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용(龍) 그림에 불교의 눈 그리기

편집자
✽ 본 논문은 2018년 7월 25일~28일 태국 치앙라이의 ‘마에파루앙(Mae Fa Luang) 대학교’에서 ‘불교와 인공지능(Buddhism and AI)’이라는 주제로 열렸던 제8회 세계청년 불학심포지엄(World Youth Buddhist Symposium)의 기조강연을 위해 작성한 원고다.

 1. 화룡(畵龍)-인공지능의 용 그림

1)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그리고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

인공지능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신경계가 외부세계와 접하는 방식은 ‘감각(Sense)과 처리(Processing)와 운동(Movement)’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이나 귀와 같은 감관을 자극한 정보가 구심성(求心性) 신경을 통해 우리의 신체로 들어오면, 중추신경인 대뇌에서 그 정보를 적절히 처리한 후, 원심성(遠心性) 신경을 통해 손과 발 등의 근육을 움직임으로 발현한다. 중국어로 전뇌(電腦, Electric Brain)라고 부르는 컴퓨터의 작동방식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키보드와 마우스와 같은 입력(Input) 장치는 우리의 감각기관에 해당하고, 중앙처리장치(Central processing unit)는 대뇌의 역할을 하며, 모니터나 프린터와 같은 출력(Output) 장치는 우리의 운동기관에 해당할 것이다. 과거에 일반 컴퓨터의 경우 새로운 정보를 입력하는 장치는 키보드와 마우스뿐이었고, 가공된 정보를 출력하는 장치는 모니터와 프린터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문명의 이기들은 정보의 입력과 출력, 처리와 저장에서 상상을 초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전 세계의 정보통신기기들은 인터넷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바코드, QR코드, 마이크로 칩, 음성인식, 사물인식 등에서 보듯이 정보의 입력 방식이 다양해졌으며 자율주행 자동차, 3D 인쇄, 로봇, 드론(Drone) 등에서 보듯이 정보를 출력하는 방식 역시 참으로 다종다양하다. 또한 단말기(Terminal)의 사용자들은 포털 사이트(Portal site)나 SNS를 운영하는 기업의 서버에 방문(Visiting), 검색(Searching), 대화(Dialogue) 등의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 흔적의 정보는 인공지능으로 처리되어, 그 정보를 소유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활용된다. 2016년 한국의 바둑왕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AlphaGo)에서 보듯이 인공지능의 혁명적 정보처리 능력은 우리를 경악게 한다. 우리 사회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정보통신기기의 입력수단과 출력방식 그리고 정보처리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다. 우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컴퓨터에 비유할 때, ‘무한 입력(Infinite input), 무한 처리(Infinite processing), 무한 출력(Infinite output)’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불교의 존격(尊格) 가운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란 분이 계신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바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살펴보시고[觀], 그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이에게 온갖 모습을 나타내어 도움을 주시는 절대자[自在]다. 그래서 그 이름 앞에 천수천안(千手千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살펴야 하기에 천 개의 눈을 갖고 있고, 그런 모든 중생의 필요에 따라서 갖가지 방식으로 도와야 하기에 천 개의 손을 갖고 있다. 전 세계인들의 극찬을 받았던 중국 장애인예술단(中国残疾人艺术团)의 ‘천수관음무(千手觀音舞)’는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시킨 공연이었다.

그런데 ‘무한입력, 무한처리, 무한출력’이라는 4차 산업혁명의 방식은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을 닮았다. 천안으로 전지(Omni-scient)하고 천수로 전능한(Omnipotent) 관세음보살이다. 4차 산업혁명은 바로 전지전능의 인간사회를 지향하는 듯하다. 인공지능은 그 몸통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든 과학기술이 그렇듯이 인공지능의 경우도 명(明)과 암(暗)의 양면을 갖는다. 만일 우리가 모든 인류와 생명의 행복을 염원한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한입력의 전지’와 ‘무한출력의 전능’을 구현하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사회에서 ‘무한처리의 인공지능’은 무엇을 목적으로 작동하는가? 관세음보살과 같이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위하는 대자대비의 실천을 위해 작동하는가, 아니면 4차 산업기술을 선점(先占)한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작동하는가?

 ‘불교와 인공지능’을 주제로 태국 치앙라이에서 열린 세계청년불학세미나(7.25~28)

2) 인공지능의 귀납추리와 빅 데이터의 신대륙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언어의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이라고 정의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지능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인위적인 기술’이다. 이렇게 풀이할 때 비단 4차산업의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컴퓨터는 물론이고 전자계산기도 넓은 의미에서 인공지능의 범위에 들어오며 동아시아에서 사용하던 주판 역시 산술계산을 보조하는 인공지능에 다름 아니었다. 더 소급하면 ‘문자 기록’ 역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와 같이 인간의 기억능력을 보조하는 인공지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자 기록은 우리의 기억을 돕고, 주판이나 전자계산기는 덧셈과 곱셈 같은 산술계산을 돕는다. 주판이나 전자계산기나 컴퓨터 모두 인간의 지능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보다 정확하고, 효율적이며, 빠르게 수행(遂行)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능가하였다.

인간의 이성(Reason)이 작동하는 방식을 연역(Deduction)과 귀납(Induction)의 두 가지로 구분할 때 주판이나 문자, 컴퓨터 모두 그 방식이 연역적이다. 일반적인 컴퓨터의 경우 전문가에 의해서 미리 만들어진 소프트웨어에 따라서 작동하기에 그 방식이 연역적이다. 주판이나 문자의 경우도 그 활용방식은 연역적이다. 우리는 형태와 개수와 조작방식이 미리 정해져 있는 주판을 이용하여 계산하며 알파벳과 같이 정해진 문자들을 조합하여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내는데, 그 결과물 역시 주판알의 배열이나 기존 문자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이들의 방식 역시 연역적인 것이다. 반면에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나 지혜는 모두 귀납적이다.

그런데 지금의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출현한 인공지능으로 인해, 즉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이나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같은 학습 기능을 갖춘 인공지능으로 인해 경험을 종합함으로써 얻어지는 귀납적 사유(思惟)의 영역에서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현명해진다. 현명해진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대한 통찰이 깊어져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나이만큼의 세상을 살아오면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수명과 인지(認知)의 한계로 인해서 한 사람이 어느 분량 이상의 경험 자료를 축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개인의 경험에 근거하여 결과를 예측하는 귀납추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무진장(無盡藏)의 경험 자료인 빅 데이터에 근거하여 귀납추리를 하기에 미래에 대한 예측에서 인간을 능가한다. [엄밀히 말하면 귀납추리로 학습모델을 만들고, 이 학습모델에 근거하여 연역추리를 한다.]

세미나에서 기조강연을 하는 김성철 교수

이는 인문, 사회현상의 각종 데이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는 과정을 알고리즘(Algorithm)화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증권가일 것이다. 과거의 주가 변동 추이와 유관한 자료들을 인공지능으로 처리하면 미래에 일어날 주가의 등락을 추정할 수 있으며, 펀드 매니저는 이에 근거하여 주식의 매입 또는 매도를 결정한다.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인터넷 공간에서는 매일매일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들을 인공지능을 통해 처리함으로써 개인의 성향을 알아내고 행동을 예측하며, 사회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단(豫斷)한다. 과거에는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또 어느 한 분야에서 아무리 오래 종사한 달인이라고 하더라도 수명과 인지(認知)의 한계로 인해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머신 러닝, 딥 러닝,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등의 인공지능 기법을 활용하여 추측하고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정보통신 기업의 서버에 매일매일 축적되는 데이터들이다. 이를 빅 데이터라고 부른다. 빅 데이터는 ‘의미의 세계’에 출현한 정보의 신대륙이다.

과거에 있었던 자본주의 탄생에 못지않은 거대한 변혁이, 지금 이 시대에 전 지구적으로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과거에 자본주의를 탄생하게 만든 재화의 원천은 남북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라는 물리적 세계였다. 그런데 지금의 변혁은 ‘물리적 세계(Physical World)’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World of Meaning)’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변혁과 그 질을 달리한다. 의미의 세계에서 새로운 재화의 광맥(鑛脈)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매일매일 쌓이는 정보의 신대륙-빅 데이터 속의 광맥이다. 빅 데이터 속의 광맥을 머신 러닝, 딥 러닝, 데이터 마이닝과 같은 인공지능 기법으로 채굴하고 처리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재화를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주아들이 출현한다. 정보통신 분야의 부르주아들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이 재화의 원천이 되었듯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나 SNS를 운영하는 정보통신 기업의 서버에 매일매일 쌓이는 빅 데이터는 귀납추리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과 만나서 미래를 예측함으로써 새로운 재화를 창출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각 개인이 가상공간을 배회하고, 포털 사이트를 방문하고, SNS로 대화하면서 무심코 흘리는 행위와 의견의 정보들이 응결하여 형성된 빅 데이터의 광맥을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이 독점하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과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재화의 편중(偏重)을 초래하고 제국주의의 시대로 이어져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비극을 낳았듯이, 무한한 재화가 잠재된 빅 데이터의 신대륙을 방치할 경우 그런 비극이 발생할 우려는 없는가? 혹시 비극의 조짐이 있다면 이를 방지할 방안은 무엇일까? 정보통신 관련 서버를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 빅 데이터의 정기적인 공개를 의무화하면 재화의 편중으로 인한 비극이 예방될까? 빅 데이터의 신대륙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관리할 것인가. 우리 모두 중지(衆智)를 모아 해결해야 할 과제다.


2. 점정(點睛)-불교의 눈 그리기

1) 인공지능을 거부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넓은 의미에서 인공지능을 ‘인간의 지능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인위적인 기술’이라고 정의할 때 문자 기록 역시 인간의 기억을 보조하는, 신체 바깥의 사물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문자 기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요컨대 책에 기록하고 책을 읽으며 사는 것은 인간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저술한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소크라테스는 북부 이집트의 왕 타무스(Thamus)와 발명의 신(神) 테우스(Theuth)가 주고받았던 대화를 인용하면서 문자 기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테우스는 숫자, 계산, 기하학, 천문학, 문자 등을 발명한 신이었다. 테우스 신은 자신이 발명한 것들을 타무스 왕에게 보여주면서 이들을 이집트의 모든 사람에게 퍼뜨리라고 권하였다. 그 가운데 문자에 대해 설명하면서 테우스는 “왕이시여, 일단 배우고 나면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현명하게 만들어 주고 그들의 기억력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기억과 지혜를 위한 명약을 발견했습니다.”라고 자화자찬하였다. 그러나 타무스 왕은 정색(正色)을 하면서 “문자를 배운 사람들은 기억을 이용하는 연습을 하지 않을 것”이고, 문자의 발명으로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껍데기”를 제자들에게 주게 되며, “제자들이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고 그저 귀로 듣는 것만 많아지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즉, 사람들이 책을 이용하게 되면 기억력을 훈련하지 않고, 지혜도 적어질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신화를 소개하면서 문자 기록의 폐해를 걱정하였다. 그 이유는 말이 문자로 기록되고 나면 의미가 고정되어 버리고, 아무에게나 무차별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현인(賢人)에게 물음을 던지면 질문자의 수준과 질문의 맥락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답변이 나온다. 불교에서는 이런 방식의 교화를 질병에 성격에 따른 약 처방에 비유하여 응병여약(应病与药)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상대의 수준에 맞춘 가르침이기에 대기설법(对机说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답변을 문자로 기록해 놓으면 소크라테스의 우려와 같이 상대의 수준이나 질문의 맥락이 간과(看過)되고 만다.

그런데 최근에 괄목할 발전을 보이는 인공지능은 소크라테스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줄 것 같다. 핸슨 로보틱스(Hanson Robotics) 회사가 개발한 인공지능 탑재 로봇 소피아(Sophia)가 올해 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질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농담도 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서 “불이 났을 때 어린아이와 노인 가운데 누구부터 구해주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이는 엄마가 좋은가, 아빠가 좋은가?”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농담을 던진 후, “나는 프로그램 되어 있는 대로 행동하는데, 아마 출입구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구할 것 같다.”라고 대답하였다. 질문의 맥락을 파악한, 위트 넘치는 대답이었다. 실용화에서 아직 시작 단계에 있긴 하지만, 불교적으로 표현하여 인공지능은 응병여약, 대기설법과 같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의 천태학 이론 가운데 ‘무정(無情)설법’이란 것이 있다. 풀이나 나무, 기와나 자갈[草木瓦礫]과 같이 감정이 없는 무생물이 불교의 진리를 설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신비한 얘기가 아니다. 종이로 만들어진 불전 역시 무생물이기에, 그것 그대로가 바로 일종의 무정설법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으로 불교를 배우고 포교하면 종이와 문자로 된 불전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다. 각 종교 신앙자의 수준과 의문에 맞추어 최적의 설법을 하고 강론을 하는 인공지능 법사, 목사, 신부(神父)가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으며, 심지어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어 대화 상대를 위로하는 ‘인공감성(Artificial Emotion)을 갖춘 인공지능’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소크라테스의 우려를 해결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신앙(信仰, Faith)이나 영성(靈性, Spirituality)조차 모두 인공지능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또, 앞 장에서 보았듯이 인공지능은 귀납추리에서도 인간을 능가하기에 매사를 그의 판단에 따를 경우 우리에게 행복한 미래가 열릴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 수행자의 모습을 볼 때, 인공지능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바로 그 지점이 불교의 본령이다. 인공지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4차 산업혁명의 세계는 효율성(Efficiency)과 속도(Velocity)와 같은 양(Quantity)적인 측면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의 삶에서 효율성이나 속도로 얻어지는 양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질(Quality)이다. 중국의 고전인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에는 기계문명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逸話, Episode)가 실려 있다.

자공(子貢)이 남쪽으로 가서 초(楚)나라를 여행하고서 진(晋)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한음(漢陰)을 지나가면서 한 노인이 밭일하는 것을 보았다. 땅에 구멍을 파서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를 안고 나와서 [밭에] 물을 붓는데, 열심히 일하기는 하지만 힘만 많이 들이고 나타나는 효과는 적었다. 자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에 [사용하는]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일백 구획의 밭에 물을 댈 수 있습니다. 아주 적은 노력만 들여도 나타나는 효과가 큽니다. 노인장께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밭일하던 사람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어떤 겁니까?” 자공은 말했다. “나무를 움푹 파서 만든 기계로 뒤쪽이 무겁고 앞쪽은 가벼운데 손으로 뜨듯이 물을 퍼내기에 몇 번만 해도 [밭에] 물이 넘칠 듯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그 이름은 방아두레박입니다.” 밭일하던 사람은 화가 나서 [얼굴빛을] 붉혔지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내 스승에게서 들었습니다. ‘기계를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기계로 일을 하게 되고 기계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된다. 기계와 같은 마음이 가슴속에 존재하면 순수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순수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영혼에 불안이 생기고 영혼에 불안이 생긴 사람에게 도(道)는 실리지 못한다.’ 내가 [기계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끄러워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공은 눈을 지그시 감고 부끄러워하였으며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였다.

일반인들이 볼 때 이 일화에 등장하는 농부는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한음장인은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계를 거부하고 미련하고 힘들게 일한다. 한음장인이 비판하는 ‘기계와 같은 마음’은 효율성과 속도와 양을 목표로 삼아 작동하는 마음일 것이다. 즉 ‘외적(外的)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능’으로서의 마음일 것이다. 이 일화에는 우리의 마음에는 ‘환경의 적자(適者)가 되기 위한 알고리즘’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는 통찰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런 ‘그 무엇’을 추구하고 함양하는 것이 종교이리라.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등의 상좌부불교 전통에서 스님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2,500여 년 전의 부처님 시대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부처님 당시처럼 모든 스님이 오전에 탁발하여 식사를 마친다. 불전이 문자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전통 불교권의 스님들은 독경하고 암기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집트의 왕 타무스가 말하듯이 항상 기억력을 훈련하는 바람직한 공부 방법이다. 또 위빠싸나(Vipassanā) 수행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올리고 내릴 때 일어나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천천히 걷는다. 식사를 할 때는 음식물의 촉각과 미각을 모두 느끼면서 씹는다. 호흡을 할 때도 바람이 코를 통해서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촉감을 낱낱이 따라가며 주시한다. 너무나 비효율적으로 걸어가고, 느리게 식사를 하고, 답답하게 호흡한다. 《장자》의 한음장인 못지않게 참으로 불편하게 생활한다. 이는 양이 아니라 질을 중시하는 스님들의 삶이다. 이런 식으로 생활할 때 우리의 마음은 효율성을 위한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순수함을 회복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갖추어야 한음장인이 말하듯이 도(道)가 실릴 수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일단 우리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의 출현과 발전은 긍정적이다. 또 종교 성전의 내용을 데이터화하고 인간의 종교적, 철학적 의문과 그에 대한 해결 과정을 알고리즘화할 경우, 교화나 포교에서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게다가 인공감성까지 갖춘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인간의 지치고 상처 난 감성을 위로하는 상담자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공지능은 ‘어린아이들에게 위안을 주는 헝겊 인형’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은 타자(他者)다. 타자는 우리에게 소금이 무엇인지 설명은 해 줄 수 있지만, 소금의 맛을 전해줄 수는 없다. 우리 개개인에게는 인공지능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인공지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주관성의 영역과 죽음의 문제다.

2)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식과 주관성의 회복

고대 인도의 갠지스강 유역에 짜르와까(Cārvāka)라는 유물론자들이 있었다. ‘세속(loka)을 지향한다(āyata).’는 의미에서 순세파(順世派, Lokāyata)라고 불리기도 했다. 순세파에 의하면 세상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요소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요소가 적절히 결합하여 육체의 모습을 띠게 되면 마음이 발생하며, 죽어서 육신이 소멸하면 마음도 사라진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의 이론은 유물론(Materialism)이라기보다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명명해야 옳을 것이다. 부처님과 동시대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린(Ajita Kesa-kambalin, 6C경 B.C.E.)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지’의 요소는 땅으로 돌아가고 ‘수’의 요소는 물로 돌아가며 ‘화’의 요소는 불로 돌아가고 ‘풍’의 요소는 공기로 돌아가며, 그의 여러 가지 능력들은 허공으로 사라진다. 네 명의 상여꾼들이 그의 시체를 들고 화장터로 가면서 온갖 송덕문을 읊조리지만, 결국은 하얗게 탄 뼛조각들과 재로 변한 공양물들만 남을 뿐이다. 공덕을 말하는 것은 바보들의 교리다. 사람들은 여기에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공허한 거짓말이고 부질없는 헛소리다. 바보든 현자든 육체가 무너지면 완전히 사라진다. 죽음 후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Samaññaphala Sutta: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N.Ⅱ.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죽음 후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영혼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모두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순세파의 유물론은 ‘사상’이나 ‘철학’일 것도 없다. 누구든 감각된 것과 경험한 것에만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위와 같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순세파의 유물론은 고대 인도에서 불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사상에서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고 경멸했던 사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역(逆)으로 이러한 유물론에 근거한 학문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예를 들면 현대의학의 경우 그 이론이 그대로 치료에 적용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문인데, 그 토대는 철두철미한 유물론이다. 환자의 신체에서 일어난 물리화학적(Physicochemical) 변화를 통해 질병을 진단하고, 물리화학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또, 앞으로 언젠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많은 내용이 진화생물학과 뇌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언어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의 젊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데이터 종교(Data Religion)라는 신조어를 자신의 최근 저서 《호모 데우스》의 마지막 장의 제목으로 삼았다. 컴퓨터 과학과 생물학을 모태로 삼는 데이터교(Dataism)에서는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기린, 토마토, 인간이 단지 데이터를 처리하는 각기 다른 방법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음악학으로부터 경제학을 거쳐 생물학까지 모든 과학 분과들을 통합하는 단일한 일반이론”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러한 데이터교 역시 유물론에 다름 아니다. 데이터교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유물론과 다른 점은 그 소재가 각 개인과 관련된 ‘정보’라는 점이고, 인간의 인문, 사회적 행동에 대해 인간을 능가하는 귀납추리 능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객관성과 합리성을 표방하는 유물론을 추동력으로 삼아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흐름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가?

우리는 누구나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접한다. 하나는 객관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이다. 객관의 세계는 남과 공유하지만, 주관의 세계에는 나 홀로 존재한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주관과 객관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자동차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동차 밖에서 자동차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차 내부의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그 내부를 보는 것이다. 전자는 객관(客觀), 후자는 주관(主觀)에 대비된다. 객관의 자동차는 무수하지만 주관의 자동차는 오직 하나다. 겉모습만 보이는 무수한 자동차 중에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화려한 것도 있고 초라한 것도 있다. 그러나 운전석에 앉아서 바라본 자동차의 모습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것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핸들도 하나, 백미러도 하나, 기어도 하나뿐이다. 그 모두가 절대적인 것들이기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때는 남과의 비교가 가능하기에 우열이 가려진다. 그러나 마치 운전석에 앉아서 자동차 내부를 보며 운전하듯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체험하는 모든 것은 유일무이한 절대다. 이때 남과의 비교를 통해 일어나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모두 사라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물으면, 일반적으로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인간이 존재한다.”든지, “광물, 식물, 동물이 존재한다.” 등으로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와 달리 ‘모든 것[一切]’을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이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가지 지각수단과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여섯 가지 지각대상의 열두 영역, 즉 십이처(十二處) 등으로 구분하셨다. 마치 운전석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주관에서 관찰한 일체의 요소들이다. 우리를 타자화(他者化)하고, 대상화(對象化)하고, 도구화(道具化)하고, 사물화(事物化)하는 물리주의, 유물론, 객관주의, 과학주의를 극복하는 출구는 바로 이와 같은 주관성의 회복에 있다.

운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중시한다. 편리한 삶이 아니라, 앞에서 예로 든 《장자》의 한음장인의 삶과 같이 적절히 불편한 삶이다. 목적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는 삶이 아니라, 위빠싸나 수행자의 걸음과 같이 모든 과정을 느리게 음미하는 삶이다. 우리는 태어났다가 언젠가 죽는다. 탄생과 죽음의 출입구는 남과 공유하는 객관세계가 아니라 나 홀로 체험하는 주관의 세계에 뚫려 있다. 그리고 진정한 신앙(信仰, Faith)과 영성(靈性, Spirituality) 모두 이런 주관의 세계와 관계된다. 주관의 세계는 인공지능을 포함하여 어떠한 타자(他者)도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이다. 주관에 충실할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자각하여 궁극적으로 죽음조차 극복한다. ‘운전자 관점(觀點)으로 살아가기’-거대한 인공지능의 용(龍) 그림(畵)에 찍은(點) 불교의 눈(睛)이다. ■

 

김성철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산학술상, 불이상,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하였다. 〈역설과 중관논리〉 외 70여 편의 논문과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연구》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승랑-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등 10여 권의 저서와 역서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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