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서 자주 절집을 찾곤 한다. 아마 어릴 적 추억 때문이리라. 어머니가 절집을 찾는 날이면 빠짐없이 따라다녔으니까 말이다.

어머니가 불공을 드릴 때면 절 마당에서 놀다가 때가 되면 점심 공양을 한다. 절에서 먹는 밥맛이 너무 좋았다. 별다른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산채 몇 가지를 밥에다 얹어 주는 비빔밥인데 말이다.

그 밥맛을 잊지 못해 어머니가 절에 가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하였다. 어머니가 절에 가시는 날은 말씀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침 일찍 목욕하고 머리를 손질한 다음 새 옷이나 빨아서 반듯하게 다림질한 옷을 입으시는 날은 영락없이 절에 가곤 하셨다.

사월 초파일이면 더욱 신이 나곤 하였다. 점심 공양은 말할 것도 없고 쌀가루로 만든 백설기까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다니다 보니 때로는 스님들의 법문도 듣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불교식 인사법도 익히며 자연스럽게 불교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절에 가면 어머니 품속같이 포근하고 마음이 맑아진다.

다행히 내가 사는 영주에는 일찍이 신라의 의상 대사께서 대승불교의 진수인 화엄의 현묘한 진리를 펼쳐 보이신 부석사를 비롯해 비로사, 성혈사, 유석사, 초암사, 흑석사, 희방사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집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부석사를 자주 찾곤 한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머리도 식힐 겸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문학적 소재를 찾기 위해서다.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태백산 부석사’란 현판이 붙어 있는 일주문을 들어서서 천왕문,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사색에 잠기곤 한다.

부석사는 우주의 모든 사물은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 없이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한다는 법계연기를 기초로 하는 화엄 사상 사찰이다. 이 도량을 거닐면서 작가로서 어린이들 마음에 불성의 씨앗 하나쯤 싹틔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부석사의 중심 건물인 무량수전에 오르면 극락정토를 관장한다는 아미타불을 친견할 수 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니고 있어 ‘무량수불’이라고도 불린다. 수명이 무한한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보통 불전에서는 건물 가운데 불단을 놓고 불상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무량수전은 건물 서쪽에 치우쳐 불단을 조성하고 불상이 동쪽을 향하도록 배치하였다. 이는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에 있다는 경전의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맵시 있는 지붕의 추녀 곡선, 배흘림기둥, 공포의 구성, 처마의 머리를 받쳐주는 간결한 나무 장식 등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조화와 비례, 간결함과 역동성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여기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국보 제220호)이다.

무량수전 서쪽 뒤편에는 의상과 선묘의 아름다운 사랑이 깃들어 있는 부석(浮石)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 신병을 얻어 양주성의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 유숙하며 병을 치료하였는데 그의 딸 선묘가 의상을 흠모했다. 선묘는 대사의 귀국 선물로 정성 들여 만든 법복을 의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그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의상이 여정이 급하여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났다. 선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뒤쫓아 왔을 때는 의상이 탄 배가 이미 떠난 후였다. 선묘는 ‘이 몸이 용이 되어 대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옵소서’라고 축원하며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선묘는 소원대로 용이 되어 대사의 귀국길을 줄곧 호위하였다. 대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나라에 당의 침략 흉계를 고하고 난을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사는 봉황산에 이르러 화엄종지(華嚴宗旨)를 크게 선양할 절터를 찾았으나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異敎)의 무리 5백여 명이 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서 무량수전 서편에 있는 큰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리기를 3차례나 하였더니 이교도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 절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려고 공중에 세 번이나 띄웠다는 이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하는데 ‘부석사’란 절 이름도 여기에 기인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된 후에도 선묘는 부석사를 지키고자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밑에 몸을 묻었다고 전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1967년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을 발굴하여 5m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견하였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무량수전 뒤편에 있는 선묘각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의상 대사의 초상화를 모신 조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이 추녀 밑에 심겨 있는 선비화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이 지나도록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니 천년의 신비가 살아 숨 쉬고 있다고나 할까?

인간의 백팔번뇌를 씻어줄 수 있는 부처님의 영험이 가람 곳곳에 스며 있는 부석사 천 년의 전설을 되새기면서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깨달음과 동심의 문학 세계에 빠져 본다.

 

김동억
동시 시인 / hakam67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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