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구 이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1. 들어가는 글

실재란 사물의 본질적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불교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실재에 관한한 모든 사상의 공통점은 유물론이나 유심론을 막론하고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며 모두 실재에는 고유의 특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점이다. 고유의 특성이란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있는, 사물의 본질을 결정하는 성질”을 뜻하는 말로서 불교적 용어인 자성(自性)과 같은 뜻으로 보아도 좋다. 유물론에서는 물질에 그러한 특성이 있고 유심론에서는 마음이나 신에 그러한 특성이 있다고 본다. 요즈음 일부에서 대승불교와 사상적으로 무척 닮았다고 주장하는 힌두교에서는 브라만(Brahman)이 궁극적 실재로서 고유의 특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범아일체(梵我一體)이니 아트만(Atman) 역시 자성을 가진 궁극적 실재로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궁극적 실재로 보든 그것이 변함없는 자성을 가졌다면 그것은 객관적 실재일 것이다.

실재에 관하여 불교는 아주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다. 바로 무아론(無我論) 또는 공(空)사상이다. 불교에서는 상주불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객관적 실재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불교에서는 공보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같은 무아론(無我論)을 주장해 왔지만 무아사상이나 공사상 모두 부처님의 연기설을 바탕으로 삼고 있고 상주불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을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무아론만큼 사람을 당혹케 하고 오해를 받은 교의(敎義)는 없을 것이다. 불교가 업과 윤회를 말하고 인과응보와 사람의 도덕적 책임을 말하면서 영원한 자아를 부정한다면 이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이 아니냐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과거의 어떤 존재가 인연 조건에 의해 나와 연결되었다고 해도 그와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한 일이 나에게 업으로 작용하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상주불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전적 개념으로서의 실재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불교 경전이나 논서 곳곳에 존재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이들 중에서 현대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주목할 만한 개념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이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서 말하기를 일심에는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있으며 진여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공’이며 그 둘은 ‘불공’이라고 하였다. 불교가 실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일심이 존재의 근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궁극적 실재’로 본다면 공은 실재가 갖는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공이라는 말도 있지만 여기서는 실재에 관한 불교적 관점을 일단 ‘공’이라고 보겠다. ‘공’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이다. ‘공’을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고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공’사상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교의 공사상은 단순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공’이 갖는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성질 즉 이중성(二重性, Duality)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일차적 의미는 분명히 ‘비어 있는 것’이지만 이 ‘비어 있는 것’은 단순히 비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신묘한 작용을 한다고 불교경전은 설하고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그것을 뜻한다. 이것은 ‘공’이 이중성(二重性)을 갖는다는 뜻이다. 사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가 공의 이중성을 가리키고 있다. 단순논리로 공을 이해하려 들면 불교를 허무주의로 볼 수밖에 없게 되고 불교가 설 땅은 없어진다.

불교적 실재가 갖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하는 분별지(分別智)로는 진리를 알아낼 수 없다고 본다. ‘공’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고 논리를 초월한 직관적 깨달음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반야지(般若智)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야의 지혜를 얻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하는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다. 반야지를 인정할 수 없다면 불교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논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은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이라고 본다. 이런 이유로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물리학적 관점을 비교해 보는 것은 뜻있는 일일 것이다.


2. 인간 지성(知性)의 한계

인간의 이성에는 근원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성향이 있다. 실제로 분별지에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엄밀한 수학적 증명이 있다. 이 증명을 괴델(Kurt F. Goedel, 1906~1978)의 ‘불완전성 정리(不完全性定理, Incompleteness Theorem)’라고 하는데 이 정리를 증명을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정리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의외로 쉽다.
인간 지성의 결정체가 수학이고 수학에는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오래 전부터 수학의 체계에는 모순이 없음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그만 엉뚱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괴델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 체계 안에는
옳고 그름을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적어도 하나는 이 공리체계 안에 존재한다.

수학의 공리체계가 완전하다면, 즉 모순이 없다면, 이 공리체계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이 공리체계만으로는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엉뚱한 결과를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데 처음의 것을 ‘괴델의 제 1 불완전성 정리’ 두 번째 것을 ‘괴델의 제 2 불완전성 정리’라고 부른다. 이들을 풀이하여 설명하자면 “분별지로 시비를 가리려 들면 옳은지 그른지 판별할 수 없는 경우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과 “분별지로 판단한 것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더 큰 지혜가 필요하며 이 큰 지혜가 판단한 것도 또 더 큰 지혜가 있어야 하고 이렇게 한없이 큰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말하는 것은 수학에 어떤 모순이 있다는 애기가 아니다. 이 불완전성정리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는 근원적으로 이율배반적인 성향이 있어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학으로 수학의 완전성을 증명하려고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이성의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이유는 사물을 기술하는 주체가 자신에 관해 기술했기 때문이다. 주체가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논리학에서는 자기언급(自己言及, Self-Reference)이라고 말하는데 이때는 주체가 객체도 되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으면 주체=객체가 되어 즉 주체가 주체이기도 하고 주체 아닌 것, 즉 객체이기도 하여 모순율에 어긋나게 된다.

자기언급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정리가 말하는 내용을 관찰자인 사람과 관찰대상인 자연계와 관련하여 설명하겠다. 자연에 객관적인 실재가 있다면 이 객관적인 실재를 기술하는 데에는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관찰자가 자연을 기술하는 것은 자신에 관하여 관찰하고 기술하는 것이 되므로 이율배반적인 일이 일어나고 자연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데에 어떤 근원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해 현대물리학은 명쾌한 답을 내린다. 현대물리학에서는 관찰자의 관찰행위와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3. 자연의 이중성과 인간 인식(認識)의 한계

사람은 사물을 두 가지의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개념으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개념들 중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다루거나 언급되는 것 몇 가지만 열거해 보겠다.

① 입자(粒子)-파동(波動)
·실재(實在)-현상(現像)
·셀 수 있는 것(countable)-셀 수 없는 것(uncountable)
·똑 똑 떨어진 것(discrete)-연속적인 것(continuous)
·갇혀 있는 것(localized)-전파되는 것(propagating)
② 진실(眞實)-허위(虛僞)
③ 유(有)-무(無)
④ 주(主)-객(客) : 관찰자 - 관찰대상
⑤ 정신(精神)-물질(物質)

20세기 초까지 물리학자들은 자연현상에서 이중성을 발견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복사열(輻射熱)에 관한 연구를 하다가 빛이 에너지를 가진 덩어리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빛이 입자라는 뜻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빛이 파동이라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연구 결과에 의해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튕겨내듯이 빛이 다른 입자를 튕겨내는 것이 관찰된 후로는 물리학자들은 빛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하는 현상도 관찰되었다. 이제는 모든 입자들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갖는 것이었다.

입자-파동의 이중성은 위에 열거한 몇 가지의 대립되는 성질 말고도 믿어지지 않는 성질이나 현상들을 수없이 보여준다. 입자를 관찰하면 분명히 한 개의 입자인데 관찰하지 않으면 하나의 입자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소급하는 인과 현상도 보여주는 등 여러 가지 역설적인 일이 일어난다. 이중성은 결국 자연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이중성의 발견으로 인해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버그(W. Heisenberg)는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 原理, Uncertainty Principle)를 제창하게 된다. 이 원리는 보통 “입자의 위치(位置)와 운동량(運動量)은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라고 표현된다. 운동량은 입자의 질량(質量)에 속도를 곱한 것으로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도 의미에 변화는 없다.

이 불확정성 원리를 일반화 시킨 것을 보아(N. Bohr)의 상보성 원리(相補性 原理, Complementary Principle)라고 하는데 이 원리의 내용은 이렇다. “자연을 기술하는 기본적인 물리량에는 반드시 어떤 상보적인 물리량이 대응하고 기본적인 물리량과 상보적인 물리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두 가지 물리량(物理量)이 서로 상보적이라는 말은 “두 양이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개념”에 대응한다는 뜻이다.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서 대표적인 것을 꼽는다면 음(陰)과 양(陽)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보아는 “동양의 음양설(陰陽說)은 상보성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말하였다.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개념”이라면 “상보적인”이라는 말 대신에 “양립(兩立)할 수 없는(Incompatible)”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지만 보아는 “서로 돕는다.”는 뜻을 가진 “상보적인”이라는 말을 썼다. 음과 양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우주는 음과 양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뜻에서 그렇게 쓴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때때로 “상보적인”이라는 말 대신에 “양립할 수 없는”이라는 말을 쓴다.

상보성원리는 단순히 불확정성원리를 수식적으로 일반화시킨 것이 아니고 불확정성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바탕을 마련해 주고 있으며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중성이 자연의 본질이라면 궁극적인 실재도 이중성을 갖는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이런 뜻에서 현대물리학은 『반야심경』이나 『대승기신론』을 분별지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나 상보성 원리는 물질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의 분석행위(分析行爲)마저 측정결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4. 물리적 실재

물리학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을 통해 정의(定義)한다. 이렇게 물리량으로 기술할 수 있는 존재를 물리적 실재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실재가 이렇게 물리량을 통해서 정의된다면 측정 전에도 물리량에 관해서 얘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리학의 이론이 측정 전에도 물리량에 관해 예측할 수 있다면 이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측정을 통해서만 물리량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객관적 실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은 관측행위가 관측결과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위치를 측정하면 이미 물리계는 측정전과 달라지고 속도를 측정하면 물리계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달라지므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한다면 빛이 입자에 부딪친 후 측정 장치에 도달한 빛을 보고서 입자의 위치를 알게 된다.

그런데 빛이 입자에 부딪친 순간 빛은 입자를 때려 튕겨나가게 하므로 입자의 속도가 크게 바뀐다. 입자가 어디에 있다고 관측결과를 얻는 순간 이미 입자는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 즉 상보적인 양 양쪽에 어느 정도의 불확정도(Uncertainty)를 갖고 입자의 상태를 측정하거나 아니면 철저히 상보적인 중의 어느 한 쪽을 무시하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입자의 상태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관측행위는 관측결과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상보적인 물리량들의 조화에 의해 기술되는 우주에서 상보적인 양 하나를 무시하고 관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이 보는 현상계는 객관적인 실재일 수가 없다. 인간이 보는 것은 자기가 창조해서 보는 것이다.

측정전의 그 무엇을 객관적 실재라고 상상해 볼 수는 있다. 측정 전의 그 무엇은 파동으로서 파동함수로 기술된다. 그런데 파동함수는 추상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입자가 보여주는 파동성은 입자가 해파리처럼 널리 퍼져서 진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진동현상이 아니다. 이 파동은 입자가 존재할 확률을 말해주는 확률파(確率波)다. 물결파는 물이 진동하는 현상이고 음파는 공기나 기타 매질이 진동하여 생기는 것이지만 확률파는 실재하는 무엇이 진동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확률파에는 아무런 실재도 없다. 그저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존재나 상태가 어떤 확률을 가지고 중첩되어 있을 뿐이다. 만약 파동함수가 고양이의 상태를 기술한다면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중첩된 고양이를 나타낸다. 이런 고양이가 실재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동을 기술하는 파동함수는 확률과 관계있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정보가 파동함수에 들어 있다고 본다. 인간이 측정하여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파동함수가 포함하고 있는 많은 가능한 상태들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적 해석에 의하면, 인간이 보는 현상계란 이 파동함수가 그려내는 여러 가지 가능한 세계 중에서 관찰자가 하나를 골라서 보는 것이다. 현상계란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에서 상보적인 물리량들 중 어느 한 쪽을 무시하고 인간이 창조해낸 것으로서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보적인 양들을 모두 포함하는, 파동함수가 그리는 세계를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 같은 온갖 상보적인 요소들이 중첩되어 있는 것을 실재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상계도 실재가 아니고 측정하기 전 파동으로 기술되는 그 무엇도 실재가 아니다.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으면서도 파동함수가 물리계를 기술하며 존재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그 어떤 것, 즉 존재의 근원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굳이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공(空)보다 더 적당한 이름은 없을 것이다. 추상적인 세계라 공이라고 불렀지만 온갖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리는 없을 것이다.

관측행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분석행위마저 물리계에 영향을 미친다. ‘너’와 ‘나’로 나눌 수 없는 ‘그것’에서 ‘우주’와 ‘나’를 생각하는 순간 나타난 우주는 이미 ‘그것’과는 다른 우주라는 뜻이다. 여기에 대한 실험적 증거가 있으니 그것을 EPR실험이라고 한다.

5. 전체로서의 하나

양자역학은 물리학이론으로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양자역학의 인식론적 기반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제기한 EPR(Einstein, Podolsky, Rosen)가상실험(假想實驗)일 것이다. 실재성에 관한 보아의 해설을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받아드릴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객관적인 실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보아는 『대승기신론』이나 『반야심경』의 지지자인 셈이고 아인슈타인은 반대자인 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측정 없이 물리량을 알아낼 수 있는 실험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것이 EPR실험인데 이 실험에서 제안한대로 측정 없이 입자의 물리량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이 물리량에 대응하는 물리적 실재를 인정해야 한다. 즉 객관적 실재를 인정해야하는 것이다. EPR이 처음에 제안한 실험은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안되었으나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실험방법이 고안되었고 이 실험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부등식의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부등식을 벨(J. S. Bell)부등식이라고 하는데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방식에 잘못이 없다면 EPR실험결과는 반드시 벨-부등식을 만족시켜야한다. EPR실험이 아니더라도 만일 벨-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발견된다면 이는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된다. 벨 부등식을 여기서 유도하거나 수학적 형태로 제시할 수 없지만 원리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지금 남과 북, 둘로 나뉘어 살고 있다. 한반도에 사는 남자의 수는 남한에 사는 남자의 수보다 작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세 가지 독립적인 사건을 생각하고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의 크기를 구하면 어떤 부등식이 얻어진다. 이것이 벨-부등식의 내용이다. 아마도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벨-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가 발견되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초기 EPR의 제안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실험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이들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질량을 제외한 모든 물리량이 ‘0’인 입자가 있다고 하자. 실제로 전자-양전자의 쌍으로 이루어진 입자가 단일 상태에 있으면 질량을 제외한 모든 물리량이 ‘0’이다. 이 전자-양전자의 쌍이 어떤 이유로 분리되어 왼쪽으로는 전자, 오른쪽으로는 양전자가 튀어나갔다고 가정하자.

전자와 양전자는 모두 스핀이라는 물리량을 갖는데 이 스핀을 측정하면 측정값은 언제나 +1/2 또는 -1/2이다. 원래 전자-양전자의 쌍이 ‘0’의 스핀 값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자와 양전자는 어느 방향으로의 스핀 값을 측정하더라도 +1/2 또는 -1/2의 값 중 하나를 나누어 가지게 된다.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스핀 값을 측정하여 이들을 a, b, c라 놓고, 어느 특정한 값을 가질 확률을 구해보면 양자역학적 계산은 벨 부등식을 위배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실험적으로도 벨 부등식을 위배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이렇다. 전자와 양전자가 분리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두 입자 사이의 거리가 수백광년 쯤 떨어진 뒤 전자에 어떤 관측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전자에 관측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양전자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정보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 없으므로 전자에 수행한 측정이 양전자에 영향을 미치려면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리량은 보존되므로 전자의 스핀 값을 측정한 순간 관찰자는 양전자의 스핀 값을 알 수 있게 된다. EPR의 주장은 측정하지 않고서도 양전자의 스핀 값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물리량에 대응하는 실재를 인정하여야하고 이 사실은 스핀의 방향에 상관없이 모든 방향에 대해서 성립하므로 서로 독립인 스핀의 세 방향에 대해서도 측정 없이 스핀 값의 실재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보아는 이론적인 분석행위도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반론을 제기했다. 전자-양전자의 쌍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와 양전자로 분리되었다고 전제하고 분석을 시작한다면 분석행위 자체가 이미 정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전자-양전자의 쌍에서 전자와 양전자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측정을 하여 전자 또는 양전자로 관측했을 때만 분리되었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누구도 분리에 관해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전자-양전자 쌍만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분리되었다는 것을 관측하기 전에는 전체로서 하나(Undivided Wholeness)인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아 중에 누가 옳은가하는 실험은 1979~1982사이에 몇 번에 걸쳐 확인되었는데 보아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체를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전체를 ‘관찰대상’으로서의 자연과 ‘관찰자’로 나누는 것도 자연에 변형을 가한다는 것을 뜻한다. 전체는 그저 하나일 뿐인데 관측행위를 통해 창조한 것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기신론이 말하는바 글자그대로 ‘삼계허위 유심소작(三界虛僞 唯心所作)’을 뒷받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리되기 이전의 것 즉 관찰자와 관측대상으로 분리되기 이전의 것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의심하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를 둘로 나눈 것이므로 ‘전체로서의 하나’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 무슨 답을 얻더라도 그것은 창조해낸 것일 뿐이다. 분리되기 이전의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허상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空)이라고는 하겠는데, 더 이상 나아갈 수는 없다.

6. 맺는 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 ‘그것’을 ‘일심(一心)’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지만 일심이라고 부르면 상주불멸의 실재인 줄 착각하게 된다. 일심은 상보적인 세계를 기술하는 파동함수에 대응하는 마음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일심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니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이다”라는 말이다.

심생멸문과 심진여문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은, 마치 우주가 상보적인 양으로 기술되듯이, 일심이 상보적인 마음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상보적인 물리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듯이 생멸심과 진여심이 동시에 작용하는 법은 없다.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상보적인 마음 하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기에 ‘작용하는 이 마음’을 상주불멸의 참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질세계에서 현상계가 객관적인 실재일 수 없듯이 ‘작용하고 있는 이 마음’은 상주불멸의 영혼일 수 없다.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이 마음은 잠시 지어낸 마음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용하고 있는 이 마음을 있게 한 일심을 객관적 실재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동함수로 기술되는 세계를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중첩된 일심을 실재라고 할 수는 없다. 동시에 사랑하고 미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마음과 변함없는 진여의 마음이 중첩된 일심을 실재라고는 할 수 없다. 일심이 실재라면 사람은 생멸의 세계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생멸을 벗어나 진여의 경지에 있어야한다. 분별지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일심을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심을 상주불멸의 실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불교는 아트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일심은 모든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중첩된 마음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분별심이 만들어낸 말이다. 말로 표현하자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일심을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으로 나눈 것은 나눌 수없는 것을 둘로 나누자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입자-파동의 이중성과 같이 일심이 그대로 진여심-생멸심의 이중성을 갖는 것이다. 입자와 파동이 둘이 아니고 하나인 그 무엇이 이중성을 갖듯이 진여심과 생멸심은 두 가지 다른 마음이 아니다. 하나의 마음이 그렇게 이중성으로 표현될 뿐이다. 결코 둘이 아닌 것이다. EPR실험에서 본 바와 같이 ‘전체로서의 하나’인 것이다. 일심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벌써 ‘그것’을 ‘일심’과 ‘일심이라고 말하는 자’로 나눈 것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었으니 일심이라고 말하는 자는 일심이라고 말하는 순간 벌써 자기 자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자기 언급을 한 이상 불완전성 정리가 말하는 대로 이성의 한계에 걸려 말로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궁극적 실재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극적 실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으나 일심은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삼라만상은 일심에서 나온다. 파동함수가 물리적 실재는 아니지만 모든 정보가 파동함수에 포함되어 있듯이 일심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마음도 물질도 일심에서 나온다. 모두 생멸심이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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