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지구촌, 어떻게 구할 것인가

 

-불교에서 바라본 프롬의 소외 이론

 

1. 서론: 소외의 일반적 개념 

현대산업사회에서 사람의 상실감, 절망감, 불안감 등의 심리상태 또는 그러한 것이 나타나는 사회현상을 포괄하는 적절한 용어가 소외(alien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외라는 말은 상당 부분 일상용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동료나 친구 또는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서로 간에 서먹한 느낌이 들 때, 그리고 이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할 때도 소외라는 말을 쓴다. 또 자신이 종사하는 일이나 직무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때,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본질적인 보상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소외라는 말을 사용한다.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에 대해 잘 파악이 되지 않을 때, 그리고 급변하는 현상에 대해 무력감을 느낄 때도 소외라는 말을 쓴다. 

이처럼 소외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소외의 개념은 인간의 주관적 · 심리적인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고, 객관적 · 구조적인 조건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 또 이런 것을 비판하고 강력한 개선을 요구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소외가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러 학문 분야에서 소외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처음에는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에서 주로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사회학을 비롯해서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여러 사회과학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사회학 분야에서 소외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멜빈 시먼(Melvin Seeman)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먼은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가지는 기대감과 그에 따른 보상의 괴리에서 오는 심리현상으로 소외를 설명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크게 영향력이 없다고 느낄 때, 곧 무력감과 무의미성에 시달릴 때 소외를 느낀다. 행위가 자신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을 때 예를 들면 돈만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는 자기소외를 느끼게 된다. 시먼은 소외를 6가지로 구분해서 말한다.

첫째, 무력감이다. 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개인적 · 사회적 보상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외된 사람에게는 이러한 조절이 외부의 힘, 강력한 타자, 운명 등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무의미성이다. 이는 장차 일어나게 될 행위의 결과에 대해 만족할 만한 예측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이 상실된 느낌이다. 

셋째, 무규범성이다. 이는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수단의 동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공유된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아서 광범위하게 비행이 확산되고 개인이 경쟁이 무제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다. 

넷째, 문화적 소외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높이 평가하는 목표와 신념에 대해 낮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술가나 지식인이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대중문화를 잘 수용하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때 생기는 것이다. 

다섯째, 자기소외이다. 이는 정의하기 어려운 것인데 여러 가지 점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괴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여섯째, 사회적 고립이다. 이는 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배척의 느낌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수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고립감이다. 

다양한 소외 이론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소외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서 서술하고, 그리고 프롬의 소외 이론을 불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검토하고자 한다. 


2. 프롬의 소외 이론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대교 랍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프롬은 어려서부터 유대교에 반대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감정적 고립 상태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상태의 프롬에게 구약성서는 큰 감동과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1923~24년경에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 들어가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였다. 1929년에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접촉하였고, 프롬은 마르크스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하려고 하였다. 1939년 그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결별하고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세우고자 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여러 저술 가운데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건전한 사회》(1955)의 일부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프롬은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3가지를 제시하는데,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외부세계와 분리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무력감과 고독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에 벗어나기 위해 근원적인 해결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도피의 메커니즘’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주의 메커니즘, 파괴성의 메커니즘, 자동인형적(自動人形的) 동조(同調)이다. 그리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이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을 활용해서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을 설명한다. 

1) 권위주의 메커니즘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일차적 연대 관계를 상실한 개인이 새로운 이차적 연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과정에서 개인은 자아의 독립을 포기하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인간이나 대상에게 자신을 융합하는 경향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은 일차적 연대 관계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고독과 무력감에 주는 공포에 빠지게 되고, 이러한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인간이나 대상을 지배하거나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롬은 이와 같은 ‘권위주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디즘적 충동’ 또는 ‘마조히즘적 충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원래 프로이트가 성적(性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인데, 프롬은 이것을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쪽으로 확대하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사디즘적 경향’은 다른 사람을 자신에게 종속시켜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서 그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디즘적 경향’은 사회적으로는 더욱 잘 합리적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조히즘적 경향’은 자신의 자아를 잊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을 비하하고 고통을 당하고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운명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생의 의미에 대해 회의(懷疑)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마조히즘적 경향’도 좋은 도피의 방법이 된다. 

그런데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서로 공생적 관계에 있다. 이 둘은 권력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사디즘’ 또는 ‘마조히즘’ 성격의 사람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제도에 대해 복종적 자세를 나타내며 복종에 대해 사랑과 존경과 헌신의 자세를 갖지만, 그에 반해 무력한 사람이나 제도에 대해서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공격하고 지배하며 모욕을 주려고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프롬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성적 도착(倒錯)이나 신경증(神經症)에 대한 분석이지만, 정상적인 사람에 대해 적용할 때는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현상은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진정한 힘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이차적인 힘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 곧 위약성(危弱性) 또는 무력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개인적 자아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독자적 존립이 가능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성격’은 종교와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자연법, 신의 의지, 인간의 의무로 합리화되고, 이런 것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또 권위주의적 성격은 과거를 숭배하고 기독교의 원죄(原罪)의식에 종속된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주장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프롬은 기독교의 원래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2) 파괴성의 메커니즘

프롬은 이 지구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생물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볼 때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이득도 없이, 같은 인간을 살해하고 고문하며 파괴하는 동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파괴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펴보고 있다.

인간은 생리적으로는 동물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만, 동시에 인간적 자아를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적 자아를 의식하기에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을 실감한다. 이러한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적인 힘이 발전되도록 해서 개인적 통일성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도피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 도피적인 수단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공격적 파괴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고독과 무력감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데, 이때 대부분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은 창조적인 활동보다는 파괴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삶을 제대로 실현하려는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작동한다. 삶을 억압하는 개인적 · 사회적 조건이 파괴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추구하는 충동은 강해지고, 삶이 실현될수록 파괴적 충동은 약해진다. 파괴성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폭발이다. 삶을 억압하는 이 개인적 · 사회적 조건은 파괴에 대한 격정을 낳게 되며, 이 격정은 저수지와도 같은 것을 이루어 특수한 적대적 성향―타인에 대해서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건―을 조장한다. 

그리고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개신교의 사상에도 포함되어 있다. 개신교의 도덕적 금욕이 삶을 즐기는 사람에 대한 강력한 질투가 반영된 것이고, 칼뱅이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선고한 것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3) 자동인형적(自動人形的) 동조

자동인형적 동조(자동 순응성)는 앞에서 서술한 ‘권위주의 메커니즘’ ‘파괴성의 메커니즘’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고립, 무력감, 무의미성을 의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감정을 극복하는 점에서는 앞의 두 가지 메커니즘과 차이가 있다.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개인이 자신의 완전성을 포기하고 더 큰 힘에 귀속하려는 것이고,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그 대상을 파괴해서 외부세계가 더는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자동인형적 동조’는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문화적 양식이 제공하는 성격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사람과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외부세계의 갈등은 사라지고 고독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이처럼 인간은 개인적인 자아를 버리고 자동인형이 되어 주위 수백만의 다른 자동인형과 동일해진다. 그 결과 고독이나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 대신 자아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자동인형적 동조 현상’은 인간의 사회화과정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인간은 유년기와 소년기에 이미 외부에서 주어진 사고(思考), 감정, 원망(願望)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훈련되고 또 교육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발성과 개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진정성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적 사고, 진실된 감정, 순수한 원망보다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곧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사회의 관료제의 구조 가운데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인간은 사회에서 조작하는 신념체계에 의해서 조종을 당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신념체계에 무조건 동조하는 자동인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대해 강한 저항을 하는 경향이 있다. 

4) 현대사회의 소외현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고 뒤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는 ‘도피의 메커니즘’을 일부분 계승하고(권위주의 메커니즘, 자동인형적 동조), 거기에다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해서 소외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의 맥락에서 《건전한 사회》에서 말하는 소외이론을 검토하고, 《건전한 사회》에서 더 추가된 내용은 추후에 다른 글에서 따로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소외는 스스로를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험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이 조금 더 부연 설명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체나 자기 행위의 창조자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가 주인공이 되어 복종과 심지어 숭배까지 강요하게 된다. 소외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떨어져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각과 양식을 갖고 사물이 경험되는 바로 그대로 경험하지만, 자기 자신과 외부세계를 생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프롬은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은 거의 전면적인 것이라고 한다. 현대사회는 여러 가지 창조물을 만들어내었지만, 도리어 이러한 창조물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보는 소외는 거의 전면적인 것이다. 현대의 소외는 사람의 일, 소비하는 물건, 국가,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까지 파고들고 있다. 인간은 그 이전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스스로 창조했다. 인간은 그 자신이 만든 전문적인 기구를 이끌어갈 복잡한 사회기구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 모든 창조물은 이제 인간 위에 서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자와 중심체로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골렘(Golem)의 심부름꾼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놓여난 그 힘이 강력해지고 거대해질수록 인간으로서 자신은 더욱더 무력해짐을 느낀다. 인간은 자기가 창조함으로써 구체화되었으면서도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 소유가 되어 자기 자신의 소유권마저 잃어버렸다.
 
그리고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도 ‘권위주의 메커니즘’으로 소외를 설명한다. 일신교의 전통도 ‘권위주의 메커니즘’의 하나라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일신교 자체도 크게 보면 우상숭배로 귀착된다. 인간은 사랑과 이성의 힘을 신에게 투사한다. 인간은 그 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않고 자기가 신에게 투사한 것의 일부를 되돌려줄 것을 신에게 바란다. 일신교와 칼뱅주의의 초기에 요구되던 종교적 태도란,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이 무의미하고 황폐해진 존재임을 인식하고 신의 은총을 믿고 자기가 신에게 넘겨준 자기 자신의 속성 일부를 신이 되돌려주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앞에서 거론한 ‘자동인형적 동조’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프롬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권위는 성격을 바꾸었다고 한다. 권위는 공공연한 권위가 아니라 ‘익명의 권위’이다. 

이어서 프롬은 ‘익명의 권위’는 ‘동조’를 통해서 작용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익명의 권위는 동조의 장치를 통해 작용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하고, 어디가 다르거나 유별나서는 안 된다. 나는 일반적인 양식의 변화에 즐겨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서는 안 되고 내가 적응을 했느냐 다른 사람과 다르거나 유별나지 않으냐 하는 것이 문제 될 뿐이다. 


3. 프롬의 소외 이론과 불교사상의 접점

앞에서 프롬의 소외 이론 가운데 일부분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기초한 현대사회의 소외 이론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내용이 불교사상과 어떤 지점에서 서로 공통점을 가질 수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불교의 사상은 인도불교에서 시작해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티베트 등으로 전파되었고, 다양한 사상의 갈래가 있다. 여기서는 초기불교의 삼법인 또는 사법인을 간단히 확인하고 본격적인 분석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1) 초기불교의 3법인 또는 4법인

3법인 또는 4법인에서 ‘법인(法印)’은 불교의 징표, 불교의 증거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등 3가지 또는 4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그 가르침을 올바른 불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라는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이므로, 그만큼 이 명제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①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 변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지혜를 얻고자 하여,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② 일체개고(一切皆苦)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3고와 8고가 있는데, 8고는 뒤에 설명하고자 한다. 

③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존재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5온(五蘊)에 대해 집착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5온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5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색(色: rūpa)은 물질과 육체이다. 둘째, 수(受: vedanā)는 즐겁다, 고통스럽다, 즐거운 것과 고통스러운 것의 중간이라고 느끼는 감수작용이다. 셋째, 상(想: saññā)은 사물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는 표상작용이다. 넷째, 행(行: saṅkkha)은 표상작용에 수반되는 의지작용이다. 다섯째, 식(識: viññāṇa)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5온을 정리해서 보자면, 물질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초기불교의 고유한 세계관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꽃을 바라보고서 ‘참 예쁘구나. 집에 가지고 가야지’라고 마음먹었다고 하자. 꽃은 색(色)에 속하고, ‘꽃이다’라고 판단한 것은 상(想)에 해당한다. 그 꽃이 예쁜 것이므로 나에게 즐거운 느낌을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수(受)에 속한다. 집에 가지고 가야겠다는 의지는 행(行)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受), 상(想), 행(行)의 마음 작용에 기초가 되는 것이 식(識)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세계관은 대상 세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대상을 바라보는 주관의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④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열반의 경지는 고요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고,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잘못 생각하면 결국에는 고통을 일으키게 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는 통찰을 할 때 열반(涅槃: Nirvāṇa, Nibbāna)을 얻게 된다. 열반의 의미는 탐(貪), 진(瞋), 치(痴)의 불을 불어 끈 상태이다.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자면, 내면의 고요함이 즐거움으로 승화되는 경지 곧 ‘적멸위락(寂滅爲樂)’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집착을 버린 마음의 평온함을 말하는 것이다. 

2) 불교의 삼독과 도피 메커니즘의 접점

앞에서 살펴본 열반의 정의에서 탐(貪), 진(瞋), 치(癡)의 삼독(三毒)이 사라진 경지라고 하였는데, 이 ‘삼독’과 앞에서 살펴본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은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 그 내용을 알아본다. 

우선 ‘삼독’의 정의부터 살펴본다. 탐(貪)은 욕심, 욕망 등을 말하는 것이다. 진(瞋)은 분노, 증오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감정에 맞지 않는 것을 증오하는 것이다. 치(癡)는 어리석음, 무지, 무명(無明)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삼독은 앞에서 설명한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과 서로 통하는 대목이 있다. 

① ‘자동인형적 동조’는 개인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사회의 문화적 양식에 맞추어 사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사람은 사회에서 제시하는 신념체계에 의해 조종당하고 지배당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리석음, 무지, 무명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자세히 살펴본다면 ‘자동인형적 동조’와 무명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창조적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의 양식에 맞추어가는지에 대해 ‘자동인형적 동조’는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무명’이 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해도, 현대인이 어떻게 창조적 삶을 상실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는 ‘자동인형적 동조’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무명’은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자동인형적 동조’는 그 하위개념이면서 ‘무명’의 한 측면을 설명한 것이고, 나아가 ‘자동인형적 동조’는 현대인의 삶을 잘 포착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무명’을 현대의 언어로 설명할 때, ‘자동인형적 동조’를 수용한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②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인간이 고독과 무력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파괴의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다시 말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큼 내면의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파괴의 충동이 강화된다. 이 ‘파괴의 메커니즘’은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瞋), 곧 분노, 증오에 해당하는 것이다. ‘진’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증오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 증오의 마음, 곧 파괴의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물론, 프롬은 ‘파괴의 메커니즘’에 대해 그의 다른 저서에서 더 자세히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진(瞋)’과 ‘파괴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틀, 곧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파괴의 충동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③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인간이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외부의 인간이나 대상을 지배하거나 복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디즘적 경향’과 ‘마조히즘적 경향’으로 구분된다. ‘사디즘적 경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마조히즘적 경향’은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공생적 관계에 있다. 이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탐(貪) 가운데 ‘권력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의 권력이 ‘권위주의 메커니즘’에서 말하는 ‘사디즘적 경향’과 ‘마조히즘적 경향’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디즘적 경향’은 단순히 권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더 굴절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디즘적 경향’은 권력을 추구하는 것 가운데 더 추악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권력에 대한 욕망을 말할 때, ‘마조히즘적 경향’, 곧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접근은 일반적으로 잘 제시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탐 가운데 ‘권력에 대한 욕망’과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큰 틀에서 보면, 다시 말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점에서 본다면 이 둘은 서로 일치점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탐 가운데 ‘권력에 대한 욕망’을 설명할 때, ‘권위주의 메커니즘’에서 말하는 ‘사디즘적 경향’과 ‘마조히즘적 경향’을 포함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수용한다면, 탐 가운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의 ‘오취온고’와 프롬의 ‘소외’ 개념의 접점 

불교의 ‘8고’ 가운데 ‘오취온고’와 프롬이 제시한 소외 개념에는 일정 부분 공통부분이 있다. 이 논의를 하기 위해 먼저 앞에 소개한 ‘일체개고’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삼법인의 하나인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세상 모든 것이 고통[苦]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3고(三苦)와 8고(八苦)가 있는데 여기서는 8고(八苦)에 대해 살펴본다. ‘8고’의 4가지는 생, 노, 병, 사이다. 이는 사람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이라는 의미다. 생(生)이 고통에 들어간 것은 윤회의 관점에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이 고통의 세계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고통이다.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만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람이 피해갈 수 없는 고통이다. 

여섯째,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사랑하지만 헤어져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간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일곱째, 구불득고(求不得苦)는 간절히 구하지만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더라도 구한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적 지위가 낮은 경우에는 구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지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높고 좋은 자리에 있더라도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숙명적 한계상황이다. 

여덟째, 오취온고(五取蘊苦: 五盛陰苦)는 앞에서 말한 모든 고통은 초기불교의 고유한 세계관을 의미하는 5온(五蘊)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는 지혜 없이 대상세계(물질)와 마음에 집착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일체개고’를 설명할 때, 위의 내용처럼 ‘8고’를 제시한다. 앞의 7가지는 개별적 현상에 대응되는 것이지만, ‘오취온고’는 포괄적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세계관 가운데 하나가 5온인데, 이 5온을 지혜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면, 다시 말해서, 대상세계(물질)와 마음에 대해 집착하게 되면 결국은 고통이 수반된다는 의미이다. 

이 ‘오취온고’와 앞에서 소개한 ‘소외’의 개념은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프롬은 《건전한 사회》에서 스스로가 따돌림을 당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 경험 양식이 ‘소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종합해서 프롬이 제시하는 ‘소외’는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사람이 진정한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다.

프롬이 제시하는 ‘소외’는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 곧 ‘권위주의 메커니즘’ ‘파괴성의 메커니즘’ ‘자동인형적 동조’가 작동해서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개성에 눈을 뜨지 못하고 다른 것에 매몰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이처럼 ‘도피의 메커니즘’을 작동하는 것일까? 프롬이 명확하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집착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구하고 집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권위주의 성향(권위주의 메커니즘)을 나타내고, 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잘 안 되면 반대로 분노를 일으켜서 ‘파괴성의 메커니즘’을 작동하기도 하며, 또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안목(지혜의 안목)이 없어서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고 자신의 개성을 잃게 되고 점차 다른 사람과 동일인처럼 되는 것이다(자동인형적 동조).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면, 프롬이 제시하는 ‘소외’ 개념은 대상세계(물질)와 마음에 집착하면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오취온고’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오취온고’는 대상세계(물질)와 마음에 대해 집착하면 고통에서 피할 수 없다는 포괄적인 주장이고, 프롬이 제시하는 ‘소외’ 개념은 집착에 기인하는 것이긴 하지만 ‘오취온고’에 비해서 그렇게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프롬의 ‘소외’ 개념은 집착으로 인해서 현대인이 고통받고 있고, 그 고통받는 원인을 3가지(도피의 메커니즘)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취온고’는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프롬의 ‘소외’ 개념은 그 하위단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프롬의 ‘소외’ 개념은 불교의 ‘오취온고’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다시 설명한 것으로 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취온고’를 설명하기 위해 프롬의 ‘소외’ 개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결론

이 글에서는 프롬의 ‘소외’ 개념과 불교사상의 공통분모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고자 한다. 

프롬은 사람이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원적인 처방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도피하는 경향이 있고, 프롬은 이것을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은 불교의 삼독과 서로 공통부분이 있다. 

①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사람이 고독과 무력감에서 탈출하고자 다른 사람이나 대상을 지배하거나 복종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디즘적 충동’과 ‘마조히즘적 충동’이 있다. ‘사디즘적 충동’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이 괴로워함을 즐기는 것이다. 반대로 ‘마조히즘적 충동’은 자신을 비하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공생적 관계에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 메커니즘’은 탐(貪) 가운데 ‘권력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다. 다만 ‘권력에 대한 욕망’에서는 ‘사디즘적 충동’과 ‘마조히즘적 충동’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못하였다는 차이점은 있다. 

②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삶을 구하는 충동이 방해받을 때 파괴를 추구하는 충동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진(瞋)’과 공통부분이 있다. ‘진’은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에 대해 증오의 마음, 곧 파괴의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파괴성의 메커니즘’과 삼독의 ‘진’은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파괴성의 메커니즘’은 프롬의 다른 저서에서 더 상세히 분류하고 있으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둘은 큰 틀, 곧 마음에 맞지 않을 경우에 파괴의 충동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③ ‘자동인형적 동조’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그 사회의 문화적 양식에 순응해서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인물로 바뀌는 것이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신념체계에 의해 조종당하면서도 자신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의 치(癡), 곧 무지, 어리석음, 무명(無明)과 통하는 것이다. 다만, 불교의 무명은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자동인형적 동조’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신념체계에 의해 조종당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점을 다루고 있으므로 제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무명은 포괄적인 개념이라면, ‘자동인형적 동조’는 무명의 한 단면을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동인형적 동조’는 무명이 작동되는 현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잘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 프롬의 ‘소외’ 개념은 3가지 ‘도피의 메커니즘’이 작동해서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오취온고’와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오취온고’는 대상세계(물질)와 마음에 집착하면 결국에는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왜 사람이 ‘도피의 메커니즘’에 빠지는가 하는 질문에 적용해 보자.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람이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구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권위주의 성향(권위주의 메커니즘)에 빠진다. 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대상과 현상에 대해서는 파괴의 충동을 일으키는 것이다(파괴성의 메커니즘). 또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결국 다른 사람과 동일한 패턴의 삶을 사는 것이다(자동인형적 동조).

이처럼 프롬의 ‘소외’ 개념과 불교의 ‘오취온고’는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한 차이점도 있다. ‘오취온고’가 더 포괄적인 개념이고 프롬의 ‘소외’ 개념은 ‘오취온고’의 하위단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취온고’를 설명하기 위해 프롬의 ‘소외’ 개념을 활용한다면 불교의 사상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끝으로, 프롬은 이러한 소외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제도의 근원적인 개혁과 이성을 통한 현실의 각성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21) 이러한 부분과 불교 사상의 접점은 추후의 연구를 통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

 

이병욱 lbw33@hanmail.net
한양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천태사상연구》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인도철학사》 《한국불교사상의 전개》 《불교사회사상의 이해》 등이 있고, 〈천태지의 철학사상 논구〉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 고려대, 한국외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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