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거나 무감각해지기까지 했다. 기후위기나 생태순환 장애, 환경파괴 같은 말들이 그 구체적인 맥락에 속한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폭염과 혹한, 폭풍을 동반한 국지성 호우,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일상화 등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징후들이다.

살아가다가 넘어질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거나 난관이 있을 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달려갈 때가 그때다. 그럴 때 우리는 지눌 스님의 충고처럼, 넘어진 곳에서 주변을 잘 살피면서 바로 그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도대체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의 극대화가 일상 가운데로 다가와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주변을 살피기보다 더 앞으로만 나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올무에 걸린 짐승이 몸부림칠수록 더 세게 자신을 조이는 결과를 빚는 처참한 모습이 연상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탈성장의 요청

이제 더 이상의 무모한 성장이 아니라,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생존을 모색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을 맞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꼭 필요하다. 그 지혜를 발견하고 실천으로 옮길 수 있으려면 성장지상주의를 가져온 우리 현대사를 먼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절대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에게 성장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그 과제를 권위적인 정권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수입으로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달성할 수 있었다. 거기에 군부 정권을 시민혁명으로 몰아내는 민주화의 역사까지 더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세계사의 드문 사례로 성공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21세기 초반에 이르러서 그런 맹목적인 성장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데, 문제는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나고 있다. 탈성장은 불가피한 선택임에도 여전히 맹목적 성장만을 외치는 자들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이웃 일본의 사례에서 이미 확인된 원전의 위험을 애써 외면하는 정치인이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물론 탈성장의 일차적 의미는 경제적 차원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윤리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이다. 생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행복해하다가 불쑥 일상에 끼어드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물음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 삶은 윤리적 차원을 지니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생멸(生滅)의 과정에 진여(眞如)의 차원이 등장하는 찰나이고, 그 찰나에의 충실은 넓은 의미의 명상(冥想, meditation)을 필요로 하는 일상의 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정신적 의미나 정체성으로부터 유리된 경제적 삶은 인생을 그저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한다. 반면 시민사회는 진정성이 담긴 의미와 목적의 토대에 기초한다.”

— 데이비드 C. 코튼, 김경숙 옮김 
《경제가 성장하면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까》 사이, 2014, 442쪽.

21세기 초반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탈성장의 과제는 두 가지 차원의 위기로 다가온다. 하나는 맹목적인 성장과 그 과실의 불평등 같은 결과들로 인한 인류의 생존 위기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 기반한 쾌락 추구를 중심에 두는 가치체계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나 자신의 실존 위기이다. 당연히 이 두 차원의 위기는 서로 중첩되지만, 그렇다고 같은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는 미세먼지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우리 피부에 와닿은 지 오래고, 후자는 잘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자살률의 급속한 상승 등으로 이미 우리 주변과 자신을 감싸고 있다. 

인류의 생존 자체의 위기는 특히 우리에게 기후위기로 다가와 있고, 그것에 더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상징되는 성장의 위기로 다가와 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무감각한 일상을 지속시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막막함을 마주하면서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중이다. 백신 접종이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음에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은, 그 백신을 무기로 삼고자 하는 이른바 선진국의 일그러지고 어리석은 민얼굴을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기도 하다. 이 위기에 관한 자각은 나 자신과 우리 자식들을 위한 극적인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만 한다는 윤리적 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인류의 생존과 실존이라는 두 차원의 위기를 한꺼번에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이 탈성장 여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나 자신을 포함하는 한국 시민사회와 지구촌 사회 구성원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내기를 기대하는 관계 또는 공동체를 포함한다. 그 안에 당연히 종교와 종교계가 포함되고, 세상의 시선 속에는 제도종교에 대한 경멸과 무시라는 부정적인 것과 그럼에도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이 위기를 먼저 감지하고 앞장서주리라는 기대가 공존하고 있다.


지구 위기에 대응하는 불교윤리의 지혜

불교는 말 그대로 ‘붓다의 가르침’이고, 불교윤리는 그 가르침에 근거한 윤리적 담론과 실천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붓다 가르침의 핵심은 ‘우리 삶에 드리워져 있는 고통[苦]과 마주하라’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고통은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가끔 찾아오는 병이나 어쩔 수 없는 늙음의 서글픔 등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좀 더 강렬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모두 일시적인 고통으로 끝나고 엄청난 원심력을 가진 자본주의적 일상의 파고와 그 일상이 가져다주는 중독 같은 쾌락으로 인해 쉽게 잊히고 만다. 

우리가 처한 위기의 핵심은 그 위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성장의 종말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미세먼지와 기후위기, 세계적인 감염병 사태 등으로 이미 우리 몸과 마음속으로 다가와 있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편리함과 쾌락 추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다. 《화엄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생의 삶에 따라 훈습되는 특성’을 우리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가끔 걱정하는 척만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

자비(慈悲)는 동체(同體)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나의 삶이 타자들과의 무수한 의존 속에서만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 무수한 타자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자이기도 하다는 연기(緣起)의 동체관이 전제될 수 있다면, 자비는 곧 나 자신과 그 타자들을 구분하지 않는 눈길과 손길로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 불교윤리의 핵심 지혜이다. 모든 것에 가격을 매겨 상품화하고 그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느냐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성장 신화의 숭배는, 이제 우리 모두의 종교가 되어 있다. 이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면서 수용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지구 위기를 근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도 마련될 수 있다. 

 

 

2021년 9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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