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1. 미투: 시대정신으로서의 공감과 연대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성폭력이라고 하는 판도라 상자가 열린 듯하다. 오랫동안 꾹꾹 눌려 지하에 있었던 것들이 세상에 마구 쏟아지고 있다. 정치, 예술, 학계, 종교를 막론하고 명망 있는 인사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면서 많은 사람이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우리는 이 폭로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고, 피해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짓밟아왔는지 함께 듣고 목격하는 중이다.

과거에도 성폭력 사건은 일어났고 고발 또한 없지 않았지만, 최근의 이 성폭력 고발 운동 즉, 미투(#Me Too)는 예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신분과 함께 가해 사실을 폭로한다. (물론 모든 피해 여성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은 아니며,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성폭력이 주로 과거에는 비밀이 보장되는 치료공간에서 이야기되었다면, 미투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실명 폭로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하였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피해 여성으로부터 ‘미투, 나도 당했다’는 연대 지지를 얻는 방식이다. 즉, 미투 운동은 이처럼 공개성과 연대성을 통해서 강한 파급력을 가지게 된 것인데,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시민들의 ‘함께함(with you)’이다.

미투의 이와 같은 성격들이 가능하게 된 물적 조건으로 사회적 연결망 즉 SNS(Social Network Services)가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기존 미디어 시스템에서는 검열과 억압 등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정보를 횡적으로 소통하는 소셜 네트워킹 시스템 속에서 여성들의 외침이 그대로 전파되었고 또 그들의 이야기가 곧바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작년 2017년 미국에서부터였는데, 우리 사회에 곧바로 전달되어 전파되는 배경에 이러한 사회 연결망 활성화의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정치 지형을 포함한 많은 시대적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는 점은 여러 전문가가 이미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물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의식적인 변화 역시 이 운동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사회는 최근 촛불혁명으로 민주의식이 한층 더 성숙해져서,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감수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 작용하는 권력남용의 문제와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커지면서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투 운동은 촛불의 연장선이며, 미국 유럽에 이어 한국에서 유독 미투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도 이 요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촛불혁명을 통해 공감과 연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는지 목격했다는 것이다. 미투는 단지 성폭력 가해자를 폭로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조직 내에서 불가피하게 침묵해야 했거나,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 큰 불이익을 받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조직 내에서 무시되면서 해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부당한 경험에 대해 사회적 고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말하기 자체가 치유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치유는 각성된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정의의 회복을 위한 사회적 치유의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미투 운동을 불편한 폭로 그리고 개인적인 일탈과 성적 스캔들 문제로만 제한하여 바라보아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와 지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투에 대한 공감과 연대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민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이 운동과 어떻게 사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불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다음의 경전 말씀이 여기에 잘 부합하지 않나 생각한다.

모든 생명은 폭력 앞에서 떨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듯 남도 그러하니, 그 누구도 괴롭히지 말라.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남에게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준거는 인간의 가장 성숙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이끌어낸다. 폭력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구가 있을까. 불교의 생명사상은 이처럼 폭력에의 두려움이라는 공감에 기반하여 제시되어 왔다.

성폭력은 폭력의 문제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려고 하는 행위이며, 이때 성(sex, sexuality)이 매개가 되어 일어난 폭력이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불교의 관점이 성폭력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막는 요소는 무엇인지, 미투의 목소리를 통해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2.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이해와 발생의 구조 분석

1) 성폭력과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

성은 친밀한 관계의 표현이자 쾌락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폭력 또한 쾌락의 시각에서 종종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은 실제로 자신의 의사에 반한 이 강압적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의 무력감을 경험하는 죽음과도 같은 폭력을 느낀다. 성폭력 피해자들 가운데 종종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인격 살해’라고도 불릴 정도의 폭력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성폭력의 문제는 성의 문제로 보기보다 폭력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있다. 소위 야한 농담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하는 성희롱을 잘하는 불교계 인사가 있었다. 남녀가 여럿이 동석한 자리에서 그의 언어 성희롱이 길어지자, 한 여성이 참다못해 이를 더 노골적인 성적 이야기로 맞받아쳤다. 사람들은 인제 그만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바탕 웃고 말았으나, 그 남자 인사는 얼굴이 매우 굳어졌고 이후 뒤에서 그 여자의 입이 더럽다며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가 단지 성적 희롱을 즐기는 것이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태도이다. 자신이 들으면 불쾌한 소리일망정 남에게 함부로 떠들어댈 권력이 자기 이외에 있지 않다는 지독한 만용이었다. 성희롱 역시 성보다 권력과 연관된 폭력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 또한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연민은 대체로 심한 육체적 손상을 초래하여 무력하게 된 경우 즉, 전형적인 피해자일 경우에만 적용되곤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 같은 사회적 고정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무력한 여성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거나 때로는 적극적으로 피해를 폭로하고 개선하려고 행동하면 뭔가 불순한 동기를 가진 것으로 의혹의 시선을 받게 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적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나약한 모습으로만 규정하고자 하는 의식은 또 하나의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지적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불교인들이 종종 보여주는 편견이 있어 사례와 함께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몇 해 전, 주지 스님들 연수교육에 ‘현대사회의 성문제와 불교’를 주제로 강의하게 되어, 관련 주제에 대해 스님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한 비구니 스님이 내내 답답한 표정을 짓더니 질문했다. 스님의 먼 친척뻘 되는 미성년 여자아이가 원조교제를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서 억지로 절에 와 있는데, 도통 이 아이를 교육할 방법이 없다는 호소였다. 스님이 “네 업이 두터우니 참회의 절을 하라.”고 하였더니 더 어긋나서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 스님에게 원조교제를 한 미성년들의 경험은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연구보고를 말씀드렸다. 시간이 많지 않아 긴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그 스님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누그러지며 진지한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이어진 강의 시간에 매우 밝은 표정을 지었는데, 스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에 대해 처음으로 찡하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드디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스님들은 출가자로서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기 때문에,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연민의 마음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것을 보곤 한다. 하지만 종종 스님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연민이 발휘되기보다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문제에서 그 고정관념은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성의 일탈이라는 나쁜 업을 참회하는 것은 분명 불교의 중요한 수행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업의 문제 이전에 그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는 사실과 그 고통이 어떤 성격인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가 분노에 가득 차 남성 전체를 적대시하고 우리 사회를 갈등으로 분열시킨다는 우려 내지 비난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런 견해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동기로 이 폭로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은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 즉 피해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자기비하와 우울증, 이로 인한 자살 기도 등이 있다. 사회적인 공포 또한 적지 않은데, 성폭력 문제를 스스로 자초했다는 비난과 오명, 정조 등 여성성이 훼손되었다는 낙인, 특히 자신의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받게 될 두려움이 크며, 보호받거나 구제받지 못하는 절망 등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필자가 직접 만난 여성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였다. 친족이나 학교 선생님 그리고 직장 상사 등에게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그들의 고통은 대부분 주변에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마음에 묻어두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적 후유증은 결코 조용히 묻히지 않았다. 이성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사람들과 신뢰와 유대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보호해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원망 등으로 가족 관계에서도 문제양상이 나타났다.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경우에서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집단적으로 피해자를 왕따 시키고 비난하는 방식의 2차 폭력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많은 피해 여성에게 고통스러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었다. 폭력을 당한 것에 대해 사과를 받기는커녕 보호와 위로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피해사실이 인정되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지만,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좌절과 무력감에 자기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유독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자신의 시각 확대에 있음을 알아가고 있었다.

미투 폭로 여성들도 한결같이 자기비난의 고통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이토록 강한 두려움과 심한 좌절 그리고 자기비난의 고통 속에서도 폭로의 방법을 선택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일을 겪지 않도록.”

딸아이의 엄마는 다음 세대에 이런 악습이 전해지지 않게 하려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여전히 두렵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정의감과 이타적 관심으로 인해 외친다고 그녀들은 말한다. 자신의 분노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러한 용기를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외침을 더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2) 성폭력은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가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는 가해자의 특수한 일탈이나 병리적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에 더 강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대체로 젠더의 경향성으로 분석되는데, 여성들은 후자의 방식 즉,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현실의 조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포를 느낀다.
성폭력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와 연관된 문제인지, 무엇을 개선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다. 폭로된 내용을 보면 대체로 성폭력은 힘 있는 윗사람이 약자인 아랫사람들에게 저지른 위계에 의한 권력범죄 형태를 띠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의 교수나 학교 교사들이 학생에게, 문화예술계 감독이 소속 배우나 지망생들에게, 군대와 검찰,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에게, 그리고 종교의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말이다.

가해자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 이를 따르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혹은 지위나 인사에서 막강한 힘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불이익에 대한 우려, 또는 협박으로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적 범죄가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차별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폭력을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의 구도로 바라보면서 지나친 젠더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94%가 여성이라는 압도적인 비중 속에서 성폭력을 성차별과 무관하게 보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하고 여성을 약자로 간주하는 성차별주의에 있다고 지적된다. 실제로 성범죄자들의 여성관을 보면 여성혐오나 여성멸시 의식을 가지는 경향이 매우 높다고 보고되었다. 따라서 성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성차별 제도와 의식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어렵다고 하겠다.

특히 한국사회의 남성 중심의 성문화는 구조적인 젠더 불평등과 폭력성을 매개하면서 유지, 재생산되고 있다. 성적이라는 것이 남성의 관점에서만 구성되고, 여성의 위치가 권력의 우위에 있는 남성의 사적 소유물로서 공고화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공고한 사회구조일수록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남성의 욕망과 성적 폭력의 대상인 여성의 위치를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기제가 된다고 지적된다.

성폭력이 발생하여 피해 사실을 알려도 문제가 개선되기 어려운 점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일지 모른다. 피해 폭로 사례에 따르면 많은 여성이 겪고 좌절한 내용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성폭력 가해자를 견제하지 못하고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없게 하는 폐쇄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이것은 조직의 가부장적 문화 또는 비민주적인 운영과도 연결된다.

성폭력이 일어난 곳은 대부분 주위의 견제를 받지 않는 왕국과도 같은 곳들이었다. 이 왕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들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군림하였고, 저항하거나 문제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씌우거나 나쁜 소문으로 괴롭히고, 불이익과 퇴출 등으로 고통을 주었다. 가해자가 이렇게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조직은 대체로 묵인하거나 무관심하였는데, 피해 여성이 성폭력을 외부에 폭로할 경우에는 오히려 그 조직이 적극적으로 은폐하거나 방어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인권이나 사회정의보다는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 더 우선인 조직 중심주의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 아픈 상처를 받기도 하였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애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성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의 요소들을 분석해 보면, 성차별을 기반으로 하여 위계 권위주의로 인해 발화되고, 폐쇄적인 조직구조가 이 문제를 지속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한국불교의 권력구조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현재 한국불교계 또한 여타의 종교계와 마찬가지로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부분에서 개선과 변혁이 필요한지 도출하는 과제가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3. 한국불교의 성폭력 문제와 권력구조

한국의 미투 운동은 종교 지도자들의 성폭력 가해 또한 폭로하여 세인들에게 더 큰 탄식과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에는 현재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가톨릭 신부와 몇몇 개신교 목사 외에도 불교계 승려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종교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인들의 성범죄는 보통 종교 내적인 계율의 측면에서 먼저 언급되곤 하지만, 검거되어 입건된 비중에서 이들의 범죄가 전문직군에서 가장 높다는 보고가 있어 종교인 성범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즉, 경찰청이 공개한 ‘2010~2016년 전문직군별 성폭력범죄 검거 인원수’ 자료에서는 종교인의 숫자가 의사, 예술인, 교수 등보다 많은 681명으로 1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의 비중과 비슷하게 다음으로 의사 직군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신적 분야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종교 지도자와 몸과 정신의 건강에서 권위자인 의사가 성범죄 직군의 1, 2위를 나란히 차지한다는 점은 이 문제가 얼마나 위계적 권위구조와 연관되어 나타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종교인들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금욕주의 방식의 독신제도 문제가 늘 함께 제기되어 왔지만, 기혼자인 개신교 목사들의 성범죄도 적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문제의 원인을 그 방향에서 찾는 것은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또한 남성의 성적 욕망이 성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견해는 오랫동안 여성주의자들이 도전하고 비판해온 관념이기도 하다.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이 관철되는 구조에서의 권력에 있다는 것이다.

뒤에서도 다시 살펴보겠지만 종교에서 견지해 온 금욕주의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기보다는, 성에 대한 억압적인 의식이 여성을 멸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차별과 혐오는 성폭력의 한 조건으로 제기되었다. 자발적으로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여전히 종교의 중요한 수행의 하나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금욕제도는 성직자의 위계적 권위가 확보되는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성폭력 범죄와 같은 권력남용이 일어날 경우 이들에게 더 강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승려들의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런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는데 즉, 개인의 ‘위선적’이고 ‘뻔뻔스러운’ 일탈로 주로 비판되면서 몇몇 문제적 승려들만 ‘제거’되면 집단의 ‘청정’함이 유지될 수 있다는 기대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성문제에 연루된 불교계 승려의 경우, 특히 ‘은처승’이라는 명칭이 빈번하게 제기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불교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 시각이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처(妻)가 있는가, 없는가로 구분하는 명칭 자체가 남성의 관점에서 부여된 것이며, 성폭력의 문제를 숨겨둔 부인이 있는 문제로 희석화시키기도 한다. 즉 문제의 초점에서 폭력은 사라지고 부인이 있는가로 전환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여러 유명 인사들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문제의 원인을 자체적으로 진단하면서, 이 분야의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를 제기하였다. 지금 한국불교계에서 드러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권력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근본적인 원인 규명을 시행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의 일탈과 파계로만 이것을 바라보아서는 종교인으로서 각성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 어렵다.

따라서 앞에서 도출한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의 세 가지 조건 즉, 성차별주의, 위계구조, 그리고 폐쇄적인 조직문화가 한국불교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나아가 어떤 권력구조가 한국불교의 심각한 위기와 연결되어 있는지 개략적이나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성차별주의

종교인의 성폭력 범죄에서 성차별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그 연관성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종교 교리를 가부장적으로 해석해온 전통의 영향도 언급되었다. 불교의 경우, 남자로 태어나는 것에 대한 특권의식을 포함하여 남성우월주의와 여성멸시 등의 교설이 경전에 반영되어 있어, 불교의 성차별주의가 교리적인 명분에서 세워지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성차별적 교설은 변성성불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크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비구니 스님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내면화되어 있고, 그래서 여성성이 드러나는 것을 매우 경계하여 차라리 남성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계율의 측면에서 보면 비구니들이 남성들과 가깝게 자리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여성들과의 분리를 지향하는 이런 점 때문에 공양이나 여러 의식의 자리에서 여성보다 남성 쪽에 주로 앉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 신도들에게 특히 많이 언급된 교설은 여성의 성역할론과 결부된 《옥야경》이다. 높은 보살의 서원을 세운 승만 부인 또한 재가 여성이 지향할 바로 종종 제시되어 왔지만, 일반 여성들의 일상에 보다 가까운 가르침으로 왕성하게 해석된 것은 《옥야경》 쪽이었다. 남편과 시집의 어른들에게 순종적이고, 가정 내에서 주부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옥야의 맹세를 찬탄한 이 경전의 이야기는 라디오 법회 등을 통해 널리 보급되어온 단골 법문 내용이기도 했다.

한편,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국불교 역시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의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되곤 한다. 서구에서 불교는 매우 진보적이고 평등한 성격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아시아 특히 한국불교에 와서 보니 너무 남성 중심적이라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숭산 스님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한 여성 법사 바바라 로즈(Bar-bara Rhodes, 법명 성향) 또한 이런 경험을 소개했는데, 한국에 와서 자신은 스님의 제자가 아니라 하인이 된 것 같았고, 남자들의 그림자같이 행동해야 했다고 말해, 한국불교 문화의 가부장성이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유교화된 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견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가 극복되지 못한 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재 한국불교가 자기 위상을 전통문화의 담지자로 확보하고 있는 점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교계 지도자들은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문화를 떨쳐내어 한국의 불교를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문화에 대한 찬미와 결부된 ‘한국불교’ 자체를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한국불교의 성차별성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근현대 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고찰되는데, 자세하게 논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어 추후 후속 연구를 통해 발표하고자 하며, 여기서 대략적인 면만 언급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근현대 한국불교는 개항기 기독교로부터 씌워진 여성적 이미지-나약하고 비지성적인-를 탈피하고자 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위 ‘치마불교’라는 명칭은 그래서 매우 복잡한 산물인데, 기독교가 불교를 여성화하고, 또 불교가 자신의 여성성을 스스로 떨쳐내고자 했던 과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비구 · 대처 정화운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은 비전통적이고 비정통적인 일제의 대처문화를 극복했다는 명분으로 한국불교의 적자 위치에 서서 현재 주요 사찰을 점유하고 있는 압도적인 주류 종단이다. 정화운동에서 비구니들의 참여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연구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운동은 ‘청정비구’ 전통의 계승으로 명명될 뿐이다. 즉, 정화의 주체는 비구이며, 나머지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부인을 둔 승려, 비구가 아닌 자, 여성들이 차례로 포함된다. 불교정화운동에 대해서는 조계종 중심의 해석만 제시되어 왔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서 정화운동의 부정적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폭력에 대한 불감증은 물론이고, 청정함에 누가 될까 여성을 혐오하고 성에 대해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강하게 심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기 때문이다.

불교가 여성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애욕을 떨쳐내어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강박적인 여성혐오는 지혜보다 집착이며 폭력이다. 성문제를 일으킨 범죄자들이 성과 여성에 대해 혐오적 시각을 더 강하게 갖는 것을 보면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결코 혐오적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를 혐오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폐불일 것이다.

2) 출 · 재가 위계구조

종교 성폭력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성직자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계구조에 따른 폭력이라는 것이다. 세간에 이슈가 된 한 대형교회 목사가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면서 여성들에게 순종을 강요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이 급진주의 여성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가 지적했듯이 “신이 남자면, 남자가 신이 된다”고 하였는데, 한국에서 드디어 신이 된 남자(목사)가 출현한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부처님이다’라고 대놓고 군림하는 승려는 역사적으로는 종종 발견되지만,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불교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문화 속에 부처님과 동급의 승려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삼귀의 의례 문구와 승려 삼배가 그것이다.

불교는 부처님과 법 그리고 승가를 삼보로 여기며, 여기에 귀의하는 것을 불교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다. 승가(saṅgha, 僧伽)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승려 개인을 승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즉 불자가 의지처로 삼아 돌아갈 곳은 승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승가(좁은 의미에서는 성자의 계위에 오른 승가)인 것이다.

승가가 한역에서 단순히 승(僧)으로 축약되면서, 승은 공동체와 승려 개인을 모두 지칭하는 중의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의례문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스님들’로 고착되고, 공동체로서 승가의 의미가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불자들은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에 이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삼보가 된 스님에게 부처님처럼 세 번의 절을 하는 것이 불교의 의례가 된 것이다. 승려 개인을 귀의 대상으로 삼고 부처님과 동급의 예를 올려도 좋은가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이와 같이 (남성)승려의 위상이 부처님 같은 높이로 격상되어가던 무렵,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불교 영화에서는 성적인 희롱과 추행들이 마치 큰 가르침인 것으로 위장한 내용이 마구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근엄한 노비구승이 어린 사미니에게 깨우침을 주겠다고 옷을 다 벗으라는 장면이나, 치열한 비구니 수행자의 구도를 시험하겠다고 성추행을 견디게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강간 장면이 영화나 미디어에 미화된 형태로 많이 표현될수록 실제 강간 사건이 매우 증가한다는 연구가 지적하는 것처럼,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이처럼 구도를 가장한 폭력이 무비판적으로 노출된 것이 불교 성폭력을 얼마나 부추겼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남성에 대해 거부하기 무척 어려운 형태로 이루어지며, 종교의 경우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위장하여 더욱 교묘하게 행해지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출 · 재가 그리고 남녀의 이중적이고 뚜렷한 위계문화는 이러한 성폭력 발생조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라고 판단된다.

3)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찰 조직

마지막으로 점검할 내용은 성폭력이 은폐되고 고발되어도 해결되기 쉽지 않은 구조에 대한 것으로서 사찰의 폐쇄적인 구조 그리고 비민주적인 운영방식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는 무리 지어 수행하는 공동체를 승가라고 하며 이 승가를 삼보로 여겨 중시해 왔다.

승려를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지만, 무리를 뜻하는 중(衆)은 승려들의 생활방식이자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불교 승려들은 더 이상 무리 지어 살지 않는다. 강원, 선원 등 일시적인 기간에 함께 머물기는 하지만, 개별 소유의 사찰이 따로 있으면서 홀로 지내는 승려가 대다수라는 것은 불교계의 상식이 되어 버린 일이다.

성폭력으로 입건된 승려들의 사례를 보면 대체로 개인 소유 사찰에서 범행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공사찰의 경우에도 견제하고 감시하는 눈이 없는 경우가 많아, 이와 같은 폐쇄적인 사찰 구조가 성폭력 문제의 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찰의 폐쇄성은 비단 공간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찰 재정의 불투명은 오랫동안 불교계 안팎에서 비판되어온 내용이기도 한데, 이런 점은 성폭력과 성일탈 등이 아무런 제재 없이 자행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켜보는 타인의 눈이 없이는 인간다운 행동을 견지하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수행자는 무리 지어 함께 생활하지 않고는 청정한 계율을 유지하기 어렵다. 개인 소유화된 한국불교의 사찰 구조와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일부에 의해 독점적으로 전횡되는 사찰 재정 문제가 결국 성폭력을 지속시키고 개선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성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의 여러 분야와 비교하고, 한국불교계의 독특한 구조와 연결하여 살펴본 이유는 이 문제가 결코 하나의 문제가 아니며, 불교 내부의 시각만으로 제한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들만의 외침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계 내부에서 스스로 자정하는 노력이 없다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많은 불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사회가 현재 시민들의 지켜보는 눈과 소통하는 입으로 정의를 바로 세워가고 있듯이, 한국의 불교 또한 시민운동의 힘이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연민(karuna)’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 또한 실체가 없으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조언은 연민을 잃어버린 불교라고 생각한다. 연민을 기반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폭력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불자들이 많아지면, 이들이 모여 이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풀어가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박사) 졸업.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조교수 등 역임. 저서로 《여성주의 불교수행론》 공저서로 《한국 비구니 승가의 역사와 활동》 《한국 여성 종교인의 현실과 젠더 문제》 《불교와 섹슈얼리티》 등이 있으며, 역서로 《열정적 깨달음(딴뜨릭 불교의 여성들)》(미란다쇼 지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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