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오랫동안 공부를 하다 보니 젊었을 때는 몰랐었는데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본디 성인들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쉬운 것인데 뒷사람들이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공자와 노자, 인도의 석가모니, 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등이 남긴 말들은 대부분 쉬운 언어로 되어 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어는 전혀 일상을 떠나지 않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눈 있는 자 보고 귀 있는 자 들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했다. 부처님은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예수의 최고 가르침인 ‘산상수훈’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제자들의 책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결코 난해하지 않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없다. 

하지만 뒷사람들이 쉬운 말을 어렵게 만든다. 후대로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며 신비화된다. 

먼저 유교의 경우 맹자, 동중서를 거치면서 점차 신비화되다가 송나라 때 이르러서는 마침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성(性)과 이(理)를 가지고 성리학을 만듦으로써 유교가 어렵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공자는 중국의 풍우란(馮友蘭)이 정의한 대로 ‘유교의 부처’가 되었다. 

노자에 있어서는 그가 지었다는 현행본 《도덕경》은 난해하여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뜻이 다르다. 우리나라 현대 학자들이 번역한 《도덕경》만 해도 250여 종에 이른다. 이렇듯 의미가 모호한데 1993년에 발견된 전국시대에 쓰인 최초의 초간본(楚簡本) 《도덕경》은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후대 사람들이 여기저기 어렵고 난해한 내용들을 집어넣어 원래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자에 한국에서 소위 석학들이 현행본 《도덕경》을 1장부터 81장까지 죄다 차례대로 설명하는 인문학 강의는 잘못된 방법이다. 그렇게 공부하면 배우고 나서 오히려 노자의 본 사상에서 더욱 멀어진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의 세계만이 진정한 진리이며, 이데아는 이성을 통해서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물질, 감정 등은 저급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훗날 로마에서 기독교와 습합되면서 신비적이고 초현실적인 가톨릭 철학이 탄생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다 로마에서 만들어진 현행본 《성경》에는 예수의 부활, 물 위를 걷기, 폭풍을 잠재우기 등의 초자연적인 것들이 삽입됨으로써 기독교의 기적을 본래보다 훨씬 강화시켰다.

불교를 보자면, 붓다의 가르침은 부파불교 시대에 크게 어려워졌는데, 특히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모든 존재가 사라지지 않고 영속된다는 ‘실재론’을 들고 나왔으며, 근본불교에서 행해져 왔던 오온 ‧ 십이처 ‧ 십팔계라는 존재의 분석 방식을 더욱 세분화한 소위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을 만들어내 불교가 지나치게 번쇄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붓다 본연의 가르침에서 크게 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류를 바로잡아보고자 하여 대승불교가 생겨서 공(空)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허무함에 경도되게 되자 유식학이 나타나 부파불교의 실재론과 대승불교의 공을 절충하였다. 

한편 중국으로 전래된 대승불교는 그 사상에서 중국인의 성정에 맞게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게 선불교라든가, 체용론(體用論) 내지는 이사론(理事論) 등이다.

본디 붓다의 교설은 연기,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그 설명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매우 체계적이며 과학적이다. 먼저 이것들을 잘 배우고 나면 나머지 인도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불교 사상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거기에 맞게 개조된 것이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크게 어렵지 않다. 아니, 붓다의 본 가르침 취지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것은 배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거꾸로 공부하거나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배우다 보면 배우고 나서 오히려 불교를 더 모르게 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아예 배우지 않는 것만 못할 때도 있다. 성인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음만 못한 경우를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유교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다. 

필자가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불교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게 된 동기는 몇 해 전 근본불교 전공자 교수님에게 석가모니가 공(sunya)이라는 단어를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였는지 물었던 데에 있다. 답을 들었더니 마치 엉겨 있던 실타래가 한꺼번에 풀어지는 듯 불교의 교리가 전체적으로 명료해졌다. 이때 나는 인문학 하는 방법 하나를 문득 깨달았다. 

어떤 학자가 만든 사상이나 개념이 이해하기 어려우면 그 이전 것을 배우고, 그래도 어려우면 그 최초의 것을 배우면 된다. 현대의 것이 복잡하여 모르겠으면 고대의 단순한 것에서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에 아잔 브라흐마 스님이 지은 《시끄러운 원숭이 잠재우기》란 책을 가지고 여러 사람과 함께 스터디를 했는데, 처음 시작할 때 한 분이 “이 책은 쉬워서 가볍게 읽으면 된다. 쉽게 배운 것은 쉽게 잊힌다.”고 했다. 나는 반대로 쉽게 쓴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정독해보니 책 내용을 이루는 일상과 평범함 속에 진정 훌륭한 가르침이 내재하여 있었다. 더구나 스님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더욱 좋았다. 

대학에서 교수가 강의할 때도 쉽고 편안한 강의가 바람직하다. 학생들에게 간략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 현란한 수업은 좋지 않다. 많이 배운 듯하나 배우고 나면 그때는 많이 배운 것 같은데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어려운 수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카아(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의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내용은 참으로 훌륭하나 서술 방법이 잘못되었다. 대학 시절 때의 나를 포함하여 학생들 중에 카아의 책을 읽고서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어렵게 썼기 때문이다. 아마 어렵게 써서 이 책이 더욱 유명한지 모르겠다. 어려워야 뭔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장춘석 /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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