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의 특성과 실상

1. 들어가는 말: 개와 로봇에게도 불성이 있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주자학이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불성을 내세운다. 일찍이 정조는 다산에게 개와 소와 사람의 성이 본연지성인지 기질지성(氣質之性)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주자학적 이원론 자체를 해체시키면서 “사람의 성은 사람의 성이고 개나 소의 성은 금수의 성일 따름”이라 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했다. 하지만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라는 일본의 공학자는 동물을 “틈새가 없는 기계”라고 보면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단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로봇학회 명예회장이자 로보콘(로봇 콘테스트)의 창시자인 모리는 인상적인 방식으로 불교와 테크놀로지의 통합을 지향하는 현대 로봇공학에 대한 불교적 비전을 제시한다. 그는 《로봇 안의 불성(The Buddha in the Robot)》(1981)이라는 저서에서 흥미롭게도 “(인간뿐만 아니라) 바위, 나무, 강, 산, 개와 곰, 곤충과 박테리아 안에도 불성이 있다. 또한 나와 내 동료들이 만드는 기계와 로봇 안에도 불성이 있음에 틀림없다…… 진실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붓다의 마음과 일치한다. 제어하는 것과 제어 받는 것은 모두 불성의 현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계를 조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리는 이처럼 “불성이 불성을 조작하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상호 호혜성(reciprocality)’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연기설이나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사사무애설(事事無碍說)을 떠올리게 한다.

모리는 연기설과 무아설의 관점에서 로봇이 우주의 원소를 구성요소로 삼아 연기(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사물이라고 설한다. 그러니까 로봇을 포함한 인공물들은 모두 지구나 자연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형성하는 힘, 즉 오온의 하나인 행(行, 산스카라)에 의해 형성된 사물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모리에게 모든 ‘있음’은 단지 상이한 차원에 속한 것일 뿐 동일한 우주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대립은 잘못된 구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리의 발상은 실은 불교뿐만이 아니라 일본문화 전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사물(物)을 일본어로는 ‘모노’라고 읽는데, 일본문화는 한마디로 ‘모노의 문화’라고 일컬어질 만하다. 모리는 모노 그 자체가 되어 ‘나’와 ‘모노’의 대립까지 넘어선 곳에서 로봇과 동물과 인간에 대해 말한 것이다. 이런 모노가 무엇인지를 알면 일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2. 모노(物)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모노라는 말은 크게 ① 형태가 있는 물체 일반 ② 사람(者) ③ 대상을 명시할 수 없어 추상화한 ‘어떤 것’ ④ 생각이나 의식 등 마음 작용과 관련된 어떤 것 등의 네 가지 용례로 요약될 수 있다(《日本國語大辭典》). 이 네 가지는 다시 물질적 형태가 있는 유형의 모노(物)[① ②]와 그렇지 않은 무형의 모노(もの)[③ ④]로 대별된다. 그중 현대 일본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모노의 용법이 형태가 있는 물체나 물건 일반과 관계가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일본은 흔히 ‘모노즈쿠리(物作り, 물건 만들기)의 나라’라고 하는데, 거기서 모노는 바로 대상으로서 물체나 물건을 의미한다. 과연 일본인은 모노를 대상화하고 그것을 변형시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노가 반드시 사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종종 사람도 ‘모노(者)’라고 말한다. 이처럼 모노를 매개로 하여 사물과 사람을 동일선상에 놓는 일본인의 발상은 매우 흥미롭기 짝이 없다. 더 나아가 용법 [③ ④]와 같이 모노가 종종 정신적 혹은 영적 존재의 의미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은 더욱 일본적인 특징이다.

세계를 생명 없는 사물이나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모노의 정신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식은 일본의 신화, 종교, 민속, 예술, 미의식, 생활의 영역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정신성을 ‘스피리추얼리티(spirituality)’라는 말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상 내용에서 스피리추얼리티와 종교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일본인의 종교심이나 스피리추얼리티는 ‘모노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 일본인은 ‘종교’라는 말에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근래 일본사회에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진행되어 온 ‘스피리추얼리티 붐’에서 잘 엿볼 수 있듯이 스피리추얼리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매우 남다르다. 그리하여 스피리추얼리티라는 말은 오늘날 일본에서 비단 신화나 애니미즘의 세계를 비롯한 종교=주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의료, 케어, 복지, 생명윤리, 임사 현장, 사생관, 테라피, 교육, 에콜로지, 젠더, 경영관리에서 다도, 화도(꽃꽂이), 서도, 무사도, 유도, 검도, 연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가령 일본 신화 속에 나타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에 관해 생각해보자. 고대 일본어에 ‘모노시로(物實)’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떤 모노의 영성이나 영력을 상징하는 물건을 가리킨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가 서로 모노시로(칼과 구슬)를 교환하고 그것을 입안에 넣고 씹어 뱉어서 신들을 낳았다고 나온다. 이 모노시로는 생명을 낳는 씨앗이자 근원적인 힘이다.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하사했다는 칼(草薙劍), 거울(八咫鏡), 구슬(八尺瓊曲玉) 등 천황가의 왕권을 상징하는 3종의 신기(三種の神器)도 모노시로의 일종이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에 속하는 오미와(大神)신사의 제신인 오모노누시(大物主神)에서 모노란 절체 불명의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모노의 위대한 주인’을 뜻하는 오모노누시는 가장 두려운 신이다. 거기서의 모노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다루기 힘든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런 모노를 체현하는 신 오모노누시를 제사 지내는 것이 국가의 안태에 불가결했던 것이다. 오모노누시의 본령은 법칙, 원리,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을 나라의 중심인 미와산(三輪山)에 부동의 신앙대상으로 제사 지냄으로써 비로소 나라 만들기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종교학자 사이토 히데키는 이와 같은 오모노누시를 ‘모노가미(もの神)’라고 부른다. 그에게 신도가 말하는 ‘팔백만 신’이란 대부분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양의성을 가진 이런 모노가미를 뜻한다. 모노가미에서 모노란 벌거벗은 타물(他物)로서의 모노이자 형태가 없는 모노 즉 ‘무언가 어떤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사물이나 사상(事象)과 비슷해 보이지만, 항상 무언가 일탈한 이형(異形)으로 출현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본적 사례로 ‘원령(怨靈)’을 뜻하는 모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원령으로서 모노 관념은 나라 시대 및 헤이안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널리 깊게 뿌리내린 관념이었다. 가령 《에이가모노가타리(栄花物語)》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과 같은 당대 문헌에는 빙령 현상과 관련된 ‘모노구루이(もの狂い)’라든가 ‘쓰키모노(憑き物)’ 혹은 ‘모노노케(物の怪)’라는 말이 빈번히 등장한다. 일종의 요괴라 할 수 있는 모노노케의 모노는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재액을 초래하는 사령(死靈)이나 생령(生靈) 등의 원령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크게 자랑하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六條御息所)의 생령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오이노우에(葵の上)를 괴롭히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유가오(夕顔)를 죽인 모노노케의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또한 《마쿠라노소시》에도 산악행자[修驗者]가 호법동자를 이용해서 모노노케를 퇴치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은 원령신앙은 오늘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야스쿠니(靖国)신사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거기에서 행해지는 전몰자들에 대한 제사의 배경에는 비정상적으로 죽은 자들의 원령이 산 사람들에게 뒤탈을 부를 수 있다는 관념이 깔려 있다.

나아가 미의식과 예술 속에 나타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에 관해서는 일본인의 대표적 미의식이라고 말해지는 ‘모노노아와레(物哀)’와 전통 예능인 노(能) 및 일본 현대미술의 독창적 유파인 ‘모노파(もの派)’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가령 종교학자 가마타 도지(鎌田東二)가 창안한 이른바 ‘모노학(モノ学)’에 따르면, 국학의 대성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논한 모노노아와레는 ‘영적 위상(モノ=靈, 영혼)’ ‘인간적 위상(者=心, 인간성)’ ‘물질적 위상(物=體, 물질성)’이라는 세 가지 위상이 조화 · 연결 · 결합된 콘텍스트의 장 안에서 발생하는 감동 · 감정 · 감각 가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안에는 영성으로서 모노의 위상이 침투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고 영혼을 발동시킨다. 이처럼 마음과 영혼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모노가 항상 일본인에게 모노노아와레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한편 노의 집대성자 제아미(世阿彌)가 펴낸 《풍자화전(風姿花傳)》 제2장의 제목은 ‘모노마네(物学)’이다. 여기서 ‘모노’란 물질이 아니라 존재의 형태와 양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모노에서부터 노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우환(李禹煥)에 의해 시작된 현대 일본의 모노파는 모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모노파는 숯, 유리, 돌, 종이, 철판, 혹은 그러한 것들이 혼합된 것을 거의 가공하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모노’로서 늘어놓았다. 1970년 2월호 《미술수첩》에 실린 좌담회 〈‘모노’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사회: 이우환) 기사의 인사말 중에는 “그들(모노파)은 일상적인 ‘모노’ 그 자체를 비일상적 ·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반대로 ‘모노’와 관련된 개념성을 벗겨내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고자 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의 ‘일상적인 모노’가 작가에 의해 우연히 선택된 숯, 유리, 돌 등의 구체적인 사물을 가리킨다면, 그것들을 “비일상적 ·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열어 보이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만들지 않은 것’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모노’의 세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모노는 현상적으로는 늘 ‘하나의 모노’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분명히 돌인데도 돌 이상으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그 ‘하나의 모노’는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모노’로 경험되면서 기존의 닫힌 세계를 열린 상태로 드러나게 하는 어떤 정신성을 내포한다.

모노파가 추구한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모노’는 실은 일본인들에게 결코 낯선 관념이 아니다. 일본인은 자기 주변에 ‘살아 있는 모노’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존중해 왔기 때문이다. 가령 관 속에 고인의 애착 어린 물건을 넣는다거나 혹은 고인의 유품을 친척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는 가타미(形見)의 관습은 말할 것도 없고, 이하에서 다루고자 하는 모노 공양도 ‘일상 속에 살아있는 모노’의 경험과 관련이 깊다. 종교학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는 이와 같은 ‘살아있는 모노’의 경험에는 깊은 종교성의 기반을 이루는 스피리추얼리티가 깔렸다고 말하면서, 그런 ‘살아 있는 모노’와 사랑의 관계를 읽어냄으로써 병든 마음과 병든 사회를 되돌아보자고 제안한다.

 

3. 현대 일본사회의 모노 공양

이상과 같은 일본적 ‘모노의 문화’에서는 예로부터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과 무생물 등을 모두 포괄하는 ‘모노’에 대해 생명과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여 외경과 감사의 염을 표한다든지 혹은 미련이나 애착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전통을 ‘모노 공양’이라 한다. 오늘날 일본 전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모노 공양의 대상은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예컨대 파소콘(퍼스널 컴퓨터) 공양이나 핸드폰 공양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대상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매우 다양한 모노 공양의 유형을 크게 사물 공양과 동물 공양으로 나누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을 표로 만들어 이 글의 마지막 페이지에 별첨하였다.

모노 공양 가운데 일본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퍼져 있으며 민속행사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바늘 공양(針供養)을 들 수 있다. 전교대사 사이초(最澄)가 북동쪽 방각에 바늘을 모아 진호의 지제(地祭)를 드린 것이 바늘 공양의 기원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북동쪽은 히에이잔(比叡山) 방향을 가리킨다. 오늘날 바늘 공양의 주체는 통상 재봉교실 교사조합이나 복식전문학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양 장소는 불교사원과 신사가 많지만, 전문학교에 종교가를 초빙해서 거행하기도 하며 학교 안에 공양 무덤을 건립한 곳도 있다. 12월 8일 혹은 12월과 2월의 8일에 행해지기 때문에 ‘고토요오카(こと八日)’ 또는 ‘요오카부키(八日吹き)’로 불린다. 이 밖에 ‘야쿠시바라이(薬師払い)’나 ‘우소바라이(嘘払い)’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바늘을 공양하는 이날에는 지역에 따라 ‘바람이 부는 날’ ‘거짓말을 축출하는 날’ ‘약값을 치르는 날’ 등 약간씩 상이한 의미가 추가로 부여되기도 한다. 전국 공통으로 이날은 바늘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부러진 바늘이나 오래된 바늘을 공양한다. 한편 바늘을 금속신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지역도 있다. 이는 바늘 공양이 원래 제철신을 제사 지내는 행사였음을 시사한다.

이에 비해 가장 최근에 새롭게 생겨난 것으로 펫 공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 일본사회에서는 인간의 장례식이 점차 간략화되는 반면, 펫 공양이 마치 인간의 장례의례처럼 발전하고 있다. 가족의 개인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펫의 존재가 오히려 자녀 이상의 존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펫 이름 앞에 가문의 성씨를 붙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펫용 의복에 가문의 문장을 새기기도 한다. 심지어 펫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사람도 있다. 펫이 죽으면 통상 펫 전용 영원(靈園)에 공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요즘은 가족묘에 펫을 함께 매장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물론 펫을 가족묘에 매장하는 것은 아직 법적으로나 사회 통념상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그것이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묘지가 판매되기 시작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펫에 계명(戒名)을 부여하는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으며, 실제로 펫에 계명을 부여하는 사원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일본에서 동물 공양은 이전부터 행해져 온 전통적인 습속 중 하나이다. 일본의 불교사원에서는 대개 마두관음(馬頭觀音)을 ‘동물수호관음’으로 여겨 본존으로 삼으면서 동물의 명복과 성불을 기원하는 공양을 거행해왔다. 심지어 일본불교의 대표적 성지 중 하나인 고야산(高野山)에는 사단법인 ‘일본시로아리(白蟻)대책협회’가 구제 박멸한 흰개미들의 명복을 위해 공양한 ‘시로아리 공양탑’까지 세워져 있다. 이에 비해 펫 공양의 경우는 성불을 원해서라기보다는 펫을 떠나보낸 심각한 상실감에 대한 ‘마음의 케어’를 제공하는 서비스 차원에서 행해지는 측면이 많아 보인다.

전통적인 민속행사로 거행되어온 바늘 공양이나 인형 공양 또는 돈도야키에 비해, 연필 공양 · 간지 공양 · 부채 공양 · 젓가락 공양 · 인감 공양 · 유품 공양 · 피규어 공양 · 펫 공양 등 모노 공양의 대다수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이는 모노 공양이 전통적인 요소와 현대적인 요소 모두에 관련된 습속임을 보여준다. 그 배경에는 다양한 시대적 · 환경적 변화 요인이 깔려 있다. 가령 유품 공양의 사회적 배경으로 핵가족화와 고령화에 따른 고독사 및 자살자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주거환경의 변화를 배경으로 돈도야키가 보다 광범위한 지역의 이벤트로서 재편되고 있으며, 맨션 생활의 보급 등 주택 사정의 변화에 따라 대형 불단의 처리에 곤란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남으로써 불구 공양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의해 전통적인 붓 공양 대신 연필 공양이 새롭게 등장했고, 농경적 우마 공양으로부터 농업기계 공양으로의 변화도 가속화되었다. 근래 도시 주택가에서는 환경과 안전상의 문제로 전통적인 연기물 공양이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모노 공양의 개최 장소는 통상 학문의 신(붓 공양), 눈의 신(안경 공양), 예능의 신(부채 공양) 등 각각의 모노와 인연이 있는 사찰이나 신사에서 거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최는 관련 업계나 단체인 경우가 많다. 이때 공양 행사는 해당 회사나 조합의 친목을 도모하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한편 모노 공양의 주체는 보통 소비자나 사용자일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조업체나 판매점이 공양을 대행하는 경우도 있다. 모노 공양의 시기는 특히 연말연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밖에 각각의 모노와 연관된 날을 기념하여 행해지기도 한다. 의치 공양 · 안경 공양 · 고서 공양 · 카메라 공양처럼 재활용 자원이 되거나, 모노 공양을 거행하는 사찰과 신사의 경영에 보탬이 된다든지 특히 인형 공양을 장례식장이 영리활동으로서 행하는 등 모노 공양은 경제적 측면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와 같은 모노 공양을 행해 온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앙케트 조사 등에 따르자면 모노 공양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해당 모노에 신불(神佛)과 영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혹은 쓰레기로 버릴 경우 신불이나 영의 뒤탈(다타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양을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자신이 오랫동안 사용해온 모노에는 그 사람의 기억과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든가, 감사하는 마음 때문 혹은 예의상이라든가 이별의 의례로서 또는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등 다양하다. 이런 다양성은 전술한 모노의 다양한 속성을 반영함과 아울러 모노 공양의 전통성(애니미즘)과 현대성(소비사회 · 스피리추얼리티)을 반영한다.

현대 일본사회에서 모노 공양이 성황을 이루는 사회적 배경에는 대량생산 · 대량소비사회의 확장이 있다. 거주 공간은 협소한데 생활재는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모노를 폐기할 필요성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신불이나 영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모노 또는 애착을 가진 모노를 단순한 쓰레기로 처분할 수는 없다. 그런 심리적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장치로써 모노 공양이 성행하고 있다. 나아가 포스트모던적 현대사회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비사회의 진전에 따라 모노는 그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와는 별도의 기호론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모노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현대인에게 보다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모노를 처분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의식(의미 부여)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모노 공양의 현대적 의의이다.

한편 동물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공양하는 관습은 동물과 인간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고대 일본인의 애니미즘적 자연관 위에 불교의 불살생 윤리 및 윤회사상의 영향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동물 공양은 진혼의례로서 그 자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활동의 증대에 따라 동물을 대량으로 사육하거나 기계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하고 실험하는 현대 일본사회에서 동물 공양은 동물 생명의 수탈이라는 죄를 소멸 또는 탕감해주는 편리한 죄책 소거 장치가 되었다. 가령 동물실험장에 건립된 공양탑은 실험의 잔학성에 대한 죄의식을 정화시켜주고 동물실험의 윤리성이라는 문제를 은폐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과의 공생 에토스를 드러내는 모노 공양은 우리가 동물을 포함한 모든 모노에 대한 외경의 염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기만적인 윤리적 책임회피 장치가 되기 십상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모노 공양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일본불교 사상에 관해 생각해 보자.

 

4. 모노 공양과 일본불교: ‘제법실상’과 ‘본각사상’

일본인은 추상적인 《화엄경》보다 현실적인 《법화경》을 더 편애한다. 그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후대에 이 구절은 중국 천태대사 지의(智顗) 등의 해석에 의해 ‘제법의 실상’이 아니라 ‘제법은 실상’이라고 읽히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에서 제법실상은 ‘제법의 궁극적 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모노의 일반적 존재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불교의 핵심적 개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이로써 《반야심경》의 현실부정적인 ‘오온개공(五蘊皆空)’ 즉 ‘제법은 공이다’라는 명제와 《법화경》의 현실 긍정적인 ‘제법은 실상이다’라는 명제 사이에 피할 수 없는 긴장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불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본래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오온과 공, 제법과 실상이라는 상반된 것의 일치야말로 불교의 진리라고 이해하는 해석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다.

일본에서 이런 제법실상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시킨 자가 헤이안 시대 일본 천태종을 개창한 사이초(最澄)이다. 사이초 교학의 근간은 지의에 의해 대성된 천태사상이다. 천태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에는 삼천 가지의 현상적 세계가 존재한다. 이른바 공(空) · 가(假) · 중(中)의 진리는 길이가 있는 시간 안에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즉 일념 안에서 직증(直證)된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의가 그것이다. 이때 일념이란 마음의 작용과 객관적 현상을 하나로 묶은 일순간의 염을 가리킨다. 천태사상은 이러한 일념삼천이라는 발상을 통해 제법실상의 명제를 파악한 것이다.

사이초에게 제법실상론은 한마디로 ‘현상 즉 본질’을 가리킨다. 현상의 깊은 안쪽에서 현상과는 구별되는 어떤 본질적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 이외에 본질은 없다는 발상이다. 현상을 진실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깨달음과 미혹의 구분을 강조하기보다는 양자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강조한다. 나아가 사이초는 생래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했다.

사이초 이후 일본 천태종에서 지배적이 된 ‘본각(本覺)사상’은 바로 이런 제법실상의 발상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본각’이란 《대승기신론》에 처음 나온 개념인데, ‘본래(本)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는 깨달음(覺)’을 의미하는 말로 내용상 불성과 거의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열반경》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고 그것이 작동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미’ 붓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불교에서는 통상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는 본래 불성이 갖추어져 있는데, 오염된 마음 즉 번뇌로 인해 그 불성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번뇌를 제거하면 숨겨진 불성이 드러나 빛나게 될 것이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오염된 마음을 제거하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성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라고 설해 왔다.

이처럼 각각의 인간(중생) 안에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는 발상은 원래 ‘여래장(如來藏)사상’이라 불렸다. 쇼토쿠 태자가 지었다고 말해지는 《승만의소(勝鬘義疏)》에는 “여래장은 자성청정(自性淸淨)하여 미혹 가운데 있다 해도 생사로 인해 오염되는 일이 없다. 단지 숨겨져 있을 따름”이라든가 “여래장과 법신은 일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후에 일본불교에서 널리 설해진 여래장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발상은 인도의 초기불교, 부파불교, 초기 대승불교에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3, 4세기가 되어서야 출현하여 점차 퍼져나갔지만, 인도 대승불교의 중핵이 되지는 못했다. 티베트불교의 경우에도 여래장사상은 일관되게 이단시되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불성 혹은 여래장이 개개의 인간 안에 존재한다면,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에게 공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불교의 중요한 전통인 공(空)사상과 모순된다. 게다가 여래장 사상의 경우 수행 과정에서 부정되는 것은 오염으로서의 번뇌이며, 오염을 포함하지 않는 상주의 여래장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용수의 공사상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의 대상이며, 여래장 같은 상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불성사상이나 여래장사상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천태본각사상이 헤이안 시대 말기(11세기)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사회는 1052년을 기점으로 말법 시대가 시작된다는 말법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 사이에서도 정토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본각사상과 정토사상이 결합하고 거기에 밀교적 요소가 첨가되면서, 이 세계가 그 자체로 정토이고 만다라이며 나아가 인간은 물론 산천초목 모두가 성불한다는 이른바 ‘초목국토 실개성불(草木國土 悉皆成佛)’ 관념이 널리 퍼지기에 이르렀다.

9세기의 거장으로 유명한 천태종 승려 안넨(安然, 841~898?)은 《중음경(中陰經)》에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성불할 때 일체의 초목이 모두 불신을 이루나니 몸은 장육이 되어 다 함께 성불한다”는 구절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초목성불’의 정당성을 논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중음경》 자체가 위경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엄밀히 말해 ‘초목성불’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넨 이후 ‘초목국토 실개성불’이라는 그의 표현이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겐(道元), 니치렌(日蓮), 잇펜(一遍) 등 중세 가마쿠라 신불교의 고승들도 모두 제법실상과 본각사상에 입각한 초목성불론을 받아들였다. 특히 도겐의 선불교는 세계와 공 및 불성의 관계를 사이초의 본각사상보다도 더 래디컬하게 추구했다. 그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에 대해 ‘실유(존재하는 모든 있음)’와 ‘일체중생’을 동일시하고 그것을 다시 불성과 동일시하는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모든 있음의 세계를 철저히 성화시키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인간과 초목이 불성일 뿐만 아니라 먹고 자고 배설하고 섹스하는 것을 비롯하여 잡다한 일상들이 모두 불성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선(禪)이라는 실천을 통해 제법을 공 혹은 불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공사상과 본각사상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을 종합하려는 시도였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일본불교사에서 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은 없었을까? 본각사상을 비판한 최초의 천태 학승 쇼신(證眞, 1130?~1207?)은 매우 특이한 존재이다. 1186년 학문적으로 천태종 최고의 지위인 ‘북령탐제(北嶺探題)’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 쇼신은 주저 《법화삼대부사기(法華三大部私記)》 30권 중 《법화현의사기(法華玄義私記)》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본각사상을 비판했다. 가령 그는 식물이 성불한다는 발상에 관해 우선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설령 있다 해도 식물이 마음을 가진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에 초목성불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초목성불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그 계기가 없으면 붓다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테면 인간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붓다가 되고자 노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어가 없는 식물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다. 만일 붓다가 될 가능성만 있으면 언어적 계기가 없다 해도 무엇이든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인간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붓다가 된다는 말인데 이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쇼신은 본각사상이 불범불이(佛凡不二)의 주장에 심취하여 성불을 위한 수행을 망실함으로써 외도에 빠졌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쇼신은 본각사상의 무조건적 성불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쇼신의 합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본불교사에 본각사상을 비판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일면 기이해 보인다. 본각사상에는 자기부정이 부재하며 무매개적으로 ‘세계의 성화’를 추구하는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이 존재한다. 가령 ‘번뇌는 곧 그대로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든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같은 ‘제법=실상’의 세계는 본래 치열한 자기부정을 통해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경지인데도, 일본불교에서는 그것을 안이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다시 말해 ‘제법은 공’이라든가 ‘제법은 실상’이라는 일본불교의 근본 사상은 만일 그것이 자기부정적 실천을 수반하지 않을 경우에는 상반된 종교의 양극(속과 성, 색과 공, 미혹과 깨달음 등)을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5. 나오는 말: 공양의 일본적 변용과 신불애니미즘

이상에서 우리는 현대 일본사회에 성황 중인 모노 공양의 맥락으로 ‘모노의 문화’와 일본불교의 ‘본각사상’에 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노 공양에는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본적 밑그림이 하나 더 깔려 있다. 신불습합적(神佛習合的) 애니미즘(신불애니미즘)이 그것이다. 예컨대 전술한 ‘모노의 스피리추얼리티’는 모노 속에 생명이나 영력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애니미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돌과 나무, 숲과 산이 있는 그대로 가미(神)의 모습이라는 감각, 온갖 사물 안에 성스러운 것(정령, 신불)이 작동한다는 애니미즘적 감각이 일본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일본문화는 모노를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간주하는 애니미즘적 관념이나 관행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근래 서구에서는 특히 신도(神道)에 주목하면서 그런 일본적 애니미즘을 ‘테크노애니미즘’이라 명명하는 관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 신도는 복잡하고 근대화된 고도의 테크노-과학적인 일본사회 안에 ‘살아 있는 애니미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본에 대단히 풍부한 애니미즘의 유산들이 대부분 신도뿐만 아니라 불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일본적 애니미즘을 ‘신불(神佛)애니미즘’으로 칭한 바 있다(〈신불애니미즘과 트랜스휴머니즘〉 《일본비평》 17, 2017).

사물과 기계와 로봇뿐만 아니라 자연물과 생물과 인간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모노를 유기체로 보는 애니미즘적 모노관은 일본불교에서 말하는 ‘초목국토 실유불성’과 상통한다. 가령 신도 의식에 앞서 반드시 거행되는 정화의례에서 재계(齋戒)를 뜻하는 ‘모노이미(もの忌み, 금기)’, 언어를 영력 있는 모노로 간주하는 ‘언령(言靈)’ 신앙, 모노로서의 원령을 믿는 민간신앙, 모노가 요괴로 변한 ‘쓰쿠모가미(付喪神)’ 관념 또한 신불애니미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 중 만들어진 지 백 년 이상 지난 모노에는 혼이 깃들어 사람의 마음을 유혹한다는 근세 일본의 쓰쿠모가미 신앙은 모노 공양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이 사용했던 물건이나 도구 혹은 집기들 가령 빗자루, 솥, 악기, 신발, 모자, 방망이, 염주, 항아리, 상자 등에 영력이 깃들어 있어서 함부로 버리면 쓰던 사람을 원망하거나 인간에게 해코지나 복수를 가하는 요괴를 쓰쿠모가미라 한다. 원래는 ‘구십구신(九十九神)’이라 하여 ‘만들어진 지 99년이 지난 도구의 영혼’을 뜻하던 말인데, 후대에 낡은 도구들이 변한 요괴의 총칭이 되었다. 이처럼 함부로 버려진 모노가 요괴로 변한다는 쓰쿠모가미의 발상을 역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요괴로 변하지 않도록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모노 공양의 발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신불애니미즘의 배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종교사의 독특한 신불습합이 존재한다. 일본은 삼림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며 ‘숲의 사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일본문화의 기층으로 말해지기도 하는 조몬(繩文)문화는 인간과 동식물 등 모든 것이 이 세상과 저세상의 끊임없는 순환운동 속에 있다는 공생과 순환의 원리를 내포하며, 도작 농경문화로 이행한 후에도 그런 애니미즘적 자연관이 신도에 계승되었다. 더 나아가 불교 전래 이후에는 천태본각사상의 ‘초목국토 실유불성’이라는 구절이 잘 보여주듯이 애니미즘적 색채가 지극히 농후한 일본불교를 낳았다. 그렇게 일본화된 불교의 사상적 특색은 ‘제법실상’ 즉 눈에 보이는 나무나 바위나 사람이나 동물 등 삼라만상(제법)이 ‘그대로’ 참된 모습(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이런 발상은 나무나 바위에 영이나 가미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든지, 나무나 산 자체가 그대로 가미가 깃들어 있는 ‘고신타이(御神體)’라고 믿는 애미니즘적 신도 신앙과 유사하다.

인도불교에서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라고 할 때의 중생은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중생’을 생명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산천초목 국토까지도 포함시켜 이해했다. 나무도 돌도 불성을 가지고 있어 이윽고 성불한다는 일본불교의 발상이 자연물 하나하나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신도의 발상과 합류하여 신불습합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까 일본불교 여래장사상의 토대에는 일본 고래의 애니미즘과 신도가 준비해 놓은 틀(型)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불습합적 애니미즘의 발상 안에서 형성되어온 모노 공양은 한마디로 공양의 일본적 변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아니 할 수 없다. 공양이라는 보편적인 불교문화 콘텐츠가 모노 공양의 옷을 입을 때 거기서 우리는 일본의 속살을 보게 된다. 거기서 공양은 “모노를 처분할 때 모노의 영적 차원에 작용하는 등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든지 재액초복을 원하여 행하는 종교적 의례”로 변용되었다. 그러니까 모노 공양은 신불습합적 애니미즘과 본각사상을 밑그림으로 삼아 ‘모노의 문화’라는 일본적 특수성과 ‘공양’이라는 불교적 보편성이 만나는 곳에서 새롭게 형성된 하나의 변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박규태 chat0113@daum.net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동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문학석사). 동경대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문학박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주요 저서로 《현대일본의 순례문화》 《일본 신사(神社)의 역사와 신앙》 《포스트-옴 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 《일본정신의 풍경》 등 다수가 있고, 주요 역서로 《일본문화사》 《국화와 칼》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양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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