다. 내 마음을 열면서 상대의 마음도 열리길 기대한다. 그렇게 서로를 탐구한다. 이렇게 설레는 마음이 평생 지속될 거 같다. 그래서 이 사람하고는 평생을 연애하듯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게 착각임은 오래지 않아 알게 된다. 그러나 실망만 할 일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 설레는 연애 감정이 사라지는 대신 친숙함과 편안함이 그 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 함께한 부부가 늘 연애하듯이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노부부를 우연히 어떤 영상에서 보았다. 이 부부에게는 결혼 후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종의 의식이 있다. 두 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단정히 하고 서로 맞절을 하면서 이렇게 인사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농담을 하시는 게 아니다. 상대방을 대하는 진심이 담긴 인사다. 그 인사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하룻밤 사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쉬지 않고 변한다. 나(我)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으니 제법무아(諸法無我)다.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 처음 보는 사이다. “처음 뵙겠습니다.”는 이처럼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인사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도 했다. “태양은 날마다 새롭다.”

한 가지만 보태자면, “처음 뵙겠습니다.”는 당신이 새 사람이라서 좋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낡은 것보다는 새것이, 늙은 것보다는 젊음이, 어두운 것보다는 밝음이 좋다는 생각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보기에는 망상이다. 그는 젊은 것이 변해서 늙은 것이 되고, 산 것에서 죽은 것이, 죽는 것에서 산 것이 나온다는 것을, 그래서 젊음과 늙음이,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사실―낮과 밤이 둘이 아니듯이―을 일깨운다. 

돌이켜보면 연애할 때의 설렘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기대와 불안이 섞인, 그리고 집착에 사로잡힌 일종의 고통이며 스트레스가 아닐까? 일체개고(一切皆苦)다. 

편상범 / 고려대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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