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중계 - 번역 김화진 동국대 동아시아해양문명 & 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1. 머리말

불교사학자 장만타오(張曼濤)는 그가 주편한 현대불교 학술 총간지 《일한불교연구(日韓佛教研究)》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불교는 근 100년 동안 타이완불교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그 내재적인 부분과 전쟁 후 객관적인 형세는 전혀 다르다. 타이완불교는 대륙으로부터 전해져서 일본의 통치와 일본화를 거쳐 이미 많이 변질되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일본 통치와 일본화를 거쳤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전쟁 후 매우 빠르게 그들 전통적인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장만타오는 전후 타이완의 제1세대 불교사학자로서, 그가 주편한 《현대불교학술총간》은 민국불교 연구의 정수를 망라한 민국불교 논문의 총집이다. 각 권의 〈편집자 취지〉는 그가 각기 다른 불교 주제에 대해 관찰한 결정체로 후학자들이 중시할 만하다. 장만타오의 100년 가까운 한국불교와 타이완불교에 대한 비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허우쿤홍
허우쿤홍

타이완과 한국은 모두 일제 식민시기를 경험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타이완이 일본에 할양되었으며, 1945년 8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타이완은 중화민국 정부 관할에 귀속되었다. 한국은 일본이 침략한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으며, 8월 15일 독립 후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 즉 타이완은 50년간, 한국은 35년간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 시기 타이완과 한국의 불교는 모두 ‘일본화(日本化)’의 단계를 겪었는데, 이 기간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으며, 두 지역의 불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이러한 문제들은 비교 연구의 가치가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의 발전 추세’라는 주제로, 일본 통치 시기의 타이완불교, 국민당 정부 정권하의 타이완불교, 계엄 해제 후 타이완불교의 변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일본 통치 시기의 타이완불교

칸정종(闞正宗)의 연구에 따르면, 타이완은 식민 통치 50년 동안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① 전기(1896~1915): 탐색과 동맹기
종군승(從軍僧, 군대를 따라가는 승려) 및 각 종파의 포교사(布教師, 불교 선교사)들이 타이완에서 개교(開教)할 때 승려들이 각자 원하는 절에 들어가 각 종파의 개교 계획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② 중기(1915~1931): 합작과 발전기
무장 항일투쟁이었던 ‘서래암 사건(西來庵事件)’ 이후 일본은 타이완 통치를 더욱 강압했으며, 줄곧 승려 · 재우(齋友)의 자질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일본 통치 당국은 본격적으로 그들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타이완과 일본의 불교 방면 합작을 촉진하였다.

③ 후기 (1931~1945): 황화(皇化, 일본화)와 개조의 시기
1931년 ‘918사변’이 발발하고 ‘77노구교(蘆溝橋) 사변’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억압통치를 강화했고, 불교는 적극적으로 조정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1942년의 ‘사원전시체제(寺院戰時體制)’는 황국불교화(皇國佛教化)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1895년 이전 타이완의 불교문화는 청나라 푸젠(福建)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당시 이 지역(푸젠) 불교계는 교세가 쇠퇴하였고 그 영향으로 타이완불교의 승려는 대부분 불교에 대한 지식이 그리 높지 않았기에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신앙만 있을 뿐 실제 수행이나 불학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타이완은 선교하러 온 일본 승려나 군대를 따라 타이완에 들어온 불교 포교사들에게 불교가 미개발된 지역으로 인식됐다. 이는 일본 불교계 인사들의 눈길을 끌었고, 이로 인해 점차 많은 일본 불교계 각 종파의 승려들이 타이완에 오게 되었다.

일본 식민시기에 타이완에 들어온 종파는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진언종(真言宗)[고야파(高野派) · 제호파(醍醐派)], 선종(禪宗)[임제종묘심사파(臨濟宗妙心寺派) · 조동종(曹洞宗)], 정토파(淨土宗)[정토종(淨土宗) · 서산심초파(西山深草派)], 진종(真宗)[본원사파(本願寺派) · 대곡파(大谷派) · 목변파(木邊派)], 일연종(日蓮宗), 법화종(法華宗)[현본법화종(顯本法華宗) · 본문법화종(本門法華宗)]이며 모두 8종 14파가 있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타이완에 들어온 후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시작된 포교 활동은 점차 타이완 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군대를 따라 들어왔거나 혹은 파견 임용되어 타이완에 온 것으로, 그들의 포교 활동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일본이 타이완에서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8종 14파 가운데 선종과 정토진종이 가장 발전하였다.

일본에서 타이완으로 유입된 불교 종파를 통해 일본 통치하의 타이완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 마쓰가네 기미마사(松金公正)는 일본불교의 타이완 포교는 종파마다 포교 목적과 방식이 각기 다르고 사찰 설립이나 타이완 사람에 대한 포교 방식 역시 각기 다르기 때문에 연구할 때 ‘일본불교’라는 명칭으로 모든 종파를 획일화한다면 역사적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마쓰가네 기미마사의 견해는 일제 치하의 타이완불교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의 한국불교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강점기의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의 복잡성과 다양한 연구 가능성을 시사한다.

1895~1945년까지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한 50년 동안 타이완불교는 원래의 ‘중국 한전불교(漢傳佛敎)’에서 ‘일본화’한 불교로 변화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한국은 서양 열강과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불교도 변화했다. 먼저 불교에 대한 각종 규제와 금지를 풀고 절의 사무를 관리할 기구를 설치하였다. 불교가 부흥하자 구조와 형태도 변화가 생겼는데,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교단에 결혼한 승려도 생겨났다.

 

3. 국민당 정권하의 타이완불교(1945년 이후)

1945년은 타이완이 중화민국 정부에 귀속된 해이자, 국민당과 공산당 내전이 시작된 시기이다. 1949년 12월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내전에 실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는데, 이때 적지 않은 불교계 인사들도 함께 타이완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중국대륙의 한전불교도 타이완으로 옮겨가게 된다.

1945~1949년 전후의 타이완불교는 내전 초기에 민남화(閩南化) · 재교화(齋教化) · 일본화(日本化)의 불교에서 중국 한전불교로 전변하였다. 전후 타이완불교 발전의 시각으로 보면 이 시기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자 큰 역사 의미를 가진 시기였다. 이 시기는 타이완 정권이 바뀐 시기로,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완을 통치하게 되면서 일본불교의 영향력은 점차 사라졌다. 중국의 여러 지방에서 주로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 지역의 승려를 위주로 중국 각 지역의 승려들이 타이완으로 들어왔다. 중국불교회(中國佛教會)가 타이완에서 부흥하고 전계(傳戒) 활동을 주도함에 따라 이미 일본화된 타이완불교는 점차 중국화되어 갔다. 즉 민남화 · 재교화 · 일본화한 불교에서 중국 한전(漢傳)식 불교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는 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 발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전후 타이완불교가 새로운 형국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전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찬텅(江燦騰)은 2차 대전 후 타이완의 한전불교사(漢傳佛教史)에 관한 관점을 다음 4가지로 귀결하였다.

 

1. 장만타오(張曼濤)가 제기한 ‘대륙불교(大陸佛教’의 중건

2. 리상취엔(李尚全)이 주장한 ‘강절불교(江浙佛教)’의 2차 대전 후 타이완에서의 발전론

3. 허미엔산(何綿山)이 주장한 ‘민남불교(閩南佛教)’의 타이완에서의 전파와 전승론

4. 칸정종(闞正宗)이 주장한 2차 대전 후 타이완 ‘인간불교(人間佛教)’의 전면적인 전파론

 

그러나 장찬텅은 이 네 가지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1949년 이후 타이완 본토의 중화한전불교(中華漢傳佛教)의 새로운 발전은 ‘쌍원회류(雙源匯流)’하에서 ‘재지전형(在地轉型)’으로 향하는 변형된 다원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중국 국민당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제2차 대전 후 타이완에서 부흥한 중국불교회는 타이완불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38년에 이르는 계엄 시기에 중국불교회는 불교의 관방(官方)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통제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위와 규모, 역할 등이 중앙급 불교 조직과 같았다. 1952년 말 타이난 대선사(臺南 大仙寺)의 전계 활동은 중국불교회가 주도권을 잡은 이후 타이완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 계엄 시기 이전 모든 기관이나 단체에는 중국 국민당의 당지부를 설치했는데 중국불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불교회는 중국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 조직은 모든 방면에서 당의 엄격한 지휘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중국불교회는 중국대륙에서는 그다지 많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나, 타이완에서 재건 후에는 전체 타이완불교 발전 방향을 장악하였으며, 불교회 내부의 중국 국민당 당지부의 활동을 통해 당의(黨義)를 불교에 주입하였다. 이 시기에는 불교가 정부(혹은 당)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몇 가지 예를 통해 국민당 정권하의 타이완불교의 특색을 살펴보자.

1) 타이완 출신의 불교계 인사들은 어쩔 수 없이 타이완불교의 역사 무대에서 물러나게 된다. 1945년 일본불교 세력은 식민통치가 끝나자 타이완에서 퇴출되고, 그 공백을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승려(혹은 거사)들이 채우게 된다. 고도의 일본화 과정을 겪었던 타이완불교 인사들은 혹독한 변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일본어를 중국어로 바꾸는 것도 그 어려움 중 하나였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 중국대륙에서 온 불교 세력의 의도적인 저항이 더해지면서, 그들은 일제 통치기에 가졌던 우세 지위를 빠르게 상실했으며, 점차 변두리화되거나 타이완불교 무대에서 사라졌다.

2) 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의 지도층은 대부분 든든한 당정(黨政)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백성(白聖), 도안(道安), 동초(東初), 낙관(樂觀), 장갸후투크투(章嘉呼圖克圖, 후투크투는 ‘活佛’이라는 뜻), 간규르와후투크투(甘珠爾瓦呼圖克圖), 남정(南亭), 율항(律航), 정심(淨心), 성운(星雲) 등 법사들은 홍법 활동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주동 혹 피동적으로 반공 활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리빙난(李炳南), 장만타오(張曼濤)와 같은 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3) 국민당은 적극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입당시켰다. 예컨대 1952년 음력 1월 29일, 리즈콴(李子寬)은 남정(南亭) 스님에게, 인민단체 중에 인원을 조직하여 국민당의 단체로 만들고 우수 인력을 받아들여 입당하게 하였으며, 중국불교회도 이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남정은 심장과 뇌신경이 쇠약하다는 이유로 재차 거절하였다. 리즈콴은 성난 기색을 드러내어 남정이 결심하지 않는 것을 나무랐다. 또한 1957년 9월 30일 도안(道安) 법사가 일기에서 기록하길, 비서장 천쿤(陳鯤)이 오후에 와서 공적인 일을 의논하고 중앙당사에서 이미 세 차례나 중국불교회에 당의 조직을 만들라고 요청하였으며, 당 측에서는 도안(道安)과 성운(星雲)이 당원으로 참여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유는 두 사람이 글과 말솜씨가 뛰어나고 새로운 인재라는 점에서였다.

4) 정부는 불교계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실시하였다. 타이완은 계엄 시기 백색공포의 시기에 군부대에서 반드시 일기를 쓰도록 해 군인들이 감정을 발산하게 하는 것 외에도 사병들의 사상을 감시할 수 있었다. 당시 성엄(聖嚴) 스님은 일기장에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의 〈양주사(涼州詞)〉의 시구 “술 취해 사막에 눕는데도 웃지 말게나, 고래로 전쟁에서 돌아온 자 몇몇이던가(醉臥沙場君莫笑,古來征戰幾人回)”를 적었다는 이유로 적발되어 공비(共匪)가 잠입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성덕(聖德) 법사가 타이완에 온 후 성(省) 건설청 공공공사국(建設廳公共工程局)에서 근무하다, 1950년 음력 12월에 신주(新竹) 영은사(靈隱寺)에서 출가하였다. 1955년 5월 하순에 사상 문제로 구속되어 10년 동안 뤼다오(綠島, 타이완 정치적 범죄자를 수감하는 섬)에 갇혔다. 1968년 가을에야 지롱(基隆) 영천사(靈泉寺)에서 다시 승려가 되었다.

5) 타이완 불교계는 정부에 협조하여 반공국책을 선전하였다. 예컨대 동초(東初) 법사는 공산당과 러시아에 맞서[反共抗俄]는 것이 불교의 구인구세(救人救世)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바로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라 여겼다. 또한 반공의 목적은 사원을 회복하거나 사원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대륙의 4억 동포와 전 세계 인류의 핍박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낙관(樂觀) 법사는 오늘날의 자유중국은 일체 반공을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이 반공을 위한 것이며 반공제일이고 승리제일이며, 모든 시설, 모든 행위는 현재의 반공정책에 협력해야 한다고 했다.

1963년 겨울 단향목에 새겨진 관세음보살상이 푸젠성(福建省) 남안(南安)에서 금문(金門)으로 떠내려왔는데, 불문의 제자들이 수습하여 집 안에 모셨다가 석유덕(釋惟德)이 타이완으로 가져와 지롱(基隆)의 십방대각사(十方大覺寺)에 모셨다. 주지 석영원(釋靈源) 스님은 “중국대륙의 공비(共匪)는 순리를 거슬러 행동하며 종교를 박해한다. 이 관음보살은 공비 박해로 바다에 던져지고 나서야 바다를 건너 자유로운 타이완에 들어온 것이다.”라고 했다.

6 · 25전쟁 기간 거제도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는 수만 명의 북한 · 중공 포로가 수용되었다. 중국 국적의 종군 승려 캉산림(康三林)이 매일 종교의식을 주재했는데 참석한 중공 포로가 4,000명에 달했다. 수용소에서는 반공과 친공 다툼이 발생했기 때문에 미국은 포로를 송환하는 원칙을 확립 후 전쟁 포로들을 송환을 원하는 자와 원하지 않는 자 두 부류로 구분하였다. 그중 반공포로 약 14,000여 명이 타이완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한국전쟁 반공의사’로 불렸다. 중국종교도연의회(中國宗教徒聯誼會) 및 중국불교회 등 단체들은 정부의 각종 지원 활동에 협력하여 잇달아 한국의 반공포로에게 전보를 보내 한국 내의 포로들을 격려하였으며, 불교회에서는 “타이완을 대표하는 200여만 명의 교우”로서 반공의사들의 성공적인 귀환을 기원하였다. 1954년 1월 하순, 반공의사 여러 조가 도착하였는데, 그중 천원광(陳文光) 승려 의사(義士)가 말하길, 수많은 사람이 “군대에 강제 입대하여 소련 코쟁이들을 대신하여 포탄의 재가 되었습니다. 가증스러운 공비(共匪)는 우리의 장엄한 사원과 불교 재산, 경전, 문화를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우리는 심한 굴욕을 당했습니다!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자유를 되찾았지만, “대륙의 동포 교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륙으로 돌아가 극악무도한 공비를 소탕하고 삼민주의 신중국과 신불교를 재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961년 11월 초, 타이완 불교계는 ‘금문도의 군인을 위문하는 단체(金門前線勞軍團)’를 조직하여 찐먼(金門)으로 군대를 위문하러 갔다. 당시 부단장인 도안 스님은 마산(馬山)에서 대륙을 향해 외쳤다.

“당신들은 잔학무도한 공비들에 의해 당신들이 자유를 잃고 배불리 먹지 못하고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하고 처자가 뿔뿔이 흩어져서 소나 말처럼 인간 이하의 생활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들이 주덕(朱德)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을 소멸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며, 인간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와 생활을 얻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동경하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만 기대지 말고 함께 일어나 공산당의 위선적이고 비인도적인 통치를 반대해야 합니다. 특히 당신들의 군인들은 총을 뒤집어 마오쩌둥을 향해 겨누어야 합니다.”

천성션(陳省身)이 타이완의 경참승(經懺僧)인 심붕(心鵬, 1948~ 2009) 법사를 방문하여, 당시 정치 선전 구호와 〈반격하여 대륙을 수복하자(反攻大陸去)〉는 반공의 노래를 유가염구시식의(瑜伽燄口施食儀)에서 어떻게 운용하였는지 묻자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계엄 시기 우리는 국가의 정책에 협력하기 위하여 염구법회에서 원만하게 봉인하기 전에, 우리는 손을 대포 기관총의 형체를 참고한 손도장을 만들어 ‘반공대륙인(反攻大陸印)’이라 칭하며 진언(真言)을 낭송하였다. 이때 악사는 〈반격하여 대륙을 수복하자[反攻大陸去]〉 음악을 연주하였다. 외부 무대에서 활동할 때 경찰이나 정보 치안인이 나타나 무엇을 쓰느냐고 물으면 ‘공산당을 반대하고 러시아에 항전하며, 주덕과 모택동을 살해하여 반공으로 필승하라. 장개석 총통 만만세’라는 현수막을 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4. 계엄 해제 후 타이완불교의 변화

1987년 타이완 지역은 계엄해제를 선포하면서 중국대륙으로 친지 방문과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타이완불교도 새로운 발전단계로 접어들었다. 계엄 해제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크게 성장함에 따라 타이완불교도 활발한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그 특징을 다원화와 국제화로 설명할 수 있다.

 

타이완불교의 다원화

계엄 해제 후 타이완 사회는 빠르게 변해갔으며 불교도 다원화되었다.

1) 교파 사상의 다원화: 타이완불교는 전통 중국 불교인 선종(禪宗), 정토종(淨土宗), 율종(律宗),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외에 타이완불교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인간불교 사상이 있다. 또한 현대선(現代禪), 송칠력(宋七力), 대승선공(大乘禪功), 청해(青海), 노승언(盧勝彥) 등 신흥종교들도 불교에 종속돼 살아남았다. 특히 최근 20~30년간 티베트 밀교(密教)와 남전의 내관선법(內觀禪法)도 타이완에서 크게 유행했다.

2) 승단 조직의 다원화: 기존의 중국불교회와 대등한 전국적인 불교 조직으로 불청회(佛青會), 불광회(佛光會), 전파협회(傳播協會), 사찰협회(佛寺協會), 호승협회(護僧協會) 등이 있다.

3) 승가 교육 다원화: 불교 내부에서 운영하는 불학원과 불학연구소 외에 일반 대학에 설립된 종교연구소 등 오늘날 승가 교육의 방법 및 내용 모두 다변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4) 불교 홍보 방식의 다원화: 형식이나 내용과 관계없이 다원화 현상을 보인다.

-형식의 다원화: 인터넷이나 TV를 활용하며, 콘서트나 야유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학교, 병원, 자선사업 방송국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내용의 다원화: 불법(佛法)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과 가까이하고 대중의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교 홍보의 의의로 삼는다.

5) 불교 경제의 다원화: 승단의 구조와 형식, 외형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준다.

6) 정보, 교제의 다원화: 학습, 정보 및 불교 홍보를 전 세계로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다원화 속에서 한전불교는 여전히 타이완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1895년 일본이 타이완을 통치하기 이전에도 그랬고, 1945년 일본이 타이완에서 퇴출된 이후에도 그랬다. 다만 계엄이 해제된 후, 비주류였던 티베트불교(라마교), 남전불교, 일본불교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티베트불교의 4대 교파는 모두 타이완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타이완에서 대대적으로 전파되었다. 남전불교는 태국 · 미얀마 등지의 선사(禪師)들이 타이완에 직접 가서 선법(禪法)을 가르쳤으며, 심지어 타이완에 도량을 설립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본불교는 일본 통치시대에 타이완에 대량으로 유입되었다가 2차 대전 후 소리 없이 종적을 감췄다.

1977년 중화불교거사회는 일본의 신흥종교 영우회(靈友會)와 자매결연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은 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가 일본 종교와 처음으로 맺은 정식 교류이다. 이때부터 일본의 신흥종교들이 속속 타이완으로 유입되었다. 그중 불교가 발전하여 성립된 교단은 영우회 외에도 창가학회(創價學會), 본문불립종(本門佛立宗), 입정교성회(立正佼成會), 아함종(阿含宗), 진여원(真如苑), 정토진종 신란회(淨土真宗親鸞會) 등의 단체가 있다. 그리고 전통적 일본 종파로는 정토진종, 진언종, 일련정종 등이 있는데 잇달아 타이완에서 종교 결사를 설립하였다. 외래 불교의 대량유입으로 타이완불교는 다원적이고 복잡한 현상을 보였는데, 이러한 불교문화 형태는 2,000여 년의 한전불교 발전사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타이완불교의 국제화

많은 타이완의 불교단체들은 타이완에서의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외에 도량을 설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법고산(法鼓山),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불광산(佛光山) 3개의 교단이 전 세계 여러 곳에 해외도량을 설립하였다.

1) 법고산(法鼓山): 법고산은 국내외 불교 홍보의 거점으로, 타이완 각 분원, 미국과 유럽 지역,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중화 지역으로 구분되며, 그중 미국과 유럽 지역,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중화 지역에는 현지 사원과 호법회가 포함되어 있다.

2)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 《2016 자제연감(慈濟年鑑)》에 따르면, 2016년 전 세계 자제인(慈濟人)이 분포한 국가 및 거점은 다음과 같다. 1) 아시아(20개국, 436지점) 2) 유럽(9개국, 12지점) 3) 아메리카(17개국, 146지점) 4) 아프리카(8개국, 17지점) 5) 오세아니아(2개국, 11지점).

3)불광산(佛光山): 해외 도량은 전 세계에 200여 곳이다. 타이완 지역에 설립된 도량은 남부 지역에 16개, 북부 지역에 25개, 중부 지역에 14개, 동부 지역에 8개, 외도(外島)에 4개가 존재한다. 타이완 지역을 제외하면 해외에 설립된 도량은 다음과 같다.

① 아시아 37개 ② 유럽 지역 14개 ③ 아메리카 지역 42개 ④ 아프리카 지역 8개 ⑤ 오세아니아 지역 11개

최근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가 서로 상대국 선교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경희대학교 중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인 쉬상원(徐相文)은, 필자의 정치대학 역사연구소의 후배로 〈한국에서의 ‘인간불교’ 현실과 과제〉를 저술하였는데, 글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불광산은 1999년 서울 불광사(佛光寺)를 설립하면서 타이완 인간불교의 한국 선교 주요 거점으로 삼았으며, 그동안 성운(星雲) 스님을 수행해 여러 차례 직접 한국을 방문해 한국불교계에 타이완불교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성운 스님의 다양한 법문과 가이드가 담긴 책이 한글로 번역 출간되고, 서울 불광산사는 한국과 타이완불교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불도와 불학에 관심 있는 한국 청년들의 타이완 방문을 더욱 심도 있게 추진하고 있으나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가 부족해 진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5. 결론: 제2차 대전 후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 비교

마지막으로 본 강연과 상관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 비교 연구자의 참고로 삼고자 한다.

1) 식민 시기의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일본 통치하의 타이완불교는 다음 세 가지 문제에 주목할 만하다. ① 언어 학습과 적응문제, ② 비구와 비구니의 결혼 문제, ③ 2차 대전 말기 일본이 타이완에서 진행한 황민화 정책 문제. 그렇다면 일본 통치하의 한국불교는 어떠한 특색이 있는가?

2) 민주 시대로 접어든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는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을까? 1987년 계엄 해제 이후 정당 창당을 개방하고 정치적인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타이완불교는 점차 다원화와 국제화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국이 점진적인 민주화로 들어선 이후 한국불교는 또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타이완 불교사 연구자 입장에서 이 점이 매우 궁금하다.

3) 타이완불교와 한국불교에서 서로 참고할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타이완불교에 장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장점은 무엇이며, 개선할 점은 무엇인가? 한국 당대(혹은 근대) 불교사연구자들이 어떠한 견해를 제공할 수 있는지? 우리가 공동으로 사고하는 근거로 삼고 싶다.

 

질의응답

동국대 박영환 교수
동국대 박영환 교수

1) 타이완불교의 4대 교단(法鼓山, 中臺禪寺, 佛光山, 慈濟基金會)의 창시자들(聖嚴, 惟覺, 星雲, 證嚴)은 강력한 지도력과 기획력을 발휘하며, 오늘날 타이완불교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도 이러한 타이완불교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 현재는 제2대로 전승이 완전히 이루어진 안정적인 상황이며, 제1대 시기와 같은 대변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제2대를 누가 전승하든 타이완의 본산과 긴밀한 관계와 협력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영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2) 계엄 상황에서도 타이완에서 각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청년학불운동(靑年學佛運動)은 오늘날 타이완불교의 발전을 이루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의 타이완 청년들은 타이완 불교계와 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불교계에서는 청년들의 포교를 위하여 어떤 활동을 펼치고 있는가?

▼ 청년 불교교육에 있어서 주요 인물로 이병남(李炳南) 거사와 주선덕(周宣德) 거사를 들 수 있다. 이병남은 자광강좌(慈光講座)와 불학사(佛學社), 명륜사(明倫社)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에게 불교와 유교, 중국문화를 가르쳤고, 주선덕은 이병남을 도와 각 대학에 불학사를 설립하였다. 계엄 상황에서 청년학불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이 시기에 활동하시던 분들 가운데 그 이후에 출가한 분들이 많다는 데 있다. 예컨대 불학 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이 연인사(蓮因寺)와 불광산 등 사찰 수행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80년대에 비구니 승단인 향광니(香光尼)에 출가한 경우도 많았다는 점에서 불학 교육은 타이완불교를 활성화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모두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불교는 타 종교에 비해 노인들의 종교라는 인식이 상당히 강해서 청년들의 참여가 저조하다. 기독교의 경우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일생생활에 깊게 스며들어 있는데, 불교에서도 이러한 포교 방식을 받아들여 청년들에 대한 포교가 더욱 활성화되길 바란다.

3) 타이완불교는 사회에 대한 생명활동, 환경 운동을 전개하며 타이완 사회에 건전한 방향성을 제공해왔다. 앞으로 어떤 사회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 사회성 활동이 포함하는 범주는 매우 광범하다. 타이완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타이완 불교계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타이완 불교계는 보수적 성향이 비교적 강하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불교계가 사회적인 방향성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사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불교계가 회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4) 타이완불교의 단점은 무엇인가?

▼ 타이완불교에는 장단점이 존재하는데 그중 단점을 말하자면, 타이완불교의 신도 교육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미신이나 정토적인 개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방면으로 교육이 치중되어 있고 불교의 핵심적이고 우수한 교리 방면의 교육은 많이 부족한 편이다.

5) 타이완불교의 상업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타이완불교에서 상업화 경향이 보편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는 종교 지식에 대한 이해, 불교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개인의 업장소멸이나 기복불교 같은 부분에서는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며, 타이완불교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이러한 방면을 중시한다. 인간불교는 타이완불교의 특색이지만, 인간불교가 전체 타이완불교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단지 불교에 대한 하나의 설법일 뿐이다. 상업화 경향은 비단 타이완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며, 도교나 민간신앙의 사원에도 존재하는 현상이다. 또한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등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6) 중국 근현대 시기 거사불교의 성향이 불교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 인간불교라든지 거사불교 근대 시기의 이러한 흐름은 불교의 쇠퇴라기보다는 내재적 힘을 키우는 축척으로 받아들여지는 연구도 있다. 승려는 승려로서, 거사는 거사로서 역할을 해 왔다. 또한 홍일 대사 등 거사가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다. 중국 불교사에서 거사불교의 성향 자체가 불교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7) 타이완불교에서 비구니의 역할과 공헌이 매우 큰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타이완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비구니의 역할과 공헌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타이완의 비구니와 비구의 비율은 대략 7:3 혹은 8:2로 불균형을 이룬다. 비구니는 비구에 비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타이완불교 발전 과정에서 비구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원인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특히 청나라 말기에 시작된 민속 신앙 종파인 ‘재교(齋敎)’ 및 이 종파의 여성 신도인 ‘재고(齋姑)’들이 해방 이후 구족계를 받게 되면서 불교계의 비구니 비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남녀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이 용이했던 점, 남성들이 출가를 원하지 않았던 점 등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

 

김화진  jhzh20@gmail.com
성신여대 중어중문과, 고려대 대학원 중어중문과. 국립대만사범대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대만사범대 강사, 고려대 연구교수, 동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청말 해외견문록에 나타난 다양한 서양 인식과 개혁 담론〉〈청말 해외 견문록에 나타난 중국 식(食)문화에 대한 타자의 문화적 상상〉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 동아시아 해양문명&종교문화연구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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