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지구촌, 어떻게 구할 것인가

 

1. 머리글

지금은 ‘빈틈이 사라진 시대’다. 환경에서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빈틈이 사라지고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넘어서자 위기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빈틈이 사라진 맥락에서 우리는 지금 초유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이 생물을 조작하고 창조하는 호모 데우스의 지위에 올랐다. 기후위기와 환경과 생명의 위기는 38%의 생명을 멸종위기에 몰아넣으면서 인류 사회에도 급격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착취와 불평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팬데믹을 일으키면서 대중의 일상은 물론, 노동에서 세계 경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앞으로 세계사는 4차 산업혁명과 맞물리면서 코로나19 전후로 나뉠 것이다. 코로나 이후 사회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인류 문명은 과연 종말을 맞을 것인가. 인류는 기후위기, 생명과 환경의 위기, 불평등의 극대화와 사회 붕괴의 위기,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와 노동의 위기, 간헐적 팬데믹의 위기, 공론장의 해체와 민주주의의 위기 등 6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들은 모두가 자본제의 토대에서 서로 얽혀 조건과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여섯이면서도 하나다.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COVID-19 Pandemic, 이하 ‘코로나 팬데믹’)만 하더라도 이 위기들이 서로 겹쳐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완충 역할을 하던 ‘빈틈’의 숲마저 파괴하자 숲속의 동물들과 공존하던 바이러스가 인수(人獸) 공통의 바이러스로 변형을 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고속도로로 삼아 한 달 만에 퍼져 팬데믹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시급하게 검진시스템, 백신, 치료제를 개발하고, 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에서 각 국가나 지역, 개인이 각자도생하며 경제 불평등에 이어 보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 설혹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임계점을 넘은 맥락은 그대로이기에, 수학적/확률적으로 5, 6년 주기로 팬데믹이 올 것이다. 코로나 이후 사회에 위기는 어떻게 펼쳐지고 있고 불교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2. 코로나 이후 사회에서 6대 위기의 양상

1) 기후위기 

인류의 자연 파괴가 임계점을 넘자 지구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지층에서 콘크리트 더미와 플라스틱 덩이, 닭 뼈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에 상당수 학자가 지구가 홀로세(Holocene)를 넘어 인류세(Anthropocene) 혹은 자본세(Capitalocene)로 진입했다고 말한다. 이런 변화는 인류와 생명에게 여러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기후위기로 대기와 해양과 대지가 변화하고, 매년 수백만 명의 사람과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죽고 있다. 변화의 핵심은 이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난화다. “지구촌은 매년 360억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고 이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1만 년 동안 4℃가량 오른 지구의 평균기온이 최근 1백 년 만에 1℃가 상승하였다.” 

“지금 상태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없을 경우 3~4℃만 기온이 상승해도 2080년까지 18억 명이 물 부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해수면 상승 등으로 3억 3천만 명이 홍수를 피해 이주해야 하고, 2억 2천만 명에서 4억 명이 말라리아에 걸릴 것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2,000년 수준에서 밀 생산량은 50%, 쌀 생산량은 17%, 옥수수 생산량은 6%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영향도 지대하여, “1980년부터 2020년까지 극한 날씨의 비용은 1조 8,750억 달러에 이른다.” “기후변화가 세계의 GDP를 20% 이상 감소시킬 가능성이 51%다. 이는 GDP가 –26.7%로 떨어졌던 대공황과 견줄 만한 수치다. 유일한 차이점은 기후변화의 경우 GDP 감소는 영구적이라는 점이다.” 

“IPCC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지 않으려면 금세기 말까지 지구온난화를 1.5℃로 제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약 45%를 감축하고 2050년에는 순 영점에 도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시급하고 전례 없는 사회 경제적 변화가 필요하다.”

2) 생명과 환경의 위기

인류는 한 조각의 빵과 고기, 목재를 위하여 농경혁명 이후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살하였으며, 이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체제 이후 폭증했다. 현재 지구의 대기와 산과 들, 강과 바다는 인간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배출한 중금속과 화학약품, 매연, 플라스틱 등과 개발로 인하여 생명체를 멸종시킬 정도로 오염되고 파괴되고 있다. 지금 “1초 동안 0.6헥타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 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은 전 세계 과학자 1,700명이 참가하여 조사한 4만 4,838종의 대상 동식물 가운데 38%인 1만 6,928종이 멸종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하였다.” 

“2018년에 3억 5,9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산되었고,” “2010년에만 480만 톤에서 1,27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매년 수많은 거북이와 고래, 상어, 새들이 이들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하여 먹고서 병들거나 죽어가고, 나노 상태로 분해된 플라스틱은 물고기의 몸에 축적되고, 이를 인간이 섭취한다. 

환경파괴와 기후위기는 인간에게 되돌려지고 있다. 여러 개월에 걸친 대형 산불, 역대적 홍수 · 폭설 · 가뭄 · 폭염 · 한파 · 태풍, 빙하의 소멸과 해수면 상승, 미세먼지 증가 등이 지구촌의 일상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막대한 농산물의 생산 감축과 경제 손실과 건강 훼손을 겪고 사망자도 속출하고 있다. 

3) 불평등의 극대화와 사회 붕괴의 위기

지금 불평등은 점점 극대화하고 구조화하고 있으며 사회와 체제를 붕괴시킬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18년 현재 한국의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86%, 배당소득 93.9%, 이자소득 90.8%를 차지하였다. 세계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세계 불평등 데이터베이스의 2020년 6월 30일 현재 통계를 보면, 주요 국가별 상위 10%의 전체 소득 차지 비율은 일본 41.6%, 중국 41.4%, 미국 46.8%, 러시아 45.5%, 영국 35.5%, 프랑스 33.3%, 독일 36.8% 등으로 대동소이하다. 2018년 기준 CEO와 일반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차이는 미국 265배, 인도 229배, 영국 201배, 독일 136배, 중국 127배에 달한다. 이는 정부가 공개하거나 계량화할 수 있는 수치로 전체 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여기에 부동산, 현금, 소유물 등 총자산을 포함하면 불평등은 더욱 극심하다. 불평등은 경제 격차만이 아니라 개인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고 사회를 오염시킨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경쟁, 적대감, 편견, 폭력, 스트레스, 약물사용, 사망률은 증가하고, 상호 협력과 신뢰도와 평균수명은 줄어들며, 건강은 악화한다. 

4) 4차 산업혁명과 노동의 위기

코로나 팬데믹은 4차 산업혁명을 촉진시키고 있으며 이는 인류 사회를 바꾸고 있다. 슈바프(Klaus Schwab) 등을 비롯한 대다수 학자가 정의하거나 거론하는 ‘4차 산업혁명’이란 3차 산업혁명, 곧 디지털 혁명의 연장일 뿐이다. 필자가 정의하는 4차 산업혁명이란 “컴퓨터 공학, 정보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 생명공학, 뇌과학, 신경과학, 양자역학, 우주항공공학 등을 융합해 이룩한 기술을 기반으로 생명을 조작하고 창조하는 신의 지위에 오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갖는 포스트휴먼으로 거듭난 인간이 다른 인간, 인공지능, 모든 사물과 초연결된 네트워킹을 통해 소통하며, 실제 현실/증강현실/가상현실에서 매트릭스적 실존을 하면서 디지털상으로 자신을 무한 복제하고 영생을 누리는 동시에, 인간처럼 말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기계나 생명을 만나 인류 역사 이래 전혀 다른 조건, 정체성, 세계관과 패러다임, 삶, 사회를 구성하는 대변화”를 뜻한다. 4차 산업혁명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필자는 4차 산업혁명의 양상을 10가지로 분류하는데, 이 중 8가지가 현재 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인간과 생명의 유전자, 인간의 뇌와 무의식과 감정의 영역에까지 시장을 확대하고 인간의 감정마저 착취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노동의 위기, 재현의 위기, 빅브라더와 빅마더의 감시와 통제 강화로 인한 전체주의화의 위기, 인간 정체성의 위기, 도구와 인간의 전복, 혹은 인공지능의 인간 지배 위기 등을 야기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위기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노동의 위기다. 현재 4차 산업혁명은 신자유주의 체제와 결합하여 부(富)와 정보 격차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임금을 주지 않는 부불노동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한 예로, 페이스북은 24억 명의 사용자들이 무료로 글과 이미지를 페이스북에 올리게 하고 이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2020년에 페이스북의 매출은 859억 6,500만 달러이고 순이익은 무려 38%인 326억 7,100만 달러에 이르는데” “고용노동자는 58,604명에 지나지 않는다.”  

로봇화/자동화와 이로 인한 일자리 대체는 현재 진행 중이다. “한국은 2020년 현재 로봇 밀집도가 1만 대당 868대로 싱가포르(918대)에 이어 세계 2위이며, 3위인 일본(364대)이나 4위인 독일(346대)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높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동화로 인하여 인간의 일자리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일자리도 심각하지만 다른 문제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현재 고스트 워크(Ghost work)가 새로운 노동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미 인터넷과 온라인 기업이 대형화하면서 법적 지위도, 조합도 없이 임시직으로 보조 역할을 하는 고스트 워크가 발생했다. “이들은 지금 조앤이란 여성이 아마존닷컴이 운영하는 엠터크에서 음경 사진을 거르는 일을 매일 10시간씩 수행하고 40달러를 버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놓치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부수적인 일을 보조하고 있다. “이대로 방치될 경우 수억 명의 노동자들을 눈에 안 보이는 존재로 만들 수도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불평등을 더욱 극대화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와서 숙련 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현재 미국에서 뇌과학이나 생명공학, 컴퓨터공학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과학기술을 다루거나 알고리즘을 제작/관리하는 과학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반 노동자들의 격차는 수백 배를 넘는다. 이 격차는 점점 심화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노동운동 자체를 무력화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동 거부로 맞서면 이제까지는 자본이 월등한 위상에 있더라도 이윤이 줄어들기에 마지못하여 협상에 나서거나 양보했다. 하지만, 이제 노동 거부를 하면 자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로봇이나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것이다. 배달노동자와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새롭게 조직하여 단결투쟁을 한 데서 잘 나타나듯, 노동자는 변화된 조건과 맥락에서 이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저항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 대다수가 ‘쓸모없는 자’로 전락하고 파편화하기에,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은 쉽지 않을 것이며, 설혹 투쟁한다 하더라도 자본은 로봇화/자동화로 돌파할 것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로봇봉건제의 도래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의 생산성은 인간의 수십 배에서 수천 배에 이를 것이다. 로봇이 숙련 노동자와 반복 작업을 거의 모두 대체한다면, 노동시장은 전면적으로 붕괴한다. 0.0001%의 로봇 소유주와 플랫폼 기업 소유자가 모든 가치를 독점하며,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경우 노동자는 봉건시대의 농노처럼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보조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5) 간헐적 팬데믹의 위기

인수공통의 바이러스들이 간헐적으로 팬데믹을 일으키고 있다. “메르스는 27개국에 걸쳐 2,494명을 감염시키고 858명을 사망으로 몰고 갔으며, 사스는 26개국에서 8,096명을 감염시키고 774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2021년 6월 18일 현재 세계 221개국에서 1억 7,831만 2,054명의 감염자와 386만 284명의 사망자를 낳은 채 멈추지 않고 퍼지고 있다.”22)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쉽게 변형을 하고 항체가 형성되어도 그 유효기간이 짧기에 완전 종식이 쉽지 않을 것이다. 설혹 백신으로 퇴치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불청객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만큼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의 경계나 완충지대는 무너졌다. 

코로나 팬데믹은 일상에서부터 국가, 세계 체제에 대변혁을 촉진시키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심각한 모순 상태에 있던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에 결정타를 날렸다. 바이러스의 고속도로임이 확인되면서 세계화는 일시 중단 상태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대량실업과 공황이 시작되고 있다. 수치만 차이가 있을 뿐, 경기침체와 마이너스 성장, 대량실업이 전 세계에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IMF는 2020년에 미국 –8.0%, 독일 –7.8%, 프랑스 –12.5%, 이탈리아 –12.8%, 영국 –10.2%, 러시아 –6.6%, 일본 –5.8%, 중국 1.0% 등 전 세계의 경제가 평균 4.9%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는 1930년대의 대공황 이후 가장 악화된 수치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료장비와 물품, 백신의 국제적 협업과 공유는 붕괴하고, 각국이 자국 생산과 소비에 치중하고 있다. 검역과 방역을 빌미로 각국 정부는 빅브라더식의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고, 시민을 격리시키고 있으며, 대신 포퓰리즘으로 이를 보완하고 있다. 이 와중에 생명권력은 주권권력, 데이터권력과 동맹을 맺으며 막대한 권력과 자본을 획득하고 있고, 기존의 주권권력과 훈육권력의 동맹에 생명권력, 데이터권력이 가세한 거시권력은 공포를 기반으로 더욱 강력하게 시민을 통제하고 감시하고 훈육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얻고 있다. 국가는 한편에서는 자본과 연합하여 원격의료, 원격강의, 생명 관련 사업의 시장을 확대하고, 한편에서는 탈출구를 모색하면서 디지털 혁명, 그린 뉴딜, 초연결사회를 서두르고 있다. 

노동의 경우 온라인 서비스, 배달앱이 활성화하고 임시직과 프리랜서가 증가하며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proletariat)’가 늘어나며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에 더하여 재택근무와 비재택 근무, 숙련 노동과 비숙련 노동 사이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다.

역성장에서 대량해고가 발생하면서 불평등은 더욱 극대화하였으며, 남성보다 여성이, 백인보다 유색인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감염자가 3천만 명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국의 경우, “지난 10년 동안 총 2,280만 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는데, (2020년) 3월 넷째 주(22~28일)의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665만 건, 그 1주일 전 328만 3,000건으로 불과 2주 만에 약 1,0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억만장자의 부는 2020년 3월 18일에서 11월 30일 사이에 놀랍게도 3.9조 달러가 증가했다.” “상위 억만장자 1,000명이 전염병 이전 최고치로 재산을 회복하는 데 불과 9개월이면 가능했지만, 전 세계 극빈층은 회복까지 10년 이상(14배) 더 걸릴 수 있다.”

개인들도 긴 방역과 격리 속에서 차츰 변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격리와 거리두기를 하고 감염자와 사망자가 증가하자, 시민들의 스트레스와 공포가 증대하였다. 대신에 시민들은 홀로 묵상하면서 여행하고 비싼 것들을 소비하며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행복해하면서 자신과 가족에 충실한 것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의료진과 시민들이 위기에 처한 우한, 대구, 티베트, 미얀마 시민들을 도왔다. 상당수의 시민들은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임을 깨닫고 있다. 코로나는 디지털의 메커니즘이 시민들의 일상세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하였다. 디지털 원주민, 밀레니엄세대, 산업화시대, 전후 세대의 순으로 스마트폰의 앱을 익히고 온라인 회의, 강의, 종교의례를 수용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까? 중요한 것은 미래가 결정된 것도 아니며 함부로 예측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다양한 변인들이 다양한 결과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아주 미세한 요인들이 서로 얽히고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다양한 결과를 구성할 수 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와 국가, 자본, 시민들은 통제 대 자율, 이기적 각자도생 대 이타적 상생, 경쟁 대 협력, 자연파괴 대 생태적 공존, 물질 중심 대 탈물질주의, 불평등 대 평등을 놓고 갈등하고 담론과 헤게모니 투쟁을 벌일 것이며, 어느 쪽에 더 기우느냐에 따라 다양한 버전의 국가와 사회가 전개될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볼 때, 우여곡절도 많고 갈팡질팡하고 퇴행도, 반동도, 저항도 많겠지만 점차 후자를 지향하는 사회로 이행할 것이다. 그것 말고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6) 공론장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위기

페스트에 대한 성찰,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혁명과 계몽사상, 산업화와 도시화, 보통교육, 금속인쇄와 출판의 대중화 등이 어우러지면서 의식의 각성을 한 시민들이 주술의 정원에서 탈출하여 교회 바깥에 시민사회를 구성하였다. 시민들은 책을 읽고 신문을 보며 살롱 등에 모여 모든 사람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기회와 권력을 갖고서 과학과 이성에 근거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토론을 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때로는 합의에 이르며 부르주아의 공론장(public sphere)을 형성하였다. 공중(public)은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흑사병, 연금술, 면죄부로 대표되는 어두운 주술의 정원에서 탈출하여 계몽의 빛이 환하게 비추는 세계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과학발전과 근대사회,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언론이 ‘제조된 공론장’을 만들고 복지국가가 정착되며 사적 부문과 공적 부문이 상호침투하고 관료체계와 엘리트주의가 평등한 토론을 방해하고 대중 또한 문화산업과 엔터테인먼트에 휘둘리면서 공론장은 쇠퇴하였다.” 신자유주의 체제, 디지털 사회와 4차 산업혁명, 코로나바이러스19 팬데믹은 쇠퇴하는 공론장을 아예 붕괴시키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속되면서 자본과 국가와 거리를 두고 제4부의 역할을 하던 언론들이 자본에 포섭되거나 잠식되었다. 대다수의 정론지들이 언론의 윤리와 언론기업으로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후자에 더 기운다. 상당수의 SNS와 유튜버들은 오로지 돈만을 목적으로 하여 조작과 선동, 왜곡을 서슴지 않으며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일부 언론까지 이에 가세하고, 정치와 자본은 이를 이용한다. 국가는 코로나 팬데믹을 빌미로 시민에 대한 감시와 사찰을 강화하고 시민들은 공포에 휘둘려 이에 순응한다. 포탈들이 여론을 좌지우지한다. 기존의 뉴스 가치를 따지던 모든 척도는 조회 수나 좋아요 개수로 대체되었다. 정론지도 경영위기 속에서 점점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며 실제로는 선정지로 기능을 한다. 정론지도 디지털 대응팀을 운영하면서 조회 수 상위 기사를 복사하여 기사를 제작하고 포털에 올린다. 

대중은 SNS에서 보고 싶고 읽고 싶은 것만 접하면서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있다. 이로 폐쇄된 공간에서 비슷한 정보와 생각이 돌고 돌면서 강화되고 악순환을 일으키는 반향실효과(echo chamber effect)는 더욱 증대하고 있다. 한국으로 국한하면, 그동안 진영의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조국 사태 이후 진보와 보수만이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인 자유주의 세력과 진보 진영 사이의 벽은 더욱 공고해졌다. 

 

3. 위기의 원인

이렇게 여러 위기에 놓인 원인은 복합적이다. 핵심이자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다. 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있다. 예로 들자면, 세계 식량은 78억 명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생산되는데, 8억여 명이 기아에 허덕인다. 더 야만적인 것은 이들 8억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 양, “생선과 해산물을 제하고 7,500억 달러, 총 1조 달러어치의 음식물 쓰레기를 매년 버린다는 점이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102.3%인데 자가 주택비율은 56.8%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물리적 존재이자 화학적 존재다. 생명들은 서로 다른 생명이나 자연을 먹이로 취하여 이로 물질대사를 하여 에너지를 생산하여 생명성을 유지하며, 자연 및 다른 생명과 조건과 원인으로 작용하며 서로 생성하고 변화하고 진화한다. 모든 생명은 연기를 맺은 채 순환한다. 

반면에, 자본주의 체제는 이 순환을 교란시킨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M-C-M’, 곧 화폐(M)로 생산수단을 사고 노동을 구입하여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여 만든 상품(C)을 시장에 팔아 이윤이 포함된 화폐(M’)를 얻어 이를 다시 빨리 확대재생산 하며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더 많이 착취하고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할수록 자본이 증대하기에, 교환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물화(物化, refication)와 소외를 심화하기에, 자본은 물론이거니와 대중도 화폐증식의 욕망에 휘둘린다. 

자연은 무한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선과 악, 이타와 이기의 복합체인 인간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신과 인간보다 돈을 더 섬기면서 이기심과 경쟁심, 탐욕을 서로 키운다. 이 체제는 악과 이기심, 탐욕을 제어해야 할 이성마저 도구화하면서 모든 시스템과 제도, 과학기술을 계산이 가능한 목적에 종속시킨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살인, 쿠데타, 인간과 생명의 대량학살, 전쟁도 불사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노동과 자연에 대한 자본의 야만적 착취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제어하던 제도와 법, 규정을 규제철폐의 이름으로 무력화하고, 공공영역을 사영화/민영화하였으며, 노동 유연성의 이름 아래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여 그들을 생존위기에 몰아넣었으며, 세계화를 단행하여 초국적 자본이 전 세계의 노동자와 자연을 대상으로 착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본은 노동자에게 양보와 타협을 하는 대신 정규직을 대량해고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메우고, 임금이 싼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였다. 

노동자의 가치 자체가 하락하고 노동조합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노동자의 연대는 느슨해지고 노동조합은 더욱 힘을 잃었기에 국가와 자본의 야만에 대한 저항이나 견제는 쉽지 않다. 대중의 지지를 통한 헤게모니 확보도 더욱 어려워졌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확산하고 자국 이기주의가 고조하면서 대중들의 극우 정당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높아지고 브라질,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에서는 극우나 권위적인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국가와 자본의 유착은 심화하고, 민주주의는 퇴행하였으며, 노동은 억압당하고 인권은 후퇴하고 환경은 파괴되고, 불평등이 심화하였다.

불평등으로 국한하면,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늘 크기 때문에(r>g), 소득 수준별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획기적으로 증대하여 부과하는 등 이를 상쇄할 공공정책이나 제도를 집행하지 않는 한 불평등은 심화한다.” 하지만, 피케티의 분석만으로 부족하다.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 그 체제하에서 생산수단의 사유와 독점, 권력의 격차와 민주주의의 실패, 중심이 지배하고 독점하는 세계체제, 과학기술과 데이터의 독점이나 과점, 기득권 동맹에 유리한 제도와 법, 규정 등 때문이다. 여기에 자본-국가의 유착이 강화하면서 조세개혁 등 불평등을 완화하는 정책이 별로 집행되지 못한 점, 상층과 하층 사이의 네트워크 차이, 금융부문의 수탈에 대한 대응 미비, 기득권 동맹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성공과 부패, 교육격차와 울타리 강화, 노동운동과 진보 진영의 대응 실패 등의 요인으로 불평등은 더욱 악화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한 산업화로 인하여 인간 사회는 화석연료를 에너지로 삼으면서 연소하고 남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로 방출하였으며, 수많은 상품을 생산하며 중금속과 독성물질, 플라스틱을 대기와 땅, 강과 호수, 바다로 배출하였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도시화를 촉진하고 인구를 증가시켰다. 아울러, 시민사회와 국가, 자본 사이의 균형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통제 또한 상실한 근대국가의 실패, 제3세계의 민중과 자연을 모두 착취한 제국주의, 도시화, 78억 5천만에 이른 인구, 토건 카르텔,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실패, 과학기술의 도구화와 자본과 유착, 기계론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 등도 위기의 원인이다.


4. 불교 안팎의 대안 

코로나 이후 사회의 길 찾기에 대해선 《보배경》과 《잡보장경》에 그 지혜가 잘 나타나 있다. 《보배경》을 보면, 붓다께서는 베살리에 역병이 창궐하자 제자들과 사흘을 걸어 그곳으로 가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보배경》을 설하고 제자들과 시신을 치우고 거리를 청정히 하는 일을 7일 동안 계속하여 역병을 물리쳤다. 고통의 현장에 대한 직접 참여와 헌신을 하고, 물리적 · 사회적 · 생물학적 면역체계를 작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병이 야기한 불안과 공포를 제거하는 심리적 면역체계 또한 작동시켰다.

《잡보장경》을 보면, 환희수(歡喜首)라는 앵무새가 산불이 나자 물가로 달려가서 날개를 적셔 불 위에 뿌리기를 반복했다. 제석천이 이를 알고 그 작은 날개에 묻힌 몇 방울의 물로 수천만 리에 걸친 그 큰불을 끌 수 있겠냐고 묻자 앵무새가 “내 몸은 비록 작으나, 내 마음은 크고 넓으므로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면 반드시 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몸이 다하도록 불을 끄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맹세코 불을 끄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석천이 그 큰 뜻에 감동하여 큰비를 내리니 불은 곧 꺼졌다.

동체대비심에 따른 연대와 참여, 과학적인 면역체계의 작동, 헌신에 바탕을 둔 심리적 면역체계의 작동, 목적을 향한 무한한 실천과 헌신이 코로나 이후 사회에 인류가 걸어야 할 길이다. 이제 권력과 돈, 쾌락의 무상함을 깨닫고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던 삶에서 타자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외려 더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햄버거 하나를 덜 먹으면 1.8평의 숲을 살리고 물 2,500ℓ, 곡물 1.8㎏, 57g의 메탄가스와 3㎏의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가 고기를 먹지 않거나 대체육만 먹는다면, 대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목장을 다시 숲으로 되돌리고 18%의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고 1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의 곡물을 절약할 수 있다.

세상이 바뀌려면 나부터 변화해야 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사회가 함께 바뀌어야만 나의 깨달음이 지속될 수 있고 타자의 구제, 더 나아가 자타동시 열반도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교적 대안은 대개 개인 차원에 머무는 경향이 강하다. 불교는 그동안 고(苦)를 개인적 고로만 국한하여 지멸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장아함을 보면, 가난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고 이로 도둑, 살해 등이 일어난다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전륜성왕이 보당을 부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르고 있다고 끝맺고 있다. 이는 불교가 개인의 고만이 아니라 사회적 고(social duka)에도 관심을 두었으며 열반이 개인의 수행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 대한 보시와 같은 선행을 종합하여야 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개인의 마음과 사회 구조, 개인의 업[別業]과 공동의 업[共業],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 윤리는 서로 의존하며 작용한다. 

현 상황에서 불자를 비롯하여 대중이 인식해야 할 점은 6대 위기의 극복은 자본주의 체제의 해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 모두 자본주의 체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을 통해서 보았듯이, 탄소세 등 모든 대안이나 혁신적이고 참신한 개혁책조차 자본주의는 결국 시장체제에서 이윤과 탐욕을 확대하는 수단이나 상품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국을 맞지 않으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약 45%를 감축해야 하는데, 시간만 많다면 온건한 개혁책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의 조건에서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6년 안에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는 임계점도 이미 넘어섰다. 이에 이제는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6대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사회, 곧 생태적이고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주의, 서로 자유롭게 하는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꼬뮨을 상상하고 건설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로봇화/자동화에 국한하여 예를 들면, 로봇을 공유부(common wealth)로 삼아 사회화하지 않는 어떤 대안도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는 로봇의 100% 사회화를 목표로 로봇이란 생산수단을 점진적으로 사적 소유에서 공유로 전환한다. 로봇에 관련된 기술은 로봇공학, 컴퓨터공학, 생명공학, 뇌과학, 빅데이터를 종합한 것이고 수많은 사람에 의해 축적되고 융합된 것이기에, 이 기술은 사회의 소산이며 개인이나 기업이 독점할 수 없다. 기술에 관련된 연구 또한 사회적 생산의 결과다. 기업이 소유한 로봇에 대해서는 로봇세를 높은 세율로 부과한다. 공유 로봇에서 생산한 가치와 로봇세는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택, 무상교통의 재정으로 활용한다. 노동자를 주체로 하되, 국가와 시민사회가 합의를 거쳐서 인공지능의 노동, 인간과 로봇의 협업, 인간만의 노동의 범주와 직종을 결정하고 이를 법적으로 규정한다.

불교와 결합한 대안을 모색하면, 생태계 차원에서는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 심층생태론(deep ecology),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을 넘어서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생태론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다. 세계 체제 차원의 경우, 원효가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은 똑같이 동일의 양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중심과 주변 사이의 화엄의 상즉상입(相卽相入)에 의한 무등(無等)의 체제로 전환한다. 한 예를 들어 한국처럼 인구가 밀집한 곳에서 숲을 파괴하고 태양광발전소를 짓는 것은 카드 돌려막기와 유사하다. 대륙별로 부자 나라들이 공동으로 자금을 대 고비, 사하라 사막 등에 태양광발전소를 짓고 이를 송전소와 초연결사회로 각 국가로 전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가가 나서서 제2차 세계대전 때 과학기술, 예산, 정책, 국민을 전쟁 승리에 맞추어 총동원한 것처럼 불평등과 기후위기 극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면 아직 길은 있다. 비용이 들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일자리를 창출한다.” 이에 불교의 교리와 갈마제도를 현재화하여 국가는 불교의 무등(無等)과 자비심에 바탕을 둔 자유롭고 정의로운 생태복지국가로 전환한다. 국가는 GDP나 무역량보다 생명의 다양성과 국민의 행복지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것에 맞추어 모든 정책을 기획하고 재정을 투여한다. 국가가 신자유주의를 해체하고 4차 산업혁명을 공공선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선도함은 물론, 불평등과 기후위기 극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이에 맞추어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다. 모두를 위한 빵과 행복을 추구한다. 의료와 주택, 교육, 교통은 단계적으로 무상화하며, 이를 위해 살찐 고양이법 제정, 부유세 등 조세혁명을 단행하여 이 재원으로 기본자산제, 사회연대소득, 로봇으로 일자리를 잃은 자들에 대한 재교육과 실업수당 등을 실행한다. 모든 분야에서 엘리트 및 1%의 독점을 깨는 참여민주제, 숙의민주제에 몫 없는 자의 민주제를 결합하여 권력기관과 조세기관을 시민이 위원회 형식으로 통제하고 그 수장을 직접 선출한다. 

국가는 글로벌 그린 뉴딜로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한다. 국가는 모든 생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에너지 체계와 산업체계를 혁신한다. 굴뚝산업은 단계적으로 생태친화적 제조업으로 전환한다. 석탄발전소와 핵발전소는 폐기하고 재생에너지와 지역 중심으로 에너지 체계를 전환하며, 사물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지능형 네트워크체계를 결합하여 에너지를 분배한다. 

국민도 소욕지족의 삶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가장 작은 생명도 부처님처럼 존귀하게 대하며, 타자의 아픔에 동체대비심을 갖는 것을 인간성의 최고 구현으로 삼는다. 갑의 위상에 있는 이들이 권력을 부리지 않고 을을 섬기고,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은 세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부당한 것에는 저항하고, 타자와 생명의 아픔에 대한 ‘자비로운 분노’를 행한다. 탐욕과 이기심이 들 때면 이를 무심과 이타심으로 대체하면서, 살아서는 물질적인 만족보다 마음의 평화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의 변혁에 나서며, 이를 바탕으로 자타 동시에 열반에 이르는 것을 삶의 궁극 목적으로 지향한다.


5. 맺음말

암울한 상황이지만 빛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의 오아시스가 말라 버리면 진부함과 무력함의 사막이 펼쳐진다.” 절체절명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하지만, 냉철한 현실 인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6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 집단적으로 죽어가고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 상황에서는 죽어가는 생명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애적 자비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 고와 사회적 고를 모두 지멸시키는 수행과 실천을 하면서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국가를 ‘생태적이고 민주적이며 정의로우며 약자들에 대한 자비심이 동력이 되는 사회주의’로 전환하고, 곳곳에 ‘서로 자유롭게 하는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꼬뮨’, 눈부처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의 자식과 후손들에게 22세기가 있을 것이다. ■ 

 

이도흠 ahurum@hanmail.net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등이 있다. 현재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시가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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