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식논리학의 선구적 개척자

구름아 구름아 임자도 화나면 벼락 치는가

말을 하자면 말은 한이 없다. 모를 때에는 이미 아는 게 있고, 알 때에는 이미 모르는 게 있다. ……중략……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아신다면 안 읽으셔도 아시고 모르신다면 읽어도 모르실 책이 이 책입니다.


1. 학문적 삶을 위한 준비

우촌(尤村) 원의범(元義範, 1922~2017)
우촌(尤村) 원의범(元義範, 1922~2017)

한국 인도철학의 본격적인 역사는 1964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인도철학과가 설과(設科)된 이래 시작되었다. 인도철학은 요가의 경우로 입증되듯이, 학문의 경계를 넘어 생활과 문화의 영역에서 새롭게 그 영향력을 발휘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인도철학의 현실적 응용력은 학문 영역뿐만 아니라 생활과 문화에서도 다양하게 그 여세를 확장하여 앞으로는 더욱 많은 사람의 관심과 열의를 이끌어내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불교학의 기초이자 불교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인도 사상, 인도 종교, 인도 문화와 인도 언어 등을 알지 못하면 불교학은 균형감을 잃어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학과가 개설되었다. 인도철학에서 철학이란 ‘[바로] 봄(darśana)’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사물이나 사태의 모습을 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것은 바르게 인식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우촌(尤村) 원의범(元義範, 1922~2017)은 ‘바른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도 유학을 통해 크게 자각하고 그것의 연구에 평생을 바치게 되었는지 모른다. 필자는 우촌(이하 원의범 교수를 그의 호 ‘우촌’으로 호칭함)이 수업시간에 ‘바르게 봄’과 서양의 철학(philosophy, 愛智學)이 다르다는 것을 늘 강조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촌은 근대에 들어 첫 인도 유학생이자, 인도 원전 연구의 개척자, 불교인식논리학 연구의 선구자 등의 평가를 받는 위대한 불교학자이면서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은, 살가운 큰 스승이었다. 필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의 제1세대 교수님들로부터 직접 강의를 듣고, 짧게는 4년 길게는 20여 년을 모신 제자이다. 그분들은 이기영(1922~1996), 정태혁(1922~2015), 원의범, 서경수(1925~1986) 제씨로 이제 모두 작고하셨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촌 원의범 교수의 학문적 삶과 세계를 그가 평생을 두고 천착한 불교인식논리학(Nyāya Bindhu, Hetu Vidyā, 因明學)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1) 학력

우촌은 1922년에 평안북도 정주(지금의 선천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1942년에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서울로 유학을 와서 동국대학교 전신 혜화전문학교 불교과를 입학하여 그다음 해(1943)에 졸업하였다. 혜화전문학교가 4년제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자 다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1954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우촌은 불교뿐만 아니라 더 폭넓게 종교를 바라보고 연구하고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래서 1957년에 “(The) differences of the future life between sukhavati and heaven”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62년에 수료는 하였으나 아쉽게도 학위는 받지 못하였다. 그 아쉬움이 남아서일까, 정년 퇴임과 동시에 1988년에 원광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선생께서 수업시간에 몇 번이고 자랑삼아 말씀한 것처럼, 혜초(慧超) 스님 이래 한국인으로는 처음 인도 국비장학금을 받고 바라나시(Varanasi)에 자리 잡은 바라나시힌두대학교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과 범어대학 연구생으로 약 2년(1965~66년) 동안 연구하였다. 그때 공부하면서 관심을 가진 분야가 불교인식논리학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촌은 중국의 현장 스님처럼 불교가 발원하여 꽃을 피운 본고장에서 가서 생생한 언어들을 배우고, 그것으로 쓰인 원전을 원활하게 읽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께서 나중에 동국역경원에서 한글대장경의 일환인 《니야야빈두 외》(1995)를 간행하면서 범어(sanskrit) 원본인 Nyāya Bindu of Śrī Dharmakīrti by Śrī Dharmottarāchārya Edited with Notes, Indroduction & Hindi Translation By Ācārya Chandra Sekhara Śāstri(1954년)를 저본으로 사용하여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 문헌은 아마도 우촌이 인도 유학 때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2) 경력

우촌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로 부임하기 전, 정확한 연도는 파악되지 않으나 평안북도 정주군의 곽산중학교, 부산의 해동고등학교와 서울의 보인상업학교(보인고등학교 전신)에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면서도 불교학에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1966년, 인도 정부의 국비 장학생으로 바라나시힌두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나서, 동국대학교에 인도철학과가 신설된 지 4년 뒤인 1967년 8월 24일, 인도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1969년 5월 5일에 조교수, 1976년 2월 28일에 부교수, 1979년 3월 1일 정교수로 승진하여 후학을 양성하다가 1988년 2월 29일에 정년을 맞이하였다. 그러니까 우촌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교수로 약 20년을 재임한 것이다.

우촌의 뛰어난 학덕은 정년이라는 틀에 얽매여 묻힐 수는 없다고 생각한 동국대학교의 배려로 정년 뒤 바로 ‘우수대우교수’라는 직함으로 1년 동안 재임하다가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우촌은 동국대학교에 재임하면서도 틈틈이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인도철학과 불교 관련 강의를 하였다.

우촌은 우리나라에 빨리(Pāli)어를 최초로 보급했으며, 유식학의 권위자로 남기를 바랐다. 우촌이 빨리어를 최초로 보급했음은 1950년 구산 스님(1910~1983)과 교류하면서 월정사 강사로서 직접 빨리어를 가르쳤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2학년 빨리어 강좌를 담당하였으며, 또한 전재성 박사가 번역한 《빠알리어사전》(어휘편, 문법편)의 감수를 맡았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학문적 삶의 궤적

1) 잡지 기고

우촌의 학문 활동을 잡지, 학술지에 게재한 글들과 저서를 통해 서술하고자 한다. 잡지, 학술지(학술지 성격에 준하는 것도 포함), 저서, 공저, 번역서, 그리고 감수서 등의 순서로 살펴볼 것이다. 맨 처음 기고한 글은 《현대불교》(현대불교사 간행) 1960년 7월호에 실린 〈범본과 한역장경 비교: 여래실견분 제5〉이다. 이 글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석사학위를 받은 뒤 박사과정에 재학하고 있을 때 쓴 글로 보이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촌은 그때 이미 범어(산스끄리뜨)에 대한 갈증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범어를 배우려는 열망 때문에 어렵고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인도 유학길을 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잡지에 기고한 글 가운데서 가장 최근의 글은 2000년에 태고종 금강불교대학에서 발행하는 《백화》 14호에 실린 〈묘법연화경의 묘(妙)〉라는 글이다. 이 글까지 포함하여 우촌은 40년(1960~2000)에 걸쳐 21개 잡지에 78회의 글을 기고하였다. 잡지별 기고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페이지의 〈표 1〉과 같다.

 

 


(1) 《법륜》과 《법시》
《법륜》에는 1970, 1972, 1975, 1976, 1978, 1980, 1981, 1985, 1986년, 11회의 글을 실었다. 《법시》에는 1968년에서 시작해서 1970, 1974, 1976, 1977, 1978, 1979, 1980, 1987, 1991년까지 18회에 걸쳐 글을 기고했다. 눈에 띄는 것은 1970년 6월에 기고한 〈우주정복과 불교인의 자세〉라는 글은 당시 미국 우주인들이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실(아폴로 11호)을 발 빠르게 다루었고, 1987년 5월과 1991년 6월에는 똑같은 제목으로 〈부처님은 왜 오셨는가〉라는 글을 부처님오신날 기획물로 같은 잡지에 게재했다는 점이다.

(2) 《불교》와 《불교사상》
《불교》에는 1975, 1988, 1989년에 걸쳐 3개 글을 게재하였다. 그런데 좀 특이한 점은 1975년 4 · 5월 합집호에 실린 〈불교는 무신론이다-이기영(李箕永) 선생의 소론을 읽고〉와 비슷한 주제의 기사가 여러 잡지에 10여 년 사이에 반복해서 게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곧 《사상계》 Vol.11-122(1963. 6)에 〈불교는 무신론인가, 이기영 [불교는 무신론이다]〉(원의범 논평), 《불교생활》 3호(1965. 2)에 〈불교는 무신론인가, 이기영 [불교는 무신론이다]〉(원의범 논평) 그리고 《석림》 vol. 3(1969. 11)에 같은 제목의 글이 실렸으며, 또한 우촌의 저서 곳곳에 같은 글이 중복으로 게재되어 있다. 아마도 불교는 신을 상정하는 유신론적 종교가 아님에도 성립할 수 있는 종교임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은 심정에서 이렇게 같은 내용을 여러 곳에 게재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이 글은 우촌이 불교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공부하게 된 이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사상》에는 1962과 1963년에 3개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법시》 62호(1970. 6)에 실린 논고 〈우주정복과 불교인의 자세〉가 이 잡지에 실렸던 것이 발견된다. 또 이 잡지에 실린 논문 〈사수(捨受)와 불가지(不可知)의 집수(執受)-중부 니까야를 중심으로〉도 약 8년 뒤 《불교학보》 18집(1981. 8)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외에도 잡지나 논문집에 실린 내용이 저서에서 또다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아마도 그런 제목들이 당시에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었던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3) 《불광》과 《불교계》
《불광》에는 1977, 1978, 1979년에 걸쳐 3개의 글이 실렸다. 3개의 글 모두 특집 원고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불교계》에는 1968과 1969년에 걸쳐 2개 글이 실렸는데, 〈인도불교의 현황〉 〈불생지에서 본 석가 일대기〉로 모두 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쓴 글들이다. 아마도 잡지사에서 인도 유학에서 인도 현실을 직접 체험한 우촌에게 생생한 내용을 의뢰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4) 《신행불교》와 《백화》
《신행불교》에는 1982, 1988, 1989, 1990년에 걸쳐 4개의 글이 실렸다. 그 가운데 3개가 업, 윤회 그리고 해탈을 생각하는 내용으로 곧 〈업과 해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에서 와서 무슨 짓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輪回轉生]〉이다.

《백화》는 태고종 금강불교대학에 간행하는 잡지인데 1990년과 2000년에 각각 한 차례씩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우촌이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 잡지에 마지막으로 집필한 원고가 이 잡지에 실려 있다.

(5) 《선사상》과 《사상계》
《선사상》에는 1987, 1992, 1994년에 걸쳐 4개의 글이 실렸다. 이들 4개의 글은 모두 밀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우촌이 동국대학교 학부나 대학원에서는 밀교를 강의하지 않았으나, 외부에서는 밀교 관련 강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밀교 관련 번역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밀교사상의 근원을 불교인식논리적인 면과 관련을 짓고 있다는 점도 우촌의 불교인식논리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얼마나 깊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상계》에는 1960년(11월), 1963년에 걸쳐 2개의 글이 실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불교가 현대철학에 끼친 영향: 사적 배경과 현대철학〉이라는 그이다. 이 글은 당시(1960)로는 불교가 철학이 아니라 순수한 종교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이라고 이해된다.

(6) 《현대불교》와 《불교생활》
《현대불교》에는 1960년 7월과 1961년 4월에 2차례 글이 실렸는데, 앞의 글은 《사상계》의 1960년 11월보다 약간 빨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 가운데서 가장 일찍 게재된 글로 파악된다. 《불교생활》에는 1965년(3호, 1965. 2)에 한 개의 글이 실렸는데, 이 글의 제목도 다른 잡지에 실린 것과 같은 〈불교는 무신론인가, 이기영[불교는 무신론이다](원의범 논평)〉이다.

(7) 《범성》과 《월간중앙》
《범성》은 밀교 계통의 잡지인데 1975~77년 3년에 걸쳐 무려 13개의 글이 실렸다. 그들 가운데 11개의 글이 ‘불교인식논리학’과 관련이 있는 원고들이다. 그 내용은 정지의 삼성, 현량(現量, 감각적 직감), 비량(比量), 인(因), 유(喩), 환(幻), 무(無)와 비(悲), 무상의 논리적 의미, 만법유식의 논증, 신(信)과 지(知)와 성언량(聖言量), 인명, 곧 불교인식논리학 등의 내용이 담긴 것들이다.
《월간중앙》은 중앙일보사에서 간행하는 월간지로, 1968년 11월호에 〈최루탄 속의 월남불교, 중세적 신앙의 힘 덩어리인 월남불교의 내막〉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 당시는 월남(지금의 베트남) 파병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을 때였는데, 베트남불교가 어떤지를 살펴보는 의미 있는 글로 보인다.

(8) 《과학사상》
이 잡지는 범양사에서 발간하던 계간지로, 1996년 6월호(17호)에 〈인도철학에서 본 생명관-동서양의 생명관〉이라는 글이 실렸다. 당시 한국사회는 순수 인도철학만 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환경이었고, 불교계 잡지에는 순수 인도철학이나 사상의 내용을 다루는 지면도 거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계의 관심도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촌 역시 인도철학에 대한 글은 거의 없고, 주로 불교와 관련된 글이 많았고 연구 주제도 그렇다. 하지만 이 글은 정년 퇴임 후 쓴 것으로, 인도철학이란 제명이 들어간 것은 그래도 자신이 인도철학과 교수 출신임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불교계, 또는 불교계 외의 여러 잡지에 기고한 기사를 간단하게 분석해 보았다.

 

〈표 2〉 《불교학보》 게재 논문



2) 논문
우촌은 《불교학보》(8편), 《석림》(7편), 《동국사상》(2편), 《동국대학교 논문집》(1편), 《한국불교학》(2편), 《한인문학》(1편), 《원효학 연구》(1편), 《철학》(1편), 《현상과 인식》(1편) 등에 총 23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교학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이 간행하는 《불교학보》에는 우촌이 서울대학교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실려 있다. 이 논문은 다른 곳에서도 게재하고 있다. 또한 〈사수(捨受)와 불가지(不可知)의 집수(執受): 중부(中部) 니까야를 중심으로〉(18집)도 《불교사상》(제18호, 1963년 4월)에 이미 게재된 것과 똑같은 제목이다. 이 논문집은 우리나라의 불교계 대학 부설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최초의 학술지로 평가되는데, 여기에 실린 8편 가운데 3편이 불교인식논리학과 관련된 내용의 논문이다. 이는 우촌의 불교인식논리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방증하는 것으로 읽힌다. 《불교학보》에 실린 전체 논문은 〈표 2〉와 같다.

 

〈표 2〉 《불교학보》 게재 논문



(2) 《석림》
이 논문집은 동국대학교 석림회에서 1968년에 창간한 학술지로, 동국대에 재학하거나 졸업한 스님들의 학술의 장으로 재가 학자들도 논문을 많이 게재하였다. 앞에서 밝혔듯 우촌은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부임한 다음 해부터 석사학위 논문을 시작으로, 연속해서 논문을 게재하였다. 또 특이한 사항이라면 이 논문집이 동국대 재학 또는 졸업생 스님들의 학술마당이기 때문에 게재된 논문도 이 같은 성격에 맞는 내용이 몇 편 발견된다. 여기에 실린 전체 논문은 〈표 3〉과 같다.

(3) 《동국사상》
이 논문집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생회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재학생, 대학원생, 그리고 교수들의 논문을 싣는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梵漢對照日譯參照)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우리말 번역안〉(1971, 6호)이라는 범어와 한역을 대조하는 번역 논문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 논문은 경전의 우리말 번역에서 한역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시도된 적이 없는, 범어 원전도 함께 참고한 최초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돋보인다.

(4) 《동국대학교 논문집》
동국대학교에서 간행하는 이 논문집에는 우촌이 가장 사랑하는 불교인식논리학에 대한 서론이 실려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첫해에 실린 이 논문은 아마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우촌의 첫 번째 논문으로 파악된다. 제목은 〈불교인식논리학: 서론〉(1967, 3 · 4호)으로 우촌이 인도 유학 후 바로 불교인식논리학 연구를 착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5) 《한국불교학》
이 논문집은 우리나라의 불교학계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한국불교학회의 학회지로서 큰 의의를 지닌다. 우촌은 창간호(1975, 1호)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사상의 불교적 비판〉을 싣고, 1977년 3호에도 〈한국불교와 전통윤리〉를 실었다.

(6) 기타
《한인문학》 《원효학 연구》 《철학》과 《현상과 인식》이라는 논문집에도 각각 한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특이한 것은 《한인문학》(1982, 1호)에 〈인도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라는 논문을 게재하여 두 논법 사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면서 불교인식논리학의 특성과 탁월함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표 4〉 단독 저서 목록



3) 저서
우촌의 저서로는 단독 저서(10종, 편저서 1종 포함), 공저서(2종), 번역서(6종, 중간본 1종 포함), 감수 도서(3종) 등 총 21종이 있다. 단독 저서는 1972년부터 2010년까지 출간하였고, 공저서는 2005년, 번역서는 주로 동국역경원을 통해 불교 원전(범어본과 한역본)을 1995년에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그중 특히 인상적인 저서는 정년퇴임 뒤에 출간된 2종이다. 불교학자 또는 인도철학자로서의 철학 이론서가 아닌 저서들로, 《알게 모르게 모르게 알게》(1995)라는 책이 삶을 꿰뚫은 1,700가지 짤막한 생각들을 모은 잠언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구름아 임자도 화나면 벼락 치는가》(2010)는 고령임에도 직접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짤막하게 시와 같은 문장을 담은 이른바 그림시 모음집이다. 이 저서들은 학문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서, 후학들은 큰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촌의 저서들을 분석해 보면 학문 연구의 주요 주제를 다음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①불교는 무신론이다. ②극락과 천국의 내세관적 비교 ③‘불교인식논리학’에 관한 내용. 이 세 가지 주제들은 중복하여 게재되기도 했을 만큼, 우촌 연구 업적의 주요 키워드이며, 그의 평생 연구는 이 세 방향으로 집약되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중에서도 불교인식논리학에 가장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표 5〉 공저서 목록
〈표 6〉 번역서 목록
〈표 7〉 감수 도서 목록

 


3. 우촌이 사랑했던 학문, 불교인식논리학

1) 불교인식논리학이란

 

불교인식논리학은 오명(五明, pañca-vidyā)의 하나인 인명(因明, Hetu-vidyā)이다. 여기서 명(明, vidyā)은 지(知, jñāna)와 같은 의미로 ‘지식’이나 ‘학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오명은 ‘지식’ 또는 ‘학문’을 다섯 분야로 나누어 말할 때 쓰는 말이다. 그것은 성명(聲明), 공명(工明) 의명(醫明), 내명(內明), 인명의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여기서 성명은 문법학, 공명은 공업이나 수학 등, 의명은 의학, 내명은 인도철학이나 불교의 교리, 그리고 인명은 논리학을 뜻한다. 여기서 ‘인명’이 논리학으로 지칭되는 까닭은 인명에서 인(因, hetu)은 논리적 이유, 명(明, vidyā)은 학문을 뜻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말해, 결론이 없는 말은 말이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학문도 아니다. 그런데 결론이 있다면 그 말에는 반드시 정당한 이유(인, hetu)가 있어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는 결론은 없다. 그러므로 거짓말이 아닌 참말에는 반드시 정당한 이유가 있기에 그 정당한 이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뜻에서 논리학을 ‘인명’이라고 한 것이다.

 

이 인명은 다시 ‘내도인명(內道因明)’과 ‘외도인명(外道因明)’으로 나누어진다. ‘내도인명’이란 ‘불교인명’ 곧 ‘불교논리학’을 뜻하고, ‘외도인명’이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교나 힌두교 계통 따위에서 종교적 논리학을 뜻한다. 그런데 우촌은 내도인명/불교논리학을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풀어썼다. 이렇게 풀어쓴 이유는 인명을 인도논리학(불교논리학 포함)이라고 할 경우 다른 논리학들처럼 그 특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서양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 칸트논리학, 헤겔논리학을 특징에 따라 구별할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은 ‘형식논리’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 칸트논리학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칸트의 선험논리학’, 헤겔논리학은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헤겔의 변증논리학’이라고 한다. 인도논리학도 위의 서양논리학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도논리학의 특징은 바로 ‘인식론적’이다. 그래서 인도논리학을 인도인식논리학이라고 하므로 우촌은 ‘내도인명’을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풀어쓴 것이다.

인도논리학이 인식론적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유’의 원리나 원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 논리학이다. 그런데 사유가 하나의 학문의 대상으로서 객관화되려면 ‘사유’는 언어, 곧 말의 형식에 의해 표현된 사유일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사유의 논리학적 연구는 말의 논리학적 연구라고 보는 것이 인도논리학에서 논리학적인 기본적 가정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논리학이 이른바 사유의 원리나 원칙 따위를 추상적으로 연구한다면, 인도논리학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각자의 말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하나의 논리술로서 논리학이기 때문에 인도인식논리학, 또는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쓰는 것이 그냥 인도논리학/불교논리학이라고 쓰는 것보다 그 특징을 잘 드러내므로 그렇게 풀어쓴다는 것이다.

2) 불교인식논리학은 인식론적인가

만약에 ‘인도논리학’ 또는 ‘불교인식논리학’이 인식론적이라면 그것의 실증적인 증거를 보여줄 때 그렇게 말하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논리학의 대가인 디그나(Dignāga, 陳那, 400~480년경)가 지은 《인명정리문론》의 주석서로 상갈라주 보살이 지은 《인명입정리문론》의 서두에서 불교논리학이 다루는 문제들을 통틀어 여덟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①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하여 남에게 알려주는 방법
② 남이 그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방법
③ 자기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하여 남에게 알려주는 방법에서 잘못되기 쉬운 것들
④ 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로 하여 나에게 알려주는 말에서 잘못이 있음을 말로 하여 깨우쳐주는 방법에서 잘못되기 쉬운 것들
⑤ 감각기관이 직접 아는 앎
⑥ 자기 혼자서 스스로 생각하여 아는 앎
⑦ 감각기관이 직접 아는 앎에서 잘못되기 쉬운 것들
⑧ 자기 혼자서 스스로 생각하여 아는 앎에서 잘못되기 쉬운 것들

이 여덟 가지 가운데서 ①-④까지는 다만 ‘남을 깨우쳐주는 말에 대한 설명’이고, ⑤-⑧까지는 다만 ‘혼자 스스로 깨달은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 설명들은 인도논리학이 ‘논증적’ 특징이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논증적 논리학은 추상적 사유보다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구체적으로 표현된 말과 같은 수준의 구체성을 논리적 필연성의 근거로 삼는다.

예컨대 삼지작법(三支作法)의 경우에 주장명제[宗], 이유명제[因], 실례명제[喩]는 반드시 말로 표현되어야 하는 동시에, 주장명제는 이유명제에 근거하여 주장명제일 수 있고, 또 이유명제는 그것의 세 가지 성질[三性, 三相]에 의해 이유명제일 수 있는데, 이유명제의 세 가지 성질은 반드시 실례명제에 근거하여 그 세 가지 성질을 보장받아야만 한다.

인도논리학에서 자주 드는 실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저 산 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그 산 너머에 불이 타고 있다고 추리하여 단정을 내리는 경우에 그 단정이 정당할 수 있는 근거는 결국 눈에 보인 그 ‘연기’가 틀림없이 사실상 ‘연기’여야만 하는 데에 있다. 곧 눈에 보인 그 ‘연기’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또는 나무 등을 태울 때 굴뚝 따위로 피어오르는 그 ‘연기’와 똑같은 ‘연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눈에 보인 그 ‘연기’가 (실제적) ‘연기’가 아니고 ‘연기’ 같은 구름을 ‘연기’로 잘못 본 착각한 ‘연기’라고 한다면 잘못 본 ‘연기’ 같은 구름을 이유명제로 삼는 주장명제는 주장명제일 수 없다.

이것은 ‘연기’에 근거하여 불을 추리하여 단정하는 경우, 눈의 시각적 인식의 진위 여부가 결국은 그 추리단정의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 노릇을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추리적 판단의 실제적, 또는 구체적 진위로 단정될 수 없다.” 어떤 추리판단이든지 그것이 적어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이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인식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러한 인식론적인 제약, 곧 추리판단에서의 논리적 필연성의 근거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추리단정은 반드시 ‘일상적 실제적 대화’, 곧 ‘말의 형식’을 취한다고 인도논리학은 보기 때문에 그것은 논증학적이며 인식론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내도인명을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풀어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불교인식논리학의 정오 기준과 정지

(1) 불교인식논리학의 정오 기준

법칭(Dharmakīrti, 6세기 중엽~7세기 초엽)이 지은 《니야야빈두(Nyāyabindu, 정리일적론; 불교인식논리요론)》의 첫머리에 “사람은 무엇이든 소원을 이루려면 먼저 그 일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바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한다.”라고 나온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먼저 인생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안다는 것[正知]’이 무엇이며 ‘바르게 아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구를 불교적 입장에서 하는 것이 곧 불교인식논리학이기 때문에 ‘바르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것에는 세 가지 인식이 있다. ① 성공적(artha siddhi) 인식, ② 어긋나지 않는(avisaṃvadaka) 인식, ③참이라고 확신하는(artha prathiṭi) 인식이다.

① ‘성공적 인식’은 반드시 사람의 소원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 ② ‘어긋나지 않는 인식’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예견은 어긋나지 않았다거나 틀림없다고 하는 인식이다. 이것은 그의 제자인 법상(法上, Dharmottara)의 저서 《니야야빈두 띠까(Nyāyabindu-ṭīka, 정리일적론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곧 그것은 예견적 성질(豫見的 性質, pradarśaka), 실천적 성질(pravartaka), 그리고 증득적 성질(證得的 性質, prāpaka)의 세 가지이다. 바른 인식이라면 이 세 가지 성질에 어긋나지 않는 인식이라는 뜻을 지녀야 한다. ③ ‘참이라고 확신하는 인식’은 대상의 모양대로 알기 때문에 대상의 모양대로 알았다는 자명한 확신감이 동반된다. 이에 대해 법상은 주석하기를 “바른 인식에서 인식된 대상이 인식되는 바로 그대로 틀림없이 바로 그것이라는 자명성은 바로 ‘S(주어)=P(술어동사)이다’라는 판단의 형식을 취한 주관적 확신이다”라고 한다.

(2) 정지

불을 보듯이 분명한 직접 지각일지라도 인식 자체에 ‘정오(正誤)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 이외의 어떤 다른 데에 정오 기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 《니야야빈두》에서 ‘정오 기준’이다. 그것이 추리에 의한 인식인 추론지/비량지다. 그런데 추리작용에 의해 아는 인식은 ‘개념적’이다. 연기만 보고 불을 알았을 때의 그 불은 개념적으로 상기된 ‘개념적 불’이지 결코 눈앞의 현장에서 타고 있는 빨갛고 뜨거운 ‘직접 지각적 불’은 아니다. 그러므로 추리작용에 의해 상기된 ‘개념적 불’의 인식이 바른 인식으로 증명되려면 연기가 피어나는 그 곳(산 너머나 아궁이)으로 직접 가서 타고 있는 ‘직접 지각적 불’을 보았을 때라야만 비로소 증명된다. 한마디로 비량의 정오 기준은 현량에 의해서만 분명하게 입증된다.

정지(正知, pramāṇa)에는 크게 두 가지, 곧 현량(現量, pratyakṣa)과 비량(比量, anumāna)이 있다. 현량에는 다시 감각(感覺, indri-yajñāna), 지각(知覺, manovijñāna), 자각(自覺, ātmasaṃvedana), 정관(定觀, yogijñāna)이 있다. 비량에는 두 가지, 곧 위자추리(爲自推理)와 위타추리(爲他推理)가 있다.

‘현량’이 감관적인 직감(直感)이라면, ‘비량’은 추리지다. 추리지, 또는 추리작용이란 감관에 의한 직감을 표적으로 삼고, 그 표적에 의해 감관에 직감되지 않고 다른 대상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이 추리작용에서 ‘자기 혼자만 아는 추리’가 ‘위자추리’라면, ‘남에게 알리기 위해 하는 추리’는 ‘위타추리’라고 한다.

비량은 추리작용에 의해 성립된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것은 삼지작법이다. 삼지작법이란 결론[宗, pratijñā], 소전제/이유[因, hetu], 대전제[喩, udānaraņa]이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대전제, 소전제, 결론의 순서이므로 삼지작법과 순서가 다르다. 예컨대

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대전제: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
-결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죽는다.

⑵ 삼지작법
-결론[종]: 아리스토텔레스는 죽는다.
-소전제[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
-대전제[유]: 사람은 죽는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죽었던 것처럼.

5세기에 디그나가는 삼지작법은 ‘합’과 ‘결’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여 삼지로 줄인 것이며, 이것은 앞의 5지작법에 비해 새로운 논리학이라는 의미로 ‘신인명’(新因明, nava hetu-vidyā)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도논리학’을 ‘구인명(舊因明)’이라 한다면 ‘불교인식논리학’은 ‘신인명’이라 한다.

4. 우촌의 업적, 불교인식논리학

우촌은 불교논리학을 단순히 논리학이라고 하기에 무언가 부족한, 다른 논리학과 확실히 구별되는 논리학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법칭과 법상의 전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꾸준하게 단순한 불교논리학이 아닌 ‘불교인식논리학’이라 하며, 저술과 연구물을 많이 생산하였다. 불교인식논리학을 다룬 대표적 저서로는 〈불교인식논리학 서론〉 〈불교논리학 소론〉이 들어 있는 《인도철학사상》, 〈불교인식논리학 서론〉이 들어 있는 《불교와 현대사상》, 〈바른 인식의 일반적 성격〉이란 글이 들어 있는 《현대불교사상》을 꼽을 수 있다.

번역서에도 《불교인식논리학》과 《니야야빈두: 간추린 인도 논리학, 인명입정리론》이 있다. 그런데 전자는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자료가 분실되어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법칭의 저술로 되어 있고 《니야야빈두: 간추린 인도 논리학, 인명입정리론》과 분량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같거나 아니면 비슷한 내용일 것으로 추론된다.

또 개별논문으로는 《불교학보》에 게재한 〈인식의 정(正)과 오(誤)의 기준: 불교인식논리학〉 〈인명에서의 언어와 현량과 실상〉 〈판비량론의 인명논리적 분석〉 〈한국 현대불교학의 정립을 위한 보리의 인명적 의미: 칸트의 인식론과의 비교적 측면에서〉, 《동국대학교 논문집》의 〈불교인식논리학: 서론〉, 《한인문학》의 〈인도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 그리고 일반 불교잡지 《법성》에 1975년 4월부터 그다음 해(1976) 4월까지 11번에 걸쳐 연재한 〈불교인식논리학〉 등이 있다.

이처럼 우촌은 ‘불교인식논리학’의 실상을 알리고자 여러 지면을 통해 많은 글을 썼으며, 이 글들은 ‘불교인식논리학’을 위해 평생토록 부단히 노력한 우촌의 흔적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문을식 /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객원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수식관에서 산수호흡법의 수습과정과 자연치유적 의미〉 〈유식학이 융의 분석심리학의 마음 형성에 미친 영향〉 등이 있고, 저서로 《용수의 중도 사상》 《바가바드 기따: 비움과 채움의 미학》 등이 있다. 현재 인도사회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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