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학 연구 기틀 다진 문학평론가

1. 승려로서 불교와 문학평론으로서 문학

김운학 스님
김운학 스님

필자의 불교 이해 수준은 깊지 못하다. 불교와 문학에 만남에 대해서, 불교문학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 한국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불교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있을 뿐이지 불교에 대해서는 지식이 일천하다.

김운학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필자가 동국대 국문학과 3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과목에서 특히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마다 우리 문학작품을 꿰뚫는 문학사상이 불교사상임을 실감했고 동국대 문맥이 불교임을 알았을 때, 불교대학 승가학과 교수였던 김운학 스님을 국문학 후배 2명(시인 윤효와 시인 김선아)과 함께 교수실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불교와 문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때 스님은 승가학과 과목으로 ‘불교와 문학’을 신과목으로 개설해주셨다. 나를 포함해 국문과 학생 3명과 불교학과 학승 5명(?)이 그 과목을 수강하여 한 학기를 들었다. 그때가 197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김운학 스님과의 인연의 시작이다.

김운학 스님은 1958년 《현대문학》에 평론 〈공자의 문학관〉과 〈삼매론(三昧論)〉이 추천되어 문학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하여, 불교사상을 모티프로 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73년에 도일(渡日)하여 고마자와(駒澤) 대학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동국대학의 불교대학 승가학과(僧伽學科)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제20회 현대문학상을 수상(1975)한 바 있었다. 그때 한 학기 배웠던 ‘불교문학’에 대한 이론은 그 뒤 1981년 8월 30일 발행된 《불교문학의 이론》(일지사)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에 김운학 스님은 입적했다.

《불교문학의 이론》의 ‘저자 약력’에 따르면 김운학은 본명 강모(彊模), 아호는 남하(南何),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일본 동경대학교 대학원 연구과정, 구택(駒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동국대학교 교수 역임, 1981년 8월 15일 입적으로 나와 있다. 주저로는 《삼매의 언어》 《신라불교문학연구》 《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 번역서로는 《금강경오가해》 《숫타니파아타》 《원효의 유심안락도반야심경강의》, 그리고 일반 저서로 《저쪽의 강가에서》 《한국의 다도》 등이 명시되어 있다.
김운학의 승려로서 삶은 1954년 출가하여 나주 다보사(多寶寺)에서 지효(智曉)를 은사로 득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러 사찰에서 주지(住持)를 지냈고, 불교총무원 교무국장과 선전국장을 역임했다. 그뿐 아니라 〈대한불교신보〉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했고, 방콕에서 열린 세계불교교육자대회(1968)에도 참석했다. 1973년 고마자와대학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할 때까지 일본에서 재일홍법원(在日弘法院) 교무국장을 역임했다. 동경대학 인문과정도 수학한 후 귀국, 1973년 모교인 동국대학에서 교수, 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불교문화예술원 상무이사 등을 역임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불교문학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외에 저술 활동으로는 《동대 논문집》 13집(1975)에 논문 〈향가와 일본 가요의 관계〉를 발표해서 “일본 고대 가요집인 《만엽집(萬葉集)》은 신라 향가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라는 학설을 제기했다. 또한 《만엽집》에 수록된 승려 작품이 20여 수에 이르고, 63종의 불교 용어가 발견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2. 불교적 시각으로 신라가요 연구

국문학사에서 신라가요 연구는 일본의 오쿠라 진페이(小倉進平)의 향가 연구인 《향가 및 이두의 연구(鄕歌及び吏讀の硏究)》를 효시로 삼는다. 이에 민족의식으로 각성한 영문학자 양주동은 그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본격적으로 향가를 연구하여 《고가연구》(1942, 박문서관)를 저술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14수와 《균여전》에 수록된 〈보현십원가〉 11수를 대상으로 연구하여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내고, 1957년과 1965년 두 차례에 걸쳐 수정과 보완을 하여, 1957년에 정보판(訂補版), 1965년에 무려 1,000쪽에 달하는 증정판(增訂版) 《고가연구》를 출간했다. 이렇게 양주동의 저서가 향가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국문학에서 양주동의 업적과는 다른 시각에서 김운학은 《신라불교문학연구》(1976년 현암사)을 펴냈다. 향가를 불교문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여 신라 불교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러한 김운학의 《신라불교문학연구》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많은 분이 그 가치를 평가했다. 대표적인 예가 목철우의 서평 〈본격적인 향가연구의 역서〉 이다. 이 서평에서 목철우는 “신라문학은 한국 문학사상 오랜 문학유산이다. 그것은 최고의 한국문학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가치까지를 지닌다. 일제 암흑기 이래 민족적인 자각이 표면화하면서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된 것도 신라문학의 이러한 가치와 결부된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연구는 일인학자 소창진평의 연구를 뛰어넘은 무애 양주동 박사의 《고가연구》”임을 타 학자들처럼 동어반복하면서, 양주동의 연구와 김운학의 연구가 어떤 변별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정리했다. 양주동의 연구가 “훈고학적인 성과로서 주해, 고증의 정확을 얻어 실로 천여 년 만에 베일 속에 버려졌던 향가의 진면목을 드러냈”고, “향찰로 표기된 향가 해독은 아직도 부분적인 쟁점의 해결”이 남아 있는 데 반해 김운학의 신라가요 연구는 양주동의 언어학적 해독을 근거로 한 문학적 정신사적 연구로서 큰 수확이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 성과로 ①한국불교문학의 사관 확립을 위하여 신라 향가의 훌륭한 문학성과 신라불교, 그 자체에 대한 매력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 ②그리고 그 매력, 신라불교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민중교화, 하화중생에 더 많은 중점이 주어졌다는 점, ③원효, 미상 등 고승들이 보여준 가르침들도 예외 없이 민중교화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저서가 신라 불교문학의 해명에 있어 사회와 대중을 전제하고 그 문학적인 성격을 분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신라불교와 대중, 향가와의 관계를 밀교, 정토, 관음사상에서 접근하여 신라문학이 탁월한 구세문학임을 결론짓고 있다는 점에 특히 주목했다.

이렇듯 김운학은 신라가요인 향가가 대부분 불교의 사상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불교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양주동이 시구의 주석적인 연구에 치중한 데 비해, 김운학은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춰 당대의 신라인들이 문학과 예술의 승화를 통하여 현세의 구복과 사후의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보편적 가치관을 탐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김운학은 《신라불교문학연구》에서 신라가요가 탄생하기 이전의 사상적인 배경인 화랑도, 정토사상과 밀교사상에 이르기까지 그 배경을 살펴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의 예술작품인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신라 불상 등은 물론이고, 고승인 원효, 의상, 혜초 스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향가의 의의와 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 등을 포괄적으로 고찰했다. 이러한 학문적 접근은 기존의 문학적 해석과는 변별성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한국 불교문학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당대의 불교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신라불교의 대중성과 사회성을 부각시키려는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25수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14수, 혁련정의 《균여전》에 11수가 전한다. 《균여전》에 전하는 〈보현십원가〉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설하고 있는 보현보살의 깨달음을 노래한 시가이다.

김운학의 《신라불교문학연구》에서 기존의 향가연구와 변별성이 있어 주목되는 부분은 불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밀착도 때문에 파생되는 관점인데, 그 대표적인 연구가 〈헌화가〉이다. 〈헌화가〉의 노인을 관세음보살의 화현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선풍도옹으로 보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처용가〉를 민속과 불교와의 만남으로 보고 불교문학의 가능성으로 짚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연구는 〈우적가〉를 불교 정신이 배어 있는 작품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인데, 그 점을 “도적의 칼날에 목이 베오 새로운 생을 바라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 생명을 버리고 있었고, 다시 그 닦아온 왕생원과 뜻에 의해서 전생하기를 바라고 있었다.”에서 찾았다. 그리고 〈혜성가〉에 대한 해석을 비평가의 시각으로 보았다. “이적으로 볼 때는 마음의 환화로써 공연히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아 혜성이니 왜병이니 하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본래가 청정하고 무애한 현상을 중생이 스스로 망견을 내서 현혹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치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그리고 〈도솔가〉는 미륵신앙, 〈제망매가〉 〈원왕생가〉 〈우적가〉는 미타신앙, 〈도천수관음가〉는 관음신앙, 〈보현십원가〉는 화엄사상을 영향을 받는 시가라는 점에서 ‘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을 심층적으로 고찰했다. 이와 함께, 불교 신앙의 기능을 향가에서도 탐색하고 있다. 〈제망매가〉에서 ‘축원’의 기능을 찾았고, 〈도천수관음가〉에서는 ‘희구’의 기능, 〈원왕생가〉에서는 ‘발원’의 기능을 찾아내기도 했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향가는 〈도솔가〉와 〈원왕생가〉이다. 〈도솔가〉는 속칭 〈산화가〉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삼국유사》 ‘감통 제7’ ‘월명사도솔가 조’에 보면, 경덕왕 19년 경자년(760) 4월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자, 왕은 월명사를 불러 향가를 지어 부르게 했다. 월명사가 이 노래를 지어 부르니 괴이하게 해가 사라졌다고 《유사》에서 전한다. 이런 이야기를 볼 때 이 향가는 주술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를 제/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彌勒座主)를 모셔라
— 〈도솔가〉 전문

월명사의 〈도솔가〉를 《삼국유사》에 소개한 일연은 이에 대한 설명을 부가하기도 했다.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푸른 구름에 한 송이 꽃을 날려보낸다/ 은근하고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도솔천의 대선가를 멀리서 맞이하리”가 그것이다. 위의 “솟아나게 한 꽃”은 두 개의 해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으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으로 도솔천에 계신 미륵불을 모시라는 주술 언어를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미륵좌주를 모셔라”라는 말은 앞으로 오실 미래불인 미륵불을 따라 내세에 나타나라는 의미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가는가/ 어느 가을 이름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 〈원앙생가〉 전문

〈원앙생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지은 향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죽은 자가 극락으로 갈 때 노잣돈으로 쓰는 종이돈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월명 스님은 사천왕사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고 한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길을 거닐자, 달이 그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길을 월명리라 하였으며 월명도 그 일로 인해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월명사는 능준 대사의 제자로 시가와 송가를 지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러한 일화를 가지고 있는 월명사의 〈원앙생가〉는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신라가요다. 이 시가 속에는 삶과 죽음의 길이 하나지만, 여기 있어 두려워 “나는 간다”고 말하지 못하고 떠나 누이야! 너와 나는 “어느 가을 이름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난 동기간인데도 네가 가는 곳을 모르겠다는 정창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비유를 많은 이들이 칭송하는 것은 한 나뭇가지와 잎의 관계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간 곳은 모르더라도 나는 미타찰, 아미타불의 땅인 극락세계에서 도를 닦으며 너를 기다리겠다는 염원이 담긴 발원의 시가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김운학은 주목했다.

이렇듯 김운학의 《신라불교문학연구》와 《향가에 나타난 불교사상》(동국역경원 간, 현대불교신서 2, 1978)은 주석적인 연구가 아니라 신라가요인 향가를 불교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다.

 

 


3. 불교문학의 이론 체계 제시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은 이른바 불교문학의 총체적 이론 체계를 위한 개론서이다. 이 글의 서론 부분에서 불교문학 연구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제시했다. ‘불경 속의 문학성 연구’와 ‘문학작품 속의 불교사상’가 연구가 그것이다. 이를 지표로 해서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은 경전의 문학성 연구와 일부 고전문학의 불교사상 연구를 겸한 서적이다.

 

목차를 보면 그것은 확실해진다. ‘제1장 개설’에서는 1.불교문학의 개념, 2.불교문학의 가치, 3.불타의 언어, 4.경전의 언어, 5.경전의 결집, 6.경전상의 문학성, 7.불전문학 8.본생문학, 9.비유문학, 10.송영문학, 11.선과 문학 12.법의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어 불교문학의 범주를 제시하는 한편, 그 연구에 필요한 이론을 정리한다. 그리고 ‘제2장 불교문학의 실제’에서는 1.선어의 상징성, 2.’벽암록’의 문학적 가치, 3.십우송 고찰, 4.한산시의 세계, 5.체념의 문학, 6.선시의 계보 7.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불교문학의 실천비평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제1장 개설이 ‘불경 속의 문학성 연구’를 위한 이론이라면, 제2장 불교문학의 실제는 ‘문학작품 속의 불교사상’을 연구한 실천비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운학은 《불교문학의 이론》을 내면서 서문 격인 ‘머리말’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필자의 불교와 문학과의 인연은 오래다.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이론 면으로 문단에 데뷔한 뒤 줄곧 이 불교와 문학을 양립시키며 불교문학의 영역을 고수해 왔다. 일종의 한국 불교문학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이의 한국적 발전을 위하여 힘써 온 것이다.” 이러한 토로는 승려와 불교학자로서 불교연구와 문학평론가로서 불교문학의 실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연구의 방법론으로 인명론(因明論)을 차용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필자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평론 논리의 이론을 위한 인명론을 선택한 것도, 또 박사학위 논문으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문학 형태인 신라 불교문학을 선택한 것도 다 이러한 뜻에서였다. 어쩌면 근대 한국 불교문학의 발전은 필자의 문단 역사와 함께 전개되었음을 느낄 정도로 필자의 문단 데뷔 이전은 이론 면에서 전무의 상태였다. 필자는 이를 의식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유학 중 이 분야의 글을 가장 많이 조사해 봤고 귀국해서도 동국대학교 승가학과 주임교수로 취임해 오면서 먼저 이 불교문학개론을 커리큘럼에 넣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며 이 저서를 내게 된 경위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불교문학에 대한 인식을 점검하고 있다. “흔히 불교문학 하면 다만 문학적인 면만을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일반 학계에서는 이를 가볍게 보려는 경향도 있으나 불교문학은 그대로 경전 전체가 불교문학이라 할 만큼 광범하고 깊다. 불교문학은 이 가운데서 문학적인 측면을 더욱 조사 연구하는 학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연구에 의해 경전의 뜻도 더욱 정확히 알 수 있고 부처님의 사상도 또한 더욱 바르게 아는 첩경이 될지도 모른다. 필자는 학교에서 불교문학에 대한 강의를 해온 지 올해 꼭 9년째다. 그러면서도 아직 다른 책들은 내면서 이의 교재 하나 내지 못했음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 책에 대한 비중을 너무 크게 두었기 때문이며, 필자 외에 다른 누구 쓸 만한 사람이 없다는 여유와 나태감에서였”음을 진솔하게 토로했다(‘머리말’).

김운학은 불교문학의 개념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불교문학(佛敎文學)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불교의 문학’ ‘불교와 문학’ ‘불교를 위한 문학’ ‘불교적 문학’ ‘불교에 의한 문학’ 등 무언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은 다른 이미지를 주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구체적 이미지와 관계없이 다만 ‘불교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져 온 것은 틀림없다. 때문에 불교문학은 광의(廣義)로도 협의(狹意)로도 또한 불교의 어느 부분적으로 경, 율, 논 삼장(三藏)의 전부로도 혼용(混用)되어 온 것이”라고 전제하며 “‘불교의 문학’은 그 범위가 퍽 모호한 것 같다. 그러나 그래도 불교 안의 문학이라는 의미가 더 풍겨온 것을 느낀다. 즉, ‘불교에 의한 문학’과 거의 같은 의미로서 불교 문헌 중에 문학적 가치가 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다시 되새겨 생각해 보면 장경(藏經) 전부인 불교의 문학 또는 불교에 의한 문학으로도 통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불교를 위한 문학’은 불타의 생애와 불교교리를 전하기 위해 창작된 문학으로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다음 ‘불교적 문학’은 그 폭이 넓어져 ‘불교를 위한 문학’보다는 더 잘 잡히지 않는다. 전자는 불교의 소개와 포교를 위한 문학이지만 이는 그러한 목적의식보다는 불교사상이나 신앙이 스며진 문학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둘은 다른 불교의 문학이나 불교에 의한 문학보다는 문학적 의미가 더 강하게 풍긴다”(《불교문학의 이론》 6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문학에 대한 개념은 ‘불교와 문학’을 키워드로 한 아래 설명에 필자는 개인적으로 방점을 찍고 있다.

다음 ‘불교와 문학’은 불교 전체를 문학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불교적 인생을 문학적으로 그릴 수도 있으며 또한 불교와 문학과의 관계를 찾기도 하는 비교적 광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불교와 문학의 독립된 개념도 더 강하게 떠오른다. 흔히 불교문학이라는 개념은 이 불교와 문학에 더 많이 포용되는 것 같다. 이처럼 불교문학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구체적으로 그 개념을 찾아보면 이렇게 혼동하기 쉬운 요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자는 ‘佛敎’와 ‘文學’의 독립된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인정하면서 불교문학을 보고 싶다. 그것이 불교와 문학에 속하건 불교적 문학에 속하건 불교의 문학에 속하건 관계하고 싶지 않다. 이럴 경우 불교문학은 經典보다 좁기도 하고 또 넓기도 하다. 그것은 경전 전체가 문학이 아닐 수도 있고 일반의 불교사상이 또한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작품으로 나타나 불교문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견지에서 불교를 소재로 하는 문학에 基點을 두고 보면 문학적 가치는 있으나 그 의미가 약한 것 같고 佛敎敎理를 문학적으로 음미해 보면 불교의 의미는 깊고 광범하나 그것이 과연 문학인가 하는 데는 더욱 의심이 간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불교와 문학은 독립된 영역이다. 학문으로서의 범주도 그러하고 특히, 불교 쪽에서 보면 문학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버려야 하는 존재 불가로 인식하기도 한다. 특히 선(禪)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선방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으로 직지인심(直持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선심(禪心)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호체계의 상징성과 비유성을 차용하여 선시(禪詩)만을 인정할 뿐 문학 그 자체는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선시는 본질적으로 문학을 배제하면서 고도로 절제되고 압축된 상징, 비유시로서 혹은 깨달음의 시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문자를 오도송을 일갈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선시라는 용어조차도 불가에서는 사용을 절제한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불교문학의 개념을 이해하려 한 영역이기도 하다. “시를 논함은 선(禪)을 논함 같이 선도(禪道)는 묘오(妙悟)에 있고 시도 또한 묘오에 있다”는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시학은 우리 불교시학의 전형이라 할 때, 시와 선의 바탕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문학론이다. 마음이나 시가 인간의 사고 체계나 사상체계에 의해서 표출되기보다는 직관이라는 형식논리에 비롯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불교와 문학의 대척성을 《불교문학의 이론》 ‘경전상의 문학성’에서는 이렇게 정리한다. “일반적으로 불교를 총괄해 말할 때 3장(藏) 13분교(分敎)라 한다. 즉 경(經) · 율(律) · 논(論) 3장과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頌), 무문자설(無問自說), 연기(緣起), 비유,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미증유법(未曾有法), 논의(論議)의 12분류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곧 불설(佛說)의 양식과 성질을 열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종래에는 9분교였던 것이 뒤에 12분교로 되었다. 이것은 곧 불설의 전부며 문학적 형식의 전부이기도 하다. 즉, 경전을 장르상으로 이렇게 나누어 넣고 보면 불경이 다분히 문학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34쪽)가 그것이다.

필자는 문학으로, 시로 표상된 공간은 미지의 세계라 생각한다.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이 언어화 과정을 초월해야 하는데, 시를 쓴다는 행위는 언어화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는 일과 언어도단과 사투를 벌어야 한다. 언어화 과정으로부터 일탈한 명상의 차원, 곧 선적 상황에서 언어를 찾을 때에는 불립문자의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그 결과 터져 나오는 언어가 선시(禪詩)이며 게송(偈頌)이다. 선은 언어화 과정이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는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다. 경계도 없고 색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 공(空)의 상태이기 때문에 무엇도 담을 수 없고 그 무엇도 버릴 수 있다. 인간의 마음까지도 버려야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그 공간에 선시가 있다. 그래서 지혜를 찾아 떠나는 문학의 길, 그 끝에 불교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문학의 가치를 그것으로 대신하곤 한다.

불교에 일천한 필자가 인식하는 불교는 고(苦)를 극복하자는 종교이다.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종교이기도 하다. 인간 삶이 고로부터 시작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무애(無㝵/無礙), ‘걸림이 없기’가 그 하나이다. 이 언어는 삶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불교에서 무위(無爲)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변화를 떠난 것을 말한다. 연기되지 않는 것, 영원불멸의 초시간적 진실, 열반, 진여를 말한다. 진여는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없어진 자리. 적멸 그대로 즐거움이다)’의 자리이다.

그곳을 이루기 위해 문학은 창작의 고(苦)를 감수한다, 그리고 고를 구체화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표현구조로 모색하게 된다. 문학에서 형식논리도 불교에서 충분하게 탐색할 수 있고, 표현구조까지도 차용할 수 있다는 가정도 하게 된다. 불교 쪽이 아닌 문학 쪽에서 볼 때, 문학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사상을 찾는 일이 불교문학의 몫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해내야 할 몫이다.

물론 경전 속에 나타나고 있는 문학성을 찾아내는 일도 불교문학의 몫이긴 하지만 문학 연구가의 불교 이해 능력의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런 점에서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은 문학 쪽에서 불교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소중하다. 특히, 문학비평이 전공인 필자에게 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값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직관과 자오(自悟)에 의해서 창작하는 문인들의 정신구조를 서구 논리로는 분석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우리 문학비평 논리를 불교의 인명논리(因明論理)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는 가능하다는 의미다.

이 글의 논조에서 다소 빗나간 것일 수 있지만, 요컨대 우리의 사고, 동양인의 의식세계, 나아가서는 한국의 문학세계는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 그래서 서구의 논리에 의해서 작품이 분석되기보다는 우리의 사고논리나 인식체계에 의해서 분석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에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은 설득력이 강한 제시를 해준다고 생각해왔다. 특히 불교 논리의 원형인 인명논리가 그 단초가 된다는 점을 주목해 왔다. 그러나 김운학의 착안도 문학의 연구방법론으로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사고체계를 규명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또한 국문학과 연계성이 고려되지 않은 채 불교학의 범주 안에서 착안된 것이기 때문에 문학 원리와는 거리가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 문학계에서는 서구 문학이론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반성과 함께 국문학 이론 정립에 부분적인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문학이론의 층이 두텁지 못한 탓에 불교문학과의 접합을 시도하기에는 다소 시간이 요청된다. 특히, 불교문학에 대한 접근이나 관심조차도 넓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이 불교문학의 귀납적인 이론 성립이나 실제 적용이 부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동어반복적인 담론이지만, 한국문학의 정신사적 맥락이 불교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문학사를 신라가요에까지 소급해 가지 않더라도 근대문학의 사상적 저변에는 불교사상이 깔려 있음은 누구나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연구가 서구적인 연구방법에 의해서 접근되었을 뿐 우리의 인식체계에 의해서 접근되고 있지는 못하다. 이 위상에서, 낯설기는 하나 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연구 분야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낯설다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적으로 용어와 불교교리의 ‘낯섦’이다. 많은 작가들이 불교 교리나 용어가 낯설고 한정된 범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일반적인 교리에 묶여 새로운 지평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불교문학에 관심을 갖고 졸저 《현대불교문학의 이해》(종로서적, 1989)를 펴낸 바 있는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현대문학 이론을 불교에서 그 원형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오랫동안 하고 있지만, 제반의 많은 어려움으로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고대 인도 학술의 한 과목인 인명학(因明學)은, 용어부터가 낯설고 그 교리가 한국적인 불교와는 다소 거리가 있기도 하며, 또한 동양 논리학일 뿐 비평의 척도로서는 불가능을 내포하고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불교의 비평논리가 문학 연구방법으로서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제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먼저 착수해야 할 과제는 고대 불전 속에서 문학의 원형을 찾아 정립하는 일이다. 예컨대, 불교설화나 선시 등 송영(頌詠)에서 문학의 외적 혹은 내적 구조의 패턴을 만드는 한편, 그것이 적용된 신화나 전래설화가 어떻게 수용되어 왔으며,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불교문학의 연구방법론 정립의 어려움은 이렇게 시작부터 생겨난다. 위의 전제 사항이 어느 정도 성립될 때, 불교문학의 이론은 그 뼈대를 갖추게 될 것이다. 즉, 불교적 원형의 논리가 정립되는 셈이다. 신화 · 원형비평의 척도에 의하면 문학작품의 우수성은 얼마나 그 작품이 신화나 원형에 접근되어 있는가에 의해서 판별된다.

즉, 그 구조에 얼마나 닮아 있으며 그를 얼마나 많이 수용하고 있는가, 현대적 변용이 얼마나 기교적으로 처리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고전으로의 회귀성향이 우수성 여부의 척도로 사용된다. 불교문학도 이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불교교리의 무엇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작품의 위상을 결정하기보다는 그 구조의 미메시스 여부에 따라 우수성이 결정될 것이라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적 삶과 인간관에 얼마나 접근하였는가가 그 작품의 가치 문제와 긴밀한 상관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에서 지고의 지향점은 인간 본체의 깨달음에 있으며 삶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있다. 인간 본체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저 먼 곳에 그 원형이 있다. 고대로 소급해 갈수록 인간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모든 문학작품이 궁극적으로 추출해내야 할 원초적 감성과 의지도 컴퓨터와 같은 기계가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여기에 있지 않고, ‘원시’시대라 불리는 먼 곳에 있다. 이런 생각이 신화 · 원형의 중요성을 낳게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불교문학의 원형은 원시불교의 사상체계나 구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삶의 양상이 달라져 있고, 가치관도 사뭇 달라져 있을수록 본질 해명에 가치를 둔다면, 이의 타당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렇듯 불교적 원형이 다각적인 국면에서 연구되고, 그 논리가 하나의 정설로 고착될 때 불교문학의 연구방법론은 형성될 것으로 믿는다. 또한 ‘불교는 논리도 아니며 언어(이성)도 아니다’라는 명제를 유보시킬 때, 위의 가설은 정설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 점을 필자는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 절실하게 느껴야 했다.

이렇듯 동어반복만 할 수밖에 없는 필자의 게으름을 먼저 탓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 문학의 토양이 불교에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불교문학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학문으로서 불교문학을 정립하는 초석은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이 마련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불교 논리의 원형인 因明의 일반적 개요와 그 가치를 약술함으로써 因明論理의 인식을 위한 기초 작업을 삼고 싶다.(……) 因明은 고대 인도의 학술의 一科目이다. 즉 인도에서는 일반 학술로서 5明이 있다. 內明 · 聲明 · 醫方明 · 因明 · 工巧明이 그것이다. 因明은 불교 일반의 學이고, 聲明은 文法 音韻의 학이며, 醫方明은 의술의 학이고, 因明은 因에 관한 학, 즉 논리학에 있어서의 媒槪念의 학이다. 다음 工巧明은 공업 공예의 학이다. 이와 같은 고대 인도 학술의 체계로 볼 때 因明은 다만 因을 밝힌다는 종래 因明學者의 개념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을 인명논리를 인식한 김운학의 주장을 제시한 부분이다. 이 인명논리로 필자는 졸저 《현대불교문학의 이해》에서는 김초혜의 시 〈사랑굿〉 분석과, 졸저 《인간, 불교, 문학》에서는 황동규의 〈그믐밤〉을 분석하여 그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현대시의 비평논리로 자리매김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불교적 인식의 핵인 인명논리 중 신인명으로 보면, 인(因)에 해당한다. 일반 논리학에서는 소전제에 해당한다. 신인명(新因明)의 삼지(三支)는 종(宗)-인(因)-유(喩)이다. ‘종’은 단안(斷案)이다. ‘인’은 소전제이며, ‘유’는 대전제를 의미한다. 이는 3분작법(三分作法)인 비논법(比論法)이다. 그리고 고인명에서는 종(宗) · 인(因) · 유(喩) · 합(合) · 결(結)의 5분작법으로 비평논리를 문학에 적용시키면 물론이고 소설까지도 분석될 수 있고, 그 역으로 창작논리에도 차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운학의 《불교문학의 이론》을 통해 불교문학을 배운 필자는 졸저 《현대불교문학의 이해》(1989)와 《인간, 불교, 문학》(2017)을 저술했다. 물론 아직은 보잘것없고 그 노력 또한 도로로 끝날지 모르지만, 이를 계기로 불교문학의 이론 체계를 더욱 정치하게 다듬어보고자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그 바람을 이끌어줄 선행연구가 바로 김운학의 불교문학 연구이다. 그런 점에서 김운학은 불교문학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의 맨앞에 서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유한근 / 문학평론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동 대학원(석사),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등단. SCAU 교수 역임. 저서로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인간, 불교, 문학》 등과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외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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