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지구촌, 어떻게 구할 것인가

 

1. 

“집이 불타고 있다.” 
2019년 다보스 포럼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세계 정치 경제 지도자들에게 했던 말이다. 지난해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겪으며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이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재인용함으로써 그것은 기후변화를 넘어 이 시대의 총체적인 위기를 상징하는 비유가 되었다.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집이 불타고 있을 때처럼 행동하라는 툰베리의 호소에 아감벤은 불타는 집에서 평상시처럼 행동하며 인간다운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지젝은 봉쇄와 격리 등 전시 공산주의에 준하는 자유의 제한이 불가피하다고 맞서고 있다.

하지만 조각가이며 사진작가인 제이슨 디케레스가 말했듯이 우리가 사라져도 이 행성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라는 질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불타고 있는 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대응하는 태도에 대하여 첨예하게 대립된 견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아감벤과 지젝은 현재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위기가 하나의 문명이 붕괴하고 있는 징후라는 점에 대해서 공통의 인식을 보여준다. “해변에서 모래 위에 그린 얼굴이 지워져 버리는 것처럼 현재의 인간은 사라질 것”이라는 아감벤의 비감에 찬 경고와, “팬데믹이 우리가 인간이 되는 일의 기본적 의미를 포함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새로운 시대를 공표한다”는 지젝의 단호한 가설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비롯한 기후위기, 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등 현재 불타는 집이 바로 인간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불타는 집’의 비유는 《법화경》 〈화성유품〉에도 나온다. 불타는 집이 인간존재 자체임을 일깨웠던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불타는 집’의 비유는 지구적 위기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툰베리의 호소를 넘어 근대문명이 구축해온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재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발본적(radical)으로 다른 사유를 촉구하는 언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 

근대는 “전통과 우주적 질서에 의해서 ‘주어진 세계’라기보다는 인간 주체의 이론과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것”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장한 개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한 형성된 공동체라는 이념은 허구적인 이론에 불과하지만, 계몽주의의 기획에 따라 구축된 근대사회에서 개체로서의 인간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자 근대 자본주의에서 사적 소유의 주체로서 자리매김되었다. 근대적 개인의 출현과 더불어 ‘전근대’ 공동체가 사라지고 국가, 관료제, 도시, 제도, 규율 등 근대적 체제가 성립하게 되는데, 낭시가 지적하듯 개인(individual)이 문자 그대로 더 이상 나눠질 수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특권적 존재라는 사실에 입각하여 “유럽은 세계를 향해 전제정치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과 모든 집단적이거나 공동체적 기획을 평가하는 기준을 가리켜”왔다. 다른 한편으로 공동체의 해체가 남긴 상흔들, 분열된 사회와 기술-정치의 지배, 그리고 사유화된 자유와 권리, 각자 고립된 벽에 갇힌 삶은 공동체를 발견하려는 욕망을 계속 추동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간헐적 팬데믹 시대(The Age of Intermittent Pandemic)’라고 명명될 정도로 심각한 현재의 위기가 전 지구적 공동 노력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따라 공동체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위기를 타계하려는 방안으로 검토되고 있는 공동체 담론이 계몽주의가 개인을 이상화한 것 이상으로 공동체를 이상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공동체의 상실을 한탄하면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과거 언젠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공동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공동체, 루소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조화로운 원초적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가공의 실체이기도 하지만, 공동체(community)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시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까지 ‘공동체적’ ‘공동의’라는 말에서 가까운 과거의, 한반도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있는 공산주의, 유럽과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 잊을 만하면 출몰하는 신나치즘과 극우 인종주의,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이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 전체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에 못지않게 현실의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지금까지 이루어진 수많은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 역시 공동체 담론을 진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공산주의는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 시대에 공동체는 불가능한 기대로 치부되거나 아니면 공동체 구성에 필요한 기술적인 문제들만 진지한 토론의 대상이 되어왔다. 

낭시는 공동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 “공동체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공동체 전체에 실현시키며, 그 공동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은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을 완성한다.”고 보는 일반적인 공동체 이념에 대하여 “인간의 공동체라는 목표 자체에, 즉 고유의 본질을 본질적으로 만들어내는 인간존재들의 공동체라는 목표에 뿌리 깊게 종속”된 세력들이 만들어낸 경제적 연합, 기술적 조작, 정치적 통합이 ‘전체주의’로 귀결되고 끝내 공동체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현실 공산주의의 실패에 대해서도 레닌, 스탈린 등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적 이념이나 이상에 포함된 정의, 자유, 그리고 평등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자로 정의되고 자신의 작업과 생산물들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생산하는 자로 근본적으로 정의되는 인간”이 공산주의적 이상이기 때문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전체주의든 공산주의든 공동체의 순수성, 단일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외부를 부정하고 배제하는 폭력을 양산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내부적인 폭력도 낳는데, 데리다가 ‘자가면역’ 개념을 빌려 설명한 공동체 내부의 폭력이 바로 그것이다. 

공동체 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낭시가 도달한 결론은 공동체의 문제가 공동체 구성과 체제상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자체보다 인간에 대한 사유, 즉 인간을 내재적 존재라고 보는 사유의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적 체제 아래서 발생한 개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며 공동체의 복원을 시도할 때 우리는 구성원들이 어떤 공통성, 다시 말해 전통과 역사적 신화, 민족적 특수성, 단일한 언어와 같은 실체나 본질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기대한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이 특권적이며 분할할 수 없는 본질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낭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내재성이, 또는 최고의 내재적 존재라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인간이 바로 공동체를 사유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처럼 인간을 내재적으로 본질을 갖는 존재라고 보는 것을 “내재주의(immanentism)”라고 명명하고, 이 용어를 통해 전체주의뿐 아니라 개인주의도 함께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내재주의가 우리 시대의 사회 형태나 정체를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와 그 모든 법적 장치들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동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낭시는 개인은 만들어진 것이며 개인의 문화와 개인에 대한 예찬은 근대 이후 발생한 관념이라고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그는 현대세계의 모든 경험 속에, 인간 소외의 기원에 개인이 있다고 진단하면서, 원자이고 분할될 수 없는 것인 “개인은 내재성의 또 다른 표현이며 그것과 짝을 이루는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낭시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분리된 개인들로서는 어떤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를 만들 수도 없다. 오히려 소통을 억압하고 공동체가 상실되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었다. 신성한 본질을 갖는다고 여겨진 공동체는 날조된 것이며, 개인들로 구축된 사회가 만들어낸 가혹한 현실의 짓눌림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몸짓이다. 그것은 모든 소통을 억압한다. 공동체에 대한 윤리들, 정치학들, 철학들이 우애를 강조하고 ‘상호주관성’을 조직하고 휴머니즘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공동체는 타인의 죽음을 말할 뿐이다. 낭시는 형이상학적 주체의 논리에 의해 무시된 공동체 논의를 다시 시작하려면 절대적 내재성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3. 

공동체에 대한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낭시는 존재를 ‘개인’이 아니라 ‘단수성(singularité)’이라고 명명한다. 단수성은 “개인성의 본성도, 개인성의 구조도 결코 갖지 않는” 것으로서, 진정한 공동체는 자아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단수성으로서의 ‘나’들의 공동체, 다시 말해 타인들의 공동체이다. 이러한 존재를 낭시는 ‘외존(exposition)’이라고 명명한다. 단수적 존재는 개인이 아니고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가운데 존재는 ‘자기 밖에’ 있다. 존재에게는 어떤 내적 경험도, 따라서 주관적인 것도 없으며, 오히려 바깥과의 관계에 대한 경험에서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공동체만 그들을 존재하게 한다. “하나의 주체가 아니고 ‘나’보다 더 큰 주체는 더욱더 아닌 공동체는 그러한 의식을 갖는 것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낭시는 개인성 자체의 형성 이후에 구성된, 개인들의 집합이 공동체라는 생각을 비판하면서 개인성은 그 자체로 오직 그러한 집합 내부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성이 공동체와 소통을 구성한다기보다 공동체와 소통이 개인성을 구성한다. 낭시가 보기에 공동체는 더 이상 모든 개인의 어떤 본질, 그들 이전에 주어질 수 있는 어떤 본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오직 소통을 가로질러서만 그 자체로 존재하는 분리된 ‘단수적 존재들’의 소통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통은 “자신과의 단절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자기 동일성 안에 폐쇄적으로 갇힌 이들 사이에서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규정된 개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기 바깥에 존재하려는 탈자화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오로지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한다. 그것은 공동의 무,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해 가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가운데 자기-밖에 있으려는 것으로서의 탈자태적 운동 그 자체이다. 낭시는 “동일자가 타자로, 동일자가 타자로 인해, 또는 동일자가 타자에게 향해 있거나 기울어져” 있는 움직임을 ‘편위(기울어져 있음)’라고 명명한다. 

소통은 외존이 현실태에 해당하는 탈자화한 단독적 존재들끼리 서로 만날 때, 즉 한쪽이 아니라 자기 변화를 이끌어낸 양쪽의 만남에서 발생한다. 

공동체는 단수적 존재들의 외존, 다시 말해 자기의 바깥에서 타자를 향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따라서 공동체는 추상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관계도 아니고 어떤 공유된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존재가 아니며, 그것은 공동 내 존재, 서로 함께 있음, 또는 더불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실존한다는 것, 그것은 내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자기 자신에게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홀로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타자성’으로 여기는 데에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떠한 본질을 통해서도, 어떠한 주체, 어떠한 장소를 통해서도 자기 내의 그 타자성을 타자의 고유한 자기로, 또는 어떤 ‘대타자’로, 또는 어떤 공유된 존재로 현전하게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의 타자성은 ‘더불어 있음’으로써만 도래한다.” 

낭시는 단수성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유한성의 나눔, 유한성의 공동적 나타남이라고 말한다. 유한성은 탄생과 죽음같이 우리가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낭시는 죽음을 유한성을 각인시키는 대표적인 상황이며 죽음을 통하여 ‘함께-있음’으로서의 공동체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죽음과 같이 존재의 유한성을 각인시키는 그 한계상황은 어떻게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의 죽음 곁에 존재할 뿐 타자가 겪는 존재 상실에 접근할 수 없다. 죽음 오직 나의 죽음으로서만 경험된다. 이에 반해, 낭시는 타자의 죽음을 접촉하는 순간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강조한다. 타자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목격하는 내가 소멸되고 다른 ‘나’로 이행하는 탈자태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타자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나와 타자가 만나는 순간, 나는 그 누군가가 되어 죽고 타자 역시 그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변화한다. 이 변화를 통해 밝힐 수 없는 하나의 공간이 열리는데, 블랑쇼는 이것을 관계의 공간이며 소통이 발생하는 공동체적 공간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죽음과 같이 존재의 유한성을 각인시키는 상황은 이를 목격하는 존재의 변모를 이끈다. 이때 존재는 그 한계 속에서 자기 바깥의 타자로 향하는 움직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음으로써 죽음을 함께 나누는 ‘함께-있음’으로서의 공동체가 가능해진다. 죽음을 개인이 본래적 자기와 관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파악한 하이데거와 달리, 낭시는 죽음을 탈자태적이고 소통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따라서 낭시가 말하는 공동체는 타자들의 공동체이다. 여러 개인이 그들의 차이들을 넘어선 어떤 공동의 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자신들의 타자성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타자성은 공동의 실체가 아니며, 반대로 각각의 ‘자기’의 비-실체성, 또한 각각의 ‘자기’의 타자들과의 관계의 비-실체성이다. 모든 ‘자기’들은 그들의 타자성을 통해 관계 내에 있다. 이는 그들이―관계를 결정짓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관계 내에 있지 않으며, 더불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있음이 타자성이다. 따라서 더불어 있음 또는 공동 내 존재는 실존의 존재 자체의 고유한 양태, 다시 말해, 외존되는 양태이다. 내가 ‘우리’라고 말할 경우에만 나는 ‘나’이다. 

이로부터 낭시는 “공동체는 이루어야 할 과제의 영역에 속할 수 없으며” 다만 공동체를 유한성을 경험하는 것처럼 경험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과제로서의 공동체 또는 성과물들에 기반한 공동체는, 공유된 존재가 그 자체로 객관화될 수 있고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거나 설사 생산된다고 해도 공동체적 실존을 결코 맡지 못한다. 

낭시는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블랑쇼가 명명한 것처럼 ‘무위(de-soeuvrement)’라고 주장하였다. 과제, 성과, 작품 등을 말하는 ‘oe-uvrement’의 반대인 ‘desoeuvrement’은 과제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공동체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며 그들 자체를 만들어낸 성과들을 공유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과제에서 빠져나오는 것, 생산과 완성을 위해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공동체란,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제도적 과제에서 벗어난 공동체이며 단수적 존재들의 ‘외존’이라는 상황으로부터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무위는 “우리를 공동 내에 외존시키는 것이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며, “말할 수 없을 어떤 것이 말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또한 주체들이 결여한 무엇이 도래하게끔 그 주체를 비행동의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며, 비행동 뒤의 열림이다. 그러므로 박준상이 말하듯이 무위를 ‘공동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단수적 존재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반대로 끊임없이 존재와 존재자들을 분할하며, 그 분할로써만 단수적/공동적이다. 이 공동적인 얽힘이 바로 타인과 나의 단수성, 또는 복수성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사이’이다. 바로 이러한 단수성들이 분출하는 정념이 곧 공동체의 정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지도 않으며 지배를 위한 계산적 작용도 없으며 향락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공동체를 통해서만, 공동체의 소통으로서만 가능한” 환희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죽음을 넘어가지 않는 단수적 존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단수적 존재들이 나누는 세상이 바로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체는 어떤 단일한 개체거나 실제가 아니다. 공동체는 단수적 존재들의 균열과 나눔에 따라 끊임없이 나누어지고 이동하는 역동적인 것이며 미완성의 것이다. 우리 존재는 낭시의 표현대로 ‘공동-내-존재’이다. 다른 단수적 존재와 접촉하면서 자신을 외향화시키고 바깥으로 노출시키며 존재하는 영역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외존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은 공유하는 어떤 것을 절대적인 가치나 목적으로 승격시키거나 고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고 따라서 그 경계 또한 유동적이거나 불명확할 것이다. 

낭시에 따르면, 우리는 매 순간 자신들의 한계들을 나누며, 자신들의 한계들 위에서 서로를 나누어 가진다. 우리는 부모 자식, 공적 인간과 사적 인간, 생산자와 소비자 같은 사회적 관계에 머물지 않으며 “무위에 처해 공동체 가운데 있다.” 낭시는 미완성을 공동체의 원리라고 단언하면서 공동체를 이끄는 역동성은 나눔의 역동성, 무위의 역동성, 다시 말해 어떤 공동체도 구성하거나 만들지 않기 때문에 “공동체의 나눔을 미완성의 것으로 내버려두는 것이 관건”이라고 역설한다. 공동체의 나눔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라는 단일체도 실체도 없다. 오히려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또 내버려진다. 공동체는 과제가 아니라 무한히 새롭게 되풀이하고 도래하는 미완의 것이며 공동의 것으로 나누어야 할 선물, 과제가 아니라 “유한성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무한의 임무”이다.

4.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발본적인 재사유를 통해 낭시는 인류 공동체가 무언가를 공유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공동으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공동이 되는 공동체이며, ‘공동-내-존재’가 우리의 실존 상황이며 실존의 고유한 양태임이 역설했다.

공동체 없이 인간일 수 없다는 낭시의 주장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통해 여실하게 확인되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어떤 특권이나 이데올로기적 실체가 아니라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듯 ‘취약하며’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며’ ‘고통과 슬픔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인간 문명의 첫 번째 증거를 부러진 뒤 치료된 대퇴부 뼈에서 발견했던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함께 생활하는 동료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동료가 곤경에 빠졌을 때 그 어려운 사정을 공감하며, 자신의 위험이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동료를 도울 수 있게 됨으로써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통찰했다. 이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공동의 기반이며, 낭시가 말하는 나눔 또는 분유, 그리고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불안정성 또는 취약성을 통해 공동체 담론을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낭시의 공동체 담론에서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공동체의 붕괴, 개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데 어떤 현실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 때문에 공동체의 목적이나 과제를 부정하고 무위를 강조하는 낭시의 급진적인 사상은 “현실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려 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가 이러한 사유 안에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공동체를 복원하려는 현실적인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등 인류가 처한 위기가 전 지구적 공동 대응을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며 공동체를 상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낭시의 주장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무위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내버려지는 대로 방임해야만 할까, 아니면 내재적 공동성이 아닌 그 무언가에 기대어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에 나서야 할까? ‘무위의 공동체’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내재적 공동성이 아닌 그 어느 것에 기대어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을까? 

《무위의 공동체》 한국어판 서문에서 낭시는 자신이 주장한 ‘무위’가 ‘비-행동’임을 밝히고 있다. 행동이 하나의 작품과 같은 어떤 것을, 즉 만든 사람과 독립적인 ‘사물’과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생산하고 실현시키는 방법을 가리킨다면 ‘무위’에 분명 ‘비-행동’이 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낭시는 비-행동이 무언가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 역시 “어떤 행동, 또는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행동’과 같지 않지만 변화를 만들어내는 ‘비-행동’은 적극적인 활동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러남 가운데, 어떤 받아들임, 나아가 엄격히 비-심리학적 의미에서의 어떤 수동성 가운데” 있다. 낭시는 이 수동성을 일종의 열림이며, ‘도래하게 내버려둠’ 또는 ‘존재하게 내버려둠’으로 보았다. 자유주의에서 생산적 행동이 만들어낸 생산물들에 대한 관심에 따라서 ‘하게 내버려둬, 그냥 내버려둬’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도래하게 내버려둠’ ‘존재하게 내버려둠’은 “우리의 생산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 우리와 무한히 더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따라서 ‘도래하게 내버려둠’ ‘존재하게 내버려둠’은 무관심이나 방임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지며 현실 세계 속에서 타자라는 상황에 개입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다. 낭시는 그런 행동이 일종의 열림이며 그것으로부터 직접적인 행동을 가져오는 정치적인 행동을 기대할 수 없지만, 정치를 넘어서 무한의 질서인 질서라는 점에서 현실 정치와 관계 맺을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삶의 질서인 그 질서와 열림을 정치가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 정치가 그 질서와 열림에 접근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산출하지 않으면서 도래하는 것을 도래하게 내버려두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위의 공동체는 타자와의 관계에 소극적이거나 현실 정치에 무관심한 자연 상태의 공동체를 말하지 않는다. 박준상이 지적하듯이 이러한 오해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함정에 더욱 빠지게 한다. 고대 중국에서 노자의 무위사상이 전제정치를 위한 정치 기술로 활용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낭시는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공동체의 부재 속에서 공동체는 과제로서 제안되어서는 안 되지만, “공동체로 향해 있는 정념은 무위 가운데, 모든 한계와 개인의 형태를 고정시키는 모든 완성을 넘어서기를 요구하고 호소하면서 전파”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은 단수적 ‘능동성’ 속에서의 무위라고 할 수 있으며, 앞에서 말했듯이 미완성이 그 원리가 된다. 

낭시가 주장하는 공동체를 향한 정념은 박준상이 주장하듯이 “단순히 인권이나 휴머니즘이나 우애와 사랑을 강조하고 인식하고 주지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 우리의 관계가 경제적 차원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경제적인 관계의 변화를 통해 변혁이 일어나야 하지만, 또 정치적인 것의 차원에서 공동체라는 구성체로 수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적 지평에서 사회를 구성하는 부차적 존재인 원자들의 집합도 아니고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 공동체도 아니며 경제적인 면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는 단위도 아니다. 최근의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하는 힐링이나 따뜻한 인간관계도 그 핵심이 아니다. 박준상이 지적하듯이 낭시 사유의 새로움은 이미 결정된 사회에서 돌아서는 ‘위험하고 급진적인’ 박탈과 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5.

낭시가 말하는 무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모든 가치에 ‘괄호’를 치고 우리 각자가 우리 바깥의 ‘우리’로 향하는” 데 있다면, “본래적 의미에서 ‘자연적 태도’로부터의 전환인 ‘환원’”이라면, 그것은 동양에서 말한 ‘무위’와 다르지 않다. ‘desoeuvrement’의 번역어 ‘무위’가 불가피하게 노장사상의 맥락 속으로 삽입시키게 됨을 알면서도 이 번역어를 선택했던 번역자 박준상이 인정했듯이, 낭시의 사유를 비롯하여 하이데거에게서 영향을 받은 여러 사상가들에게서 동아시아 사유의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낭시의 발본적 재사유를 통해 근대문명의 기초가 되었던 개인과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공동체가 오히려 역사적으로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동양사상에서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슬링거랜드에 따르면, ‘무위’는 “애쓰지 않기나 행하지 않기가 아니라 최적으로 활동적이고 효과적인 사람의 동적이고, 힘들이지 않으며,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무위의 상태는 힘들이지 않음과 함께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을 특징으로 하며, 그 상태에서 우리는 힘들이지 않음과 자기를 의식하지 않음에 대한 내적 감각을 갖는다. 이 때문에 무위의 상태에서 우리는 실제로 가장 활동적일 수 있고 심지어 가장 효율적일 수 있다.

“무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와 동시에 훌륭한 예술작품을 창작 중이거나 심지어 전 세계를 조화로운 질서로 가져가는 중일 수도 있다.” 또한 무위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뜻 보기에 마법과 같이 강력한 영향력을 주어 즉각적으로 정치 질서를 펼치도록 해주는 힘, 즉 카리스마로서 표현된다. 또한 무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신뢰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데, 이는 “공동체의 무위 또는 무위의 공동체는 ‘우리’에 대해 소극적이지 않으며 반대로 더할 나위 없이 급진적으로 ‘우리’로 편위되어 있다.”는 낭시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고대 중국에서 무위는 반사회적인 은거와 초세속적인 종교 수행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반사회적 형태에서 무위의 사회적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논어》 《도덕경》 《장자》에서 무위의 도는 군자, 다시 말해 통치계급의 도로서 제시되었는데, 무위는 인간의 협력과 조화를 위한 방법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보다 더 큰 공동체에 기여하는 활동이며 하늘과 하늘의 도에 대한 신념으로서 이해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더 큰 공동체의 관계 안에서 바라봄을 의미한다. 인간과 공동체를 어떤 본질로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무위의 태도 속에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는 ‘외존’이 있다. 이러한 비움의 방식은 ‘정치를 넘어서 무한의 질서인 질서라는 점에서 현실 정치와 관계 맺을 수 있다’는 낭시의 주장과 상응한다. 

슬링거랜드에 따르면, 무위는 ‘너무 열심히 하지 않기’ ‘흐름을 따르기’ ‘완전한 몰입’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무위의 이러한 특징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행하는 노력들, 일하기, 애쓰기, 노력하기 등이 낳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단지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러하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자본가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쓴다.” 팬데믹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희생하는 자본주의적 진실을 노출시켰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경제적 성장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할 때 가장 흔히 나타나는 저항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경제 논리라는 점도 자본주의의 희생적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경제가 굴러가게 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노동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지연되는 향유의 논리를 통해 자신을 유지한다. 무위는 지젝이 지적하듯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희생, 즉 이윤을 곧바로 소비하는 대신 재투자를 해야 하기에 완전한 만족은 영원히 미뤄지는 희생을 감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급진성을 갖는다.  

무위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지점은 ‘노력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를 통해 개방성과 자발성에 도달하는 것으로, 중국 사상의 각 학파에 따라 그 자발성에 대한 이해와 도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자발성에 도달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은 일치한다. 무위를 “노력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라고 본 슬링거랜드의 해석 가운데 단수적 존재가 ‘우리’로 기울어지기 위해 해야 할 실천을 발견할 수 있다. 

6.

다시 《법화경》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집에 불이 났을 때 일상적인 삶과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전시 공산주의에 준하는 강제력을 동원하여 집단적인 대처를 해야 한다는 지젝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평소처럼 모든 일을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아니 더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아감벤의 충고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집이 불이 났을 때 불을 끄기 위한 행동을 빨리 취해야 하지만, 현재의 위기가 세상의 종말이며 인간의 소멸이라면 낭시와 아감벤 등이 주장한 대로 근대적 인간 주체의 관념을 발본적으로 전복시키고 빨리 그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툰베리가 주장했듯이 오늘날 정치와 경제 시스템은 기후와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지젝의 우려처럼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절실하게 전 지구적 동원 체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지구 온난화와 환경 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지구적 공동 행동을 향한 시도들이 연이어 실패하고 있다. 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한계와 허약함, 고통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부가되지 않지만 그것이 공동의 문제라는 사실, 그리고 공유하고 협력함으로써만 위기 극복이 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감내하고 희생함으로써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는 쉬워도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의 취약성과 상실에 기초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하자는 버틀러의 제안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해결이 되기 어렵다. 데리다가 주장하는 환대, 종교지도자들이 제안하는 연민과 공감 역시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법적 규제와 폐쇄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도 없다. 자연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부터 파괴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환경을 옥죄어 오는 자연환경과 기후의 위기, 노동의 소외 등 당면한 위험을 법적 규제와 폐쇄만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소비주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소욕지족’과 ‘청빈’ 등 종교적 실천 역시 일상의 삶에 적용하기 쉽지 않다. 

낭시가 주장하듯이 공동체로서의 삶과 실천을 방해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관념이다. 각자가 주체이고 권리의 담지자이며 타자와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을 계속 가지고 있는 한, 지구적 위기에 대한 공동대응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지젝이 지적하듯이 “팬데믹 이전 사회의 특징이었던 공동체 생활과 사적 영역 간의 취약한 균형 상태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여지가 감소했음에도 더 많은 프라이버시로 귀결되지 못하고 새로운 양상, 즉 사회적 의존과 통제에 관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는 양상으로 대체”될 뿐이다. 

아감벤이 주장하듯이 “사람들이 어떠한 보장도 없는 전례 없는 제재와 제약을 받아들인 이유는 팬데믹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익숙했던 세상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집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주의 기획이 남겨놓은 이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인간 본성에 근거하여 본다면, 우리들의 존재가 어떤 본성도 갖지 않는다는 점, 끝없이 타자로부터 살아가고 도래하는 타자에 대책 없이 맡겨져 있다는 앎이 낭시의 주장처럼 인간의 변화를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는 지젝이 주장한 것처럼 탈인간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낡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는 대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건설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로 나서야만 한다.” 

불타는 집에서 소꿉놀이에 빠져 불이 타는 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약속한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을 줘서 집에서 나오게 했다는 《법화경》의 방법에서 중요한 핵심은 선물이 아니라 자발성이다. 두려움 없이 새로운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성적 설득도 전시 공산주의와 같은 강제력도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자발성이다. 

《금강경》 《유마경》을 비롯한 대승 경전은 공의 깨달음을 보살도 실천의 조건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타적 실천을 위한 조건으로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내기’를 가르친다. 결과를 바라지 않고 ‘그냥 하라’는 이 가르침은 ‘노력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라는 무위의 이중적 특징을 더 근본적으로 자발성에 근거 짓게 한다.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머묾’이란 가르침은 무위의 상태에서 어떻게 적극성이 발현되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단수적 존재들의 외존이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유위에 머물지도 않고 무위를 다하지도 않는다”는 ‘공동-내-존재’로서 인간이 어떻게 ‘노력하지 않음’이라는 무위의 상태에 빠지지 않고 ‘노력하기’라는 유위의 상태에서 보살의 이타적 실천을 수행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러한 통찰에 근거하여 불교는 공동체의 범위를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중생계로, 나아가 우주 법계로 열어놓는다. 낭시의 ‘무위(desoeuvrement)’ 개념이 서양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공동체를 고정되고 완성된 것으로 묶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불교의 ‘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위에 처한 인간은 이성적인 자기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자발성으로 활동하고 자신을 타자에 열어둔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자기 존재의 실존 방식이기 때문에 어떤 의무감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발성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이익은 바로 기쁨이다. 그 어떤 자발성도 기쁨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없다. 기쁨에 젖어서 단수적 존재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타자를 위한 삶을 산다.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해가고 도를 행하는 자는 날마다 덜어낸다. 덜고 또 덜어 마침내 무위에 이르게 된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34)라는 명언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추구되고 성취되어야 할 공동체의 목표가 아니라 무위의 공동체에서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위는 공동체 복구를 위한 조건이지 결과가 아닌 것이다. 

몰입과 단순한 삶이 주는 기쁨을 통해 스스로 무위에 처하고 자발성으로 돌아감으로써 위기 극복의 새로운 전망이 열릴 것이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와 같지 않고, 좋아하는 자는 즐겨 하는 자만 같지 않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35)는 공자의 말처럼, 무위의 공동체, 무위를 수행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근대적 인간을 넘어서서 탈인간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더불어 자연에서 느끼는 기쁨 가운데 식물과 동물, 인간 모두 똑같이 고통을 느끼고 취약하며 한계를 지닌 존재로서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어떤 전환이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

 

명법 myeongbeop@gmail.com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박사).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운문승가대학 졸업.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은유와 마음》 《미술관에 간 붓다》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한국불교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언〉 외 논문 다수. 현재 해인사 국일암 감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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