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茶亭) 스님이 백양사 주지로 계실 때의 일이다. 아마 이십 년 전쯤 된 것 같다. 십여 명의 문성암 신도들이 스님을 뵈러 백양사를 찾았다. 난 아내와 함께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갔다. 천방지축 개구쟁이 아들한테 출발하기 전부터 스님 앞에서는 얌전해야 함을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스님께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부처님 이야기, 경전 이야기, 서옹 스님의 참사람 운동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해 주셨다. 그때 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손을 들었다.

“스님!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만영이구나. 당연히 해도 되지.”

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일행의 귀가 우리 아들에게 쏠렸다. 적잖이 당황한 나는 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물었다.

“중용(中庸)과 중도(中道)가 어떻게 달라요?”

순간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돌멩이 하나가 내 뒷머리를 딱 때린 것 같았다. 잠시 내 동공도 커졌다. 스님은 ‘저놈 제법이네’ 하는 표정과 함께 빙그레 미소를 보내며 차분하게 설명하셨다. 중용이란 유교적 개념으로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평형의 상태라고 하셨다. 또 중도란 불교의 근본 사상으로 예를 들어 선과 악, 옳고 그름, 깨달음과 번뇌 등 대립하는 양 끝단을 초월한 통합된 자리라면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하셨던, 강물에 흘러가는 뗏목 이야기를 예화로 들어 중도의 의미를 풀어주셨다. 그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은 가물가물하지만 자리를 함께했던 신도들의 궁금증까지 명쾌하게 해소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때 내 동시집을 스님께 드린 적이 있다. 그 동시집에는 불교에 관한 작품이 몇 편 들어 있었다. 한 편을 유심히 읽어보시더니 향엄 선사의 오도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선종에서 전하는 유명한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는 화두에 대해서였다. 선사는 총명하여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였는데 하루는 스승 위산 선사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물었으나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다. 그는 스스로 낙담한 후 운수납자가 되어 떠돌다가 남양의 혜충 국사 유적을 찾았다. 그곳에 머물러 풀을 뽑다가 우연히 돌멩이 하나를 들어 대나무 숲으로 던졌는데 ‘딱’ 하는 맑은 소리가 들려오자 크게 깨우쳤다는 것이다. “한 번의 딱 소리에 알았던 것 다 잊으니(一擊忘所知) 더 수행할 필요가 없구나(更不假修冶)”로 시작되는 향엄 선사의 게송을 읽어보면 두꺼운 무명의 벽을 돌멩이의 일격(一擊)으로 깨부수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님께서 왜 갑자기 향엄 선사 오도송 이야기를 꺼내셨을까. 대나무에 부딪혀 맑게 울리는 돌멩이 하나가 진여의 세계를 열어주는 단초가 되었듯이, 동시 작품도 어른과 아이들 즉 독자의 마음을 딱 치는 돌멩이 하나가 되어 울림이나 기쁨을 주거나 감동의 세계를 안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의 깊은 뜻은 지금도 헤아리기 힘들지만, 시조의 종장이나 시, 동시 작품의 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심(童心)은 결국 선심(禪心)이 아닌가!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말은 이미 저자에 유통되고 있으니 논리적 비약은 아닐 것이다.

김종만 기자의 〈오도송에 나타난 네 가지 특징〉(《불교평론》 2호. 2000년 봄호)을 아동문학을 하는 입장에서 의미 있게 읽은 적이 있다. 오도송의 특징을 돈오적 입장, 자연과의 합일, 이미지의 사용 기법, 육화된 경지의 구축 등 네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두 번째 자연의 합일에 저절로 관심이 쏠렸다. 동산양개의 물속의 그림자, 당나라 어느 비구니의 매화 향기, 오조법연의 솔바람 댓잎 소리 등을 예로 들어 자연현상과의 합일을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동시에도 자연에 대한 직관적 표현은 많다. 동심이야말로 자연에 제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비언어적인 언어로서의 시’의 극치인 오도송이나 선시에 비교할 수 있으랴만, 동시도 마음을 맑게 해주는 서정적 선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금강경오가해》를 꺼냈는데 무언가가 책갈피에서 뚝 떨어졌다. 스님의 휘갈긴 글씨가 보였다.

“책을 쌓아두지 말게나. 그대가 할 일은 다만 이뿐임을 알게나.”

아, 또 다른 돌멩이 하나가 딱 내 정수리를 내리치는구나. 게으름에 대한 채찍이었다. 《금강경》을 읽으면서 야부 선사의 선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라고 스님이 주신 책이었다.

《오가해》 제31분에서 “천 길이나 되는 낚싯줄을 곧게 내리니(千尺絲綸直下垂) 한 물결이 일어나매 일만 물결이 뒤따르도다(一波纔動萬波隨).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夜靜水寒魚不食)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빛 속에 돌아오도다(滿船空載月明歸).’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걸작 야부 선사의 선시도 읽었다. 좋은 동시를 쓰려면 먼저 선시에 대한 안목부터 높이라는 의도였으리라.

 

이정석
동시 시인 / goban4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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