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의 특성과 실상

들어가며: 일본불교에서 ‘장식(葬式)’의 문제

의례는 교의에 근거하여 목적성과 정기성을 가지고 실천되는 일련의 조직화된 행위를 말한다. 종교 교단 안에서는 의례를 통해 구성원 간의 연대성을 창출하고, 종교 감정을 고양시키며, 신앙적 일체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종교 의례 중에서도 죽음을 다루는 의례, 즉 상장례는 그 종교의 사후세계관 내지 내세관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장송의 방식에서는 망자와 그 친족이 믿는 종교의 타계관(他界觀)이 드러난다. 이처럼 장송의례는 한 민족 내지 문화권의 생사관이나 타계관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장례문화의 특성은 ‘불교식 장례’ 혹은 ‘장례불교(葬禮佛敎)’와 ‘화장(火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로 제시된 ‘장식(葬式)’불교는 바로 장례의 거행을 전담하고 치중하는 불교를 말한다. 일본 장례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주로 불교 승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생전에 불교 신앙이 깊지 않았던 사람도 일단 사망 후에는 승려에게 계명을 받아서 피안으로 갔다가 오봉(お盆, 우란분절)에 다시 유족과 만나는 구조를 취하는 것이 일본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람의 임종으로부터 시작되는 장례 절차, 그리고 이후 자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선조 제사가 모두 신도로 등록된 사원의 불교의식에 따르게 된다. 또한 일본불교에는 납골당을 포함하고 있는 사원이 많아서 추석과 피안(彼岸, 춘분과 추분 전후 각 3일을 합한 7일간), 그리고 제사 등의 불교 행사 시에 사망자와 생존자의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사찰에서 장의를 거행하고 사찰 인근에서 화장한 후, 사찰 내에 묘지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이 글에서는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는 장식불교의 기원과 개념, 역사적 전개에 대해 알아보고, 현대 일본 국민의 장식불교에 대한 인식이 3 · 11 대지진 재해를 계기로 어떤 식으로 변화해가는지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인 ‘21세기에도 장식불교는 엄존할 것인가’에 대한 진단은 앞에서 제시한 내용을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장식(葬式)’불교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

언제부터 누구의 제안에 의해 ‘장식불교(葬式佛敎)’라는 표현이 유행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1963년 조동종의 타마무로 타이조(圭室 諦成, 1907~1966, 당시는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가 저술한 《장식불교(葬式佛敎)》(대법륜각)에 의해 그 명칭이 항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장식불교’라는 용어가 주는 어감은 누구라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수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의 본질을 ‘장식’으로 전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장례를 거행해주고 그 사례금으로 사찰을 운영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일본불교의 현실을 지적하는 의미가 강하다. 그렇다면 일본불교가 ‘장식불교’라는 곱지 않은 별칭으로 불리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그 기원과 전개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일본불교에서 9세기 말이 되면서 황족이나 귀족의 자제가 다수 관승의 세계로 들어와 세속의 권력이 사원 안에서도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관승들은 천황으로부터 진호국가의 기도를 행할 자격을 승인받은 승려들로서 케가레, 즉 사예(死穢, 시체 오염에 대한 타부)를 기피할 의무 때문에 장식에 참여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 역시 시체나 유골과의 접촉을 기피했고, 서민들은 도리노베(鳥辺野), 아다시노(化野), 렌다이노(蓮台野)와 같은 장송지나 가모가와(鴨川) 강가에 시체를 갖다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1세기경을 분기점으로 특히 귀족 사이에 유골(화장골)에 대한 관념이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서, 12세기에는 고야산(高野山)에 납골 관례가 일반화되면서 서서히 유골을 존중하고 보존하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관념의 변화를 추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정토교의 보급과 내세신앙의 유행이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가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며, 죽은 시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은 중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6)의 신불교 출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가마쿠라 신불교를 열었던 주역은 구불교 사원에서 내려와 거리에서 포교를 실천했던 둔세승들이었다. 정토종의 조사 호넨(法然), 진종의 조사 신란(親鸞), 일련종의 조사 니치렌(日蓮), 조동종의 도겐(道元), 임제종의 에이사이(榮西) 등의 둔세승들이 조직적으로 장식에 참여한 결과 13불사를 정비해가게 되었다. 이처럼 둔세승 교단이 조직적으로 장례식을 맡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들 교단이 조직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됨으로써 장식불교 탄생의 배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부정(不淨)을 피하는 케가레의 관습은 고대와 중세 일본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며, 특히 관승의 경우에는 이러한 부정을 피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둔세승들은 그러한 사예(死穢)의 관습에서 자유로웠으며, 14세기에 이르면 황제나 쇼군, 다른 관승의 장례식도 주관할 수 있게 되었다. 율종의 승려들은 ‘청정 계율은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사예의 장벽을 극복하고 장례를 집행할 수 있었으며, 염불 수행자들 역시 정토왕생의 교의로 인해 사예로부터도 자유로워지게 된다.

이렇게 사예로부터 자유로워진 불교가 사자 의례와 조상숭배의 종교적 기능을 담당하며 일본문화의 근간을 형성한 것은 근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 이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불교의 각 종단에서 추선공양 의례가 행해져 온 배경에는 정치를 비롯한 현실적 상황이 존재한다. 에도막부의 종교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제종사원법도(諸宗寺院法度)’가 제정된 1665년 무렵에는 승려들이 촌락공동체에 정주하면서 불교 의례에 기반하여 촌락민의 장례와 제례를 행하게 된다. 에도막부 정권은 불교사원이 장례와 조상 제사를 매개로 하여 촌민(檀家)과 결합하게 되는 이러한 자생적인 흐름에 개입하여 ‘제종사원법도’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다.

에도시대에 접어들면서, 선교사들의 기독교 포교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도쿠가와막부 정권은 1638년 기독교도의 시마바라(島原) 농민반란을 계기로 기독교를 완전히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1668~1669년이 되면서 막부 정권은 국민을 통제하고, 기독교 금지정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사청제도(寺請制度)를 제정했다. 사청제도는 당시 각 촌락에 정주한 승려들이 그곳 촌민들의 장례와 제사를 담당하고, 또 촌민들은 사원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양자의 상호부조 관계를 적절히 활용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제도를 통해 모든 지역의 주민을 이에(家) 단위로 사원에 등록시키고, 그 사원에게 지역 주민의 종교 신분을 조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주민들은 자신이 소속된 사원, 즉 단나사(檀那寺)로부터 기독교 신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신분증명서인 사청증문(寺請證文)을 받아서 관에 보고해야 했다.

이 사청제도를 통해 단나사와 단나(檀那) 집안 간에 반영구적 고착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단가(檀家)제도 또는 사단(寺檀)제도라고도 부른다. 단나는 단나사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경제적 토대가 되고, 단나사는 단나의 장례나 조상제사, 종교의례 등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사원 승려의 본업은 자신의 절에 소속된 단가의 장례를 주관하고, 기일에 맞추어 제례를 주재하는 일이 되었다. 또 단가 신도들은 집안의 장례나 제사 외에도 불기(佛忌), 정월(正月), 우란분(お盆), 피안(彼岸) 등에 사원을 찾아 보시하면서 사원의 후원자가 되었다. 장례와 제례를 중심으로 하여 사원과 단가의 관계가 강화되고, 자연스럽게 사원은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사원이 행정조직의 말단 기능-단가로 등록된 국민의 호적관리-을 담당함과 동시에 단가들에게 장의를 제공하고 불교식 추선공양을 주도하게 된 단가제도를 통해, 일본의 장식(葬式)불교가 견고히 뿌리내리고, 현재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다.

 

현대 일본의 장식불교와 장례식 상황

일본의 장례는 에도시대의 장례 간소화 정책으로 인해 고별식 중심의 장례로 변화되었다. 현재 일본의 장례는 대부분이 장례식장에서 행해지는데, 장례식장은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주택의 협소로 인해 집안에서 가정의례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혼인예식장, 장례식을 위한 회관(会館)을 발생시켰다고 한다. 일본의 장례식장은 장의회관(葬儀会館)이란 뜻으로 ‘재장(斎場, 사이죠)’이라고 한다. 장례비용은 참여자 수, 계명의 등급, 제단의 등급, 홀 사용 여부, 참여한 승려 수, 화장장의 공영/민영 여부, 음식 접대의 여부 등의 복합적인 조건에 따라 크게 차별이 있다.

오늘날 일본의 장의 절차는 대략 메이지시대에 일반화되기 시작하는데 ① 죽음의 발생, 장의 준비, 부고 전달 ② 통야(通夜, 밤샘), ③ 출관(出棺) 및 장례행렬, ④ 장례식, ⑤ 화장(火葬), ⑥ 장례식 후 추선공양이라는 의례절차로 이루어진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위와 같은 구체적인 절차들이 도시부를 중심으로 일반화해 가는 과정에서 장의가 비대화되면서 고인을 잃고 경황이 없는 유족들을 대신하여 번잡한 절차나 장의도구 임대 등을 담당하는 전문장의업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메이지 10년대에는 이미 동경을 중심으로 ‘장의사(葬儀社)’라고 하는 상장례 전문회사가 성립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하는 예가 늘어나고,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불편함을 피하여 절이나 장례식장(葬祭場)을 이용하는 예가 점차 늘어났다. 특히 최근에는 전문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경우가 급증하면서 자택장례는 현격히 감소하는 추세이다. 예로부터 장례를 거행하는 공간이었던 집이 이제는 장례식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시신이 집으로 옮겨져 염과 입관을 하더라도 장례를 장례식장이나 절에서 하게 되면 그곳에서 통야를 하게 된다. 자택 장례가 드문 요즘에는 집에서 통야를 하는 경우도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근래의 통야는 매우 간소화되어 유족들만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고, 또 그 시간도 저녁 2~3시간(저녁 7~9시 전후)으로 끝나는 반절 통야(半通夜)가 많다. 현재 통야의 목적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것이 매우 간소화되면서 이전의 유족과 가까운 친족들만의 통야로 회귀하였다고 볼 수 있다.

통야 다음 날에 실시하는 고별식(장례식)은 현대에 들어와 장례 행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전 집에서 출관(出棺)하여 사원과 같은 장례식장으로 이동할 때 있었던 장례행렬이 거의 사라지고, 또 통야 의식이 간소화되면서 고별식(장례식)의 비중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장례를 마친 후에는 49재, 100일재, 1주기(만 1년), 3회기(만 2년), 7회기(만 6년), 13회기(만 12년), 17회기(만 16년), 그리고 마지막 제례에 해당하는 33회기 혹은 50회기(弔いあげ)를 행하게 된다. 후손이 이러한 제례를 모두 올려야 고인의 사령(死靈)이 정화되어 조령(祖靈, 조상신)으로 승화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일본 역시 현대에 들어서면서 친족과 이웃 공동체 간의 유대가 약화되고, 이들 공동체와 불교 성직자 간의 관계가 불안정해지면서 의식 수행에서 종교단체의 역할도 현저하게 감소했다. 또한 고령화에 따라 고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온 사회적 지인이나 우인이 거의 없고, 이전에 비해 장례식 참석자가 현저히 줄어듦에 따라 장례식의 간소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즉, 가까운 친인척만이 참여하는 가족장이나, 일련의 장례과정을 간소화하여 통야(通夜) 후에 바로 화장을 해버리는 ‘직장(直葬)’이 유행하고 있다.

요즘에는 묘지 부족 사태로 인해 캐비닛식 납골당, 자동식 납골당 등 좁은 공간에 많은 유골을 납골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묘지가 출현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목장 형식을 취하는 동경도립 ‘코다이라 영원(小平霊園)’이 2012년 개장하여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유골을 골호(骨壺)에 넣지 않고 수목 아래에 토장을 함으로써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되돌아가는 자연장을 행한다. 유골을 압축하여 메달, 반지, 목걸이 등으로 만들어 고인을 기리는 새로운 장례문화도 생겨났다. 또한 지인 등에게 알리지 않고 친지들만이 모여서 장례를 치르는 가족장이나, 생전에 장례를 예약하는 ‘생전장(生前葬)’도 행해지고 있다.

그 밖에 망자의 재를 나무 아래에 묻는 ‘수목장’도 행해지고 있다. 현재 일본은 우주장 · 냉동장 · 음악장 · 생전장 등으로 다양하게 새로운 장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납골당도 선호되는 추세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장례방식과 다른 형태의 장의가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식 장의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얘기와도 통할 것이다. 또한 장례 이후에 행해지는 제례로서 중음(中陰) 기간(49일)에 시행되는 7번의 법요가 3번으로 축소되고, 상복을 입고 근신하는 관습도 사라졌다. 또 정월(正月)에 조상의 영혼에 공양을 올리던 관습은 거의 사라지고 그것이 우란분절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몇 가지의 사례만으로도 불교가 의식을 전담하여 집행하는 역할이 쇠퇴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2008년에 나온 〈오쿠리비토(送人 おくりびと)〉라는 유명한 영화는 장례식을 집행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불교 승려는 아무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체 역시도 장식불교가 쇠퇴하고 있음을 무언중에 반영하고 있다.

이전에 호구 관리를 담당했던 사청제도에 입각한 사단(寺檀) 관계는 헌법에 의한 거주이전의 자유 보장, 민법에 의한 제사 계승과 가계상속의 분리, 현대 일본인의 종교관 변화 등에 의해서 이미 시스템적으로 지속이 곤란한 상황이다. 또한 연간 지역 이주자 수가 500만 명에 이르는 현대에는 단가들이 거주지를 이사하는 경우, 기존의 사단 관계를 해제하고 나서 새로운 사단 관계를 체결하지 않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결국 막부에 의한 사청제도로 시작된 단가 시스템이 21세기에 인구의 노령화와 인구수 감소,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현대에 들어 장례의 간소화와 다각화 현상이 장식불교의 쇠퇴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 11 대진재(大震災) 이후 장식불교를 둘러싼 변화

2011년에 있었던 3 · 11 대진재(大震災)는 직접적인 피해자는 물론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과 정신적인 상처를 남겼던 사건이었다. 전후 최대의 막대한 자연재해가 있었던 그 현장에서는 많은 사람이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활동에 열중했는데, 그중에는 승려를 비롯한 종교인들도 있었다. 종교인들만이 해낼 수 있는 활동의 모습이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불교를 둘러싼 수많은 보도 역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적지 않은 승려들이 구체적인 실천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피해자들을 위해 자문하는 모습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매체들이 불교의 미래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언급했다. 지진에 의한 충격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2012년 초 무렵부터 언론에서 ‘불교붐’이라는 용어가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상황이 찾아오게 되었다.

지진 후 일부 사원이 피해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규모의 피해자가 자신의 안전을 찾아서 쇄도한 사원들이 있었다. 피해가 컸던 지역에서는 반년 가까이에 걸쳐 피난민을 수용했던 사원도 있었다. 피난소 사원은 옛날부터 있던 사원의 기능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도쿄의 아사쿠사지는 관동대지진 때 피해자가 경내에 피난했던 경험에 근거하여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사찰의 내진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교토신문〉 교토, 2013년 3월 15일). 이 밖에 언덕에 지어진 사원 등이 예로부터 지역 주민의 피난소가 되어 온 지역은 적지 않다(〈高知新聞〉 2013년 6월 21일 등). 하지만 사원의 이러한 측면이 미디어에서 반복해서 보도된 것은 진재 이후의 일이다.

사원의 피난처로서 기능이 재평가되면서 전국 각지의 지자체에서는 향후 재해에 대비하여 사원을 정식으로 대피소로 지정하고, 지역의 불교회와 협정을 맺거나 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진재가 발생하고 난 후 수개월 간은 다수의 희생자가 나온 재난피해지에서 승려들이 독경과 진혼의 천도의식을 행하는 모습이 무척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 결과, ‘장식불교’ 비판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불교에 대한 불신 인식이 진재를 계기로 하여 역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타났다(〈産経新聞〉 東京, 2011년 8월 11일). 이는 타성적인 관습으로서가 아니라, 눈앞의 죽음에 대해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는 형태의 ‘장식불교’라면 현대 일본인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진재를 계기로 불교의 사자의례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종류의 견해는 그 후에도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장의에서 불교의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는 승려들이 늘어났으며, 여기에 대해서 “장식불교를 다시 생각하는 움직임(葬式仏教を考え直す動き)”이라는 해설이 붙은 기사 등이 있다(〈読売新聞〉 大阪, 석간 2012년 4월 5일).

그러나 이러한 풍조는 진재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재해에 의한 망자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엷어지는 것과 함께 소실되어 갔다. 이처럼 지진 후 승려에 의한 새로운 유형의 활동과 사원의 공공성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게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례불교’에 대한 시선은 다시 부정적으로 전환되었으며, 특히 사원의 경제적 기반인 보시에 대한 비난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일본의 승려는 장례식이나 법사 등의 의례에만 필요로 하며, 망자에 관한 일만을 관여하면서 불교가 본래 해야 할 산 자의 구제에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장식불교’ 비판이 전후의 어느 시기부터 자주 행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장의업계 저널인 《SOGI》의 〈기자 노트(記者ノート)〉에서는 “일본불교는 현재 ‘장식불교’로 야유받고 있으며, 승려에 의한 장의는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비즈니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근년에는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승려에 대한 기대가 미디어와 일반사회에서도 높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SOGI》 2013년 7월 10일). 또한 〈산케이신문〉에 게재된 논설에서는 “종교는 현대에서 존재 의의를 잃은 것은 아닌가. 그 눈에 띄는 사례가 최근의 장의에 관한 것이다”라고 서술하면서 근년의 장의방식의 격변과 장의와 불교의 분리에 대해서 언급하였다(〈産経新聞〉 東京, 2014년 6월 22일).

진재 이전부터 장식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이를 주제로 하는 저서 《장례식은 필요하지 않다(葬式は,要らない)》(幻冬舎新書, 2010)를 냈던 종교학자 겸 작가 시마다 히로미(島田裕巳)는 다시 2014년에 《제로 장례-간소하게 죽자(0 葬-あっさり死ぬ)》(集英社, 2016)를 내놓으면서, 궁극적으로 간소화된 장송의 방식을 제안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장의의 간소화로 인해 사원경제에 타격이 되겠지만, “불교는 무상을 말하기 때문에 제로(0) 장례의 방향성이 본질적이다. 불교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라 장식불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서술하고 있다(〈読売新聞〉 東京, 2014년 5월 5일).

‘장식불교’라는 용어 자체에 본래 비판적인 뉘앙스가 있었지만 진재 후에 현저해진 장식 이외의 불교에 대한 평가절상에 의해서 그 부정적인 인식이 점점 강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진재 후에 승려에 의한 새로운 유형의 활동이나 사원의 공공성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장식불교’는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장식불교’의 경제적인 기반인 보시금에 대한 비난이 서서히 강화되고 있다.

2010년에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시마다 히로미의 《장례식은 필요하지 않다》를 통해서 일본의 고액 장례비가 회자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직접 장례에 참여하는 승려이자 불교학자이기도 한 아타고 쿠니야스(愛宕邦康)는 적극적으로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아타고 쿠니야스는 “일본소비자협회가 2007년에 실시한 제8회 장례에 대한 앙케이트 조사 결과에서는 장례비용의 전국 평균은 231만엔”이라고 하였지만, 이 비용은 ‘장례의 음식 접대 비용 / 사원(장례식장)의 비용 / 장례 세트 비용’의 총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아타고 쿠니야스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상주가 문상객들에게 답례품을 주는 ‘향전(香典) 답례’의 액수를 줄이면 상가의 실질적인 부담이 많이 줄어들 가능성도 커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물론 문상객들의 숫자가 많고, 향전 답례를 일률적으로 2, 3천 엔으로 당일 반환하는 경우를 전제할 때의 얘기이다.

보시는 ‘장식불교’의 경제적 기반으로서 승려들의 사원 운영에 불가결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불합리하게 높은 금액을 지불해 온 것으로 생각하는 국민의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또한 승려들이 장의는 신성불가침의 ‘종교 행위’라고 주장한다 해도, 거기에서 발생하는 보시의 금액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그러한 주장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결국 진재 직후에 각 종단의 승려들이 피해 현장으로 가서 피해주민들을 위해 봉사활동과 진혼의식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좋은 인상을 준 것은 불교와 승려일 뿐, 장식불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본 국민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장례불교’는 지진 재해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무렵 보였던 재평가의 가능성을 실현시키지 못했으며, 지진 이전보다 더욱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승려 파견서비스’를 통해 드러난 장식불교의 민낯

일본의 장식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고조되면서 이를 대변할 수 있는 두 권의 책이 대중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앞서 언급한 종교 학자 시마다 히로미의 《(장례식은 필요하지 않다(葬式は,要らない)》(2010)와 승려 신분인 아키타 미츠히코의 《장례식을 하지 않는 사원(葬式をしない寺)》(2011)이다. 이 책들의 인기는 장식불교의 대안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여기에 더하여 ‘정액제 스님 파견 서비스(お坊さん便)’를 둘러싼 소동은 이러한 상황을 다시 선명하게 부각시키게 되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집안과 연결된 보리사(菩提寺, 단나사)가 없는 유족에 대해 승려를 소개해주는 것이 장례상품 서비스의 하나이다. 인터넷 쇼핑몰 업체인 아마존 재팬에서 2015년 12월부터 취급하기 시작한 ‘정액제 승려 파견서비스’는 사원과 관계가 희박한 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망자에 계명을 부여하는 여부에 따라 가격은 차별이 있다. 사단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점과 함께 금액의 투명성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소개한 승려의 일 처리가 좋지 않은 경우는 장례회사의 신용도와 직결되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당 승려의 평판이나 ‘보시’의 시세(相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조사하며, 그 평가에 따라서 소개자를 선정한다고 한다.

장례에서 독경 등을 해주는 승려에 대한 사례금의 성격인 ‘보시’의 비용은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사원과 신도 양자 간 조절하여 정해져 왔는데, 인터넷 정액제 승려 파견 서비스는 이러한 불명확한 보시금 비용을 전국 기준으로 통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비스의 참신성은 다른 데 있다. 서비스의 대상이 되는 불사를 장의에 제한하지 않고 기제사 개념의 연기법요(年忌法要)를 비롯하여 모든 추선(追善) 의례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장식불교의 위계를 와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이 정액제 승려 파견 서비스는 불사를 집행할 수 있는 장소가 확보되어 있고, 거기에 비즈니스 차원에서 승려를 초청할 수 있다면 특정 사원과의 사단(寺檀) 관계를 체결할 필요가 없으며, 단가의 의무인 경제적 부담이나 연기법요로부터도 해방된다는 점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 해인 2016년 3월 4일 전일본불교회가 아마존에 ‘항의문’을 보내서 이 사업은 ‘종교 행위를 서비스로서 상품화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일본불교회의 입장은 장의에서 생기는 승려에 대한 보시 가격의 불투명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스님 파견 서비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불교회의 아마존 제소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으로부터 “왜 보시라고 이름 붙여 고액의 금전을 요구하는가”라고 하는 역비판이 일어나게 했기 때문에 결국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결과가 되었다.(〈朝日新聞〉 東京, 2016년 8월 11일)

시마다(島田)에 의하면 일본소비자협회가 2007년도에 실시한 앙케트 조사결과 장례식 비용의 전국 평균이 231만 엔에 달한다. 구체적으로는 장의사에 직접 지불하는 장례식 비용이 약140만 엔, 음식접대 비용(조문객들에 대한 답례품인 ‘코덴가에시(香典返し)’ 포함) 약 40만 엔, 장례식을 인도하는 승려 및 절에 대한 ‘보시’ 비용이 약 54만 엔 등이다. 여기에다 새로이 묘지를 구입하거나 민영 혹은 공영 공원묘지를 이용하게 되면 비용은 더욱 커진다. 버블경제 시기에는 500만 엔이 넘는 계명 받는 비용을 지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島田裕巳 《葬式は、要らない》(幻冬舎新書, 2010, 109쪽). 한편 2014년 일본소비자협회가 ‘제10회 장의에 관한 앙케트 조사’를 통해 나온 평균 장의비용은 188만 9천 엔을 기록했다. 장의비용의 감소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한편 비용을 둘러싼 분쟁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장례비용 안의 ‘보시’에는 승려들의 독경과 인도(引導), 그리고 계명(戒名)을 주는 것에 대한 사례가 포함된다. 여기서 계명에 대한 보시란 일본 특유의 장식불교 문화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죽은 이에게 ‘계명을 부여하는 관습에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최상위의 계명은 최소한 100만 엔 이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음 단계로 내려갈수록 보시료는 적어진다고 하지만 가장 낮은 경우에도 10-20만엔 정도이다. 결국 이러한 ‘보시’ 금액이 장례비용의 증가로 이어져 불교식 장례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도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시에 대한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아마존에 제소한 불교회 측도 이미 파악하고 있으며, 소송문에서도 “(승려가) 법외적인 ‘보시금’을 청구하는 등의 사실이 있는” 것을 인정해버린 상태이다(〈東京新聞〉 東京, 2016년 3월 7일).

결국 ‘장식불교’는 적잖은 도시민들에게 이미 ‘서비스’인 상품이며, 더군다나 그 상품 서비스의 대가로서 보시에도 또한 가격 설정의 투명성이 요구되고 있다. 아마존의 ‘스님 파견 서비스’를 둘러싼 소동은 이러한 장식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모두의 시선에 드러내는 결과가 된 셈이다.

 

맺으며: 일본 장식불교의 미래는?

2003년에 처음으로 일본의 연간 사망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이후, 2005년에는 출생자 수 1,062,530명에 사망자 수 1,083,796명으로 사망자 수가 더 많아지는 역전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주간 다이아몬드〉 2013년 1월호 특집기사 〈돈 들지 않는 절, 묘, 장례〉에 의하면 연간 사망자 수는 2012년 125만에서 2039년에는 166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는 곧 일본 전체 인구수의 감소를 의미하며, 불교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그나마 충실하게 신도 역할을 해왔던 세대와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구수의 감소는 바로 사원 신도 수의 감소와 직결된다.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의 절을 경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가의 수가 300호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즉, 연간 장례식 수를 총 단가 수의 5% 정도로 잡으면 15건 정도이다. 이를 일본소비자협회가 2007년 조사에서 발표한 장례식에 대한 절의 보시료 평균 54만9천 엔을 곱하면 연간 약 823만5천 엔(한화 약 8천450만 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입을 기반으로 주지의 급여와 절의 관리, 유지, 보수에 충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절에서 운영하는 영대공양(永代供養) 수입의 근간이 되는 묘소 중심의 단가 신도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으며, 장의의 간소화와 신앙심의 저하 등으로 1990년 말 7153만 명의 단가 신도 수가 2010년 말에는 4544만 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그 결과 사원들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고, 절을 이을 주지 스님이 없는 무주지(無住持) 절이 늘어나고 있다. 2010년 기준 전국 7만 이상의 절 중, 약 2만 곳의 절이 주지 스님이 없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원 측에서는 시주 관리와 사원 운영 비용 측면에서 다양한 장례 형식을 확립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영대공양료를 인하한다든지, 많은 유골을 수납할 수 있는 납골당 형식의 묘지로 전환한다든지, 묘지 개발업자들과 연계하여 새로운 수입 창출을 도모하는 방식 등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들도 국가의 법률과 지방의 조례 등에 따른 승인을 거쳐야 하고, 초기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는 않은 상황이다.

일본불교가 장식을 통해 사원 운영의 측면에서 이제껏 누려왔던 것을 온전히 포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단가로 등록되어 있던 신도들도 갈수록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지극히 단순해 보인다. 장례사업의 다각화보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법은 죽음 이후에도 사원과 함께할 수 있는 신도들을 지속적으로 늘려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장식불교라는 타성을 벗고, 이 간단한 답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21세기의 한국불교도 사찰을 빠져나가는 신도들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 장식불교를 둘러싼 일본불교의 고민이 더 절박해 보인다. ■

 

김성순 shui1@naver.com
서울대 종교학과 대학원에서 〈중국종교의 도 · 불교섭에 나타난 수행론: 당·송대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석사학위, 〈동아시아 염불결사의 연구: 천태교단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광대 HK연구교수, 금강대 HK연구교수,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동국대 HK연구교수, 전남대, 한국전통문화대 강사이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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