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지구촌, 어떻게 구할 것인가

 

1. 민주주의의 위기와 그 징후들

위기는 언제나 숨어 있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사람이든 제도이든 위기를 통해 성장하든가 아니면 쇠퇴하거나 몰락한다. 위기가 새로운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될 것인지는 모두 위기를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말해주는 징후는 많지만, 2020년 전 세계를 동시에 위험에 빠뜨린 코로나 팬데믹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측정할 수 있는 분명한 지표다. 전쟁과 기아, 천재지변처럼 우리의 자유와 권리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에 대한 대처방식은 민주주의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신종 코로나 전염병을 처음 발견하고 경고하였던 중국 우한의 안과의사 이원량은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바이러스에 희생되었다.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말은 민주주의의 생존조건을 말해준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하나 이상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만약 중국이 언론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였다면,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국 당국과 시민들이 언론의 자유와 다른 권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위기는 다시 발생할 것이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 발생관 관련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이러한 진단에 의문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적 전염병의 위기를 겪으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시민들 상호 간의 신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신뢰보다 통제를 우선시하는 독재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신뢰의 토대 위에 지배와 통치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국민과 국가의 신뢰 관계가 전쟁과 전염병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민주주의 제도 역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보여준 것처럼 생명과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을 때 국민은 어렵게 성취한 자유와 권리를 잠시 유보하고 자신의 삶을 보호해줄 국가에 위임하려는 강력한 유혹에 빠진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합법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고, 국민은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복지를 책임지는 국가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위기의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붕괴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결코 쿠데타와 혁명처럼 총을 든 군인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군인이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의 손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당선된 대통령이나 총리가 권력을 잡자마자 그 절차를 해체해버리거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의 붕괴는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 21세기는 민주주의의 모순을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민주화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어 민주주의가 표면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종식되기 직전인 1988년 자유 선거를 치르는 나라가 147개국이었는데 1995년에는 164개국으로, 그리고 1999년에는 191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냉전의 종식은 “인류의 이데올로기 발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며,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어 정부의 최종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반쯤만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전 세계에서 승리하지는 못하였는지만, 많은 국가는 민주제도를 수용하여 지도자를 투표로 선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21세기는 형식적 민주제도가 정립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를 온전하게 실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고 믿었던 서구와 미국, 그리고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영국의 보리스 존슨,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처럼 국민이 뽑은 지도자가 선출된 후에 자신의 해석대로 국민의 뜻을 제도화함으로써 비판적 집단을 억압하는 ‘신권위주의’가 출현하였다. 자유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보편화되지만 동시에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붕괴하는 현상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을 때가 위기이다. 이제까지는 서구와 미국과 같이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설령 심각한 사회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자체는 커다란 도전을 받지 않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확신에 차 단언한 것처럼 “이전의 여러 정부 형태는 내재된 결함이나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었지만, 자유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러한 근본적인 내부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틀렸다. 자유와 평등의 자유민주주의 원칙은 결함이 없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민주제도에는 결함이 있다. 21세기 초기에 우리가 깨달은 것은 민주주의 제도가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체제가 상당 기간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 로마의 공화정과 르네상스 시대의 공화국을 거쳐 근대 민주주의가 정립될 때까지 민주주의는 항상 민주주의 원칙을 위협하는 도전에 대한 생산적 응답을 통해 발전하였다. 그러나 전후의 서구와 냉전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제동의 핵심 기준이 달성되면 정치체제는 항구적으로 안정될 것이라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믿었다.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고 정립되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공고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공고화를 역전시킬 다양한 조건들을 경험하고 있다. 미래 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남겨주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 위해 요청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원칙이 민주주의에도 적용된다.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와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면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 제도의 결함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결함을 제거하고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부분적 민주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로, ‘불확실한 민주주의’에서 ‘확실한 민주주의’로, 그리고 ‘결함 있는 민주주의’에서 ‘정착된 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결함 있는 민주주의(defective democracy)’는 통상 “통치권에 대한 접근을 규제하는 충분히 민주적인 선거 체제의 존재를 특징으로 하지만, 다른 하위 체제의 기능적 장애로 인해 잘 기능하는 민주주의라면 자유와 평등의 보장을 위해 필요한 보완적 지원을 상실한 지배체제”로 정의된다. 간단히 말하면, 선거 민주주의가 실행된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1987년 민주화의 봄에서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민주화가 공고화된다고 믿었다. 선거철마다 부정선거의 의혹이 불거지긴 했지만,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은 평화적으로 교체되었다. 민주제도가 정착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 덕택에 한국은 영국 매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20년 민주주의 지수 보고서》에서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평가를 받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선거제도, 정부의 기능, 정치적 참여, 정치 문화, 시민의 자유의 지표에서 선거제도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다른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현재의 제도에 안주한다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쇠퇴하고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민주주의는 과연 안전한가? 아니면 위태로운가?


2. 민주주의의 두 가지 원칙: 자치와 권리

민주주의가 병들었는지 아니면 건강한 상태인지를 알려면, 우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정치적 지배의 형식과 체제인 민주주의는 그리스어 개념이 말해주는 것처럼 ‘국민(demos)의 지배’이다.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였던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 인구는 대략 30만에서 40만으로 추산되는데, 시민은 약 14만 명이고 그 가운데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성인 남자 시민은 4만 명 정도였다. ‘메틱(metic, metoikos)’이라 불리는 시민권은 없고 거주권만 가진 외국인 거주자 7만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노예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국민의 지배는 오직 제한적 의미에서만 타당하다. 주로 노예가 담당하였던 가정의 생산활동에서 벗어나 정치에 참여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좋은 삶을 위해 조직한 공동체가 민주주의였다. 여기서 국민은 결코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서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원시적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만 전제하였을 뿐 그 외의 사람들을 배척한다는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우리는 시민들의 자격인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받아들인다. 자유의 관점에서 자유와 평등의 두 가치를 결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평등의 관점에서 두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회민주주의로 구분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파악한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정치체제이다. 정치체제는 지배와 통치의 형식이기 때문에 언제나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전제한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지배자는 항상 평등한 시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어서 일정한 통치 기간이 끝나면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간다. 정권이 평화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시민은 정치적으로 평등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민이 스스로 지배하는 자치의 방식이다.

민주적 자치는 항상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법이 지배하는 민주정체에서는 민중 선동가가 나타나지 않는데,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최고 권력을 갖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민중 선동가들이 나타난다. 이것은 민중이 다수로 구성된 독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다수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최고 권력을 갖기에 하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법을 통한 국민의 자치이다. 그러나 국민이 직접 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소수의 집단은 법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권력을 잡은 독재자는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왜곡한다. 민주주의 제도는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 요소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발전된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을 대변하는 정치적 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진다. 정치적 엘리트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일반 국민이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대중이 토론과 자율적인 조직을 통해 공적 삶의 의제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요 기회들이 있고, 또 그들이 이러한 기회들을 능동적으로 사용할 때 번성한다.”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적인 문제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인 자치이다. 자치가 이상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정표와 같다.

문제는 선거로 선출된 정치적 엘리트들이 국민을 대변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확대할 때 발생한다. 그들은 민주적 제도를 통해 선출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체제를 자신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이 권력을 이용하여 대중의 요구와 욕구를 조작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제도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작동되고 있지만, 정치와 정부가 점점 더 특권화된 정치 엘리트들의 손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벌어진다. 콜린 크라우치는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 민주주의(Post-Democracy)’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떻게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허용하고 반영될 수 있게 할 수 있는가?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일단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공적인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참여할 수 있는 국민의 평등한 권리를 요청한다. 자유주의는 정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유롭고 다양한 기회들을 요청한다. 국민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집단적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최대 민주주의는 이와 같은 강한 자유주의가 없이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 개인의 권리와 정치적 참여 사이에는 일종의 갈등과 긴장 관계가 존립한다. 정치적 역량의 평등 기준을 강조하면 할수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규칙과 제한은 더욱더 많이 개발될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평등의 절대화는 다양한 행위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분리될 가능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권리와 복지를 최우선순위로 설정하더라도 정치적 의사결정이 소수의 특권화된 엘리트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민주주의는 붕괴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정치적 시스템이다. 이러한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자유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변환한다. 다시 말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의 권리와 정치적 참여를 모두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정치 형태는 타락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왜곡된 형태로 결합할 때 자유민주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타락할 수 있다.

야스차 뭉크는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두 가지 타락 형태로 서술한다. 하나는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이다. “민주주의는 반자유주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독립기관을 행정관들의 자의적 통치에 종속시키기를, 또한 소수자들의 권리를 축소하기를 선호하는 곳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자유주의 체제이며 정기적이고 경쟁적인 선거를 치르고 있더라도 비민주적으로 될 수 있다. 이것은 특히 정치체제가 엘리트 위주로 왜곡된 상태에서, 선거가 국민의 뜻을 공공정책으로 바꾸는 일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두 가지 타락 형태는 현재의 정치적 현상을 대변한다. 신권위주의가 발흥하는 국가에서 국민은 점점 더 소수민족과 소수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반자유주의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정치 엘리트들이 국민의 권리와 복지에는 신경을 쓰지만 기성 정치체제를 고수함으로써 대중의 견해에 양보하지 않으려는 ‘비민주적’ 태도를 보인다. 반자유주의적 성향은 독재체제로 기울어지고, 비민주적 성향은 관료제를 지향한다. 공적인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정책 결정에서 일반 대중의 영향력은 점점 더 줄어든다. 선거만이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된 것이다.

국민 자치의 원칙과 개인의 권리 존중, 국민의 정치 참여와 자유 보장은 민주주의가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야스차 뭉크는 국민 대중의 성향은 점차 반자유주의적으로 바뀌고, 정치 엘리트들의 선호는 비민주적으로 변해간다고 진단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충돌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반자유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개인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민주주의와 비민주적 자유주의, 즉 민주주의가 없는 권리 보장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과 용어 자체에 커다란 물음표를 붙이는 경향은 이미 우리의 민주주의도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3.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움직임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이다. 민주적 제도는 법의 지배이다. 문제는 법으로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제도 안에는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이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왜 타락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디커플링은 언제 일어나는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민주주의 이전의 형태로 퇴보하는가? 민주주의 이전의 비민주적 정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개념들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와 병리적 현상을 겨냥한 여러 개념 중에 특히 ‘파시즘(fascism)’ ‘포퓰리즘(populism)’ 그리고 ‘트라이벌리즘(tribalism)’이 눈에 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용어들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경향으로 읽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정한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면 민주주의는 언제나 세 가지 위기 요인을 갖고 있다. 첫째는 정권이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는가의 ‘정당성의 위기’이고, 둘째는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왜곡하거나 기만할 수 있는 ‘대변의 위기’이고, 그리고 셋째는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정치적 엘리트가 부패하여 이기적 집단으로 변질하는 ‘부정부패의 위기’이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에서조차 국민은 정치인과 공직에 있는 관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사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하는 정부 신뢰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정부 신뢰도는 39%로 36개 회원국 가운데 역대 최고 성적인 22위를 차지하였지만, 여전히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 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2021년 1월 28일 발표한 2020년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 Corruption Perceptions Index)에서 우리나라는 100점 만점에 61점, 180개국 중 33위이지만 OECD 국가와 비교하면 부패 수준이 별로 좋지 않다. 물론 이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북미와 서유럽 전체에 걸쳐 국민은 정치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문제는 정부 및 정치인의 신뢰 저하와 함께 민주적 제도에 대한 신뢰도 잃어 간다는 것이다.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잃는 상황에서도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권력을 잡은 정치적 집단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무시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려는 운동이 바로 파시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법이 지배하지 않을 때 선전 선동가가 나타난다고 경고한 것처럼 정권의 이익을 위해 법을 자의적으로 이용하거나 형식적으로만 준수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 파시즘이다. 이렇게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도자가 결국 독재자가 된다. 독재자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항상 국민의 이름으로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독재자는 헌법과 선거 시스템, 그리고 다양한 제도를 바꿈으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하고, 경쟁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운동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종종 공공의 선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다.” 독재자는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파시즘을 지향하는 정치체제에서는 ‘국민의 뜻’이 만능이다. 파시즘은 기존의 법도 국민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수정하거나 폐지한다. 따라서 파시즘 정권은 야당과의 정치적 대화나 타협을 거부하고, 야당을 잠재적 경쟁자보다는 제거해야 할 적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파시즘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인 정당을 무력화시킨다. 정당은 본래 유권자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후보자를 선출하는 기능과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걸러내는 기능을 가지는데, 이러한 기능이 파시즘에 의해 마비되면 민주주의의 제도적 핵심인 견제와 균형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공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국민의 뜻’을 많이 들먹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파시즘의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파시즘은 국민에게 아첨하다가 대중 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하는 독재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두 번째 경향은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부정적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뜻을 제도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포퓰리즘은 국민의 뜻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 파시즘이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위로부터 아래로 국민의 뜻을 왜곡한다면, 포퓰리즘은 아래로부터 위로 국민의 뜻을 변형한다. 파시즘이나 포퓰리즘 모두 선전과 선동을 통해 국민의 뜻을 왜곡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기존 정치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신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포퓰리즘의 핵심은 반권위주의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 부패한 정치적 엘리트 집단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한다. 그들은 기존 정당 체계의 가치를 부정하고, 기성 정치인들을 비민주적이라고 매도한다.

포퓰리즘은 사회의 일부가 정치적 주류에 속하지 않고 기존 정당에 의해 소외당한다는 감정이 만연할 때 창궐한다. 우리는 지금의 정치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은 기존의 정치인들이 망쳐놓은 것이다.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다수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다수이다. 이런 논리로 무장한 포퓰리즘의 적은 바로 정치적 엘리트이고 기득권 세력이다. 정치적 불만, 사회적 소외 그리고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 결합하면 포퓰리즘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다. 

포퓰리즘은 기존의 정당 체제와 미디어가 근본적으로 썩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사실과 진실도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옳다는 감정이 객관적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자신들이 믿는 것이 바로 사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검토하거나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은 페이크 뉴스, 허위 정보, 음모론을 양산한다. 진리와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와 누가 나와 함께하는가만이 중요하다. 포퓰리즘은 기존의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의 유지와 확대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적 엘리트를 거부하며 자신들이 바로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포퓰리즘의 구호는 자치라는 민주주의 원칙과 맞닿아 있다. 포퓰리즘은 정치적 엘리트가 지배하고 독점한 정치체제에 의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국민의 불만과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은 틀림없다. 포퓰리즘은 종종 보통 사람의 언어로 민중의 목소리를 진솔하게 대변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민주주의적 요소는 여기까지다. 국민의 뜻을 반영하고 대중의 의지를 존중하는 데에서 포퓰리즘은 장기적으로 훨씬 더 해롭다. 

포풀리즘은 첫째 자신들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기성 엘리트 정치인은 거짓말을 하고 따라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즘이 경멸스러운 소수와 배신당한 다수의 대립 구도를 조성하여 소리 없는 대중의 정체성을 이용하는 수사학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둘째, 포퓰리즘은 정치를 극도로 단순화한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확실하고 즉각적인 해결책을 원하기 때문에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트의 현란한 수사는 단지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부족함을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포퓰리즘은 민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한다는 허위의식을 심어줌으로써 토론과 심의의 정치 문화를 파괴한다. 올바른 지도자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 기존의 제도를 개혁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만연할수록 민중의 통치를 부르짖는 포퓰리스트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렇게 국민의 뜻을 왜곡된 형태로 반영하는 포퓰리즘은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국민을 선동하는 파시즘에 화답한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번째 경향은 ‘트라이벌리즘’이다. 우리는 폐쇄적 집단과 네트워킹을 자신의 이익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정치적 부족중심주의’로 파악한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지배를 의미하고 지향하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와 정체는 언제나 소수의 정치적 엘리트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 정치적 엘리트들이 국민의 뜻을 반영하려는 의지와 책임이 없으면, 정치적 엘리트와 국민 사이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정치적 엘리트들은 민주주의의 집행자라는 점에서 항상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또 국민의 뜻을 반영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엘리트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민주적 성향을 띠게 된다. 야스차 뭉크가 말하는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윤리적 가치와 규범이 아직 성숙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제도에서 중요할 역할을 담당하는 정치적 엘리트들은 권력과 이익의 카르텔로 전락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 사회의 관피아이다. 5급 이상의 공무원이 퇴직 후에 공기업이나 유관 기관에 재취업하여 요직을 독점하는 현상을 말하는 ‘관피아’는 공직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다. ‘벼슬 관(官)’ 자와 이탈리아의 폭력조직 ‘마피아(mafia)’를 합성한 ‘관피아’라는 용어는 치욕적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부족중심주의를 잘 말해준다. 

관피아 연고주의는 독특한 구조의 사회적 네트워킹이 권력과 결합할 때 어떻게 부패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다. 관리 감독과 인허가는 오늘날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규제 권력이다. “국가는―국가의 기구와 권력은― 사회의 모든 산업에 대한 잠재적 자원이거나 위협이다. 금지하거나 강요하는 권력, 돈을 받거나 주는 권력과 함께 국가는 수많은 산업을 선택적으로 돕거나 해를 끼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한다.”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규제이다. 규제로 인해 이익을 보거나 또는 손해를 보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는 까닭에 규제의 형식은 자원 분배의 공정성을 결정한다. 

여당과 야당이 겉으로는 정치적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익과 공동선에 대한 책임이 옅어지면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는 정치 계급의 구성원이 된다. 정치는 정쟁이 되고, 정쟁은 이권 투쟁이 된다. 오늘날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고,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포퓰리스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들이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밥그릇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엘리트들이 집단화되어 서로를 적대시하면 할수록, 정치는 민주주의를 배신한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으로 건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경향들인 파시즘, 포퓰리즘, 트라이벌리즘이 모두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우리는 이 세 가지 위험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은 동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4.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조건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지배 형태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정확하게 본 것처럼,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은 다원성이다. 한 인간이 아니라 다수의 인간이 같은 거주지에 살면서 협력한다는 “다수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면서도 공동선에 기여하고 동시에 공동으로 협력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가 민주주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다원성을 줄이고 획일화하는 모든 경향은 실제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거꾸로, 민주주의가 지속되려면 사회의 다원성이 공정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민주주의의 위기는 실제로 사회의 다원성이 축소되면서 발생하였다. 파시즘은 선전과 선동을 통해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억압하고, 포퓰리즘은 복잡한 정치를 단순화시키며, 트라이벌리즘은 다양한 정치적 의제와 가치를 이익투쟁으로 환원한다. 왜 이런 일이 풍요의 시대인 21세기에 벌어진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반민주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 사회적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21세기 초기의 사회적, 정치적 현상은 ‘양극화’라는 용어로 압축된다. 신자유주의로 촉발된 세계화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였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중산층의 축소로 인해 사회가 20대 80 또는 1대 99의 사회로 양극화되면서, 정치적 지형도 중도가 없는 적대적인 양극단으로 양극화하였다.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중간 허리가 사라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위기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디커플링’으로 표현된다면, 이러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디커플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냉전 이후 민주주의가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좀 더 공정한 통치 형태라고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은 사실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에 기반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는 독재체제였고, 북미와 서유럽같이 잘사는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경제적 번영과 민주화를 함께 이룬 나라에서 정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로 여겨졌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곧 민주주의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성장할 때 역동적이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음에도 성장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장이 멈추면서 사회적 협동의 산물인 부는 불공정하게 분배되고 있다. 성장 없는 풍요로움은 공정하지 않은 풍요로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자유민주주의의 미래와 역동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직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일시되던 시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부모보다 더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부모의 생활 수준과 비교하여 경제적 지위 향상을 의미하는 ‘절대 소득 이동성’은 갈수록 떨어져서, 오늘날 젊은 세대는 열심히 일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민주주의의 가장 커다란 독이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는 양극화 사회에서 계층 이동은 중단된다. 

사회의 양극화는 자본주의의 승자와 패자를 혐오와 증오의 감정으로 갈라놓는다. 성공한 승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능력과 노력의 대가를 받았을 뿐이라는 오만한 감정을 갖게 되고, 실패한 패자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굴욕과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사회에서 ‘하면 된다’는 능력주의는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고착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의 이중성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샌델은 이처럼 포퓰리즘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를 “굴욕의 정치(politics of humility)”라 부른다.

공정에 대한 외침은 사실 굴욕의 표현이다. 사회는 풍요로운데 나만 가난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이 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양극화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 가지 경향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분리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다시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는 ‘시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이다. 세상에는 시장의 이점을 잘 활용하여 부유한 사람들이 있고, 여러 이유로 인해 시장의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이 시장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다. 

우리는 이러한 미덕을 ‘연대(solidarity)’라 부른다. 서로 협력하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호혜성에 바탕을 둔 결합이 바로 연대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 양극화 사회에서 이러한 연대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우리는 이제 “극단적인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22)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분노와 원한만으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 민주적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경제적 필요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여전히 타당하다. 민주주의의 두 원칙, 자유와 평등은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자유와 평등이 꽃필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양극화를 줄이는 길이 바로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

 

이진우 jinwoolee@postech.ac.kr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동 대학 총장, 한국니체학회 회장, 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니체의 인생 강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치철학》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포스텍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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