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흔히 불교를 수행의 종교라고 한다. 이는 유신종교가 신앙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것과 대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어떤 전통의 수행을 하고 있을까.

고려~조선의 불교 수행전통이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수행 방식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중국 · 일본과 다른 한국불교만의 특징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조선의 불교 수행전통에 대해서는 문헌을 통해 밝혀내야 할 문제이지만, 전통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현재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수행 내용을 분석하고 각 내용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본다면 수행전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불교 수행 내용은 무엇인가? 선, 간경(看經), 염불, 지계(持戒), 위빠사나 등이다. 이 가운데 한국불교사의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수행은 어떤 것일까?

이 글에서는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흐름을 불교사적 맥락에서 살펴보고, 그러한 맥락이 현재 한국불교 수행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행전통의 기준 시점이 필요하다. 물론 현재의 수행 내용을 검토한 후 그 기준을 정해야겠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오늘날 수행의 모체가 되는 기준 시점을 조선 후기로 정하고자 한다.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중세와 근현대를 잇는 가교(조선 후기)가 필요하고, 그 가교는 수행전통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연결고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논의는 가교로 다가가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시작할 것이다.


2. 고려~조선 중기, 불교 수행론의 전개

1) 고려 전기, 균여와 의천의 수행론

⑴ 균여의 화엄절대주의 수행론

7세기 중반 의상이 중국 유학에서 배워온 화엄사상은 훗날 화엄종으로 발전한다. 화엄 10찰로 대표되는 사찰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면서 화엄종은 신라 불교를 주도해갔다. 이후 8세기에 법상 유식사상이 본격 전래되고 9세기에는 남종선이 정착하는 가운데 화엄종 세력이 다소 약화되기는 했으나, 신라 말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한 북악파와 지리산 화엄사에 근거지를 둔 남악파가 대립할 정도로 그 위세는 그다지 꺾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헌이 부족하여 북악파와 남악파의 대립 원인과 사상적 차이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북악파가 의상 화엄사상을 계승했다면, 남악파는 중국 화엄, 즉 법장 화엄사상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행히 고려 초에 활약한 북악파 출신의 균여가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어서 그의 사상을 통해 당시 신라 화엄종 북악파의 수행론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균여(923~973)는 중국 화엄교학에서 체계를 세운 별교일승과 동교일승의 개념을 재해석하며 화엄절대주의를 주장하였다. 중국 화엄교학에서는 오교(五敎: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돈교-원교) 중 원교의 《화엄경》이 삼승과 구별되는 일승의 가르침이지만, 하사교(下四敎: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돈교)와 연결되는 점을 말하는 동교일승과 하사교와는 구별되는 점을 말하는 별교일승의 두 측면에서 설명함으로써, 일승의 원교에 동교와 별교를 모두 포섭하여 원교의 수승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균여는 중국 화엄교학과 달리 원교만이 별교일승이고 하사교는 동교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별교인 원교의 일승법만이 여래의 자내증(自內證)을 설한 것이고 동교인 하사교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한 방편적 가르침이라고 하여 원교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균여의 화엄절대주의 사상은 수행론에서도 믿음[信]-이해[解]-수행[行-증득[證]의 단계적 방법이 아니라 믿음이 곧 이해 · 수행 · 증득이라는 동시(同時)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는 별교는 믿음에 (이해 · 수행 · 증득의) 모든 지위가 포섭되어 있지만 동교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또한 원인[因]이 완전하면 결과[果]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단계적 수행의 길을 제시하기보다 돈오적(頓悟的) 인과(因果)의 길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의천의 교관겸수론

균여의 화엄절대주의 사상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송과 요의 저술은 망라하면서도 균여의 17부 60권이나 되는 저서는 전혀 수록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의천은 중국 화엄사상에 비추어볼 때 균여의 사상이 정통 화엄교학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국 화엄사상의 견해와 달랐던 균여의 화엄절대주의 사상은 고려 초기 법상종과 구산선문의 성장에 대응하여 화엄사상의 우월성을 드러내려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서 통합 지향적인 교선회통의 견해로부터 비판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의천은 화엄종 출신으로서 고려 사회에 천태종을 정착시키고자 했던 승려였다. 당시 고려의 불교계는 교종으로는 화엄종과 법상종이 대표적이고, 선종으로는 남종선의 구산선문이 대표적이었다. 이 중에 구산선문은 경전을 등한시하고 조사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남종선의 교외별전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의천은 이러한 구산선문의 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교외별전의 남종선 전통을 지양하고 교선회통의 방향으로 선종 세력을 재편하기 위해 천태종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구산선문의 수행전통을 천태 관법으로 바꾸도록 유도함으로써 ‘교에 의거하여 선을 수행’하는 전통을 확립하고자 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고려 천태종이 선종의 영역 안에서 개창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의천의 궁극적 목적은, 교종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선종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재편될 때 고려불교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화엄과 천태의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화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 같다. 교종에서는 성상융회의 사상을 통해 법상종을 포섭하고 선종에서는 천태종의 관법으로 구산선문의 남종선을 포섭한 이후 교관겸수(敎觀兼修), 즉 화엄교학의 교를 기본으로 하고 천태삼관의 관을 겸하여 수행하는 교관겸수로써 교와 선의 융합을 이루고자 했을 것이다.
 
2) 고려 중기, 지눌의 정혜쌍수론

의천의 교관겸수론이 교종의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선회통을 이루려는 의도였다면,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정혜쌍수론은 선종의 남종선 중심으로 교종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정혜쌍수론은 〈보조비문〉에 제시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徑截門)의 삼문으로 설명되는데, 《원돈성불론》 《간화결의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등의 저술을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지눌의 수행론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성적등지문을 이해하는 데 있다. 성적등지문은 성(惺)과 적(寂)을 똑같이 지니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성이란 성성(惺惺)으로서 혜(慧)를 의미하고, 적이란 적적(寂寂)으로서 정(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적등지는 정혜쌍수와 같은 의미가 된다. 정은 자심(自心)의 체(體)이고 혜는 자심의 용(用)이다. 체는 용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용도 체 없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 둘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정과 혜를 평등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성적등지는 정혜쌍수와 같은 의미이고,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기본원칙이다. 이는 김군수(金君綏)의 〈보조비문〉에서 “뜻을 반드시 《육조단경》에 두고 이통현의 《화엄신론》과 《대혜어록》을 펼쳐 항상 두 날개로 삼아 삼문을 열었으니,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이었다”라고 한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말은 성적등지문을 설하고 있는 《육조단경》에 기반하여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로 볼 때 성적등지문은 수선의 원칙으로서 제시되었고, 그 원칙의 내용이 원돈신해문과 경절문이었다고 생각된다.

3) 고려 말기 선사의 간화선 절대주의 수행론

지눌의 수행론은 정혜쌍수의 성적등지문에 기반하여 교학을 포섭하는 원돈신해문과 간화선 수행의 경절문으로 제시되었고, 이는 하근기와 상근기 모두에게 깨달음의 길을 제시한 수행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면 원돈신해문은 폐기되고 간화경절문만을 절대시하는 풍조로 변화되었다. 고려 말을 대표하는 선사는 태고보우(1301~1382)와 나옹혜근(1320~1376)이다. 이들은 중국 임제종의 간화선풍을 전수하여 한국 임제종의 조사가 되었고, 그들의 수행론은 간화선 절대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보우는 부처님과 조사들이 설하신 문자 언어는 중 · 하근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설한 것이므로 그 진정한 뜻은 문자에 있지 않다고 하였다. 수행자는 방편에 얽매이지 말고 심지를 참구하여 대사(大事)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우에게, 교학은 선보다 못한 것으로서 버려야 할 것이었다. 보우의 사교입선(捨敎入禪)적인 견해는 의천과 지눌이 추구했던 ‘교에 의거하여 선을 수행’하는 태도와는 다른 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우의 관점은 정토관에서도 적용된다. 보우는 정토가 서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오직 마음이 정토이고 자성이 아미타불이라고 하였다. 이는 서방정토를 부정하고 유심정토를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미타불의 법신이 중생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대로가 정토이므로 서방정토는 그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조차도 선으로 귀속시켜 염불선을 주장하였다. 보우에게 염불선은 염불 그 자체가 화두가 되는 간화선이었던 셈이다.

고려 말 또 한 명의 대표적 선사인 혜근 역시 근기에 상관없이 간화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간화선이 수행하는 승려에게만 필요한 수행이 아니라 재가와 출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필요한 수행이라고 권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고 조주의 무(無) 자 화두를 참구한다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이 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각성선화(示覺成禪和)〉 〈시육상국인길(示睦相國仁吉)〉 〈답이상국제현(答李相國齊賢)〉 등의 다른 글에서도 보인다. 따라서 혜근은 후학들에게 간화선만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견고히 가지도록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혜근의 수행관 역시 보우와 마찬가지로 의천이나 지눌의 견해와 달리 간화선 절대주의적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조선 중기 선사의 수행관

조선시대는 유학의 나라라고 할 만큼 모든 국가 운영 체제가 유교 중심적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다 보니 고려시대의 불교적 제도와 가치는 점차 배제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만이 남았고, 그나마도 사실상 선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가 명종 대 이후 종파적 개념은 유명무실해졌다. 조선 전기에는 교학승으로서 이름을 전하는 이가 거의 없고 선사로서 저술을 남기고 있는 몇몇 고승들을 통해 그 수행관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함허기화(1376~1433), 허응보우(1505∼1565), 청허휴정(1520~1604)의 수행관을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함허기화는 나옹혜근의 임제법통을 이은 선사이지만 그가 남긴 저술들을 볼 때, 교학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금강반야바라밀경윤관》에서,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가르치시어 모든 중생이 근기에 따라 원만하게 이해하도록 하셨는데 구차하게 근기에 따라 설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의 근기는 예리하고 둔하여 같지 않다. 비록 성인의 신묘한 교화라고 하더라도 어찌 한꺼번에 문득 이익 되게 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넓은 자비를 아끼지 말고 두세 번 이끈 후에야 빠짐없이 근기에 따라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기화는 질문한 자에게 꽃이 핀 것만을 보고 꽃에 따라 피는 시기가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며 비판하였다. 그리고 상근기는 말로 설명해주지 않아도 깨닫고, 중근기는 말로 설명해주어야 하며, 하근기는 여러 번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근기에 따라 그에 맞는 가르침으로 빠짐없이 모두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근기는 선 수행이 적합한 자이고, 중 · 하근기는 언어의 교학이 적합한 자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중 · 하근기의 수행법으로서 교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허응보우는 명종 6년(1551)에 문정왕후(1501~1565)의 불교 중흥책에 힘입어 재건된 선교양종에서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를 역임했다. 그는 선과 교가 물과 얼음의 관계처럼 일체라고 보았다. 선교일치론을 주장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허응보우는 서방정토 역시 인정하였다. 어리석은 중생은 자력으로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우므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여산혜원의 백련결사와 같이 염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염불하면 임종 시에 황천길을 면하고 아미타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극락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허응보우는 서방정토를 믿고 염불할 것을 권하고 있다.

청허휴정은 허응보우에 의해 재건된 제1회 승과의 선과에 급제했으며, 선종전법사(禪宗傳法師) 및 판선교종사(判禪敎宗事)를 역임했다. 그는 《선가귀감》의 제5구에서, 상근기의 경우에는 교학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지만, 중 · 하근기의 경우에는 교학을 자세히 판단한 후에 그 교학의 의미를 버리고 일념을 직지하여 견성성불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 · 하근기에게는 교학이 필요하지만 여실한 언교로써 자세히 판단한 후에는 교의를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상근기는 말 없음에서 말 없음으로 나아가고 중 · 하근기는 말 있음에서 말 없음으로 나아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중 · 하근기의 경우에는 교학을 공부한 후에 선으로 나아가라고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에 기반하여 《심법요초》에서는 참선문과 염불문의 수행관을 제시하였다. 참선문에서는 경절문과 원돈문을 설명하였는데, 경절문은 활구로서 심로(心路)와 어로(語路)가 끊어진 경계이고, 원돈문은 사구로서 심로(心路)와 이로(理路)가 있는 경계라고 하면서,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염불문에서는 입으로만 하는 염불은 아무런 이익이 없으므로 마음과 입이 서로 상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을 유심정토적으로 해석한 수행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선 후기, 삼문수학과 율맥 전통

1) 경절문 중심의 삼문수학 성립

청허휴정이 제시한 삼문수학은 그의 말년제자 편양언기(1581~ 1644)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된다. 언기는 스승의 삼문을 계승하여 더 명확하게 그 개념들을 정리하고, 스승의 저술을 간행하여 유포함으로써 휴정의 사상이 조선 후기 불교계를 주도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인물이다.

언기는 삼문을 설명하면서, 교문은 부처님이 중 · 하근기를 위해 설한 원돈문이고, 선문은 상근기를 위한 수행문으로서 격외선의 경절문이며, 염불문은 부처님이 말세 중생들을 위해 시설한 것으로 아미타불을 칭명하여 정토에 태어나고 관세음보살을 칭명하여 시험합격, 무병장수, 극락왕생의 기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근기에는 차이가 있지만 법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여, 선 · 교 · 염불이 서로 다르지만 같은 땅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근본적으로는 염불과 참선이 같은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언기의 삼문수학 이론에서는 원돈문과 염불문이 경절문에 예속되어 있었다. 염불문이 독자적으로 상 · 하근기에 걸쳐 수행문으로서 설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유심정토적 선정일치(禪淨一致)가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돈문과 염불문이 그 자체적으로 생명력을 가지지 않는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경절문에 예속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2) 선 · 교 · 염불 병립의 삼문수학 전개

17세기 중반 이후 원돈문과 염불문은 서서히 자생력을 가지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유교국가가 추구했던 학문 지상주의적 태도와 맞물려 불교도 승려교육을 체계적으로 해나가면서 서서히 변화하였다. 또한 선종 내부에서도 청허계와 부휴계로 나뉘고, 또 청허계에서는 4대 문파로 나뉘어 계파 혹은 문파 간에 경쟁적 구도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 경쟁 관계는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새로운 발전의 추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문의 관계는 18세기 화엄학의 유행과 서방정토 신앙의 확대로 인해 점차 변화되었다. 17세기 말 《화엄경소초》의 간행은 전국 강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염불결사와 염불가사의 유행으로 염불 · 수행도 더욱 중시되었다. 원돈문은 선과 교의 접점이라기보다 교학으로 이해되었고, 염불문은 유심정토와 서방정토가 합일되어 염불 그 자체로서 긍정되었다. 선사들은 교학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강사를 겸하였고, 염불을 일생의 수행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선사들에게서 선교일치의 관점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휴정이 선 우위의 관점에서 교학을 수용했다면, 조선 후기 선사들은 선교일치의 관점이 보편화되었다. 이는 청허계와 부휴계를 가릴 것 없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부휴계 백곡처능(1617~1680)에게서도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처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전한 선과 말로 전한 교로 나누고, 다시 선에 돈점이 있고 교에 성상이 있다고 하였다. 또 선은 상근기를 위해 전한 것이고 교는 하근기를 위해 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교 이치의 근원은 같다고 하여 선교일치의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처능의 관점은 승려교육의 이력 과목에서도 드러난다. 《선원제전집도서》와 《법집별행록절요사기》는 선교일치를 주장한 대표적인 논서이다. 게다가 사교과와 대교과에서도 《원각경》 《금강경》 《능엄경》 《화엄경》이 그 교과목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선교일치의 사상적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선사들은 염불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시대에 유심정토를 주장했던 선사들도 염불 그 자체는 배척하지 않았다. 다만, 서방정토의 실재를 인정하기보다 유심정토로써 염불선의 수행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삼문 가운데 염불문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선의 경절문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휴정은 염불문을 제시하면서 서방정토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하근기를 위한 수행문으로서 서방정토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후 조선후기 선사들은 대체로 유심정토와 서방정토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합일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여 삼문의 평등성을 주장하며 간행된 책이 《삼문직지》라고 할 수 있다. 1769년에 간행된 진허팔관(振虛捌關, 생몰년 미상)의 《삼문직지》는 경절문 · 원돈문 · 염불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서문에서 ‘삼문이 깨달음의 길에 들어가는 관문으로서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삼문을 동등한 수행문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휴정이나 언기에게 보이는 수직적 관계와는 다른 수행체계라고 할 수 있다.

3) 19세기 삼문수학과 율맥 중시의 전통 성립

18세기를 거치면서 삼문은 동등한 수행의 문으로 인정되어 전국의 큰 사찰에는 선원과 강원이 설치되어 많은 승려가 수행하였다. 염불문의 경우는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승려와 재가자들이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하는 수행으로 널리 인식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건봉사 만일회를 기점으로 전국적으로 염불회가 조직되었고 사찰 내에 염불원(혹은 염불당)이 설치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로써 염불문 역시 선원이나 강원처럼 독자적인 영역으로 수행문의 지위를 다져갔다.

한편 19세기 불교계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율맥이 새롭게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1863년(철종 14)에 필사된 《산사약초》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로서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 지계, 조불조탑을 제시하고 있다. 조불조탑은 불상이나 탑을 세우는 불사이지만 수행문으로서 삼문과 지계(持戒)가 제시되어 있다.

《산사약초》에서는 경절문은 선이고, 원돈문은 교이며, 염불문은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수행문임을 말하고 있다. 경절문에서는 진귀조사를 언급함으로써 19세기 전반 백파긍선(1767~1852)의 삼종선(조사선, 여래선, 의리선)과 초의의순(1786∼1866)의 사종선(조사선, 여래선, 격외선, 의리선) 논쟁에서 보여준 조사선과 격외선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고, 원돈문에서는 규봉종밀(780~841)의 5교론(인천교-소승교-대승법상교-대승파상교-일승현성교)을을 제시하여 화엄교학의 수행문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염불문에서는 서방정토를 말하면서도 자심미타를 언급함으로써 서방정토와 유심정토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산사약초》에서 정의하는 삼문은 18세기와 다르다고 보기 어렵지만 경절문에서는 조사선이, 원돈문에서는 화엄교학이 더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18세기 삼문수학 전통이 19세기까지 이어지고 또 근대까지 이어져서 한국불교 수행전통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 이전의 문헌에 보이지 않던 지계에 대한 부분이 《산사약초》에 보이는 점은 19세기 율맥의 복원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승려의 당연한 의무이고 수계의식은 조선시대에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율맥의 형성은 19세기부터 확인된다. 이에 대해 묵담성우(1896~1981)는 〈비구계발족원인〉에서, 고려 말에 끊어졌던 율맥이 19세기 대은낭오(1780~1841)가 지리산 칠불암에서 7일 밤낮을 기도한 끝에 한 줄기 서광이 대은의 머리에 비추어오는 서상수계(瑞祥受戒)를 받은 이후 낭오→금담보명(1765~1848)→초의의순(1786~1866)→범해각안(1820~1896)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문헌에 따라 범해각안→제산(생몰년 미상)→호은문성(1850~1918)→금해관영(1856~1926)→만암종헌(1876~1946)→묵담성우의 율맥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범해각안→선곡(생몰년 미상)→용성진종(1864~1940)의 율맥을 말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수계의식의 전통 계승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19세기에 계사에 의한 수계의식이 중요시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계율 중시의 분위기가 반영되어 《산사약초》에서는 수행문으로서 지계가 별도의 항목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4. 근현대 선 · 교 · 율 · 염불 수행전통의 성립

근대 서구문명의 유입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과정에서 한국불교 전통은 크게 훼손되었다. 해방 이후 전체 승려의 8할이 대처승이었다고 할 만큼 결혼하지 않던 승가 전통은 무너졌고 승려의 식육도 일상화되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성립된 선원, 강원, 염불원의 수행전통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국의 선원과 강원에는 승려들이 공부하고 있었고 염불원(혹은 염불당)에는 승려와 재가자들의 염불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한국적 수행전통을 지키던 청정 비구승들은 일제 강점기 대처승의 확산에 따른 위기감을 느끼고 계율 정신의 복원을 추진하고, 마침내 총림의 건설로 이어진다.

특히 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현대에 이르러 율원이 성립되었다. 오늘날 총림이라 하면 선원, 강원, 율원이 있는 큰 사찰을 의미하는데, 현대 최초의 총림은 1947년에 성립된 해인사의 가야총림과 백양사의 고불총림이다. 해인사와 백양사가 율맥을 이어온 사찰이었기 때문에 총림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율맥을 이은 선곡과 용성진종은 해인사에 주석했으며, 만암종헌과 묵담성우는 백양사에 주석했다. 엄격한 계율에 입각한 수행처로서 선원과 강원을 운영하는 곳이 바로 총림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대처승을 부정하며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조계종 건립으로 이어진다. 조계종 건립의 정신은 총림 건설의 정신과 이어지며 그것은 바로 계율을 기본으로 한 선 · 교 · 염불의 삼문수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수행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하다.

18세기에 정착한 삼문수학 위에 19세기 율맥의 복원으로 이어진 일련의 수행전통은 현대 한국불교의 특성을 형성하게 되고, 이는 전통 종단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에서 그 맥을 이었다. 즉 일상 의식 속에 염불이 정착되고, 출가자로서 강원은 당연한 공부 과정으로 인식되었으며, 안거 기간을 기준으로 선원이 운영되었다. 또한 율원에서는 계율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어졌다. 만약 고려시대라면 하나의 사찰 안에 선 · 교 · 염불 · 율을 동시에 수학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조선 후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질곡의 근대를 거친 이후 현대에 이르러 한국적 불교 수행전통으로 정착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수행전통의 정착에 큰 영향을 미친 대종사로서 조계종 제3, 4, 6대 종정을 지낸 고암(1899~1988)과 제7대 종정을 지낸 성철(1912~1993)의 수행 가르침이 주목된다.

고암 스님은 출가 후 해인사 강원에서 사집, 사교, 대교를 수료한 바 있다. 그 후 선사이자 율사로서 삶을 살았다. 그의 삶 자체가 경론을 공부한 이후 수선하기도 하였지만, 언어문자의 경론을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염불에 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그는 평소 법문에서 참선을 통해 삼매에 들어가든, 염불을 통해 삼매에 들어가든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참선만을 주장하거나 염불만을 주장하지 않았다. 염불도 그 자체로 화두가 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는 대담하는 가운데 일상의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기도할 때는 삼귀의를 하고, 십중대계를 외우고, 천수경을 한 편 염송하고, 예불을 하여야 한다. …… 금강경 사구게를 스물한 번 독송하고, 교주 석가모니불을 108번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1천 번 염불한 뒤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 사홍서원을 하고 참선을 하라.

위의 수행법은 불교 신도에게 권한 것이지만 모든 수행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며 고암당의 평소 수행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계와 염불과 간경과 참선이 하나의 수행 속에서 모두 실행된다. 조선 후기 삼문수학이 하나의 과정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십중대계를 외움으로써 계정혜의 삼학 정신을 수행의 시작으로 삼았다. 이는 조선 후기 이래 계승되어 온 삼문수학과 계율수지의 전통이 결합된 선 · 교 · 염불 · 율의 동수론(同修論)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은 1947년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였다. 봉암사 결사를 하게 된 배경에는 왜색불교를 배격하고 한국불교 수행전통을 복원하려는 불교계의 염원이 있었다. 그리고 성철 스님이 생각하는 왜색불교의 배격은 계율 정신을 회복하여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청정승가 건설이었고, 수행전통 복원은 임제종 간화선 수행풍토의 계승이었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려 말 태고와 나옹의 간화선 절대주의 수행은 교학이나 염불 역시 간화선으로 흡수되는 수행법이다. 그러나 성철 스님이 간화선 중심의 수행을 주장하였지만 태고와 나옹의 수행법과 일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철 스님은 교학을 수용하되 교학에 매몰되어 참선 수행을 등한시하는 승려의 자세를 비판하였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철 스님은 깨달음은 교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학의 이론적 기반 위에 참선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봉암사 결사의 〈공주규약(共住規約)〉에서 하루에 한 번 능엄대주(楞嚴大呪)를 독송(讀誦)하도록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대계를 강송하도록 하였다. 능엄대주의 독송은 염불의 변형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교학과 염불을 수용한 성철 스님은 간화선만을 절대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면 조선 후기 삼문수학과 계율수지의 전통을 계승하되 간화선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성철 스님은 간화선을 기본으로 하되 교 · 염불 · 율을 함께 닦는 수행론이었다고 생각된다.


5. 맺음말

이상에서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를 거쳐 근현대의 수행론을 살펴보고 오늘날 한국불교 수행전통을 선 · 교 · 염불 · 율의 동수라는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왜 겸수가 아니라 동수인가? 겸수라는 말은 주된 수행법이 있고 그에 병립하는 수행을 수용할 때 겸수라는 말이 어울릴 수 있다. 가령 의천의 수행론에서는 화엄교학을 기본으로 하여 천태교관을 수용하기 때문에 교관겸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하여 오늘날 불교계의 일반적인 수행은 선 · 교 · 염불 · 율을 동시에 닦는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성철 스님의 수행법을 동수론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겸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의 일반적인 수행법은 동수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제목에서 ‘동수 전통’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연구자 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

 

이종수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동국대 사학과 문학박사(한국불교사 전공).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 및 국립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HK교수 역임. 역서로 《운봉선사심성론》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후기 불교 이력과목의 선정과 그 의미〉 〈조선후기 화엄학의 유행과 그 배경〉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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