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교토학파(京都學派)라는 명칭이 최초로 공적인 기록에 등장한 것은 이 학파의 개조(開祖)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 1870~1945)의 제자 토사카 준(戸坂潤, 1900~1945)이 1932년 한 신문에 게재한 〈교토학파의 철학〉이라는 기고문으로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가 지향한 학문적 특성이 불교 또는 일본적 관점에서 서양사상을 해석하고 비교하며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철학, 불교학, 종교학 그리고 신학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두는 학자들이 속한 분야도 다양하다. 이뿐만 아니라 이 학파에 속한 주요 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던 행적으로 말미암아 정치학, 역사학 측면으로도 상당히 주목받았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교토학파와 이에 속한 학자들에 관한 여러 훌륭한 연구 성과가 발표되기는 했지만, 이 분야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안타깝게도 연구자의 층이 두텁지도 않고 이에 따라 연구 결과물 또한 많지 않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교토학파와 여기에 속한 학자들에 관한 연구가 국내 학계보다 더욱 왕성하게 수행되어 왔다.

니시다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0)를 교토학파의 ‘핵심 3인방’ 또는 소위 ‘빅 스리(Big Three)’로 지칭하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비록 니시다와 다나베를 제1세대로 하여 오늘날에는 제4세대에 속하는 학자들까지 거론되고 있고, 이들 모두가 교토학파의 이론적 성장과 외형적 발전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이 글을 통해 그 학자들의 사상을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이 3명의 학자 각각의 사상 전체를 다룰 수도 없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세 학자의 사상을 검토하며, 그들의 사상이 달성한 불교 교학적 성과를 평가할 것이다. 다만 니시다의 경우 사상의 기초를 형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전체적인 사상의 개요를 서술할 것이며, 다른 두 학자의 경우는 불교와 관련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2.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교토학파의 사상적 특징은 당연히 이 학파의 개조인 니시다 기타로를 떠나서는 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후에 소개하게 될 다나베 하지메와 니시타니 게이지를 비롯한 교토학파의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교토대학 철학과가 전 세계 철학계가 주목하는 교토학파로 성장하는 사상적 기틀을 구축함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지닌 일본 최초의 근대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니시다의 사상에 관한 연구에서 국내의 대표적인 학자인 허우성 교수는 니시다의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철학적 특징을 ‘자각(自覺: self-consciousness)의 철학’과 ‘역사 · 정치철학’으로 구분하며, 전자는 대체로 종교적 · 구원론적인 것으로, 후자는 용어 그대로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것에 관한 관심으로 분석한다. 이에 더하여 이 두 철학은 본질적으로 존재론인데, 그 존재론의 핵심은 행위, 자기한정(自己限定), 일즉다(一卽多)의 논리, 내재즉초월(內在卽超越)의 논리 등으로 구성된 ‘자각의 형식’에 있다고 설명한다. 다른 학자의 경우에서도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와 같은 니시다의 두 가지 철학적 특징 또한 개인적 삶의 궤적과 그것이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으로 인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니시다는 유서 깊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를 사랑하며 앞길을 여는 데 큰 힘이 되어주던 큰누나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한 큰딸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지켜보며 인생의 큰 비애를 맛보게 되었다. 그의 고교 재학 시기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자유주의적 사상을 억누르고 규칙과 처벌 중심의 무단적(武斷的) 교풍을 추구하던 학교 당국에 저항하는 태도로 생활하며 학내에서 각종 문제를 일으키던 중, 결국 ‘독립독행의 길’을 갈 것을 선언하며 자퇴를 하였다. 그러나 독립독행의 길이 결코 쉽게 실현되지는 않았고 여러 가지 좌절을 경험한 후에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산사를 찾아 선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시작한 선 수행은 한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일평생 그의 삶에서 중요한 버팀목이자 학문적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 주제가 되었다.

니시다가 겪은 난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퇴학한 1890년, 일본에 불어닥친 최초의 자본주의적 경제공황으로 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게 되었고, 장남의 방황을 보다 못한 모친의 간곡한 부탁과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마침내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교를 중퇴한 그에게는 본과가 아닌 제2급의 선과(選科)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했던 그가 동경제대 재학 시절 선과 재학생으로서 당했던 차별, 졸업 이후에도 선과 출신이라 취직자리 하나 얻기 어려웠던 시기를 겪으며 느꼈을 실망과 굴욕감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 컸을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가 않았다. 25세 때 외사촌 누이와 결혼했고 곧이어 자녀도 태어났지만, 그는 결혼생활에서 별다른 기쁨을 얻지 못했다. 급기야 아내가 갑자기 가출하였고, 이에 분노한 부친의 결정으로 결국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게 되었다. 비록 약 2년 이후 부부는 재결합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어린 자녀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는데, 그가 37세이던 1907년 한 해에만 다섯 살이던 차녀와 출생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5녀를 잃었다. 일평생 자녀 여덟을 두었던 그가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남아 있던 자녀는 겨우 셋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그가 생애 전반에 겪었던 갖가지 고통과 비애의 상황들을 열거한 이유는 그 모든 경험을 통해 자신의 “마음 깊은 밑바닥”을 찾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전반기 철학의 모티프라고 할 수 있고, 그 모색의 결과로 획득한 결정체가 ‘순수경험’이고 그다음이 ‘자각’이었기 때문이다.

니시다 철학을 논하면서 ‘순수경험’ 개념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전체적인 기초를 형성하는 주요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불교적 요소를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의 ‘순수경험(pure experience)’으로부터 차용한 이 개념은 니시다 자신의 대표작 《선(善)의 연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서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사상을 체계화해가는 기본 토대로 활용하였다. 그는 순수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순수경험은 직접경험과 동일하다. 자기의 의식 상태를 직접 바로 그 아래에서 즉각적으로 경험했던 때, 아직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지식과 그 대상은 완전히 합일하고 있다. 그것이 경험의 가장 순연한 상태이다. …… 참된 순수경험은 세공된 그 어떤 의미도 없는 사실 그대로의 현재 의식일 따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니시다는 순수경험을 ‘직접경험’ 또는 ‘지적직관’으로도 표현하는데, 주관과 객관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이며 인위적인 세공이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행위이다. 가령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절벽을 기어오르는 경우나 음악가가 숙련된 곡을 연주할 때와도 같이 전적으로 지각이 연속되는 상태라고 그는 설명한다. 니시다에게 순수경험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선의 연구》 전체를 통해 지향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선(善)의 본질’을 규명하는 핵심기반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선을 학문적으로 설명한다면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참된 선이란 오직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곧 참된 자기를 안다는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자기는 우주의 본체인바, 참된 자기를 안다면 비단 인류 일반의 선과 합치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본체와 융합하고 신의 뜻과 어느새 합치하는 것이다. 종교도 도덕도 실로 거기 말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참된 자기를 알아서 신과 합치하는 법은 오직 주객합일의 힘을 스스로 얻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위와 같은 니시다의 설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참된 선”이란 “참된 자기를 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며, 참된 자기를 알게 되면 인류의 보편적 선과 일치되고 우주의 본체와도 융합하게 된다. 종교와 도덕도 결국 이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바로 개개인 스스로가 “주객합일의 힘”을 얻는 것임이 니시다가 《선의 연구》를 통해 주장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주객합일의 힘은 순수경험의 획득을 통해 달성된다. 따라서 결국 순수경험은 참된 선의 성취로 이어지게 된다는 논리이다.

교토학파 3세대 학자로 분류되며, 소위 “서구의 대표적인 교토학파 대변인”이라고 불렸던 아베 마사오(阿部政雄, 1915~2006)에 따르면 니시다의 사상은 순수경험 이후 계속 발전하며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해 가지만, 일관된 그의 근본적 관심은 ‘참된 실재’는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으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을 체계적·조직적으로 파악하며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아베의 설명과 같이, 순수경험을 기초로 한 니시다의 사상은 이후 다른 서양철학자의 사상과 대화하며 점차 발전하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먼저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과 ‘사행(事行, tathandlung)’을 골자로 하는 피히테(J. G. Fichte, 1762~1814)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각’의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직관’을 강조하는 자신의 철학적 특징을 살려 “일체의 작용을 초월한 장소(場所)의 입장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장소의 논리(logic of place, 場所の 論理)’가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던 니시다는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사상을 구성하는 ‘이데(idee)’와 ‘절대정신(absoluter Geist)’ 개념을 원용함으로써 ‘절대무(絶對無)’의 개념을 정립했다. 그가 주장하는 ‘절대무’란 결코 단적인 공무(空無, empty nothingness)나 허무(虛無, nihilit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존재론적 유 · 무의 구분을 초월한 ‘무’로써,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에 맞닿아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절대무의 자각’으로 확장되며 그의 ‘자각의 철학’이 포섭하는 영역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다.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자각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점이 되고 있지만, 니시다는 이처럼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서구철학의 언어로 체계화함으로써 ‘불교적 자각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니시다가 자신의 학문적 영역을 불교철학 내에 한정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점은 넓은 의미에서 대승불교적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국내에서 교토학파에 관한 연구 분야의 또 다른 대표적 학자인 이찬수 교수는 그의 철학에 대해 “대승불교적 입각점에서 동서양의 사상을 서양철학적 언어로 통합해낸 탁월한 성취”라고 평가한다. 일본불교 연구의 권위자인 포르(Bernard Faure) 교수는 니시다 철학에서 그의 종교적 체험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순수경험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니시다의 사상과 선불교와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쨌든 순수경험에 대한 니시다의 공식은 명백히 젠이었다. 니시다가 스즈키처럼 교토(京都)와 카마쿠라(鎌倉)의 여러 사찰에서 1897년부터 10여 년간 젠 수행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03년 여름, 대덕사(大德寺)에서 마침내 어떠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니시다 사상의 토대가 되는 순수경험 이론은 ‘어떠한 사회 · 문화적 맥락으로부터 독립된 순수경험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할 수 있다. 심지어 순수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모든 경험은 인식론적 과정의 결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뒤에서도 논의될 내용이지만, 그의 후임자 다나베조차 니시다의 이론에 대해 과도하게 종교적 영역을 중심으로 한 탓에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 버렸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니시다의 순수경험 이론에 대한 비판도 비판이지만,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니시다가 가장 강력하게 비판받아온 영역은 그의 ‘역사 · 정치철학’에 대해서이다.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게 되자 그는 조국의 운명에 깊이 공감하며 역사 · 정치철학을 전개해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대동아공영권을 철학적으로 지지한 것인데,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하였다. 당시 도조 내각은 이것을 수용하여 1943년 11월 5일과 6일 양일간 도쿄에서 열린 중국, 만주, 필리핀, 태국,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하였다. 이로써 니시다는 중국과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의 고통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지역 제국주의에 빠지고 말았고, 마침내 학자로서 훗날 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근대의 세계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구상한 미래 역시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제국주의가 이끄는 세계였다.

한편 니시다가 자신의 역사 · 정치철학을 형성하는 이론적 기반으로 활용한 것 중 하나가 ‘일즉다(一卽多)’의 논리였는데, 이것이 갖는 화엄교학과의 연관성 때문에 학문적 · 종교적 측면에서 사안은 더 민감해졌다. 그 역시 일즉다 논리의 일례로 화엄교학에 존재하는 사사무애(事事無礙), 사리무애(事理無礙), 혹은 사즉교(事卽敎)를 거론한 적이 있다. 중요한 불교적 가치를 지닌 논리가 전쟁과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념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938년 일본 육군성에서 작성한 〈국방국책안(國防國策案)〉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를 풍미하던 저명한 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쇄케 한다.

 

3. 다나베 하지메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다나베 하지메
다나베 하지메

다나베 하지메는 니시다와 더불어 교토학파 1세대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가 흔히 니시다의 제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교토학파에 속하는 여타 학자들처럼 교토대학 학생으로서 니시다의 가르침을 받은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에 후배 학자로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니시다를 만나기 이전에 이미 동경제국대학에서 수리철학으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 강사로 재직하던 중 니시다의 《선의 연구》에 큰 감명을 받고 그와 교류하며 배움을 이어나갔다. 이후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해인 1919년에 니시다의 초청으로 교토대학 문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불교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다나베에게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니시다처럼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 신란(新鸞, 1173~1262)의 사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착안점을 토대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니시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특히 생애 후기 ‘참회도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는 신란의 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둘째, 그는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대체로 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 여겨지는 그리스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불교적 시각에서 상호 대화하며 그것을 해석하고자 했다.

먼저 첫 번째 특징과 관련하여, 다나베가 니시다의 이론적 토대 위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을 이찬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나베는 한편에서 이런 니시다의 순수경험 내지 절대무의 자기한정 개념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공이 색이 되는 논리가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절대무, 즉 공(空)을 색(色)과 즉(卽)이 되게 해주는 ‘매개’에 관심을 기울였다. 공이라는 보편이 색이라는 개체가 되는 데는 논리적으로 매개가 요청되며,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서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란의 정토사상이 ‘아미타불, 그 본원, 중생의 신심’이라는 세 가지 핵심적 요소로 요약된다고 할 때, 다나베가 주장하는 ‘매개’는 그 셋 가운데 ‘신심’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란의 사상에서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다나베는 진리 체험의 과정을 타력적 차원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추구해나갔다. 이처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태도는 수리철학이나 과학철학과 같이 철학 분야 중에서도 자연과학과 가장 밀접한 분야에서 오랜 기간 학문적으로 연마한 경력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나베는 ‘참회도 철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속에는 조국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표명한 일종의 개인적 양심선언을 포함하고 있다. 1946년에 발표한 자신의 저서 《참회도로서의 철학》을 통해 표명한 이 사상은 전쟁 기간에 국가의 실책에 대해 어떤 반대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며 철학자로서의 무력함으로 고뇌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참회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고백한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나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고 나 자신의 망설임으로 괴로워하였다. 그러한 교착상태 속에서도 철학적으로는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딜레마에도 적당한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심지어 철학을 계속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나의 망설임은 철학자로서 그리고 대학교수로서 자격 미달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내면으로부터의 질문과 의문으로 씨름하며 많은 날을 보내며 탈진과 절망의 순간으로 내몰리다가 마침내 철학이라는 숭고한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나 자신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순간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고뇌 속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나의 무능함에 겸허하게 나 자신을 굴복시켰다. 나는 불현듯 새로운 통찰에 도달했다. 나의 참회하는 고백-메타노에시스(회개)-는 예상치 못하게 외적인 것들에게서 멀어지며 나의 내면으로 나를 되돌이키게 했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다나베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극심한 고뇌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새로운 통찰은 참회로 이어지고, 이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의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전환은 그로 하여금 자력이 아닌, 타력 구제를 강조하는 신란의 정토사상에 더욱 심취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확실히 이것은 나 자신의 힘(자력)으로 떠맡는 철학이 아니다. 그 힘은 이미 절망으로 포기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힘(타력)에 의해 수행되는 철학인데, 메타노에시스(회개)를 통해 나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게 했고, 나의 순전한 무력함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하도록 유도했다. …… 메타노에시스 안에서의 내 전향의 경험, 즉 전환과 부활의 경험은 정토진종의 교설을 수립한 신란(1173~1262)으로 하여금 정토진종의 교리를 수립하게 이끌었던 경험과 동일하다. 아주 우연하게도, 비록 나의 경우는 철학의 영역 내에서 발생했지만, 나는 불교적 수련을 통해 신란이 따라갔던 것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선 수행의 체험에서 비롯된 니시다의 사상이 ‘순수경험’과 ‘절대무’를 기반으로 하는 자력문이라면,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다나베 또한 동일한 사상에서 출발하였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사상의 전개를 이루어갔다. 그는 니시다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한 ‘매개’에 천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전적인 타력에 의지하는 신란의 정토사상으로까지 나아갔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학자로서 평생을 통해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조국의 실책을 바로잡는 데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을 통해 느꼈던 무력감은 그로 하여금 전적인 타력에 의지하는 사상적 전향을 경험하게 했다.

불교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다나베에게 나타난 두 번째 특징은 불교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 간에 체계적인 이론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앙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시다의 선 수행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절대무’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매개로 자기부정을 실천할 수 있는 절대자의 위치에 둠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신관(神觀)과 접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다나베가 직접 ‘무즉신론(無卽神論)’이라고 명명한 이 이론은 절대무의 개념을 활용하여 ‘무에 근거를 둔 신론’ 즉 무신론(無神論)을 펼치는데, 이것은 ‘신이 없음’이나 ‘신의 죽음’을 주장하는 기존의 무신론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유신론과 같이 ‘유의 절대 긍정’을 사용하여 신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 절대부정’을 사용하여 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절대무에서 비롯된 타력은 기존 유신론의 신과 같이 직접 존재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대 존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작용하는 사랑이다. 절대자의 자기부정을 통해 인간의 자기부정이 이루어지는데, 전자의 자기부정이 사랑이며 다나베는 이것을 ‘무즉애(無卽愛)’라고 불렀다.

 

4. 니시타니 게이지의 사상과 불교적 요소

교토학파가 니시다에게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학파로 성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니시타니 게이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교토학파의 성장을 위한 그의 기여는 지대하였다. 그는 스승 니시다로부터 “자기보다 더 자기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스승의 사상을 온전히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의 틀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교토학파를 구성하는 학자들 가운데 불교 중심적인 색채를 가장 강하게 드러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니시타니는 니시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약 3년간 유럽에서 수학하였는데, 바로 일본 교육청의 연구원 자격으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하이데거와 함께 연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찬수 교수에 따르면, 니시타니는 특히 하이데거의 허무주의 해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움과 동시에 단순히 하이데거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닌, 그의 사상을 뛰어넘으며 현대적 의미의 불교철학을 시도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가 특별히 하이데거를 자주 거론하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사상을 연구하든 서양사상 가운데 그가 특별히 관심을 쏟았던 영역은 소위 ‘과학주의’와 ‘허무주의’였다. 니시타니가 특별히 허무주의에 천착하게 된 이유는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타계하고, 2년 후 자신도 동일한 병을 앓아 일시적으로 학교도 포기해야 했던 절망적인 체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여러 에세이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과학주의와 허무주의가 상호연계되며 만들어내는 악순환을 니시타니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과학주의는 일체를 철저히 ‘대상화’해서 분석하며, 그 결과를 생명이 없는 법칙에 환원시킨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과학적 법칙에 맞추기 위해 애쓰다가 오히려 그 법칙으로부터 소외되기에 이르며, 마침내 인간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무의미를 보게 되는 허무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주의가 주체를 상실하는 허무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과학주의에 매몰된 시대가 허무주의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분석했던 니시타니가 관심을 집중한 또 하나의 영역이 바로 종교인데, 자신이 체험한 시대적 흐름 속에 담긴 ‘종교적 무관심’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진단하였다. 그가 추구했던 접근법은 서양철학이 도달한 지점인 허무주의를 그대로 두지 않고 오히려 더욱 극단까지 유도해가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이 발생하게 함으로써 일체 존재의 긍정을 위한 토대가 형성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허무주의의 극단에서 서양철학이 시도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니시타니가 서양의 허무주의에 대응해 내놓은 방안은 불교의 ‘공(空)’ 사상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것으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의식의 장(意識の場)’으로 칭하며, 이것과 대비되는 ‘공의 장(空の場)’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였다. 니시타니에 따르면, “나의 근저가 허무”라는 사실에 머물고 만 것이 그간 서양철학에서 발전시켜 온 허무주의였으며, 이때의 허무는 “유(有)의 측면에서 표상된 무”이며, 유에 상대되는 무, 즉 ‘상대무(相對無)’에 불과하다. 니시타니는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 “허무가 다시 ‘공’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이때 상대무는 극복되고, 존재와 하나가 된 무, 일체의 대립적 표상이 극복된 지점, 즉 ‘절대공(絶對空)’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아베는 공의 입장을 종교 연구의 새로운 토대로 삼고자 하는 니시타니의 종교철학이 갖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니시타니는 모든 종교들에 공통된 보편적인 본질을 찾던 18세기와 19세기 종교 철학들을 모방하지 않는다. ……니시타니는 전통적인 종교 철학들의 입장이 무너지고 인간 존재들 속에 ‘내재한 것(the immanence)’이 돌파한 그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그 장소가 ‘공(空)’이다. 공 속에서 비인격적인 인격성-혹은 인격적인 비인격성-이 확립되고 삶과 죽음의 이중적인 노출이 참으로 가능하게 된다. …… ‘전통의 경계 안과 밖의 입장에 동시에 서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을 장차 존재해야 할 종교의 기초로서 밝히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과거 종교철학의 입장을 부수는 부정적인 요소와 세계종교의 새로운 구축과 발전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확신을 포괄한다.

아베는 그리스도교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주장했던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과 니시타니를 비교하며, 후자의 학문적 시도를 종교의 ‘비종교화(de-religionization)’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불트만에게 비신화화는 해석학적 문제인 데 반해, 니시타니에게 비종교화는 해석학적 문제가 아니라 모든 자아 중심적 견해를 돌파하며 공(空)의 입장에 서는 주체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니시타니는 공의 입장을 “삶과 죽음, 존재와 무의 불가분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며, “허무 속에서 분산되고 해체되었던 모든 것들이 다시 존재를 회복하게 되는 장소,” 그리고 “대긍정의 장소” 등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공의 입장은 니시타니 철학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자, 근대 서구의 허무주의 입장과 구별되며 그것을 초월하는 돌파구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5. 교토학파의 교학적 성과: 결론을 대신하며

이상으로 소위 교토학파의 ‘핵심 3인방’으로 불리는 니시다 기타로, 다나베 하지메, 그리고 니시타니 게이지의 사상을 토대로 교토학파가 갖는 사상적 특징을 검토하였으며, 거기에 내재한 불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해 보았다.

니시다가 학파의 개조로서 자신의 선 수행 체험을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며 불교와 서양철학이 조우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를 구축하였다면, 다나베는 니시다 철학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도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한 이론적 단점을 과감하게 지적하며 그것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참회도의 철학’을 개진하며 학자로서 양심선언을 하는 결단성도 보여주었다. 니시타니는 스승 니시다의 사상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이론적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을 통해 서양철학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했다. 이들 세 학자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교토학파는 불교 교학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성과를 달성했다고 평가한다.

첫째, 비록 교토학파가 서양철학의 사상체계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언어를 원용하며 발전하기는 했지만, 현대 동양철학-그 가운데 특히 불교 교학에 기반을 둔 불교철학-이 서양철학과 대등한 관계에서 교류하며 상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부분은 세 학자를 위시한 교토학파에 소속된 학자들 모두의 학문적 노력을 통해 달성한 교학적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선 수행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종교적 체험은 불교학 내에서조차 정교한 교학적 언어로 체계화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 교토학파에서는 이것을 서양철학자의 사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의 시각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창안하며 그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특히 학파의 개조인 니시다의 노력이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함으로써 달성된 이러한 성과는 철학뿐만 아니라 불교학, 종교학, 신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이론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19세기 서구에서 더욱 팽배해진 무신론적 사조와 ‘신의 죽음’에 연관된 주장들이 더욱 강한 세력을 확보해가던 사상적 맥락에서 교토학파는 새로운 신관을 제시하였다. 즉 ‘절대무’의 개념을 사랑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기부정을 실천하는 절대자의 자리에 두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관을 불교적 차원에서 포섭하는 창의적이면서도 과감한 시도였다. 니시다가 수립한 ‘절대무’의 이론을 다나베가 더욱 진전시킴으로써 정립된 이 교학적 성과는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접목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넷째, 교토학파는 과학주의와 허무주의에 직면했던 서구 사회의 사상적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을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 발견하였다. 과학주의에서 비롯되는 인간소외와 이를 통해 허무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악순환을 탈피할 방안을 ‘공의 입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서구 철학의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니시타니 철학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다. 소위 ‘불교적 종교철학’을 추구했던 그의 철학은 불교철학이 서구 철학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서 교학적으로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이상과 같이 교토학파는 교학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성과를 나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었던 그들의 자취는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교토학파의 위상을 격하시킨다. 오늘날 교토학파에 속한 학자와 그들의 제자들에게는 일본이라는 국가 중심성, 일본인이라는 민족 중심성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가치, 그리고 불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 본연의 가치를 얼마나 고수하느냐의 책임이 다른 어느 학자들보다 더욱 요구될 것이다. ■         

 

최용운 yuchoe@sogang.ac.kr
서강대학교 대학원 졸업(종교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을 통해 조명한 한국 간화선〉 〈대혜종고의 사회참여에 관한 연구〉 등이 있고, 저서로 《숭산행원의 생애와 사상》 The Buddha & Jesus(공저)가 있다. 현재 서강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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