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1. 머리말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번식의 욕구를 통해 그 종의 존속을 이어간다. 자신의 몸 안에 음양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어 자체적으로 생식을 해내는 생물도 있지만, 대체로는 암컷과 수컷이라는 서로 다른 두 종의 성(性, sex)을 전제로 그들 사이의 결합을 통해 생식한다. 우리 인간을 포함하는 포유동물의 경우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성은 자연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없다면 당대에서 종말을 맞는 비극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성(sexuality)은 이러한 생물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다른 맥락의 특성을 더하게 되면서 복잡성과 복합성을 지니게 된다. 우선 사회구조와 권력의 출현과 맞물리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회과학적 의미의 성(gender)이 등장한다. 인류 역사가 대체로 남성 중심의 흐름으로 정착하면서 남성은 우월하고 강하며 여성은 열등하고 약하다는 이미지가 자리 잡고, 그것은 다시 일부일처제 중심의 결혼제도와 만나면서 남성에게는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의 차별적 역할분담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성은 다른 한편 돈으로 사고팔거나 전쟁의 승리에 대한 대가로 챙길 수 있는 전리품 같은 형태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것이 여성의 위상 강화로 인한 축첩제의 철폐 등으로 이어지면서 음성적인 형태로 바뀌었고,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그러한 음성적인 성매매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나라라는 오명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수준의 성담론이 전통적인 기반의 성윤리를 근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이할 정도의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성윤리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일 수 있고, 이러한 성담론의 표층과 심층 사이의 괴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부각되는 ‘미투(me too)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어떤 관점을 지닐 수 있을까? 성문제는 기본적으로 생물학적 문제이지만, 동시에 사회과학적 문제이자 윤리적 문제이다. 권력관계에 근거한 성적 괴롭힘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최근의 사태는 그중에서 주로 사회과학적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관계 속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 차원을 함축한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입장 또는 관점을 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이 작은 글의 목적이다. 그중에서도 윤리의 관점을 중심으로 삼아 생물학적 차원과 사회과학적 차원을 포괄하는 입장을 택해보고자 한다.

이런 입장을 택하고자 할 때 지닐 수 있는 한계는 지나치게 윤리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도덕주의의 위험성에서 생길 수 있다. 도덕주의는 모든 문제를 도덕으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완고한 입장을 의미하고, 성문제를 윤리의 문제로만 한정 지음으로써 다른 차원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성윤리 또는 성의식을 바라보고자 할 때도 이런 위험성이 수반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불교윤리를 ‘붓다의 가르침 또는 그가 발견한 진리에 근거한 윤리적 관점과 실천 지침’이라는 넓은 의미로 정의하고 출발할 경우, 성에 관한 생물학적 관점과 사회과학적 관점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2. 한국인의 성의식과 성윤리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단구조와 세계화, 자본의 지배라는 현재의 질서 속에서도 불교와 유교로 상징되는 전통의 영향 또한 일정 부분 공유하면서 하루의 일상을 영위해가고 있다. 각자의 성장배경 등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영향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차이점이 부각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공통점이 더 많이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성의식과 성윤리는 모두 한 개인 또는 집단이 지니는 성 관련 의식들을 전제로 성립되는 개념들이다. 그중에서 전자는 가치중립적으로 그 의식을 조사하여 기술(記述)할 때 주로 사용되는 사회과학적 개념이고, 후자는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가치판단을 내리거나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할 때 사용되는 윤리학적 개념이다. 당연히 이 둘은 서로 긴밀한 연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성의식을 고려하지 않는 성윤리 담론은 공허해지고, 성윤리를 고려하지 않는 성의식 조사발표는 실천력을 결여한 정보제공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21세기 초반 한국인의 성의식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러 조사연구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 포함된 성의식이다. 미투 운동은 권력관계를 기반으로 삼아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성적 괴롭힘에 대한 총체적인 고발과 성찰 운동이다. 그런데 이 운동에 대한 해석과 반응에서 다양한 성의식이 표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출의 과정 속에는 서로 충돌하는 성윤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다시 인터넷 기반 의사소통의 장이 지니는 즉시성과 감정적 대응 등이 더해지면서 비정상적인 담론이 펼쳐지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

2018년 3월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미투 운동 관련 여론조사 결과가 그런 성의식의 표출과 성윤리의 충돌을 잘 보여주고 있는 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여성이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은 동의한 것이다.’ 등 성폭력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의견에 동의하는 비율이 예상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성이 있다. 동의 비율이 남성 50.8%, 여성 41.9%로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었지만, 연령별 차이가 더 큰 점이 인상적이다.

20, 30대의 동의 비율은 24.0%, 27.9%인 데 비해, 40대는 46.4%, 50대는 58.0%, 60세 이상은 64.9%에 이른다. 60세 이상은 여성의 경우에도 동의 비율이 60.4%로 나타나 남녀 차이보다는 세대별 차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여성은 조신하고 단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성윤리가 연령층이 낮아질수록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성에 주목하면서 자율적인 성결정권을 중심에 두는 윤리관인 자유주의적 관점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특별히 부각시키면서 성관계의 과정과 결과에서 그 책임을 더 부각시키는 보수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성윤리와 함께 한국인들의 성윤리를 규정지을 수 있는 대표적인 관점이다.

성윤리에는 결혼과 출산 중심의 보수주의 성윤리와 합의와 쾌락 중심의 자유주의 성윤리, 사랑 중심의 중도주의 성윤리가 있다. 류지한은 인간의 성욕이 지니는 특성을 본능의 차원을 일부 넘어설 수 있는 폭넓은 성적 자유와 책임, 다른 인간존재와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로서 인격적 차원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특히 “인간의 성이 지닌 인격적 차원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주는 독특한 특징”이다. 성윤리가 성욕이라는 본능적 차원과 함께 성관계를 통한 인격적 만남의 차원을 지니는 점에 주목하는 관점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다만 그때의 ‘인격’이 어떤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의 여지가 남는다.

우리 한국인들의 성윤리를 형성하는 윤리관을 셋으로 나누어보고자 할 때, 그 윤리관의 내포(內包)는 성욕의 발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의 문제이다. 즉 그 핵심 내용은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 문제인데, 그것은 다시 제도적인 근거와 기능적인 근거로 나뉜다. 보수주의 성윤리의 경우, 성욕 발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제도적인 근거는 결혼이고 기능적인 근거는 생식, 즉 자식 출산이다. 자유주의 성윤리의 경우는 각각 합의와 쾌락이고, 중도주의의 경우는 계약과 사랑이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성윤리는 결혼 제도 내에서 출산을 위해 발휘되는 성욕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자유연애 사상의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도입된 이후로 역시 우리 한국인의 성윤리관 중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자유주의 성윤리는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제도적인 기반으로 삼아 성욕의 쾌락 기능에 집중하는 윤리관이다. 그 사이에 중도주의 성윤리가 자리하고 있고, 현재 우리 한국인들의 상당수는 중도주의를 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윤리관의 기본 요건이 일관성이라는 점의 확인이다. 하나의 윤리관이 윤리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바뀌지 않는 판단과 적용, 실천의 일관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물론 윤리관이 곧 행동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후퇴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복원력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보완책이 전제될 때라야 용납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성윤리관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일관성에서 생겨나고 있다. 자신의 딸과 다른 여성에게 적용하는 윤리관이 다를 경우 그 사람의 윤리관은 온전한 것일 수 없다.

자유주의 성윤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이른바 즉석만남이나 성매매를 통한 성관계의 정당화 수준이다. 이 비율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자유주의 성윤리관의 정착 여부를 짐작해볼 수 있다. 2015년 질병관리본부에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의뢰하여 실시한 ‘전국 성의식 조사’에 따르면, 특히 20대 남성층에서 이런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성의식은 평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와 맞물리면서 성윤리관의 미성숙 또는 훼손을 가져와 자신과 타인에게 적용하는 성윤리관이 달라지는 비일관성으로 나타날 가능성 또한 높다.

특히 한국 남성들의 경우, 대부분 군대 경험을 통해 성매매 등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고 그 경험 안에 포함된 남성 중심적인 성 상품화 경향과 성 이데올로기에 포섭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혼 이후에 적극적으로 요구받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윤리관, 즉 결혼과 출산을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로 삼는 윤리관과 만나는 과정에서 왜곡과 혼재 양상으로 자리 잡아 지속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이러한 남성들의 성의식은 여성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쳐 한국인들 모두의 성윤리관을 왜곡된 형태로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각각 다른 유형의 성윤리관을 적용하고자 하는 이 땅의 많은 어머니의 경우가 그 사례이다.


3. 불교의 성윤리관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한국인의 성의식과 성윤리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데 불교는 어떤 관점을 취할 수 있고 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문제가 지니는 일상에의 파급력이 큼에도 지금까지의 불교윤리 논의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불교윤리 논의 자체가 극히 미흡한 현실 속에서 특히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고, 이 상황은 국외의 불교윤리 관련 논의까지 확대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성욕의 도덕적 정당화 근거를 묻는 성윤리관 논의에 대해 불교가 소극적인 이유는 성욕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취해 온 불교 전통 때문으로 보인다. 욕망 추구는 무명(無明)의 그림자를 지속적으로 확대 · 심화하는 것일 뿐이어서 경계해야 하고, 특히 자신의 소유 욕구에서 벗어남이 깨달음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불교 전통에서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욕망과 같은 불은 없고
증오와 같은 죄악은 없다.
이 몸과 같은 괴로움은 없고
평화로움보다 더 나은 행복은 없다.

성은 기본적으로 욕망의 문제이다. 식욕과 함께 성욕은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기본 욕망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맹자와 고자(告子) 사이의 인간 본성 논쟁에서도 식색(食色)이라는 개념으로 다루어졌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욕망, 특히 몸에 기반한 욕구는 경계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고, 현재까지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다. 불처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성욕은 당연히 억제와 절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특히 수행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음행(淫行)은 승단 추방죄라는 가장 큰 벌로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다만 재가불자들에게는 대상과 장소, 시간 등을 한정 짓는 성행위가 허용되었고, 그것은 우바새계라는 형식으로 제정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몸에 대해서도 ‘이 몸과 같은 괴로움은 없다.’고 강조하는 경전을 보면, 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괴로움의 원천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불교는 중도(中道)의 윤리를 말하지 않는가? 자신의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는 수행이나 약물 등을 통해 몸의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 모두 붓다는 경계하였음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관점들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받아들여야할까?

이 문제 말고도 불교 교리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실제로도 일정 부분 충돌할 수 있는 가르침이나 계율이 꽤 많이 존재한다. 경전의 시간적 · 공간적 허용성이나 진제와 속제의 구분을 통한 일상과 깨달음의 불이적 관계설정 등이 그러한 충돌을 해석할 수 있는 이론적 · 실천적 틀로 제안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혼란이 쉽게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윤회의 굴레를 어둠[無明]으로 묘사하는 불교철학의 핵심 전제를 떠올릴 필요와 마주한다. 윤회는 어둠 속에서 인간이 짓는 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존재의 굴레이자 비극이다. 이러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자 그 결과인 열반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과 열반은 존재의 비극적인 수레바퀴인 윤회로부터의 탈출이자 극복인 것이다. 성욕은 그런데 이러한 윤회의 굴레를 지속시켜주는 생식의 수단이자 통로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교에서는 극복의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정한 한계 안에서 성욕 발휘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재가불자들에게도 음욕과 관련되는 계는 여타 계율과 다른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재가자들이 지켜야 하는 오계 중에서 불사음계(不邪淫戒)는 다른 네 개의 계와는 다른 성중지계(性重之戒)인 것이다.

(우바새는) 마땅히 오계(五戒)를 마음으로 받아 지녀야 한다. 이 오계 중에서 넷은 후세에 특별히 더 강조되지 않았는데, 끊기가 어려워 쉽게 지킬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계는 음욕으로 인한 모든 인연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방일하지 않아야만 지킬 수 있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출가는 어렵고 거기서 기뻐하기도 어렵다.
가정생활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사는 것도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윤회의) 떠돌이에게 생긴다.
그러므로 (윤회의) 떠돌이가 되지 말고
괴로움이 빠진 자가 되지 말라.

우리는 이 두 경을 비교해봄으로써 우선 자신이 윤회의 떠돌이임을 직시하는 깨달음의 구현과 그것을 극복하는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과 마주하게 된다. 그다음으로는 그러한 윤회의 원천이 자신이 어둠 속에서 짓는 업이며 그중에서도 음욕으로 인한 업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임을 말하는 가르침과도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재가자의 성욕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우호적인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출가자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성과 관련된 행위는 대체로 가장 무거운 벌인 승단 추방죄로 다스리는 율장의 많은 사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불교의 성윤리는 현대 윤리학의 분류 중에서 보수주의 성윤리에 가까운데, 그중에서도 매우 엄격한 사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출가자의 성욕은 그 자체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고, 재가자의 경우에도 윤회의 떠돌이를 면치 못하게 하는 핵심 요인이면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로 성욕 문제를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불교의 성윤리관은 몸에 근거한 쾌락 추구를 죄악시하면서 영혼의 열망에 기반한 사랑만을 긍정하는 플라톤적 관점, 즉 플라토닉 러브를 떠올리게 한다. 플라톤에게 온전한 사랑은 영혼 또는 정신의 사랑이고, 몸에 기반한 성욕이 개입된 사랑은 타락한 것일 뿐이다.

물론 불교의 성윤리를 이처럼 극단적인 금욕주의로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중도(中道)의 윤리 또한 불교의 핵심 윤리이고 이 윤리를 성문제에 적용할 경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의 성윤리가 자유주의보다는 보수주의에 가깝고, 그것도 좀 더 강화된 보수주의 윤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성윤리관을 현재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불가피해진다.

4. 불교 성윤리관에 대한 현재적 해석과 한국인의 성윤리

21세기 초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성윤리관은 온전하지 않다. 유교윤리에 기반한 보수주의 성윤리와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성윤리 사이를 편의에 따라 오가면서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온전한 의미의 성윤리관이 정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엄숙주의 성담론과 ‘성을 가장 쉽게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상반된 평가로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성윤리관의 혼란은 당연히 외형적인 시민사회의 정착에 걸맞은 시민윤리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 전반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민주화 여정을 성공적으로 밟아온 현대 한국인들은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와 형식적 민주주의 정착의 동시 성취라는 세계사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불행히도 저항적 시민사회가 지닐 수 있는 도덕적 해이가 함께 수반하면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도덕성에서는 그다지 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최근의 미투 운동을 통해 확인하는 중이다.

이런 혼란상은 당연히 한 개인의 차원에서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한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에 대해 충분히 유념해야 하겠지만, 그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한 요인 중에는 우리 사회 전반의 성의식 수준과 성윤리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와 같이 성윤리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 동시에 유념하면서, 그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할 때 불교의 성윤리관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가) 한국인의 성윤리 문제 해결을 위한 불교의 지혜

한국인의 성윤리 문제를 불교 성윤리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연결 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인의 성윤리에 전통의 이름으로 포함된 성윤리관 속 불교의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데에서 불교 성윤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점 또는 내용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중요한 쟁점이지만, 이 작은 고찰에 담기에는 큰 주제여서 일단 제외하고 두 번째 쟁점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불교의 성윤리관은 수행과 깨달음, 열반이라는 불교 고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여정의 하위 변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수행과 깨달음, 이를 통한 열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면서 권장되는 데 비해, 방해가 되는 것들은 피해야 할 것이거나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된다. 성욕 또한 이러한 회피와 극복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불교 성윤리관의 핵심이다. 우리는 일단 이 핵심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성욕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을 불교 성윤리관에 따르는 삶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이 지닐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는 면이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일상처럼 성이 상품화되고 그것이 다시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채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욕 자체를 다스림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극복하고자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많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욕 속에 담겨 있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감안하면 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성욕은 한 번으로 충족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더 크고 자극적인 충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것에 탐닉하지 않고 아예 멀리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인간의 성욕은 맹자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고자의 적절한 주목과 같이,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타고난 본성일 뿐이다. 그 흐름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가만히 흐르게 놓아두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어느 지점에서 막고자 하거나 억지로 떨쳐버리고자 할 경우 더 큰 욕망으로 발전하여 우리를 압박해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욕에 관한 금기와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불교의 성윤리관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불교의 성윤리가 보살의 두 형태를 이루는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구별을 전제로 해서 성욕 발휘의 정당화 준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구와 우바새는 욕망의 부름에 응하지 말고 항상 그 생겨나는 마음에 응하지 말라. ……만약 음욕이 생겨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해도 아직 합하지 않았다면 참회가 가능하고, 합했더라도 음행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참회가 가능하다.

이 계경(戒經)에서는 우바새와 비구를 구별하지 않고 음욕을 비롯한 욕망의 부름에 응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지만, 《우바새계경》에서는 보살을 출가보살과 재가보살로 나누고 그 차이를 전제로 해서 계율을 설하고 있다.

만약 재가보살이 참회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면, 스승으로서 두 명의 제자를 얻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선남자여! 재가보살이 스스로 이 능력을 갖추고 큰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면, 백성을 자신의 자식처럼 보호하고 모든 악업으로부터 벗어나 선행을 할 수 있게 가르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재가보살들에게 성욕의 발휘는 부분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정당화 근거가 제공된다. 그 근거는 삿된 음행이 아닌 경우이고 그것은 다시 결혼제도 속에서 부부 사이에 발휘되는 음욕 중에서 장소와 시간을 가리는 것으로 구체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재가보살의 성윤리관은 양반 가문을 전제로 해서 혼례를 치른 부부가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발휘하는 성욕에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교 성윤리관과 상당 부분 닮아 있지만, 그것보다는 범위가 넓다고 볼 수 있다. 양반 가문에서 부부의 성행위는 주로 시어머니가 정해주는 날짜, 다시 말해서 며느리의 생식이 가능한 날짜에 한해 허용되었지만, 재가보살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의 청정성만 보장되면 어떤 경우든 허용되기 때문이다.

나) 불교 성윤리관의 현재적 해석 과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토대로 불교 성윤리관의 현재적 의미와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불교 성윤리관은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불교 고유의 목적에 포섭되면서 성욕을 수행의 과정에서 직시(直視)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데서 출발한다. 이 출발점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재가보살의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성욕 발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해주는 차별성이 나타난다. 이 성윤리관에 따르면, 성욕은 무명(無明)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면서 동시에 극복과 초월의 대상이다. 이러한 성윤리관은 성욕의 상품화와 이데올로기화를 중심으로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성 관련 상황을 성찰해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일차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상황의 직시라는 부분에서 문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 직시를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서 성욕이라는 관점에서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실천적 함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불교의 성윤리관은 전반적으로 성욕을 금기와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전통적 성윤리관을 형성하고 있는 보수주의의 그것과 가깝다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러한 보수주의 성윤리는 한편으로 결혼제도가 무너지고 있고 성을 생식의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현대의 일반적인 성윤리관에 비추어볼 때, 시대착오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불교의 성윤리 또한 금욕과 극복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성을 통한 쾌락 추구와 연대의식의 확충을 소홀히 하게 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의 성윤리는 좀 더 시야를 확대하고 적극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요구와 만나게 된다. 이 요구는 특히 성을 인격적 만남과 유대의 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중도주의 성윤리의 관점에서 부각될 수 있다. 불교의 성윤리가 보수주의의 틀을 넘어서서 성을 인격적 만남과 합일(合一)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통로로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윤리의 핵심 전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상호 연기성이고, 이 연기성(緣起性)은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과 유대, 합일의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의 근원이다. 성관계는 그러한 연기성을 자신의 체험 세계 속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관계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불교의 성윤리관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여 사회 속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성욕과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적극적인 인식과 수용은 당연히 출가보살과 재가보살 사이의 차별성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출가자의 경우는 자신이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결혼과 독신을 선택함으로써 성욕에 대한 보다 엄격한 통제와 제한된 통제 사이의 선택 또한 가능하다. 재가자의 경우도 결혼과 독신의 선택이 가능하지만 성욕의 통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승려의 결혼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만해의 경우가 불교 성윤리관의 현대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의 성욕에 대해서도 긍적적으로 인식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자연스러운 본능의 억압일 뿐만 아니라 포교와 교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을 꼽고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의 승가공동체 또한 은처자 의혹과 승려의 유흥업소 출입 등으로 세간의 비판을 집중적으로 받는 점을 감안하면, 만해의 제안을 적극적인 고려의 대상일 수 있다.

셋째, 불교의 성윤리관이 지니는 일상적 의미에 주목하면서 그 의미와 현재적 해석의 과제를 제안해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각자도생의 이념과 일상적 풍요와 편의의 추구라는 지향을 기반으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성욕은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넘나들면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의 중심으로 부각되어 있고, 윤리를 전제로 하는 법률과 이 욕구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가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정이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성윤리 교육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불교의 지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상 차원의 그것은 걸림없음[無碍]이다. 우리는 성욕을 비롯한 본능의 충족을 통해 생존을 보장받는다. 그런 점에서 식욕과 성욕으로 대표되는 욕구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적절한 충족의 대상일 뿐이다. 불교의 지혜를 통해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그 ‘적절함’이다. 욕구충족의 적절함은 다시 양의 문제와 함께 그 충족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의 문제로 귀속된다. 먹는 양의 적절함은 그것이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우리 앞에 놓였는지에 대한 평가에 의존한다. 성욕의 경우 그 양의 문제는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상대방의 숫자와 함께, 그 인격적 만남의 수준이라는 질적 문제로 연결된다. 그런 적절함이 갖추어져 있다면 성욕의 추구와 성취는 정당화될 수 있고, 불교계에서는 재가자에게 일차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일상적 깨달음을 위해 권장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5. 맺음말

현대 한국인의 성윤리는 성윤리 성립의 기본 요건인 적용의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의 전제이다. 성욕 발휘 과정과 결과에서 도덕적 정당화 근거를 찾기보다는, 순간적인 쾌락의 추구와 무책임성이 발휘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요건과 출산이라는 성욕의 기능적 요건에 초점을 맞추던 유교 중심의 보수주의 성윤리가 급속도로 무너진 곳에, 각각 합의와 쾌락 중심의 자유주의 성윤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채 표류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 글의 분석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란상은 한국인 개개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해결되어야 하는 수많은 문제를 양산하는 요인이 되고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 대안 모색의 과정에서 우리는 불교의 성윤리관이 줄 수 있는 지혜를 함께 찾아보고자 했다. 우선 불교의 성윤리관은 깨달음과 열반이라는 종교적 목적을 전제로 삼는 수행의 과정에서 성욕의 크기와 강도를 직시하면서 금욕과 극복의 대상으로 제안한다. 그러면서도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일정한 차별성을 인정하여 재가자에게는 장소와 시간의 삼감을 전제로 성욕 발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불교의 성윤리관이 현재 상황에 맞게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특히 일상에서의 걸림없음이라는 불교의 지향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본능으로서 성욕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인격적 만남과 합일의 경험을 통해 연기성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의 성욕 발휘 과정은 구 자체로 금기의 대상이 아닌 수행의 과정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의 성윤리관이 이러한 일상의 지혜로 재해석되면서 수용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현대 한국인들의 성윤리 문제는 물론 그들의 일상에 의미 있는 제안이자 실천지침으로 살아날 가능성 또한 열릴 수 있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장, 본지 편집위원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