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운암(雲庵) 스님(1896~1982)
한운암(韓雲庵) 스님(1896~1982)은 용성(龍城) 스님(1864~1940)의 아홉 제자 중 한 분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진 스님은 아니다. 그러나 8 · 15 해방 이전에는 1920~30년대에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 대동군(大同郡) 일대에서 발생한 일제 강점기의 수리조합(水利組合) 반대 투쟁을 이끌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1970년대 전후에 젊은 시절부터 50여 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던 동서양 철학에 대한 비평서 5권 1질을 출간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 있다. 즉 운암 스님은 일제에 항거하였을 뿐 아니라 동서양 철학도 깊이 있게 연구하였는데, 그동안 철학을 연구한 스님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로 동양철학을 공부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운암 스님(이하 존칭 생략)은 동양철학은 물론이고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고대에서부터 근 ·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루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이런 운암 사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서술한다면, 불교사상을 기반으로 동서양 철학을 비평하면서 약육강식이 범람하는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철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운암이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약소국가와 미개민족이 희생당하는 세계 현실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한민족의 아픔을 몸으로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사상적 특징이었다. 운암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생활하면서, 특히 일제 강점기의 수리조합반대투쟁을 직접 이끌면서 세계의 역사와 현실의 모순을 깊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세계와 인류가 조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는 사상을 추구하였고, 한민족의 독립과 자주적인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주체적인 철학을 확립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 불교학계에는 그동안 근현대에 업적을 남긴 스님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해왔으므로, 운암과 같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분투하였을 뿐 아니라, 동서양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비평을 통해서 독창적인 철학을 제시한 업적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일제 강점기에 운암이 펼쳤던 수리조합 반대투쟁을 중심으로 운암이 참여하였던 활동을 통해 운암의 생애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서 동시에 동서양 철학을 비평하면서 수립한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2. 운암의 생애

1) 성장기와 학습기

운암의 속명은 한병익(韓炳益)이며, 1896년 12월 24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순안면(順安面)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순안에서 직접 농사를 짓던 자작농이었는데, 운암의 저서에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묘사한 내용을 보면, 어린 시절의 운암은 평남 순안의 농촌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듯싶다.

꿈속같이 고요하고 즐겁기 한없던 옛날 고향 풍경의 한 토막을 그리고자 한다. (중략) 작년 늦가을 바람 차갑던 날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마늘도 벌써 파랗게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렇게 싹이 트고 따뜻한 봄날이면 할아버님께서는 갈퀴를 들고 부지런히 가옥 혹은 장포(場圃: 집터 가까이 있는 채소밭-필자 주) 주변에 지저분하게 널린 검불과 낙엽 등을 긁어모아서 모닥불을 피우시곤 하였다. 아버님은 마당에서 수숫대 잎을 따고 계셨다. (중략) 이같이 평화롭고 황홀하기 끝이 없던 내 고향의 옛 봄날의 풍경은 한결같이 어제인 양 생각이 되는데……후략……

운암은 학업에도 특출한 능력을 보였는데, 유년 시절에 한학(漢學)을 배웠으며, 열다섯 살의 나이에 평양의 영명사(永明寺)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반야심경》을 강의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운암은 1913년에 순안에 있던 의명중학교(義明中學校)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고, 1921년에는 일본 와세다(早稲田) 대학 정경과 통신과정에 입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였다. 1981년의 인터뷰 기사에서 운암은 20세(1915년)에 율곡과 퇴계의 이론적 미비점을 발견하였고, 30세(1925년)에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오류를 발견하였다는 내용을 보면, 의명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와세다대학에 재학하고 졸업하던 시기에 동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조선은 국운이 기울어져 일본에 병탄되었던 암울한 시기였으나, 운암은 비교적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한학과 불교와 동서양의 다양한 학문을 두루 배울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축적된 운암의 학문적 식견과 민족의식은 1920년대 이후, 일제가 조선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 농업을 식민지화하려고 추진하였던 수리조합 사업에 대한 반대투쟁 과정과 해방 이후 운암의 사상적 업적 속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2) 수리조합 반대투쟁

수리조합(水利組合)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06년이었는데,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대지주들이 관개수(灌漑水)를 확보하여 안정적으로 농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밑받침하는 한편, 일제도 쌀을 증산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일제는 1910년대까지는 기술과 자본이 부족하여 적은 자본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제언(堤堰)과 보(洑)의 수축에 집중하였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급속히 산업화되면서 쌀 수급에 문제가 생겨 가격이 폭등하여 마침내 1918년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제는 본격적으로 쌀값과 식량문제 해결에 나서게 되었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조선과 대만에서 쌀을 증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즉 일제는 1918년 ‘쌀 소동’을 겪은 후, 1920년 산미증산계획(1920~1934)을 수립하면서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수리조합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의 세부 사업에는 토지개량사업과 농사개량사업의 두 가지 사업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제는 토지개량사업에 중점을 두었는데, 토지개량사업의 핵심이 바로 수리조합 사업이었다. 당시의 논농사는 대부분이 강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리조합 사업은 산미증식계획의 핵심으로서 일제는 이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수리조합 설치가 본격화되면서 이에 대한 조선인의 반대운동도 일어나게 되었다.

수리조합 반대운동의 전체적인 동향을 보면,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전국의 총 조합 수 225개소 가운데 약 50%에 해당하는 113개소에서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많은 반대운동이 일어났던 원인은 수리조합 사업의 근본적인 목적이 일제 식민지 권력과 대지주가 식량 생산기구를 독점하여 조선을 일본의 식량 기지로 만드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는 수리조합 설치 과정에서 공권력을 동원하여 일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대지주가 운영주체가 되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업을 계획하고 조합을 운영하였으며, 행정관청도 부당하게 간섭하였다. 나아가 사업을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비용 중에 일제와 대지주가 부담하여야 할 비용도 중소지주와 자작농들에게 전가하였는데, 일제는 대지주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한편, 중소지주와 자작농들의 희생 위에서 사업을 전개했다. 일제는 조선인과 일본인 대지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공권력을 이용하여 강제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지주를 제외한 농촌의 전 계층이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그중에서도 소규모라도 토지를 소유하였던 조선인 중소지주와 자작농들은 수리조합 사업에 직접 참여 당사자가 되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중소지주와 자작농들이 투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사업의 부담이 전가되어 압박을 받았던 소작인들도 투쟁에 참여하였다.

 

평남의 평안수리조합은 전국에서도 반대투쟁이 격렬한 조합 중 하나였는데, 수리조합 설치 이전부터 설치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반대투쟁이 발생하였다. 설립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평안수리조합은 1926년에 설치되었는데, 운암이 태어난 순안은 평안수리조합에 포함되었다. 평안수리조합은 평안남도에서 가장 큰 수리조합으로서 일제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운암은 평남 순안의 자작농 출신으로서 일제의 수리조합 사업 추진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았던 계층이었다. 따라서 운암은 자연스럽게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투쟁에는 운암의 속명인 한병익(韓炳益)이라는 이름이 신문 지상에 나타나고 있지 않다. 평안에서 발생한 투쟁의 모습을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초기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1923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1922년부터 관청의 권유로 평안수리조합을 만들었으며, 공사비가 많이 들어 지주들의 부담이 과중하였고, 관청에서 강제로 지주들로부터 공사 승낙 도장을 받으려 하여 지주들이 평남도청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운암은 아마도 학생 신분으로서 지역 문제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운암은 1924년 9월 11일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학생총연합회 발기총회에 임시의장으로 참석하였으며, 1928년 6월 25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유학생동창회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므로 이 기간에 운암은 순안에 머물면서 지역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이후의 수리조합 반대투쟁은 점차 격렬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1930년 12월 13일에는 평남 평원군 순안면의 평안수리조합 지주들(대표 김려간)이 평남도 당국에 수세 면제를 청원하고 자기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하면 수세를 내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운암이 살고 있던 순안 지역에서 먼저 수세 면제를 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7일 뒤인 1930년 12월 20일에는 평안수리조합 관내의 지주들이 지주회를 창립하고 수세불납동맹을 실시키로 결의한 뒤에 고지서를 모두 조합에 반환하였다. 7일 만에 순안에서 시작된 수세불납투쟁이 평안수리조합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수세불납을 결의하고 고지서를 조합에 모두 반환하였는데, 순안 지역이 평안수리조합의 투쟁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이끌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다시 1931년 4월에는 평안에서 조합장을 고소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런 내용은 1981년의 인터뷰 기사 중에 운암이 일제 강점기에 수리조합 부정사건을 파헤쳐서 법정에 고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인 농정과장의 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직접 고소장을 만들어 법정에 제소하였다는 내용과 부합하고 있다. 짐작건대 이 시기 또는 몇 달 전인 1930년 말부터 운암은 평안수리조합 투쟁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1931년 5월 5일에는 1,200명의 지주들이 평양의 평남도청에 과도한 수세(水稅)와 강제 차압에 항의하기 위해 집결하였다. 그리고 1931년 11월 19일에는 평남 평안수리조합의 지주들이 순안에서 지주조합의사원회(地主組合議事員會)를 열고 (채무)상환 연기 등을 결의하였으며, 4일 뒤인 1931년 11월 23일에는 평안수리조합 지주대회가 순안 숭의(崇義)학교에서 열렸으며 수세감액과 보조(補助)를 요구하였다.

이때 운암은 5명의 평안수리조합 교섭위원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1931년 12월 22일에는 평남 순안의 평안수리조합 지주대표들은 평남도 당국에 첫째, 금년도 조합비는 부과액의 2할 5분만 징수할 것, 둘째, 기채(起債) 상환연한을 20개년에서 60개년으로 개정할 것, 셋째, 기채 120만 원 중에 국고보조 23만 원을 공제한 97만 원을 저리채(低利債)로 차환(借換)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에도 운암은 5명의 지주대표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평안수리조합은 3가지의 투쟁 목표를 설정하였는데, 목표를 설정한 이후 6일 후에는 지주들이 평남도청에 자신들의 결의사항을 요구하기 위해 집결했다. 즉 1931년 12월 28일에 평안수리조합의 지주 약 천여 명이 평남도청에 몰려가서 이미 설정한 3개조의 진정 요건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한 다른 기사를 보면, 평남도청의 농무과장은 지주들을 피하여 몰래 도망갔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이때 지주들은 토지가 차압될 때까지 수세(水稅)를 납부하지 않을 것이며, 1월 7일에 다시 모여서 진정을 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런데 지주들이 토지가 차압될 때까지 수세를 납부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은 일제가 부과하는 수세와 채무와 이자 등의 부담이 지나치게 과중하였고, 이런 과중한 부담을 그대로 지는 것보다는 지주들 스스로 자신의 토지를 포기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1930년대 초반에 쌀값이 폭락하면서 수세(水稅)는 지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조합비를 내지 못해 토지 차압과 공매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의 권리를 포기하거나 심지어 소작인에게 토지에 관한 모든 권리를 넘기는 경우도 발생하였는데, 평안수리조합 지역에도 지주들이 스스로 토지의 권리를 포기하는 양태가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1931년 12월에 운암(한병익)은 평원군(平原郡) 양화면(兩花面)의 지주였던 안재수(安載遂)와 함께 2명의 지주대표 중 한 명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리고 천여 명의 지주가 평남도청에 몰려간 지 10일 후인 1932년 1월 7일에 평안수리조합 분규가 확대되어 4천 명의 지주 및 농민이 도(道)에 항의하려 하자 경찰이 개입하여 2명의 지주대표가 도지사를 면담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도지사는 지주들의 실정을 조사하여 부담 능력대로 징세하겠다고 하였으며, 기채 상환을 20년에서 60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고리채를 저리채로 차환하는 것은 ‘고려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평남도청은 1월 9일부터 1월 11일까지 3일 동안 평안수리조합의 몽리(蒙利) 구역에 대해 농촌 실정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런 내용을 보면 운암은 1931년 11월 23일에 5명의 교섭위원에 포함되었다가 그 이후에 수리조합 반대투쟁이 격화되면서 1931년 12월 천여 명의 지주들이 평남도청에 직접 찾아가서 도청 책임자에게 진정하는 직접적인 실력행사의 시기부터 2명의 지주대표 중 한 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1930년 12월부터 1932년 1월까지의 평안수리조합의 투쟁을 보면, 순안 지역은 평안수리조합의 투쟁을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수세불납뿐 아니라 기채 상환의 연한과 이율 문제도 수리조합투쟁의 목표로서 설정되는 과정에서 순안 지역이 투쟁을 주도하였음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순안은 평안수리조합 투쟁의 중심지였는데, 순안 지역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사항들은 단시일 내에 평안수리조합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이 기간에 운암은 지주대표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양화면(兩花面)에 거주하던 안재수라는 인물과 함께 2명의 지주대표 중 한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운암은 수리조합투쟁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순안면의 지주대표로서 평안 수리조합 반대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1932년 3월 2일에는 평안수리조합의 지주 600명이 수세(水稅)를 체납하여 결국 토지가 차압당하였다. 과중한 수세를 납부하지 않고 있던 지주들의 토지가 차압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운암은 안재수와 함께 지주대표로서 평안수리조합의 출납을 맡았던 직원의 횡령에 대하여 고소하였다. 그렇지만 천여 명의 지주 중에 반 이상의 지주들이 스스로 토지를 포기하는 상황에서 수리조합 반대투쟁은 급격히 약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운암은 그 이후에도 계속 지주대표로 활동하였는데, 1932년 12월에는 총독부를 방문하여 수리조합비 2할 5푼 감하 등 7개 항을 진정하였으며 1933년 1월에는 총독부를 방문하고 재해지역 수리조합비 감면 및 수리조합장 불신임건을 진정하였다.

3) 기타활동

전술한 바와 같이 운암은 1924년 9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학생총연합회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았고, 1928년 6월에 일본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 동창회에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운암이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1926년 6월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는 가뭄을 걱정하면서 민족적 단결력으로 재난을 극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며, 또한 1929년 6월 기고한 글에서는 시기(猜忌)와 분쟁으로 얼룩진 민족의 현실을 애통해하면서 민족의 생명을 부활시키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보면, 운암은 와세다대학 졸업 이후에는 동서양 철학을 공부하면서 농민과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운암은 해방 이후에 조만식의 참모였으며, 북한자유당을 창당하여 사무총장으로 정치활동에 참여하였지만, 그의 정치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아마도 운암은 평안수리조합투쟁 이후에는 동서양 철학 비평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였던 듯하다. 왜냐하면, 운암은 20세(1915년)에 율곡과 퇴계의 이론적 미비점을 발견하였고, 30세(1925년)에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오류를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집필을 시작한 지 40년 만에 자신의 철학서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을 보면, 그가 동서양 철학서 5권을 출판한 것이 1973년이므로 1933년경에는 집필을 시작하였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운암은 청소년 교화활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956년 6월에는 최초의 중 · 고등학생회를 서울 정릉 녹야원에서 발족하였으며, 그 후 1957년 3월 15일에 운암은 범어사에서 용성 스님의 위패상좌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는데, 출가 이유는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동서양 철학의 대안을 찾는 공부에 매진하고자 함이었다.


3. 운암의 사상

1) 동서양 철학 연구의 동기

운암의 사상이 집대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동서양 철학 비평서는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철학사사상평》(1973), 《서양철학사사상평》(1973), 《비판윤리학》(1973), 《철학개론》(1973), 《동양철학개론》(1973)이 그것이다. 이 밖에도 운암의 저서는 《살길을 찾자》(1976), 《반야심경 1》(1977), 《반야심경 2》(1978), 《국민성개조운동론》(1978) 등이 있다. 이러한 저서 중에서 운암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는 동서양 철학 비평서 5권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의 저서에는 동서양 철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문예부흥과 계몽운동을 거치면서 발전한 서구문명은 19세기부터 동아시아를 침략하여 무자비하게 점령하였다.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이 일어나 찬란한 과학문명을 이용하여 약소민족을 살육하게 되었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허울 좋은 간판을 내걸고 침략을 일삼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냉전 · 열전이 이어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군국주의, 공화주의와 전제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은 사상적(思想的) 전쟁은 분노와 쓴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한다. 사상이라는 허울 좋은 미끼 속에는 약소국가와 미개민족을 노리는 무서운 마취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는 세계 제패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식한 대중을 속이는 강자들의 빛 좋은 개살구요, 자유와 평등이란 것도 인류를 정복하기 위해 미개민족을 속이는 광고판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극(極)에 달하면 반드시 쇠퇴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새 역사가 반드시 시작될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창조의 과정에서 시대적 문제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가진 인식적 새 원리와 인류의 모든 이념을 지휘할 수 있는 정당한 표준을 가진 도덕의 원리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까닭에 “도덕의 새 표준 수립”과 “진리의 새 근거 창명(創明)”이라는 16자를 유일한 목표로 하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연구에 분투하였다는 것이다.

운암은 이러한 결심을 하고 연구에 매진하여, 8 · 15해방을 지나 1 · 4후퇴 즈음에는 거의 원고가 완성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1 · 4후퇴의 급박한 상황에서 원고를 버리고 올 수밖에 없었으며, 남한으로 피난한 이후에 북한에 버리고 온 원고를 몇 분의 일이라도 복구한다는 심정으로 틈틈이 기록한 결과로 5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운암이 동서양 철학을 연구하게 된 동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운암은 기존의 모든 사상이나 주의가 모두 결함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약소국가나 미개민족을 점령하고 지배하기 위한 미끼이자 마취제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데, 근 · 현대의 세계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운암 사상의 요점

동서양 철학 비평서 5권
(원각사, 1973)
반야심경(1977)
운암은 현대과학 문명은 많이 발전하였지만, 정신문명이 과학문명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인간은 자신의 뿌리인 인간의 본성(本性)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즉 현대는 인간의 정신문명이 과학문명을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칼을 가지고 있고 정신병자가 권총을 휘두르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지배하면 인류사회가 악화(惡化)되고, 반대로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지배하면 인류사회가 성화(聖化)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운암은 현대는 과학문명에 편중하여 물질적 이기주의가 정신적 인도주의를 이기고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인 선천적 본연성(先天的 本然性)을 회복하는 인간성 회복운동이 인간세계를 개조 · 혁신하는 가장 타당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운암은 인간의 본성인 선천적 본연성이 회복된 상태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보면, 정각, 열반, 해탈, 견성에 해당되며, 선천적 본연성이란 자기 목적이 되는 절대적 실재라고 하였다. 즉, 선천적 본연성은 무상목적성(無上目的性), 무상본체성(無上本體性), 무상원인성(無上原因性), 무상주체성(無上主體性), 무상자유성(無上自由性), 무상평등성(無上平等性)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선악(善惡)의 가치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유교에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논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인 인간의 선천적 본연성을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 목적이고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는 선천적 본연성은 선악(善惡)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선과 악이라는 규정은 궁극적인 목적에 필요한 수단이 그 목적에 적합한지 부적합한지를 구분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선천적 본연성을 선악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한 오류는 칸트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칸트는 그의 도덕설 중에서 도덕은 자신이 목적이어야 하며, 다른 어떤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즉 도덕은 단언적, 무조건적 지상명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단언적, 무조건적 지상명령을 도덕의 최고표준으로 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규정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이라는 무조건적 단언적(斷言的) 명법(命法)을 선의지(善意志)로 보았는데, 단언적, 무조건적 지상명령으로서 도덕은 그 자신이 목적이므로 선과 악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칸트의 도덕설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운암이 인간 선천적 본연성의 회복을 강조하였으나, 유심론을 긍정하거나 유물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운암은 유물론과 유심론의 대립에 대해서도 정신이란 물질의 내적 작용의 주관적 인식태를 의미하는 것뿐이며, 물질이란 정신의 외적 표현의 객관적 연장태를 의미할 뿐이라고 보았다. 즉 운암은 유물론과 유심론이라는 철학적 대립을 불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운암의 사상은 진화론에 대한 해석에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운암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최초에 우주의 물질에서 광물이, 광물에서 식물이, 식물에서 동물이, 동물에서 점차 고등동물로 진화하여 인간이 나타났으며, 인간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초인간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우주의 물질에서 생명과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여 발전해 온 것은 우주 자체가 전체로서 일대생명(一大生命)인 동시에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은 우주 대생명의 진화 단계를 모두 거친 최종적인 존재로서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고 보았다. 더불어 운암은 광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를 일체유심조의 원리로도 설명하는데, 일체유심조는 의지력을 의미하며, 의지력을 가지고 자율적 창조력을 발휘하는 우주 대생명의 진화 결과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운암은 또한 사회사상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 공산주의를 모두 불완전하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철학적으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므로 무산대중(無産大衆)을 포함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현실적으로 배금주의(拜金主義)와 다름이 없으며, 또한 사회주의 · 공산주의도 민주주의의 사상적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사회조직을 개조하려는 것일 뿐이므로 민주주의가 가진 윤리학적 결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운암은 이러한 현대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전체를 모두 존중하는 개사쌍전적(個社雙佺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4. 맺음말

이상으로 운암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았는데, 당시의 신문기사 등을 보면, 운암은 평안수리조합의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운암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기에 농민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시대를 꿈꾸게 되었으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 속에서 동서양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운암의 사상은 동서양의 철학을 모두 섭렵한 상태에서 방대하고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 전모를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지면과 필자의 능력이 모두 부족하다.

그러나 운암의 사상을 그 대강의 모습만이라도 묘사한다면, 동서양의 휘황찬란하고 다채로운 사상이나 주의 · 주장이 현실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한편 모순을 감추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나아가 운암은 이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도덕의 새 표준 수립’과 ‘진리의 새 근거 창명(創明)’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평생을 걸친 연구의 결과로 ‘진정한 도덕적 기준은 우주 대생명의 영구 창조성’이라 사상을 펼치게 되었다. 즉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면서 생명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창조적 발전을 도모하는 도덕이 진정한 도덕이라고 보았다고 해석되며, 생명 그 자체는 어떤 사상이나 주의 · 주장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장성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의 경영사상 연구〉(박사학위 논문) 〈원측 유식의 불성론과 그 정체성〉 〈4차 산업혁명과 불교의 경제윤리〉 등이 있다.산으로서 다른 유산과는 차별화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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