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교의 특성과 실상

1. 들어가는 말

1868년 3월 28일, 메이지 정부는 ‘신불판연령(神佛判然令)’을 내리고 공식적으로 신불분리 정책을 실시한다. 이후 일본사회에서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사건과 더불어 신사와 사원을 분리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우두천왕(牛頭天王)을 제신(祭神)으로 했던 교토(京都)의 기온샤(祇園社)가 스사노오노미코토(速須佐之男命)를 제신으로 하는 야사카신사(八板神社)로 바뀐 것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온샤의 제신이 스사노오노미코토로 됐다는 것 자체가 중세 ‘신불습합(神佛習合)’의 결과를 수용한 것인데, 이러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신불판연령’은 사실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불교와 신도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해 왔음을 반증하는 법령임을 알 수 있다. 곧 일본의 오랜 신앙적 전통 속에서 신불습합이 이뤄져왔는데, 이를 국가의 법령에 의해 폭력적 ․ 인위적으로 분리해내겠다는 것이 바로 신불분리 정책의 기본 방향이었다. 이렇게 메이지 정부는 기존의 종교적 전통에서 신도를 따로 분리해냄으로써 고대 일본사회를 지탱했던 ‘신기신앙’의 전통으로 회귀하고, 이런 신앙의 회귀를 토대로 근대 천황의 절대적인 왕권(태양신의 자손에 부여된 절대권력)을 재구축함으로써 새로운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신도국교화 정책은 이런 맥락 속에서 시도됐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메이지 정부는 새로운 방향으로 ‘국가신도’ 정책을 수립해 갔다.

그러므로 일본 근대의 불교를 이해함에서는 우선적으로 메이지 정부가 ‘신불판연령’에 의해 분리해내고자 했던 신도와 불교의 관계성, 곧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신불습합’의 전통이 어떻게 급속도로 와해되는지, 또 불교의 근대화가 이뤄지는 속에서 이 신불습합의 전통이 어떻게 계승되어 가는지를 분석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특히 신불습합은 신도와 불교의 단순한 기계적 결합이 아니라, 그 속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해 온 중생에 대한 구제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의 사건은 불교계가 근세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시대(근대)와 마주함에 있어 대중을 향해 새로운 구제의 원리를 제시해야 한다는 근본적이면서도 숙명적인 요구에 직면하게 했다. 또한 동서양 문명이 충돌하는 극한의 대립 속에서 외부적으로는 ‘서구적 근대’와 마주하면서 근대화의 노선을 수용해 가야만 했다. 이처럼 근대화와 새로운 구제론의 창출이라는 두 과제 앞에서 일본불교 내부에서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근대 불교계 신종교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2. 신불습합 전통의 형성

신불습합이란, 일본의 전통적인 신기신앙(神祇信仰)과 불교가 복잡한 형태로 결합하고, 그 결과 독특한 신앙의 복합체를 구축해 온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신불습합의 초기 모습인 ‘신신이탈(神身離脫)’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8세기 무렵부터다.

7세기 일본은 율령의 제정과 더불어 관료제도 및 징세(徵稅) 시스템 구축, 《일본서기》의 편찬 등을 통해 본격적인 율령국가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일본이 한문으로 기록된 정사(正史)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림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적 국가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글로벌 스탠다드’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천황이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직계자손이며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천하를 지배할 명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계보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의 신에 대한 제사에도 변화가 발생하였다. 일본 전역에서 다양하게 전개됐던 기존의 신들에 대한 제사가 율령국가 체제에서는 천황과 국가의 안녕질서를 위해 봉사하는 국가 중심의 율령제사로 변환되며, 신기관(神祇官)이 모든 국가적 제사를 담당하는 신기제도(神祇制度)가 형성되었다. 신기관에 의한 제사는 태양신의 직계자손으로 절대권력을 가진 천황의 권위를 의례에 의해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 제사를 통해 천황은 일본 각 지역 유력자 조상신들의 최상위에 있으면서 이들에게 관직을 부여하고 정기적으로 폐백(幣帛)을 분급하면서 사격(社格)을 서열화하는 대가로 지방호족들에게 세금을 징수토록 하는 시스템을 의무화했다. 지역의 호족들과 그 조상신들은 천황과 아마테라스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고 그 최고신의 신력에 의지하여 현실 세계의 안녕과 질서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권력체제가 유지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 중 · 후반으로 추정된다. 불교가 처음 전래될 당시 일본에서는 부처님을 ‘번신(蕃神)’, 곧 외국에서 도래한 신으로 인식했다. 일본에 이미 존재하던 많은 신들과 별반 다른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부처님은 ‘불신(佛神)’으로서 사람들에게 역병을 일으키기도 하고 재앙(祟り)을 내리기도 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일본 왕가를 장악해 들어가는 것은 일본이 본격적으로 율령국가 체제에 들어서는 시기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에 의해 적극 수용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신과 부처는 성격이 서로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보편화하며, 신과 부처는 서로 대립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3. 신신이탈(神身離脫)에서 보살(菩薩)로

이러한 신과 부처의 관계는 8세기 이후 신궁사(神宮寺)가 등장하면서 큰 변화가 감지된다. 신궁사는 신사(神社) 경내에 병설하는 사원(寺院)을 말하는데, 이후 점차 사원이 신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궁사의 건립과 더불어 비로소 ‘신신이탈’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와카사히코신(若狹比古神)은 “나는 신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고뇌가 매우 깊다. 불법에 귀의해서 신도를 벗어나고자 하나 그 원력을 이룰 수 없으므로 재앙을 일으킬 따름이다”라고 하는 등, 일본의 신은 육도(六道) 가운데 천상에 머무는 존재일 뿐 윤회전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고통받는 신’의 존재로 묘사된다. 심지어 신들은 인간들이 수행을 통해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해 자신들은 어떤 불도수행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인간에 의지하지 않으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신인관계(神人關係)’ 역전 현상도 일어났다. 이러한 인식이 신궁사 건립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하며, 인간이 신을 위해 독경을 해주는 ‘신전독경(神前讀經)’도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다.

또한 불교의 일본 유입과 유행은 산악신앙에도 큰 변화를 준다. 기존에는 산은 곧 신령이 머무는 곳이라는 점에서 신과 동일시됐었고, 따라서 산이 곧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사람은 특별한 제사를 행할 때 외에는 함부로 산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불교 유입 이후, 주술에 의지하는 밀교계 수행자들이 산의 영력(靈力)에 의지하기 위해 일부러 입산수도하는 산악수행(山岳修行)이 유행했다. 그 결과 주술적 종교자로 유명한 가츠라기산(葛城山)의 엔노오즈누(役小角), 하쿠산(白山)의 다이쵸(泰澄), 하코네야마(箱根山)의 만간(滿願) 등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존의 산악신앙에서 금기한 입산수도를 행하는 명분으로 ‘신신이탈’을 제시했다. 곧 산악수행자들은 고통받는 신들의 구제를 위해 산을 거점으로 수행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밀교계 사도승(私度僧)들이 초창기 신불습합을 이끌었던 핵심 인물들로 간주되고 있다. 당초 조정은 이들 산악수행자들을 주저(呪咀)의 무리로 간주하여 금압(禁壓)을 가했는데, 이들의 치유 능력이 민간의 환영을 받게 되면서 점점 조정에까지 들어가 가지기도(加持祈禱)를 행하는 등 세력을 확대해갔다. 이처럼 밀교화된 산악신앙은 후에 수험도(修驗道)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8세기 후반에 이르면 신불습합의 양상은 다시 변화하게 되었다. 신과 부처의 관계는 과거처럼 단지 고통받던 신들이 부처에게 구원을 바라는 ‘신신이탈’의 양상을 벗어나 신이 적극적으로 부처의 일을 도우면서 중생과 부처 사이에서 가교적 역할을 담당하는 ‘보살’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우사(宇佐) 지방의 제신(祭神) 하치만신(八幡神)이 ‘하치만다이보사츠(八幡大菩薩)’로 변모한 것이나, 후지산(富士山)의 제신 아사마노카미(淺間神)가 ‘센겐다이보사츠(淺間大菩薩)’로 현현하는 양태다. 이 가운데 하치만보살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보살’ 호칭을 받는 신으로, 일본의 신불습합을 이해함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보살의 칭호가 부여됨으로써 ‘신신이탈’을 꿈꾸는 중생에 불과했던 일본의 신들도 불법에 귀의하여 보리심을 발하며, 나아가 보살도를 닦는 보살이 되어 중생들의 숭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4.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의 전개

신들에게 보살의 칭호가 부여되면서 신불습합의 흐름은 10세기경부터 ‘본지수적(本地垂迹)’의 단계로 전환되어 갔다. 본지수적이란, 본체인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임시로 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상이다. 곧 ‘부처-참된 본체-구제를 행하는 존재’를 본지라 하고, ‘신-임시적 현현-구제로 이끄는 존재’를 수적이라 하여, 부처를 우위로 하면서도 부처와 신이 둘이 아닌[一體] 관계임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테라스의 경우 대일여래(大日如來)나 관세음보살을 본지로 하며, 하치만보살은 아미타여래, 가스가대신(春日大神)은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이 본지로 배당되는 등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이르면 대부분 신들의 본지불이 정해진다. 중세 일본국(日本國)의 명칭이 ‘대일여래(大日如來)의 본국(本國)’ 곧, 대일여래의 근본이 되는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처럼, ‘본지수적’ 사상은 중세 신불습합의 가장 전형적인 유형으로 정착되었다.

그렇다면 일본 중세에는 왜 본지수적설이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일까? 그 배경에 있는 것이 바로 말법사상과 그에서 파생된 구제원리의 갈망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 말법사상은 정법과 상법을 세트로 해서 삼시설(三時說)이라 불린다. 일본에서는 자연재해와 더불어 승려들의 일탈과 난동이 극에 달하자 말법이 다가왔음을 실감했고, 마침내 에이쇼(永承) 7년(1052) 말법 제1년을 맞이했다.11)

이렇게 말법이 현실에 실현되자 사람들은 말법 속에서도 구원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러할 때 등장하는 것이 본지수적설이다. 곧 사람들이 선택한 가장 효과적인 구제 방법은 ‘수적’에 의해 현세에 몸을 나타낸 신과 인간의 결연(結緣)이었다. 사람들은 ‘수적’의 신이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낸 것은 말법변토(末法邊土)의 중생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며, 최종적으로는 피안의 정토에 이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세에는 사람들이 신에게 왕생을 빌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고대사회에서 신은 한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구제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씨족 단위 또는 지역 단위로 정례화된 제사를 반복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던 신의 성격이 본지수적설이 전개됨과 더불어 현세와 내세를 통해 개인의 소원을 충족시켜주는 불보살과 신이 동체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신사를 정토로 인식하거나 신이 극락왕생을 실현시키는 등 기존의 신기제도나 전통에 큰 변화가 이뤄졌다.

특히 말법변토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시기상응(時機相應)의 구제자로서 출현한 신의 위상을 드높이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말법변토에 처한 중생의 열악한 상황이 강조되면서 말법변토를 구제하는 신들의 나라라는 ‘신국(神國)’ 개념도 정착되었다. 일본이 신의 나라라는 개념은 고대에도 있어 왔지만, 중세에는 말법변토와 융합된 새로운 신국 개념이 출현한 것이다.

 

5. 가마쿠라신불교의 등장과 신기(神祇)신앙

그런데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教)를 대표하는 호넨(法然)과 신란(親鸞)의 정토계 종파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신불습합 현상에는 다시 변화가 발생한다. 호넨과 신란의 정토계 종파도 근본적으로는 말법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기존의 방식으로는 구제받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새로운 구제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염불에 의한 서방정토의 추구였다. 호넨은 기존의 불교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난행도(難行道: 聖道門 ․ 雜行)를 부정하고, 이행(易行)의 칭명염불(稱名念佛)이라고 하는 정토문을 전수(專修)할 것을 주창했다. 따라서 호넨에게 기존의 본지수적은 난행도의 하나로 간주되므로, 신기불배(神祇不拜)의 자세를 취했다.

이는 정토진종의 교문을 연 신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호넨과 신란에게 신기신앙은 염리(厭離)해야 할 예토(穢土)의 행위라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호넨과 신란의 제자들의 경우 신기신앙과 결합을 구태여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로는 정토계 종파가 강력한 국가의 탄압을 경험했고, 또 점차 대중적 신앙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신도설을 수용하여 신기신앙과 염불신앙을 절충해가려는 노력이 필요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선종(禪宗)의 경우 임제종은 에이사이(榮西) 이래로 태(台) ․ 밀(密) ․ 선(禪) 겸수를 기본으로 하면서 신기신앙을 수용하고 있고, 도겐(道元)의 조동종에서는 호법선신(護法善神)으로서의 신기신앙을 인정했으나 적극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도겐의 제자들은 조동종의 보급을 위해 본지수적설과 타협해갔다.

가마쿠라 시대 가장 두드러지게 신기신앙을 적극 수용하면서 신불습합의 새로운 양태를 전개해 간 것은 니치렌(日蓮)이다. 니치렌은 다른 종파에 대해 ‘염불무간(念佛無間) ․ 선천마(禪天魔) ․ 진언망국(眞言亡國) ․ 율국적(律國賊)’이라고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법을 수호하는 신들의 중심에 아마테라스와 하치만보살을 두었다. 또 히에노카미(日吉神) 이하 모든 신들도 《법화경》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이라 하였고, 정법이 행해지지 않는 때 이들 선신은 일본을 떠나고, 정법이 행해지면 다시 돌아와서 국토를 수호한다고 하는 ‘신천상법문(神天上法門)’을 설했다. 일련종의 대만다라(大曼茶羅)에 아마테라스와 하치만보살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니치렌 이후 제자들은 삼십번신(三十番神) 신앙을 도입해서 일련종의 호법선신 사상을 확립했다. 신의 수가 30인 이유는 1개월을 단위로 교대하며  《법화경》을 수호한다는 신앙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일련종에서도 《법화경》을 수호하는 신 이외의 다른 신들에 대해서는 정토계 종파와 동일하게 ‘신기불배’의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가마쿠라신불교는 대부분 ‘신기불배’와 ‘신국’사상을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이들 신불교들은 당시 본지수적과 신국사상을 기본 입장으로 취하는 전통불교로부터 이단으로 비판받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는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 신불교 대부분은 교조 사후 교단의 발전을 위해, 특히 본격적으로 서민층에 침투해 들어가기 위해 종래의 본지수적의 습합사상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은 결국 신불교가 당시의 체제에 순응해 갔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6. ‘천도(天道)’ 사상 형성과 불교 세계관의 붕괴

일본 중세의 막부 지배체제에 큰 변화를 초래한 오닌의 난(應仁の亂)은 종교계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기존의 체제가 밀교 계통의 불교, 본지수적을 근간으로 불교가 우위에서 신도를 포섭하는 신불습합의 불교가 천황제 왕권과 막부체제를 지탱하면서 중세를 지탱해 왔던 것에 대해, 오닌의 난은 기존 장원제(莊園制) 붕괴와 왕권의 쇠퇴, 공가(公家)의 몰락 등 사회의 기층질서에 큰 변화가 초래되면서 불교 또한 권위를 상실해 갔다.

그렇게 불교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천도(天道)’ 사상이다. 천도란, 《주역》에서 볼 수 있는 자연의 도리로서의 천도에 인격을 부여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었다. 일본에도 일찍부터 이러한 인격적 천의 개념이 유입되었으나, ‘신’이나 ‘불’의 개념과 중복되는 측면이 많아서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닌의 난 이후 왕권이 상대화되고 불교계가 전국 다이묘(大名)와 대립하는 가운데 불교는 모든 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모든 세력을 통합할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천도’ 사상이었다. 당시 유행했던 천도 사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① 천도는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② 천도에 의한 은총은 신불의 가호와 동등하다고 인식되었다.

③ 세속도덕의 준수가 천도에 의한 가호의 요건이 되면서 종교적 규율보다도 세속도덕을 우선하는 것이 특징이다.

④ 외면적 행동보다 내면적 윤리를 중시하는 것으로 ‘심중(心中)의 진실(眞實)’이 천도에 들어맞는지 여부가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이 가운데 ③과 ④의 경우 일본 근세 사회와 종교계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종교적으로는 오닌의 난 이후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천도’ 사상은 근세 개인의 윤리와 도덕적 측면을 보증하는 논리가 되기도 하고, 이러한 윤리의 강조는 새로 일본사회에 유입된 주자학과 결합하여 불교를 비판하는 배불론(排佛論)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한다.

일본사회에 ‘천도’ 사상이 확장됨과 더불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제교일치(諸敎一致) 사상이다. 유 · 불 · 도 삼교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삼교일치(三敎一致)는 중국 선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무사들의 지지를 받았던 오산선림(五山禪林)을 중심으로 삼교일치 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다만 이들은 도교 대신 신도를 넣는 삼교일치의 논리를 펴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는 중세 후기의 이세신도(伊勢神道)와 요시다신도(吉田神道)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며, 근세 이후 일본인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태도 형성과 더불어 일본 기층신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곧 삼교일치 사상은 가나소시(仮名草子)에도 자주 등장하고, 근세 심학(心學)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응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세 유가신도(儒家神道)가 배불론을 전개함에 있어 이에 대해 반론을 펼치는 불교계 지식인들 역시 신불일치(神佛一致) 또는 신유불(神儒佛)일치 사상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한편 요시다신도의 창시자인 요시다 가네토모(吉田兼俱)의 경우 유 ․ 불 ․ 신 삼교 중에서도 신도가 근본(根本)이며 유교가 지엽(枝葉), 불교를 화실(花實)이라고 하는 ‘근본지엽화실설’을 주장한다. 이는 중세에 인도→중국→일본으로 이어지던 불교 중심의 삼국세계관을 뒤집는 것으로, 신도야말로 불교나 유교 사상의 근본이므로 신도를 중심으로 구제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새로운 구제 원리의 제시다. 이 또한 근세 지식인이 신도를 본위로 하는 사상을 형성해 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7. 근세 배불론(排佛論)과 신불습합

전국시대(戰國時代) 불교계에서 일으킨 잇키(一揆: 一向一揆, 法華一揆)를 부담스러워했던 다이묘(大名)들은 불교계를 세속권력에 복종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폭력적 진압과 더불어 ‘아즈치종론(安土宗論)’을 열어 일련종을 굴복시켰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자신의 천승공양(千僧供養)에 응하지 않는 일련종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를 박해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막부를 형성하는 시기, 이미 불교계는 세속권력에 대항할 힘을 잃었고 무기력하게 막번체제(幕藩體制)에 편입되었다. 근세 불교는 에도막부가 불교계의 무력화와 민중 지배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제정한 본말제도(本末制度)와 사단제도(寺檀制度)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장례식과 법요(法要)를 주된 종교 행위로 정착해 갔다. 이런 가운데 근세에는 유학자와 국학자를 중심으로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사상이 성행했으며, 이런 사상이 결국 메이지유신 이후 폐불훼석 사건 발생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배불사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전기(前期) 배불사상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 주로 유학자를 중심으로 불교가 오륜(五倫)과 오상(五常)을 버리고 도를 구하는 이단이라는 관점, 곧 윤리주의적 관점에서 불교를 배척했다. ‘천도’ 사상에서 비롯된 세속윤리를 중시하던 경향이 근세에 이르면 유학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불교계를 공격하는 논리로 탈바꿈한다. 이에 대해 후기 배불사상은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경세론자가 등장해서 정치적, 경제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했다. 곧 불교는 사민(四民: 사농공상) 이외의 유민(流民)이라거나 가람(伽藍)불교가 국비(國費) ․ 민비(民費)의 낭비라는 논리다. 이에 더해 불교의 수미산설(須彌山說)의 허구성을 공격하거나 대승 경전은 부처님이 설한 경전이 아니라는 형태의 대승비불설 등 과학적이고 문헌 비판적인 관점의 배불사상도 후기 배불사상으로 등장했다. 중세에 꽃을 피웠던 불교가 근세에는 유학자들과 국학자 등에 의해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근세에는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신도가 탄생하였다. 세이카나 라잔 등은 주자학적 이기설(理氣說)을 바탕으로 신은 이(理)이며 심령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이당심지신도(理當心地神道)’를 폈다. 특히 이들은 유학적 왕도와 신도를 동일한 관계로 이해하면서 유학적 사유에 근거한 왕권비호의 논리를 적극 해석해 갔다.

그런데 이러한 신도설은 대부분이 중세를 통해 형성된 불교의 색깔을 벗겨내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곧 중세의 신불습합에 의해 형성된 신기(神祇)에 관한 언설에 대해 비판적 시점으로 명쾌하게 정리하고 새롭게 해설하려는 것이 근세 신도 형성의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은 중세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유학적 지식을 동원한 신도를 막부체제의 ‘치도(治道)’ 원리로 만들고자 했다.

초기 유가신도의 탄생은 곧 중세 신불습합을 배격하는 배불론의 한 양태로 출발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근세 배불사상은 왕권의 쇠퇴가 불법의 전래와 신불습합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으로, 왕법불법상의(王法佛法相依)에 의해 유지되어온 중세 불교의 근본이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배불론은 반윤리성과 반왕권성, 그리고 생사관이 주된 논점으로 제시되었다.

한편 근세에는 주자학의 일본적 이식에 성공했다고 평가되면서도 스이카신도(垂加神道)라는 독자적인 신도를 개창했다고 하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가 등장했디. 그는 주자학적 이(理)와 신도의 신(神)을 동일한 성격으로 묶으면서도 천리(天理)와 인리(人理)가 합일하는 천인합일을 신심합일(神心合一)로 대응시키는 등 ‘윤리주의적’인 유가신도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안사이는 신도와 유학을 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부정하는 ‘신유겸학(神儒兼學)’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사이의 신도설이 형성되는 그 자체가 사실 이미 중세를 통해 형성된 습합적 신도인 이세신도와 료부신도(兩部神道)를 근간으로 형성한다는 점에서 중세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안사이의 신도설은 근세의 신도가와 국학자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안사이에 의해 주창된 신도의 윤리주의적 이해는 뒤에 계승되고 확장되어 신도를 종교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윤리도덕의 규범으로 이해하려는 인식 경향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근세 이후 신도는 유교와 습합하는 형태로 나아가지만, 기본적으로는 중세를 통해 형성된 신불습합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독자적이고 ‘고유’한 신도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고유’하다고 생각했던 형태 대부분이 사실 중세 신불습합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근세와 근대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원천을 전통적인 고대 신도의 신 관념에서 찾고자 했는데, 이는 사실 중세 신불습합을 통해 불교적 심(心) 관념이 신(神)에 내재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근세의 신심일치(神心一致)가 성립할 수 없고, 따라서 근대 신도 중심의 윤리관이나 도덕론도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8. 근대 불교계 신종교의 탄생

근세를 통해 일부 유학자들이나 국학자, 또 위정자에 의해 배불적 언설이나 시책이 이뤄졌다고는 해도 그것이 근세 전체 신앙 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통제에 의한 불교의 본말사제도나 사단제도(또는 寺請制度)는 사원의 자주적인 조직화를 제도적으로 보증하는 것 같았지만, 본산의 자유로운 포교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등 불교계 전반의 유약화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근세를 통해 막부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담당해 온 유교의 경우 사상통제와 종교 통제 면에서 결코 미더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신도와 국학자들에 의해서는 복고신도(復古神道)와 미토가쿠(水戶學)가 성행하면서 존황양이(尊皇攘夷) 풍토도 힘을 얻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반적인 민중의 신앙 세계에서는 산악종교(山岳宗敎)를 중심으로 한 민속신앙이나 일련종 계통의 재가강(在家講), 석문심학(石門心學)과 같은 유교계 대중운동 등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이래로 이어온 신도와 불교의 밀접한 관계는 민간신앙의 세계에서 계속 유지되었고, 이는 ‘민속종교(民俗宗敎)’ 또는 ‘습합종교(習合宗敎)’의 형태로 근세가 끝날 때까지 신앙체계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신불습합 전통의 연속성이 근대 일본사회 기저층의 신앙 세계를 형성해왔던 것이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이라는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인위적인 조치에 의해 불교와 신도를 강제로 분리시키고자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에 의해 비로소 근대에는 자칭 민족종교로서 ‘고유’한 신도인 교파신도(敎派神道)가 창출되었다. 하지만 근세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런 ‘고유’한 ‘고대 본래의 신도[惟神道]’라는 것은 사실 고대에서 중세, 근세로 이어지는 신불습합의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재해석되어 온 세계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의 ‘고유’임을 알 수 있다.

근세 도쿠가와막부에 의한 제도적 통제의 방식이 근대에 이르러 ‘신불판연령’에 의한 신불분리, 그리고 각 지역에서 민간 주도로 일어난 폐불훼석과 메이지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시행된 제도적 억압으로 달라졌을 뿐, 큰 틀에서 억압적 상황 자체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근대적 제도의 변화는 에도막부라고 하는 구체제에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불교 세력을 일단 무대에서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권에 어울리는 불교계 내부 구성원의 변화를 요구하는 한 과정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신불분리에 의해 신도를 국교로 삼으면서까지 근대 일본이 지향했던 국가의 형태는 서구적 세속국가가 아니라 천황을 ‘살아 있는 신(現人神)’으로 하여 제정일치를 표방하는 ‘초세속국가(超世俗國家)’였으며, ‘의사적종교국가(疑似的宗敎國家)’였다. 그리고 근대 불교계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곧 폐불훼석에 의해 불교가 어떤 탄압을 받았는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당시 상황이 근세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빨리 알아차리고 불교계가 이 새로운 무대(천황 중심의 초세속국가 체제)에서 어떻게 생존해 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이 변화는 첫째 기존의 국가에 의해 보장되던 자신들의 영역이 상실되는 세속화가 진행되는 것을 의미했고, 둘째 불교계가 기존의 신불습합이라는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의와 신앙체계를 새롭게 구성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셋째 천황제 이데올로기라는 새로 구축된 신화 체계에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기성 불교계는 신불습합의 과정을 통해 형성해 온 일본불교의 정체성을 버리고 역사주의적 입장에 서서 인도불교의 역사와 경전을 선택하여 그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비신화화(非神話化)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불교는 약 천여 년에 걸쳐 형성해 온 신불습합의 종교적 경험을 한순간에 털어내 버리고 구제이념조차 빈약한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신불분리와 폐불훼석을 경험한 근대 불교계는 메이지 국가의 압력에 밀려 전통적 의미의 신화(신불습합)가 해체당하고 만다. 에도시대까지 이어오던 전통적인 종학(宗學)에도 변화가 발생하는데, 주로 해외에 유학을 다녀온 학승들을 중심으로 근대 불교학이 전개되어 갔다. 불교계몽운동이나 재가불교운동이 시작되는 것도 이러한 근대의 특징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불교 근대화의 방향성은 대체로 기요자와 만시의 《정신주의(精神主義)》나 지카즈미 죠칸(近角常観)의 《참회록(懺悔錄)》처럼 인간 정신의 내면에 침잠하는 것에 의해 근대적 신앙을 수립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구제에 집중해 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의해 근대 종교의 자격을 획득하려고 하는 신불교운동, 이에 대해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의 국주회(國柱會)처럼 불교와 국가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관점, 호법운동(護法運動)에서 호국운동(護國運動)으로 발전해가거나 불교가 근대 내셔널리즘의 구성요소가 되기도 했다. 당시 불교계의 주된 흐름은 서구의 기독교에 대항하여 불교를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지에 역량이 집중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한편 메이지 정부의 신불분리령은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수험도를 비롯한 신불습합 전통을 이어오던 일련종 계통의 종교 집단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근대사회를 통해 전통적인 신앙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법화종 계통과 일련종의 경우 삼십번신으로 칭하면서 황조태신(皇祖太神)을 비롯한 신기(神祇)를 배사(配祠)하고 있었고, 만다라본존에 아마테라스와 하치만보살 등의 신호(神號)를 써넣고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신불습합이 일체 금기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법화 또는 일련계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 근대를 통해 신종교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거사불교 또는 재가불교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진언종이나 천태종, 선종 계통에서도 신종교가 탄생했다.

그런데 이 불교계 신종교들은 대부분 기존의 불교계가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이후 국가에 의해 금기시된 현세이익적 치병 활동이나 신불습합적 요소들을 적극 수용해간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현세이익적 치병 활동을 적극 수용하면서 형성된 교단은 본문불립종(本門佛立宗), 영우회(靈友會)계 교단, 창가학회(創價學會), 법음사(法音寺)계 교단 등이 있으며, 신불혼효적(神佛混淆的) 성격을 적극 수용하면서 형성된 교단으로는 변천종(辯天宗), 해탈회(解脫會) 등이 있다. 이들은 중세 이후 근세를 통해 민중 저변에서 형성되어온 종교적 요소를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신불분리에 의해 신앙처와 구원처를 상실한 민중의 종교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일본 내 근대 불교계 신종교의 가장 유력한 원천이 되는 것으로 일련종 계통의 신종교가 제시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그 이유로 유일 절대적 배타적인 구제수단을 설하는 것에 의한 단순명쾌성과 일련종이 지닌 현세 지향적 성격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곧 불교의 최종 목적이 열반이나 해탈이 아니라 현세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통해 운명을 개선하는 것이 구제와 직접 연결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창가학회가 일련종 계통 중에서도 신앙 활동에서 신도의 치병(治病)을 비롯하여 운명의 개선[宿命轉換]에 집중해가는 등 기존의 일련종 교학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혁신해 간 대표적인 교단으로 주목받아왔다. 이처럼 근세 이후 지속되어 온 현세이익적 치병 행위가 근대에는 신종교라는 교단의 틀을 가진 집단을 통해 체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이후 국가적 차원의 신도분리 정책으로인해, 아직 교의나 조직이 정비되지 않았던 수험도 계통의 습합종교들의 경우도 자신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주술에 의한 치병(治病), 현세이익적 세속윤리와 현세구제의 이념 등을 유지하면서 점차 근대적 종교의 모습을 한 단체, 곧 교주와 교단, 교의와 교규, 의례 등을 정비한 신종교로 변모해갔다.

한편 동일한 일련종 계통의 신종교라고는 해도 다나카 지가쿠가 설립한 국주회의 경우 개인의 신앙과 구제보다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더 중시하고, 일련종 계통의 다른 교단과 다르게 현세이익적 치병행위를 금지하는 등 프로테스탄트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특징을 가진 신종교 교단도 나타난다는 점에서 반드시 모든 불교계 신종교가 신불습합적 요소를 수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근대화 또는 개혁적 성향도 불교계 신종교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수용되어 갔다.

 

9. 나오는 말

2007년 일본종교학회에서는 ‘신불습합과 모더니티’를 주제로 특집호를 발행했다. 여기서 시모다 마사히로(下田正弘)는 “지금 필요한 것은 불교의 다양한 은유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하는 것에 있다. 그 소박하고 강력한 길, 그것은 새로운 ‘신불습합’의 창출일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는 일본사회에서 신불습합적 요소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데, 기존 불교계와 불교학계가 이를 적극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점에 대한 비판이 담긴 것으로 읽힌다. 이는 대중의 신앙적 갈망에 불교계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사회에는 저변에서는 여전히 신불습합적 신앙의 실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민속학이나 민족학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한편으로 불교의 근행(勤行)과 신들에 대한 제사가 공존하는 사원이 현존하고 있고, 여전히 신사 경내에 궁사(宮寺)가 설치되어 있어 제신(祭神)의 영력에 의존하는 승려나 행자(行者)들의 제령기도(除靈祈禱)가 행해지는 전통을 가진 사원이나 신사도 있다. 일본인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한 집안에 불단(佛壇)과 신단[神柵]이 공존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메이지 정부의 신불분리와 그로 인해 파생된 폐불훼석의 사건이 불교와 신도를 인위적으로 분리시켰다고는 할지라도, 민중의 실제 생활 속 신앙의 풍토에서 그 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내에서 최근 불교계 신종교의 탄생에 관한 연구가 없어 그 구체적인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기존 불교계와 불교계 신종교가 민중의 신앙과 구제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신불습합적 종교가 탄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일본사회에서 신불습합의 전통은 일본인들의 현실적 신앙의 한 유형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권동우  susanowo0428@gmail.com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원불교대학원대학교(석사), 교토불교대학(박사) 졸업. 주요 논문으로 〈教派神道の朝鮮布教からみる近代神道の様相〉 〈신도(神道)의 조선 유입에 관한 재검토〉 〈교파신도의 조선포교로 보는 근대신도의 이중성〉 등이 있고, 저서로 《スサノヲの変貌ー古代から中世へ》 등과 공저로 《日本書紀1300年史を問う》가 있다. 현재 영산선학대학교 원불교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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