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위기의 지구촌, 어떻게 구할 것인가

 

기후위기의 인식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지구적 기후환경 변화는 나와는 관계없으며, 내 일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지만 이미 우리는 기후위기 시대를 헤치며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인류가 지구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지구에서 늘 일정함을 유지하던 에너지 순환 흐름의 문제가 생긴 것이 그 원인입니다. 세계를 넓혀, 온 우주로 바라보면 티끌만큼이나 작은 지구환경의 변화로 인해 어떻게 이렇게 큰 영향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 언뜻 피부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구만의 심각한 변화는 우주 차원에서는 단지 서로 순환하면서 나타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평온한 상태로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티끌만 한 지구의, 그것도 한구석에서 모든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작은 생명일 뿐입니다. 그러니 한없이 좁은 삶의 터전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에너지 흐름에 문제가 생긴 것을 극히 작은 부분적 변화라 치부하면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것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고, 작은 변화가 그 본질을 어찌하지는 못하는 것이 우주의 이치겠지만 그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 고스란히 몸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흩어졌다 모이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이동과 순환은 모두 우주의 기본 법칙입니다. 국지적이겠지만 이 균형이 깨질 경우 그 지역에서만큼은 커다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연이 스스로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우리 인간이 단지 한두 세대에 걸쳐 지구 전체의 순환구조를 깨뜨린 것은 분명 자연의 순리인 순환에 의한 변화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끝이 없을 물적 욕망만을 추구하며 돌진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자업자득으로 맞은 기후위기입니다. 이제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간 행한 과오를 찬찬히 돌아볼 시점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익숙한 습을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온실효과

안타깝게 인간은 우주의 너무나 좁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어쩌면 미미한 생명체로서, 우리에게 우주를 꿰뚫는 통찰력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사실은 어떠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우주에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은 지구가 유일합니다. 지구는 오랜 시간 동안 우주에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엄청난 에너지 변화를 완충하는 과정을 거치며 생명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두꺼운 옷을 마련했습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보호하는 옷이 바로 대기입니다. 대기는 태양복사 에너지에 의해 한 곳에 집중되는 에너지를 분산시켜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옷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밖에서 흡수한 열에너지를 거의 모두 밖으로 내보내거나 토양이나 물속에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밖에서 들어오는 열을 흡수한 만큼 내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이 계속 축적되는 현상은 추운 겨울에는 좋지만 더운 여름에는 곤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기라는 옷을 벗을 수 없으니 고스란히 견뎌 내야만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람을 포함해 지구의 온 생명이 견딜 수 있는 역치가 어디까지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설정해놓은, 산업혁명 이후부터 지구 평균온도 상승분이 1.5℃가 되는 시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조금 더 온도가 높아질 때까지도 견딜 수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 인간은 그 이상의 온도를 견딜 것입니다. 그러나 1℃ 정도가 높아진 지금도 과거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생물종들이 빠르게 멸종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비록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온도는 높을지언정, 다른 생물과의 상호작용을 필수로 하는 생명체로서 더 빠르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온실효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밭에 비닐하우스를 만들면 하우스 안이 뜨거워집니다. 비닐이 태양에서 전달되는 에너지는 고스란히 하우스 안으로 받아들이지만, 밖으로 다시 나가는 에너지를 나가지 못하게 막기 때문에 하우스 안에 열에너지가 쌓여 뜨거워지게 되는 이치입니다. 지구 대기에 이산화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온실효과를 유발하는 가스상 물질, 즉 온실가스가 비닐하우스의 비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적정한 두께의 온실가스층을 유지해 왔지만, 산업혁명 이후, 특히 본격적인 산업화가 진행된 1950년대 이후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언뜻 매우 작은 변화로 보입니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과거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지구 대기의 단지 0.03% 정도를 유지하면서 변화해 왔는데, 이제 0.04%가 조금 넘은 상황입니다. 이 광활한 대기에서 단지 1만분의 1의 차이인 0.01%만이 늘어난 것이니 어쩌면 무시해도 될 수 있는 티끌만 한 양의 변화이지만, 이 작은 변화가 우리 인류를 포함해 모든 지구 생명체의 삶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 상황을 만든 이는 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보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작용과 반작용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따르는 것이 이치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면 그 반작용으로 어딘가에서는 대가를 치르기 마련입니다. 다만, 내가 추구한 편리함에 대한 반작용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고 다른 사람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쌓은 공덕이 온전히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니며 다른 모두에게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은 꼭 유의해야만 합니다.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생각하면서 행동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변하니 다들 따라 변합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의 · 식 · 주라 합니다.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에너지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에너지 측면에서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농경을 중심으로 한 정주사회를 유지해 왔습니다. 농경사회가 유지되는 동안 우리 조상들은 1년을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을 구하기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의 거의 모든 시간을 논과 밭에서, 때로는 산과 들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을 추수가 끝난 후부터 바로 추운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 이 둘 모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입니다. 

불과 60여 년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음식을 하거나, 겨울철 추위를 견디기 위한 에너지를 거의 모두 나무에서 구했습니다. 농사일이 없는 때, 추수를 끝내자마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산에서 나무를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위를 견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유독 추운, 산속 깊숙이 자리한 사찰에서도 당연히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사찰 주변의 숲이 지금까지 보호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산사에서도 음식과 난방을 위한 나무가 필요했기에 귀한 나무를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모두 베어가도록 놔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살아야 하니, 나무를 구하려는 사람과 지키려는 사람의 대립은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오래된 숲에 둘러싸인 전통사찰의 조선 후기 사진들을 보면 사찰 주변은 숲이 남아 있지만 먼 곳은 그러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숲이 남아 있는 경계는 사찰의 인력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의 벌목을 막을 수 있는 한계선이었을 것입니다. 
성철 스님께서 부처님 법에 따름을 기치로 내걸고 작성한 봉암사 결사의 행동지침 중 하나를 보겠습니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라는 규약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힘든 일이 아마도 겨울을 나고, 음식을 할 때 필요한 나무를 해 오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추위를 온몸으로 견딘다고 해도 엄동설한을 나기 위해서는 많은 나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겨울나무 한 짐은 밥 한 끼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철 평전》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중은 하루에 나무를 석 짐씩 지도록 했다. 각각의 지게가
있어야 했으니 지게가 스무 개도 넘었다.

아무리 자연과 동화되어 수행한다 하더라도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온기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온기를 마련하고 밥을 짓기 위해 매일같이 지게 한 가득씩, 석 짐의 나무를 해야 했으니 주변의 숲은 그야말로 생명을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 됩니다. 모두 베어서는 안 되며, 지속적으로 베어도 다시 자랄 만큼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숲이 자기 힘으로 유지가 될 수 있는 양만 베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는 나무만을 베어내도 안 됩니다. 이후에는 점점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찰 주변에서 이렇게 화목을 확보하려고 숲을 지키지 않았다면 산사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조선 후기, 보호되는 사찰림의 규모로 산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최근 얘기하고 있는 탄소중립 순환사회를 실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찰 주변에 소나무림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짜 나무인 참나무와 달리 생소나무는 땔감으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까지도 우리나라 전체 가정에서 사용하는 연료 중 나무의 비율이 80%에 달했으니 산과 가까운 마을과 사찰은 모두 나무를 사용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깊은 산중의 사찰이라도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에너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나무를 하루에 석 짐씩 하는 고된 일과를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고된 일과를 해소하는 에너지 전환이라는 작용이 있으면 어딘가에는 반작용이 있기 마련입니다. 편해진 만큼 잃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올해 여름은 사상 최악으로 뜨거운 여름이 될 것입니다.”라는 뉴스는 매년 봄이 되기도 전, 한겨울부터 떠들썩하게 언론에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 예측은 몇 달 후에는 정말이지 족집게같이 맞습니다. 절반은 실제로 사상 최악으로 뜨거워져서 그러하고 나머지 절반은 사상 최고는 아니지만 느낌으로는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습니다. 우리 몸이 1년 전을 고스란히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을 지내고 여름이 오니 덥다고 느낄 뿐입니다. 그럼에도 여름이 예전보다 뜨거워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온실가스를 빠르게 대기 중으로 방출하여 만들어진 이상기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숲속에 자리 잡은 산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전에는 선풍기도 없이 여름을 시원하게 보냈지만, 지금은 에어컨이 필수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은 온갖 어려운 내용으로 채워지지만, 여름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지구에 옷을 입히는 온실가스가 두터워져 밖으로 나가는 열에너지를 더 많이 잡아두기 때문입니다. 땅속 깊숙이 저장되어 있던 탄소 덩어리를 에너지로 사용하여 얻은 편리함이 기후위기를 맞은 근본 원인입니다. 지구가 스스로 대기 중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배출하는 양이 훨씬 많이 늘었고 이렇게 배출한 온난화 물질이 또다시 열에너지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득롱망촉(得隴望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닙니다.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생활합니다. 사찰도 이제 두 발을 이용하지 않고 바로 앞까지 자동차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물건들은 유행이 지나면 빠르게 바꿔야 하고, 쇼핑을 하면서도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이용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약간의 편리를 위해 다른 이의 고통을 만들어 내는 ‘새벽 배송’까지 일상화가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더 편한 생활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이 모든 편리함을 위해 우리가 받는 대가는 에너지 과소비에 따른 기후위기입니다. 

이 위기를 되돌리는 방법은 안타깝게도 복잡하지도 않고 여러 대안이 있지도 않습니다. 방법은 단 두 가지로 아주 단순합니다. 첫째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게, 조금 덜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쉽지 않습니다. 한번 편해진 몸을 다시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방법은 이렇게 과도하게 배출된, 쓸 수 없는 에너지를 다시 흡수하여 고정하면 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이 흩어진 에너지를 고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나무를 더 많이 심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나무가 있는 곳은 보호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 나무를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이것이 어렵습니다. 좀 더 많은 숲을 개발해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가지 모두 어렵습니다.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사찰의 소나무숲

불교가 인간과 자연을 서로 주고받는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 바라보는 것은 우리 모두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에서 숲은 그 자체로 불교를 대표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사찰과 숲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 사찰은 이렇게 하나로 연결된 숲을 지켰고, 그에 대한 적절한 상호작용으로 지켜진 숲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재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깊은 산 속에 사찰을 지은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연료는 모두 주변의 숲이, 나무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먹을거리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산속이라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대부분 사찰은 우리나라 에너지 전환 역사에서 과도기적으로 도입된 연료인 연탄을 구경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확산하기 시작한 석유로 곧바로 대체되는 과정을 겪었으리라 추정됩니다. 이 시기가 불과 30~40년 전입니다. 

사찰의 역사가 깊으면 깊을수록 사찰 주변 숲에서 나무를 땔감으로 수확한 기간 또한 그 역사가 깊습니다. 나무를 계속 수확하다 보니 숲의 흙은 비옥해질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그 척박한 토양에도 산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나무가 자라주었습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나무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계속적으로 땔감을 구하다 보니 흙이 더 많이 비옥해지지 않았기에 소나무에서 참나무로 바뀌는 자연스러운 숲의 흐름이 가로막히게 된, 사찰 생활과 자연의 공존 역사가 만들어낸 숲이 바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찰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숲입니다. 달리 말하면, 잘 보존해서 큰 소나무숲이 유지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원하는 나무를 선택적으로 계속 수확하다 보니 주변 숲이 그렇게 적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어 나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우려하는 기후위기를 초래한 석탄과 석유의 막대한 소비에 의해 만들어진 혜택입니다. 그러나 고된 노동의 해방이라는 혜택에 대한 반대급부로 우리는 지금 폭염과 폭우 등 각종 기후재난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로 연결된 인드라망 속에서 우리가 소비하는 막대한 화석에너지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위기는 단순히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수직의 관계만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한 곳의 연결고리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의 연결고리가 그것을 보완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복잡한 실이 얽혀 있는 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연결된 복잡한 망으로 이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한 자연의 치유가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깊은 산속 사찰에서도 이제 화석에너지가 없으면 생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온실가스를 내보내며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데 동참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찰의 연료를 바꾸었더니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베지 않는 숲은 나무들이 왕성하게 자라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토양 속에, 나무에, 많은 동물이 살아가는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동시에 대기 중의 탄소를 더 많이 저장하는 숲으로 바뀝니다. 그간 탄소를 저장할 수는 없었지만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던 숲이 이제는 화석에너지를 씀으로 해서 내뿜는 탄소를 흡수하면서 또 다른 형태의 공생 관계를 이어갈 채비를 한 것입니다. 실로 모두가 연결된 자연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에서 보완하고, 어느 한 곳이 넘치면 다른 곳에 도움을 주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중용의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숲이 좋아지면 좋아진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가 잘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는 흙의 상태가 좋아졌기에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척박한 토양에서 오랫동안 숲을 유지해 왔던 소나무숲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 비옥한 토양에서 더 잘 자라는 참나무나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고로쇠나무, 층층나무 등 수많은 낙엽활엽수에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자연입니다. 소나무가 죽어가는 것은 다른 나무가 잘 자라 숲이 점점 성숙해진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인데, 나무를 때던 시절을 잊고 소나무만을 생각하니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훌륭한 소나무가 죽어가니 측은지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순리를 막으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더 좋아지는 숲을 좋아지지 못하게 막고자 힘을 쓰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소나무를 뺀 다른 나무들을 모두 자르고 숲의 곤충을 모두 죽이는 농약을 뿌리는 일을 정당한 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사찰숲도 예외는 아닙니다. 국립공원에 있는 사찰숲은 조금 덜하지만, 다른 곳의 사찰숲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숲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생물인 곤충을 죽이는 농약을 아무렇지 않게 뿌리기 때문입니다. 곤충이 죽음으로 해서 더 많은 미생물과, 곤충을 먹고 사는 새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소나무숲은 토양이 비옥해진 관계로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서 밀려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제 명을 다하고 죽지는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좋아지는 숲에서의 소나무 수명은 이것이 온전한 수명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에서 밀리니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나무에 병이 걸리는 이유입니다. 건강한 나무와 건강하지 않은 나무가 함께 있으니 건강하지 않은 나무가 병에 걸려 죽고, 그 자리에서 보다 건강한 나무가 더 잘 자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것이 최근 사찰숲에도 많이 번진 소나무재선충병입니다. 

소나무재선충은 약해진 소나무 안에서 번식하는 선충의 일종입니다. 재선충은 종의 유지를 위해 약해진 소나무에서 번식하며 자라는데, 자연스럽게 소나무가 더 약해져 죽게 됩니다. 소나무재선충은 죽은 나무에서는 더 살 수 없고, 그렇다고 스스로 다른 나무로 옮겨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의 도움을 받습니다. 재선충의 이동을 도와주는 이가 솔수염하늘소와 북방수염하늘소입니다. 이들 하늘소는 약해진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데, 그 알을 통해 재선충도 따라 이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드라망 속에서 소나무의 죽음만을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재선충에 의해 약해진 소나무가 죽으면 그 죽은 나무가 또 다른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서식처로 변하고 다른 나무의 양분이 되어 숲이 더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소나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숲의 다른 복잡한 그물망을 모두 끊어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른 건강한 나무들과 건강한 곤충들, 이들을 먹이로 하는 수많은 산새들을 농약으로 내쫓는 것은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와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나무의 생명이 중요한 만큼 다른 모든 생명도 중요합니다. 한 종을 위해 수많은 종을 죽이는 행위는 어떠한 당위성을 얘기한다 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다른 생명을 죽이며 유지하고자 하는 소나무숲이 기후위기 시대를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찰에서 소나무숲이 울창한 합천 해인사와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경주 불국사를 대상으로 숲의 온도와 습도를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 해인사와 불국사는 국립공원으로 소나무숲에 함께 자라는 나무를 거의 베어내지 않은 숲이며, 범어사는 국립공원이 아님에도 낙엽활엽수를 거의 베어내지 않았지만 통도사는 소나무숲의 유지를 위해 다른 어린 나무들을 적극적으로 베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도사 소나무숲을 제외하면 다른 사찰숲의 소나무숲은 낙엽활엽수가 많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네 사찰에서 경내지와 인접한 소나무숲과 경내지의 온도를 함께 측정하여 비교해 본 결과, 각 측정 지점별로 새벽 시간대(03:00~ 06:00)와 낮 시간대(12:00~15:00)의 온도 차이가 두드러지게 다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요하게 다른 점은 소나무숲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통도사와 다른 사찰의 차이였습니다. 통도사 경내지의 경우 낮 시간대와 새벽 시간대의 온도 차가 봄철에는 무려 약 18℃나 되었으며, 소나무숲 내부도 약 15℃ 정도의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다른 세 사찰에 비해 일교차가 5℃ 이상 컸습니다. 여름철에는 차이가 조금 줄어 통도사의 일교차가 다른 세 사찰에 비해 약 2℃ 정도 큰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2℃의 차이도 엄청난 차이입니다. 산업혁명 이전보다 1.5℃가 올라가면 인류가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얘기를 생각하면 이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낮 온도가 어떠한가입니다. 온도가 가장 높은 시간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에서는 숲이 둘러싸고 있는 사찰 경내지는 주변 도시에 비해 온도가 훨씬 낮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4개 사찰과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는 자동기상측정장비(AWS)의 온도측정 자료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해인사는 가까운 AWS 측정온도와 비교했을 때 낮 동안 온도가 4℃ 이상 낮아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시원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범어사와 불국사는 해인사만큼은 아니지만 인근 도심에 비해 2℃ 정도가 낮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숲이 온도를 낮추어 경내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통도사는 인근 도시에 있는 AWS 온도보다 오히려 1℃ 가까이 높았습니다. 이렇게 온도를 살펴보니 소나무숲을 적극적으로 유지하지 않는 사찰은 숲이 주는 혜택에 대한 일반적 상식과 부합합니다. 그런데 통도사는 반대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통도사의 여름은 숲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통도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소나무림의 적극적인 관리를 통해 소나무 순림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관리가 차이를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다른 세 지역은 모두 주변 시가지보다 숲 내부의 온도가 현저히 낮았지만, 특이하게도 통도사 경내지의 경우 봄철과 여름철 모두 한낮의 온도가 인근 시가지 AWS 데이터보다도 높은 현상을 보였습니다. 또한 온도 및 습도의 낮 시간대와 새벽 시간대의 일교차는 다른 지역과 달리 주변 시가지보다도 더 크게 나타나 미기후(微氣候) 완화라는 숲의 역할은 이곳에서만큼은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소나무숲은 덥고 건조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인근의 숲 바깥 지역보다도 숲 내부가 온도가 높고 습도가 낮은 역전현상이 일어난다는 연구결과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국 소나무숲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뜨거운 여름철을 더 힘들게 하는 온도상승과 건조화라는 반작용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소나무의 보존과 자연의 이치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는가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드라망의 관점과 불교의 생명존중 사상을 기초하여 판단했을 때, 소나무를 위해 다른 수많은 다양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기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에너지를 적게 써야만 하는 지금 생활공간의 온도를 낮추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그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숲을 관리하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후자는 자연이 만들어주는 것이라 추가적인 비용도 거의 들지 않습니다. 전자만이 막대한 비용을 투입해야 하는 관리방법입니다. 


기후위기와 사찰숲의 미래

2021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즈음하여 원행 스님은 탄소중립과 생명전환 실천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담화문을 통해 총무원장 스님은 “기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와 개인이 지향해 온 삶의 방향과 방식에 대하여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전환을 시급히 요구하고 있다”고 성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직적인 성장사회가 아니라 윤회하고 공존하는 순환사회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며 “풍요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기후위기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담화문의 내용을 조금 더 옮겨봅니다. 

기후위기는 우리 인간이 자연과 서로 의지하고 서로를 살리는 공생의 관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만의 편리함과 풍족함을 추구해 온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안전이 보장될수록 뭇 생명은 죽음으로 내몰렸고, 인간이 풍요로울수록 지구의 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었으며, 인간이 편리할수록 물과 공기와 토양은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중략)…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세상과 상관없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이러한 세계관은 곧 인간-사회-우주 만물이 하나의 세계로 상호의존적이고 함께 공존하기 위한 인드라망 생명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나무를 베어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살기 위해서라도 나무를 심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아직까지 나무를 베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과거 화목 아궁이가 있을 때와 달라진 점은 필요에 의해서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잘라서 산에 놓아둔다는 점입니다. 재선충과 소나무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 자연을 보지 않고 그 일부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사찰숲을 보호한 것은, 비록 여러 이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겨울을 보내는 것과 음식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즉, 생명을 잇기 위해 최소한의 자연을 이용한 것입니다. 마을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짓거나 다른 노동을 병행해야 했기에 긴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를 할 수 있는 시기는 늦가을부터 겨우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을 대비할 만큼의 여유로움이 없었기에 그해 겨울을 보내기 위한 나무는 그해에 장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인사에, 통도사에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보일러가 아니었던 시절,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구들장이 우리 조상이 고안해낸 너무나 과학적인 난방의 방식이었습니다. 구들장 난방 방식은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열기와 연기가 구들고래를 지나 굴뚝으로 나가면서 방바닥을 덥히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마르지 않은 소나무를 사용하게 되면 다량의 송진이 나오고 이 송진이 그을음을 만들어 구들고래나 굴뚝에 달라붙어 빠르게 통로를 막게 됩니다. 한겨울에 구들이 막히게 되면 그 이후는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판단이 될 것입니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마르지 않은 생소나무를 베어 때지는 않은 이유입니다. 요 근래에 불을 잘 피우게 하면서 효율을 높인 화목보일러나 화목난로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때에도 완전히 마르지 않은 소나무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소나무를 빼고 참나무류를 포함한 낙엽활엽수는 겨울에 며칠만 놔두었다 불을 지펴도 구들을 막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멀리까지 땔감을 확보하기 위해 나가는 것은 더 엄청난 고된 노동을 요하는 것이기에, 되도록 산사 주변에 있는 나무와 낙엽을 수집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찰숲에 지금까지 소나무가 유지된 결정적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습(習)이 참 무섭습니다. 이제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않아도 따뜻하게 겨울을 나고 음식도 해 먹게 되었습니다. 예외적인 몇 곳의 방이나 작은 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유나 전기가 난방 연료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무를 연료로 사용할 때와 변함없이 사찰 주변의 숲은 계속 베어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삶의 영위를 위한 결과로 만들어진 소나무숲과 그 아래에 다른 나무가 없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경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위적 경관이 아름답다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지도 않음에도 어린나무들을 자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잘린 나무는 생명을 잃게 되고 버려집니다. 쓰임새가 없기 때문에 고스란히 탄소를 배출하게 됩니다. 과거 나무를 자르던 습은 남아 있으나, 그 용도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왜곡된 결과가 만들어낸 안타까움입니다.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한 노력

짧은 원고에서 거창하게 기후위기를 논하려 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거창할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해서는 아주 단순한 단 두 가지 방법의 실천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습니다. 

첫째, 어떻게 지금 소비하는 양을 적게 할 것인가입니다. 절약은 비단 난방이나 음식을 위한 에너지에만 있지 않습니다. 조금 돌려 생각하면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물건, 나아가 생활 자체가 에너지 소비에 기반합니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에너지를 절약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아나바다가 근본입니다. 불교의 소욕지족, 나아가 무소유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 바로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둘째, 그간 소비한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구들을 덥히기 위해 했던 나무 베기를 목적 없이 하면 안 됩니다. 배출한 온실가스를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탄소 흡수원이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래된 소나무는 그 자리에서 사라질지 모릅니다. 혹시 그것이 안타깝다면, 그 커다랗게 자란 소나무를 베어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목재로 활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나무를 빈터에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작은 나무를 심을 뿐이지만, 자연은 이 나무를 키우며 우리가 배출한, 엄청난 탄소를 흡수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실천은 가장 현명한 방법이면서도 다른 어떠한 방법이 있지 않은 대체불가의 방법입니다. 실천을 위해서는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에 즐거움을 찾으면 됩니다.
성철 스님의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얻는다.” ■

 

홍석환 hong@pusan.ac.kr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부산대학교 생명자원과학대학 부학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사찰림일대 소나무장령림의 미기후 조절효과 연구〉 〈전남 사찰림에서의 소나무 생육과 입지환경간의 상관관계 연구〉 등의 논문과 저서로 《환경에 대한 갑질을 멈출 시간》 《환경과 불교》 등 다수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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