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시골 부뚜막 위 사랑놀이처럼 다가오고 진달래 개나리꽃 피고 지듯 환하게 스쳐 간다. 병아리 떼 쫑쫑거리는 한나절 지나가면 장다리꽃 찾아다니는 벌, 나비도 염화시중을 펼쳐낸다.

5년 전 교직 정년퇴직을 하고 농촌에 귀촌하여 살고 있는 나의 일상은 다양하고 바쁘다. 약간 넓은 정원을 관리하고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며 20여 종류 100여 그루의 과수와 약용, 식용 수목을 기르고 있다. 제법 전문적 소양까지 갖추어 전정과 병충해 방제까지 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또 이런 와중에 틈틈이 문학회 운영 활동과 창작의 시간까지 하루의 일과가 빠듯하다.

재작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문학회 활동이 제약을 받아 오히려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고, 텃밭 관리에 좀 더 시간을 낼 수 있어 일 년 내내 농작물의 수확이 많아졌다. ‘논과 밭의 작물은 농부의 발길이 잦을수록 잘 큰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귀촌해서 살다 보니 여러 벗들과 친척들이 오가는데, 우리 집에 자주 와 일주일 정도씩 머물고 가는 처형이 있다. 처가의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사는 큰 처형은 일 년 중 반은 절에서 지내는 분이다. 원이름을 잘 부르지 않아 모르지만, 아내와 처가 식구들은 “핵교언가”라고 불렀다. 어릴 때 1남 6녀의 첫째 언니로 먼저 학교에 다니는 언니를 “핵교(학교) 엉가(언니의 지방 사투리)”라고 부르다가 자매들이나 이웃 친지까지 통칭되었는가 싶다.

‘핵교’ 처형은 어릴 때부터 다리가 조금 불편하여 지금도 지팡이를 짚고 다닐 때가 많다. 그래도 밭일이나 집안일은 교직 생활을 40여 년 하고 정년을 한 아내보다 손도 빠르고 야무지다.

귀촌해서 만든 작은 하우스에 봄채소 씨를 뿌릴 때마다 채소 씨앗이 잘 나지 않아 서운한 적이 많았다. 지난주에도 상추씨를 뿌려 놓았는데 싹이 드문드문 나서 투덜거리고 있던 차에, 마침 집에 머물고 있던 처형이 옥종면의 청계사라는 암자의 스님 이야기를 꺼냈다.

절에서 보살과 함께 스님이 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상추 등 봄채소 씨앗을 뿌려 놓고 싹이 나질 않아 다시 뿌리고 아침 일찍 텃밭을 살펴보니, 자잘한 개미들이 씨앗을 물고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나무젓가락으로 개미들의 씨앗을 하나하나 빼앗아 다시 심었다는 이야기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 ‘요놈들 봐라! 너희가 물고 가지 못하게 해야겠구나.’ 하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뿌린 후 덮개를 하였다. 과연 며칠 후 많은 씨앗이 발아하였다. 젓가락으로 씨앗을 하나하나 빼앗아 다시 심는 스님의 높은 공덕을 생각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그 이야기로 쓴 동시조가 〈씨앗 물고 줄행랑〉이다.

봄바람 살랑살랑 텃밭에 놀다 가면
노스님 씨앗 들고
뿌리며 싱글벙글
개미들 봄 식량으로
씨앗 물고 줄행랑
며칠을 조마조마
기다린 새싹 소식
또 한 번 뿌린 씨앗
“요놈들 이것 봐라!”
노스님
젓가락으로
미소 지며 빼앗고

요즈음 농촌에는 아이들이 별로 없다. 그나마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농촌의 사찰에는 예순이 훨씬 넘은 노인네들이 초파일 전후해서, 그것도 젊은 사람이 교통편을 제공해야 간혹 오갈 수 있다. 정년 후 귀촌하니 아내를 ‘젊은 새댁’이라고 부르며 지금까지도 새댁으로 칭한다.

이제 초파일이 되어도 사찰에는 아이들이 없다. 앞으로 농촌의 작은 사찰은 운영이 어렵거나 폐사될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린 불자를 양성하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집 주변에 있는 사찰에 가면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었다. 그래서 그때의 정경을 생각하며 쓴 동시조가 〈바람 놀이터〉이다.

대웅전 처마 밑에
바람이 놀러 와서
풍경에 매달려서
재롱놀이 하는데
큰스님
빙그레 웃고
바랑 지고 가더라

내가 살았던 고향 집 가까이 절이 있어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움이 내 주변을 감싸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금 귀촌해서 사는 동네도 주변에 작은 암자가 서넛 있다.

며칠 전 마을에 있는 ‘양천사’라는 암자에 들러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양천사’라는 시제의 시화와 내가 쓴 동시조집을 몇 권 건넸다. 혹 부모님 따라오는 아이들이 있으면 선물하시라고…….

 

이동배
동시조 시인 / dbdb06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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