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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다양한 경향과 층위의 시에 각인된 불심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 ④
[73호] 2018년 03월 15일 (목) 이경철 abkcl@hanmail.net

시의 본질과 역할을 고심한 1960년대 시

1960년대에 들어오며 우리 시는 다양한 시인에 의해 다양한 경향으로 펼쳐지며 오늘 우리 시단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다. 해방 후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리말을 배운 ‘한글세대’가 시단에 나오기 시작해 우리말로 사유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4 · 19혁명의 진작된 시민의식으로 1960년대는 출범했다가 이듬해인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되며 문학과 시에서도 현실참여 의식을 되새기게 했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과 급기야 6 · 25 동족상잔까지 겪으며 이념이나 현실 의식을 배제한 순수문학 일변도였던 문단에 순수와 참여문학 논쟁을 부르며 참여문학이 들어서고 저항문학, 민중문학으로 퍼져나간 연대가 1960년대다.

1960년대는 또 우리 시 사상 처음으로 ‘청미(靑眉)’ ‘여류시’ 등 젊은 여성 시인들이 동인을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한 연대다. 남녀의 성별 구분 없이, 아니 남성 중심 시단의 양념 격으로 맥을 유지해오던 여성 시인들이 시로써 여성의 감성과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서정 일변도의 문인협회 시단에 반기를 들고 시의 형태와 표현을 새롭게 하려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현대시동인’을 결성해 시의 현대화에 노력한 연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왜곡된 현실의 개조보다 시의 본질과 언어와 미학에 치중했다. 해서 순수와 참여, 난해시 논란을 부르며 식민과 분단, 전쟁으로 시의 본질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던 우리 근현대 시단에서 시의 본질과 현대성에 대해 깊이 성찰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마음에 저절로 물드는/ 저 살아 있는 것들의 그림자/ 있는 그대로 물드는/ 그 그림자들도/ 마음먹은 뒤에 그래요.// 마음을 먹는다는 말/ 기막힌 말이에요./ 마음을 어쩐다구요?/ 마음을 먹어요!/ 그래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마음먹으니/ 노래예요./ 춤이에요./ 마음먹으니/ 만물의 귀로 듣고/ 만물의 눈으로 봐요.// 마음먹으니/ 태곳적 마음/ 돌아오고/ 캄캄한데/ 동터요.

정현종 시인의 시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전문이다. 경어체와 대화체 어조는 물론 그 내용이 통달한 고승이 대중 앞에서 술술, 쉽게 ‘마음’에 대해 법문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시다. 그러나 ‘술술, 쉽게’ 전달되는 표현이 어디 그리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인가. 더구나 ‘마음’이라는 고단위 관념과 추상이.

1960년대는 이렇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면 현실, 우리네 끝 간 데 없는 내면의 깊이면 깊이 등을 여러 경향으로 새롭게 소통시키려 시와 시인들이 본격적으로 마음먹은 연대다. 한글세대가 주도한 1960년대 시의 각 경향과 층위에 는 우리 모국어와 사유에 유전자처럼 각인된 불교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드러나고 있다.

정진규‐언어와 이미지, 운율의 실감 드러낸 율려의 화엄세계

   

정진규 시인
(1939∼2017)

산다는 게 이리 축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해보니까 확실히 그렇다 나를 가꾸는 게 꽃이기도 하거니와 내가 그런 꽃들을 가꾸는 사람이라니! 축복이다 꽃으로 내가 날로 가꾸어지고 있다니 (중략) 꽃들에겐 이음새가 있다네 수선화 제가 다 못 멕이면 앵초에게 앵초는 달맞이꽃에게 이내 손잡아 건네는 어머니의 손, 멕이는 손, 연이어 핀다네 꽃을 가꾸어 보아야 저승까지 보인다네 저승까지 당겨져 보게 된다네 어머니가 보인다네 저승까지 당겨서 꽃밥 멕이는

정진규 시인(1939∼2017)의 시 〈율려집(律呂集) 45-꽃을 가꾸며〉다. 2008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경기도 안성으로 내려간 시인은 “음양(陰陽)이 만나는 생명의 리듬, 그 실체들의 몸짓이 빼곡하게 차 있는 비의(秘儀)의 공간으로 나의 시가 운행을 시작했다”라며 ‘율려’ 연작을 축복인 양 부지런히 쓰고 발표하다 지난해 타계했다.

위 시에서 나는 꽃을 가꾸고 꽃은 나를 가꾼다. 시인과 삼라만상은, 삼라만상 각각은 서로가 서로를 먹이며 가꾸고 있다. 이른바 우주 유기체론, 우주 상생(相生)의 생태환경론을 당위나 개념으로 외치지 않고 ‘해보니까 확실히 그렇다’며 시가 그냥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다.

정 시인은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시단에 나왔다. 대학 시절 조지훈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웠고, 또 조지훈의 스승인 만해 한용운의 전집간행위원으로 원고를 정리하면서 만해의 불교와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너무도 오랫동안을/ 공허한 벌판, 그 텅 비인 동굴 속에/ 서러운 소리로만 고여 온 당신은/ 허물어진 성터에 찌그러져 구르는 나팔./ 어쩌면 의미를 잃어버린 항아리.// 이제 투명한 예지로 열려야만 할 강구(江口)의 새벽./ 거기 나라(裸裸)히 뽑아 올릴 금빛 목청은 없는가./ 한 번쯤 나누어질 기막힌 화음(和音)의 이야기는 없는가.

신춘문예 등단작인 〈나팔 서정(抒情)〉 부분이다. 본질이며 도(道)며 화음에 닿지 못해 세상을 열지 못하는 언어에 절망하며 그런 언어와 화음을 희구하는 시로도 읽힌다. 이렇듯 정 시인은 출발부터 생명의 궁극적 실체, 도에 이르는 시의 운율과 언어와 형태와 내용에 정진했다.

어제는 안성 칠장사엘 갔다 잘 생긴 늙은 소나무 한 그루 나한전(羅漢殿)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비어 있는 자리마다 골고루 잘 벋어나간 가지들이 허공을 낮게 높게 어루만지고는 있었지만, 모두 채우지는 않고 비어 있는 자리를 비어 있는 자리로 또한 채우고 있었지만, 제 몸이 허공이 되지는 않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는 않고 허공과 제 몸의 경계를 제 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허공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었다 서러워 말자
— 정진규 〈알시 63-이별〉

등단 후 ‘현대시동인’으로 활동하며 언어와 시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던 시인은 1990년대부터 ‘몸시’와 ‘알시’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나와 대상의 경계이면서도 그 둘을 껴안는 몸과 둥그런 알, 그리고 그런 몸과 알을 행과 연 나눔으로 끊어지지 않고 둥글게 이어주기 위해 산문시를 개척하게 된다.

안성 칠장사 나한전 뒤뜰 노송을 소재로 한 위 시에서 비움과 채움, 있음과 없음이 음양의 한 짝처럼 서로서로 채우고 의지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상반되는 것을 하나로 끌어안은 것, 불이(不二)를 몸으로 발견한 것이다.

나의 안과 밖, 마음과 육체,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곳이 몸이다. 나와 우주가 만나는 곳이 몸이다. 사물의 안과 밖이 만나는 곳이 몸이다. 현실과 꿈이 만나는 곳이 몸이다. 몸은 안과 밖, 순간과 영원이 만나는 구체적 공간이며 실체다. 그런 화엄세계의 실감을 산문시의 직정적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끊임없는 운율과 형태로 드러낸 율려시를 선보이다 정진규 시인은 갔다.

정현종‐고해(苦海)를 가볍게 건네주는 시의 위안과 감동

   

정현종 시인
(1939∼ )

주고받음이 한 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서/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정현종 시인(1939∼ )의 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전문이다. 앞서 잠깐 살펴본 시 〈마음먹기에 달렸어요〉에서는 마음을 먹으라 했는데, 이 시에서는 마음을 버리라 하고 있다. 버려야 차는 게 마음이고, 비워야 먹을 수 있는 게 마음이라고. 이렇게 마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며 만물도 만물대로 자연스레 놀게 놔두며 많은 애독자와 소통하는 시인이 정 시인이다.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해 실존철학에 심취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정 시인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다. 등단 초기, 전후(戰後)의 허무주의적 포즈와 재래적 서정시 미학을 극복한 자리에서 출발한 시인은 오랫동안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초기 시선집 《고통의 축제》 제목처럼 ‘고통’과 ‘축제’라는 이율배반을 동시에 아우르는 시적 탄력성으로, 마침내 고통을 축제로 뒤바꿀 수 있는 시를 통해 인간의 삶도 그렇게 환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무거운 삶을 가볍고 환하게 들어 올리는 시, 그래서 덧없는 삶, 고통까지도 환하게 투사해 축제가 되게 해 고해(苦海)를 건네주는 시와 언어를 ‘깃-언어’ ‘빛-언어’라 스스로 명명하며 그런 시 세계를 열어젖혔다.

방 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 정현종 〈무한 바깥〉

깃털같이 가벼운 언어, 만물을 삼투하는 빛 같은 시를 얻기 위해 정 시인은 위 시에서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언어와 사유에 갇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만물과 어우러진다. 온몸으로 우주가 보내는 파동을 감촉하며 그들과 한 몸임을 실감으로 감동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만남을 중히 여기는 우리 국민이 애송하는 시 〈방문객〉 전문이다. 지난해 중국서 열린 한중정상회담에서도 낭송돼 화제를 모은 이 시도 마음을 다루고 있다. 지금 우리네 마음의 단면을 잘라보면 과거의 추억과 현재와 미래의 예감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세인연처럼 중첩돼 있다. 마음뿐 아니라 삼라만상 모두가 그런 마음, 연기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대상과 직접 온몸으로 만나는 마음을 의미의 얽매임에서 풀려난 언어의 실감으로, 가볍게 보여주는 시인이 정현종 시인이다.

오세영‐은산철벽을 깨뜨리는 지성과 감성의 중도(中道)

   

오세영 시인
(1942~ )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 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오세영 시인(1942~ )의 시 〈은산철벽〉 전문이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란 불가에서 화두를 잡고 수행할 때 말과 생각이 꽉 막혀 나아갈 수도 돌아올 수도 없는 절대상황을 이른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이 절대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갈 때 은산철벽은 깨지고 진여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위 시는 높은 미루나무 가지 끝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한 마리 새의 풍경에서 그런 백척간두의 극한 상황을 보고 있는 시이다. 이율배반의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상상력으로 참진 세계를 탐구해오는 시인이 오 시인이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나온 오 시인은 ‘현대시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부터 이어온 시 정신을 살필 때 〈그릇〉과 〈무명연시(無明戀詩)〉 연작을 빼놓을 수 없다. 있음과 없음, 참과 빔, 이성과 감성, 사랑과 증오, 물과 불 등 모든 이율배반, 모순된 존재를 반죽하여 시라는 그릇으로 구운 시가 〈그릇〉 연작이다. 시인의 시구대로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영혼의 형식”(〈들끓는 물〉 부분)이 그릇이다. 그러면서도 그릇같이 틀에 갇힌, 정형화된 현실을 깨뜨리고 자유와 순수한 영혼의 세계를 보여주려 시인은 출발부터 절제와 균형의 중도에 서 있었다.

새벽 세 시/ 강물이 강물로 흐르고/ 바다는 바다로 푸르고/ 까투리 장끼 곁에 눕고/ (중략)/ 세 시에 깨어/ 경(經)을 읽는다.// 일(一)은 다(多)이며 다(多)는 일(一)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의하여 가르침을 알며, 비존재는 존재이며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모습이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며, 본성이 아닌 것이 본성이며 본성이 본성이 아니며……// 화엄경(華嚴經)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 그 말씀./ 아, 가슴으로 내리는 썰물 소리/ 갈잎 소리.

〈무명연시 43〉 부분이다. 《화엄경》을 읽으며 그 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시다. ‘무명(無明)’은 부처나 보살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 그래서 고해(苦海)를 헤어나지 못한 상태를 이른다. 그런 무명 상태에서 연애시 형식을 빌려 깨달음으로 나가고 있는 시가 ‘무명연시’ 연작이다. 위 시에서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고 있지 않은가.

오 시인은 승려들이 여름, 겨울 한 철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에 들듯 여름, 겨울이면 미황사, 구룡사, 백담사 등 깊은 산 속 산사(山寺)에 들어 용맹정진하며 시를 써오고 있다. 동서양 시론에도 정통한 서울대 시학 교수로 《현대시와 불교》 등 저서와 논문, 평문 등을 통해 우리 현대시에서 불교적 요소를 찾아내기도 하고 젖줄을 대주기도 하는 시인이다.

새들은/ 누군가가 이미 낸 길은/ 가지 않는다.// 새들은/ 길 아닌 길도 길임을 아는 까닭에/ 결코/ 뒷걸음을 치지 않는다.// 새들은 스스로/ 제 몸을 버려 가벼워질수록/ 더 무거운 짐을 끌 수 있음을 안다.// 줄도 매달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날아/ 망막한 우주로 쉼 없이/ 지구를 끌고 가는/ 새.

근래에 발표한 〈새 2〉 전문이다. 하늘, 허공의 길 없는 길을 나는 새를 빌려 삶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을 주고 있다. 네 번이나 반복된 ‘길’은 새의 길이며 삶의 길이며 시인의 길이며 우주의 길, 도(道)임을 어렵잖게 알 수 있게 한 시다. 그 길을 내고 끌고 나는 새에서 어렵잖게 불교의 불, 법, 승 삼보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는 시다.

홍신선‐고단위 추상의 불교적 핵심을 활물화한 시편들

   

홍신선 시인
(1944∼ )

올겨울 제일 춥다는 소한 날/ 남수원 인적 끊긴 밭 구렁쯤/ 마음을 끌고 내려가/ 항복 받든가/ 아니면/ 내가 드디어 만신창이로 뻗든가// 몸 밖으로 어느 틈에 번개처럼 줄행랑치는/ 저/ 눈치꾸러기 그림자

홍신선 시인(1944∼ )이 1990년대 들어 선보이기 시작한 〈마음경(經)〉 연작시 첫 편인 〈마음경 1〉 전문이다. 마음 하나 들여다보고 붙잡으려 용맹정진하는 시인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드러난 시다. 마음을 개구쟁이 시절 싸움 친구쯤으로 의인화시켜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붙잡으려 하면 빠져나가는 마음, 그 형이상학적 본질을 천착하고 있는 작업이 ‘마음경’ 연작이다.

홍 시인은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1965년 《시문학》을 통해 데뷔했다. 서정주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우고 불교 영향을 강하게 받은 대학을 나왔으나, 홍 시인의 시는 기존의 불교시와는 다르다. 불교적 소재나 취향쯤의 군불만 쬔 게 아니라 마음과 공(空) 등을 위 시에서처럼 의인화, 활물화시키며 불교의 핵심에 직격해 들어가는 시인이 홍 시인이다.

죽으면 어디 강진만 갈밭쯤에나 가서/ 육괴(肉塊)는 벗어서/ 시장한 갯지렁이 시궁쥐들의 뱃속이나/ 소문 없이 채워주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 찬 뼈 두 낱 정도로 견디다가/ 언젠가는/ 그것도 다아/ 이름 없는 불개미떼나 미물들에게 툭툭 털어/ 벗어줄 일이지// 쇠막대 울 앞/ 애꿎은 시누대들만 수척한 띠풀들 사이 끌려 나와서/ 새파랗게 여우눈 맞고 있다.
— 홍신선 〈부도(浮屠)〉

고승들이 죽으면 사리를 안치한 탑이 부도다. 이름난 사찰에 가면 그 이름값 하듯 부도들도 즐비하다. 그런 부도에 참배는커녕 비아냥거리고 있는 시다. 부도를 남겨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신우대 등 자연에도 못 할 짓 하지 말고 살아생전 공양해준 천지간 미물들에게 다시 공양해주는 것이 우주 인드라망을 위해서도 낫고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는 것 아니겠는가.

겹창 너머 독한 싸락눈 날리다 그치고// 천근 같은 적막에/ 추운 살 하얗게 깎이우는/ 매화 마른 줄기/ 말 시키면 입 꾹꾹 다문다./ 입을 지운다.// 앞뒤 좌우/ 성근 꽃잎들 헤쳐 보아도/ 너는 누구인가/ 안 보이고,/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이 현실의 뒷마당은 어디인가./ 뒷 면상은/ 누구인가// 문득/ 출처 모르게 내민 밥풀만 한 혀,/ 열쇠구멍,/ 누군가 내다보는.
— 홍신선 〈허공을 쳐부수니 안팎이 없고〉 부분

제목을 보면 고승의 활달한 득도송(得道頌)처럼 보이나 한겨울 핀 매화와 적막 속에 말을 나누고 있는 시다. 허공 너머, 앞뒤 좌우 없이 원만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본 것 같은데 그냥 입 다물고 있는 시다. 입 열면 흔적 없이 사라질 그 언어도단의 지경을 솔직하게, 긴장되게 전하고 있는 시다. 시인의 개결한 마음의 언어, 이심전심으로 불교의 핵심에 직격해 들어가는 시인이 홍신선 시인이다.

박제천‐몸 바꿔가며 만물과 즉물적으로 어우러지는 극락

   

박제천 시인
(1944∼)

신새벽 머릿속 환해지는 노을/ 먹바다 지우며 솟구치는 아침 해/ 무지개처럼 명랑한 낮달/ 마침내 이 세상 누구나 입 다무는 화엄 어둠// 그리하여 그리운 그대,/ 마음대로/ 눈이 내리면 눈/ 비가 오면 비// 번개 치면 번개/ 우레 울면 우레// 내가 바로 그대인즉/ 좋은 날, 노을 속, 해도 되고, 달도 되고,/ 선녀 별도 되네, 신선 별도 되네,/ 극락이 따로 없네.

박제천 시인(1944∼)의 시 〈풍류세상〉 전문이다. 제목에 드러난 풍류(風流)는 문자 그대로 바람과 물같이 자연스레 흐르는 것이다. 나무며 돌이며 인간이며 고정된 형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며 물같이 형체 없이 흐르며 삼라만상을 몸 바꾸게 하는 것이 풍류요 우주의 도(道) 아닐 것인가.

신라 최치원이 화랑의 비문(碑文)에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고 기록해 전해준 유불선(儒佛仙)의 모체가 되는 도. 햇살과 노을과 바람과 물과 한 몸으로 살다 신선이 됐다는 단군 이래의 우리 민족의 도가 바로 풍류도다.

그런 풍류세상을 제목으로 내건 위 시는 신새벽부터 밤까지 삼라만상이 두루 환하고 즐겁다. 어둠까지도 화엄, 극락으로 동어반복의 세상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노을도 아침 해도 낮달도 별도 선녀도 신선도 시인도 몸 바꾸어가며 한 몸으로 영겁의 풍류를 그리운 이와 연애하듯 즐기고 있다.

박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해 1970년 《현대문학》에 33편의 ‘장자시(莊子詩)’ 연작을 발표하며 동양정신과 쉬르리얼리즘 언어와 기법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 연작으로 단박에 ‘장자시인’으로 불리며 동서양 고금의 사상과 지성, 기법을 넘나들고 있는 시인이다.

“불교와 시는 같은 몸의 나누어진 두 얼굴처럼 생각되었다. 시를 쓰기 위해서 부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부처가 되기 위해 부처의 말씀을 풀어나가는 것인지 나 자신조차 어리벙벙할 정도로 저들의 경전을 두루 읽게 되었다.”

이렇게 밝힐 정도로 박 시인의 시의 뿌리는 불교. 불교 경전에 끊임없이 나오는 ‘무(無)’ 혹은 ‘공(空)’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어떻게 표현할까가 화두가 돼 그걸 쉽게 풀기 위해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며 풍류로 흘러든 것이다.

문득 공중에 떠 있는 공 하나를 보았다/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저것이 갑자기 총구의 이빨을 드러내든/ 성 미카엘, 성 어거스틴의 머리 위에 빛나는 광채이든/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중략)// 너무도 심심해서/ 낮이면 해가 되고, 밤에는/ 달이 되어 세상만사를 다 구경하든 말든/ 나도 산을 보면 산, 물을 보면/ 물이 되며, 그렇게/ 내 만나는 것들과 몸을 섞으며 살기로 했다
— 박제천 〈공에게, 나에게〉 부분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시다. 공이 추상적, 형이상학적인 공(空)이든 구체적, 형이하학적인 공놀이하는 공이든 상관없다. 명(名)과 실(實), 나와 대상 등 이분법을 뛰어넘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경지에서 모든 것과 한 몸으로 살고 있는 시다.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며 깨침까지도 무화(無化)시켜가며 화엄세상에서 즉물적으로 즐겁게 어우러지고 있는 시인이 박제천 시인이다.

문효치‐천수관음 같은 대자대비에서 우러난 연민과 그리움

   

문효치 시인
(1943∼ )

그렇지, 님을 실어 저승으로 저어가던 한 척(隻)의 배가 세월의 골 깊은 앙금에 익어 지금 여기에 머무르다. 이별을 서러워하던 혈육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채 쉬임없이 들려오는 창생(蒼生)의 울음소리, 짭짜름한 저승의 바람 냄새가 잡혀와, 그렇지, 우리가 또 빈손으로 타고서 아스름한 바다를 가르며 저어가야 될 한 척의 배가 여기에 왔지.

문효치 시인(1943∼ )의 시 〈무령왕의 목관(木棺)〉 전문이다.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1966년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돼 등단했다. 1971년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1,500년 전에 죽은 자들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지는 유물을 보면서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며 불교를 찬란히 꽃피웠던 백제를 현재화하고 있는 시인이다.

위 시에서도 단박에 ‘그렇지’라는 대긍정의 감동으로 백제로 가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배에 올라타고 있다. 이제는 가버려 썩어 문드러진 줄 알았던 불교적 유토피아를 백제의 목관에서 구체적으로 만나고 있다.

개개비 쑥꾹새/ 딱정벌레나 딱정벌레의 새끼들도/ 언제나 몸부림치며 살지만/ 이 길에 들어서면/ 환한, 아주 아주 환한 금빛이 된다.// 길을 가다 말고 앉아서/ 그가 생각하는 것은/ 로댕의 저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과는 달라서/ 저 미물의 목숨./ 목숨의 애틋함에까지도 닿아 있다.
— 문효치 〈백제시-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부분

생각에 잠긴 채 걸터앉아 있는 금동미륵보살상을 소재로 한 시다. 아니 ‘그’라는 보살상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유가 아니라 개개비며 쑥꾹새, 딱정벌레 같은 미물까지도 혈육처럼 애틋하게 여기는 생각이다. 이때의 생각은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사는 뭇 생령을 자신의 몸같이 여기고 돌보는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의 대자대비행(大慈大悲行)이 된다.

이때 시는 서구의 메타포를 넘어서게 된다. 비유나 은유로 세계를 인간 편으로 끌어들이는 독단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이 무등하게 나열되게 된다. 해서 위 시에서 ‘그’는 ‘보살’이면서 ‘미물’이면서 또 시인인 ‘내’가 되게 된다.

구름의 모양이/ 바뀔 때마다/ 산은 몸을 틀었다// 산사나무 층층나무 아그배나무 등속/ 뿌리를 내린 것들도/ 함께 몸을 흔들었다// 나무에 붙은/ 자벌레 송충이 비단거미들도/ 모두 놀라 일어나 어정거리고 있었다/ 생명은 구름과 산과 나무와 벌레들에게/ 모두 한 줄로 연결되어

너와 나, 삼라만상이 한 끈으로 연결된 유기체, 우주 인드라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시 〈끈〉 일부분이다. “아프다/ 모서리가/ 아직도 쨍그랑 소리……// 깨어져/ 떨어져 나간/ 저쪽 편 몇 조각// 안부가/ 더 궁금하다/ 서리 같은/ 그리움”(〈사금파리〉 전문)에서와 같이 원래 한 몸이었다가 사금파리처럼 깨어져 지금은 헤어진 것들, 연인이며 친구며 꽃이며 벌레 같은 미물 등을 향한 우주에 미만한 그리움, 애틋함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서정화하는 시인이 문효치 시인이다.

이승훈‐서구적 아방가르드의 백척간두에서 만난 선(禪)

   

이승훈 시인
(1942∼2018)

너무 날씨가 좋아/ 밖에 나와 하늘 한번 보네/ 무슨 말도 그리움도/ 없어라/ 삶과 죽음 모두 잊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는 것/ 이런 날은 귀신이 잡아가도/ 그만이지/ 모두 나도 모르는 일/ 맑은 바람 맑은 해/ 그대가 내 친구 내 이웃/ 내 애인이므로/ 날씨가 너무 좋아/ 글 쓰다 말고 밖에 나오니/ 간 것도 없고/ 온 것도 없네/ 이미 떠났지만 여기 있고/ 여기 있지만 이미 떠난 것/ 오늘 이 햇빛 속엔/ 오고 감도 없어라/ 천진(天眞)이여/ 내 몸 그대에게 맡기고/ 세상이나 한 바퀴 돌고 오자

이승훈 시인(1942∼2018)의 시 〈천진(天眞)〉 전문이다. 날씨 좋은 날 맑은 해와 바람과 물과 한 몸이 되어 자연스레 흐르는 시다. 그러면서 유독 ‘천진’만을 내세우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런 오고 감도 없는 ‘천진’을 불생불멸의 참된 마음으로 보고 있다. 이 시인은 지난 1월 몸은 자연의 친구들에 맡기고 천진이 됐다.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 시인은 ‘현대시동인’으로 활동하며 모더니즘 시에 앞장섰다. 시뿐 아니라 서양 최신의 철학과 문학이론을 수렴하며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시 등 우리 시 최전선에서 아방가르드를 창작과 이론으로 이끌었다.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불교와 선을 접목시키며 우리 시 고유의 아방가르드를 개척한 시인이다.

자아, 대상, 언어를 꼭짓점으로 한 삼각형 구도의 시의 세계에서 세 꼭짓점의 본질을 탐구하며 하나씩 지워나가 자아도 없고 대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서구적 아방가르드 끝에서 만난 것이 선. 아방가르드의 방법론에서 그 방편의 잔도마저 태워버리고 선의 본질로 들어와 위 시와 같이 가고 옴도 없고, 있고 없음도 없는 마음의 본래, 천진으로 편안히 돌아온 것이다.

“〈반야심경〉은 나, 자아에는 고정된 실체, 본질, 자성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공(空)이고, 공은 자아가 인연의 화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야지혜는 자아가 자성이 없는 공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분별, 사량, 알음알이를 떠나야 하고, 순진한 아이들의 청정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반야지혜는 지식, 머리와는 관계없기 때문이고 머리로 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선은 깨달음과 미혹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경지”라는 것을 평생의 민감한 시 쓰기와 공부로 깨닫고 천진의 세계로 천진하게 넘어간 시인이 이승훈 시인이다.

오규원‐선적 직관의 날이미지로 드러낸 두두물물의 실상

   

오규원 시인
(1941∼2007)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오규원 시인(1941∼2007)의 시 〈부처〉 전문이다. 산 전체가 신라시대 화려한 불교박물관이랄 수 있는 경주 남산에 서 있는 돌부처를 그리고 있는 시다. 부처를 그린 시라면 으레 어떤 불심이나 신심이 들어 있어야 하는데 대상과 현상 그 자체만 묘사하고 있다. 풍경과 새가 똥 누고 간 사건을 있는 그대로 그릴 뿐 시인의 마음은 시 어느 구절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도 눈 밝은 독자들은 부처의 본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는 시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오 시인은 처음부터 기성 시의 문법을 파괴하는 해체파 시인으로 일관해왔다. 언어와 형식 양 측면에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항상 새로운 시로 나간 아방가르드 시인이다. 사물에 인간의 감정을 배제하며 있는 그대로 그린 ‘날(生)이미지’란 말을 만든 시인이다.

위 시 〈부처〉도 그런 날이미지 시다. 코도 입도 문드러져 가는 돌부처의 날이미지에서 우리는 왜 부처의 본모습을 본 듯도 한가. 선에서 말하는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이라, 모든 사물 하나하나 모두 다 도고 진리, 즉 제법실상(諸法實相)이기 때문이다. 그래 똥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있는 물건도 부처요, 돌부처에 똥을 누고 날아간 새도 또 부처 아니겠는가 하고 깨닫게 하는 시다.

그래 시인은 “있는 그대로 읽으라. 내 시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의 세계다. 모든 존재가 참이 아니라면 그대도 나도 참이 아니다”고 말하며 날이미지로 두두물물의 세계를 보여줬다. 선(禪)이란 무엇인가. 파자(破字)해 보면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아닌가. 그런 선적 시선에 잡힌 게 날이미지다.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

떨군 것은 다 떨군 맨몸으로 한겨울 눈보라 속에 묵묵히 서 있는 나목들을 보며 버리기가, 떨구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고 있는 시다. 비유며 상징 등 인간의 관념이나 사량(思量)들을 극구 배제하며 두두물물의 날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인도 ‘죄’가 되어 두두물물로 끼어들고 있는 시다.

“날이미지의 시 세계는 돈오의 세계가 아니다”라고 했던 시인이 자신의 깨달음, 혹은 깨닫지 못한 무명의 세계까지 구체적 현상으로 보여주며 그것마저도 두두물물의 천진임을 보여주고 간 시인이 오규원 시인이다. 이승훈, 오규원 시인이야말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 기성 시에 반기를 들고 매양 사물과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아방가르드의 첨예한 시의식으로 시선일체(詩禪一體) 지경에 자연스레 이른 시인들이다.

허영자‐민족 심성에 밴 불심의 자연스러운 서정화

   

허영자 시인
(1938∼ )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실/ 따라서 가면/ 가슴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 내올 듯// 머언/ 극락정토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허영자 시인(1938∼ )이 1966년에 펴낸 첫 시집에 실린 시 〈자수(刺繡)〉 전문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요즘도 많이 애송되고 있는 시다. 수를 놓는다는 여성적 소재에 여성적 감성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민족 심성에 알게 모르게 수처럼 놓인 선(禪), 마음공부가 이 시를 보면 쉽고도 정갈하게 다가온다.

허 시인은 민족의 정한이 밴 모국어를 운율감 있게 잘 살려낸다는 평과 함께 박목월 시인 추천으로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듬해 한국시사상 최초의 여성시 동인 ‘청미(靑眉)’를 결성해 여성시의 신서정 시대를 열어간 시인이다.

인연은 질겨라/ 두렵기도 하여라// 전생에 내가 빗던/ 참빗 얼레빗// 이승까지 따라온/ 하늘 위의 조각달// 내 마음이 헝클리나/ 지켜보고 있구나.

얼레빗처럼 생긴 조각달을 보고 인연설을 떠올리고 있는 시 〈빗〉 전문이다. 윤회는 물론 그래서 마음 가지런히 해야 한다는 불교적 심성이 이끌고 있는 시다.

검은 새떼들/ 멀리 날아가버린/ 빈 하늘은/ 몇만 리//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득히 사라져버린/ 마음속 빈 하늘은/ 또 몇만 리.”
— 허영자 〈이순(耳順)을 넘어〉

노년의 마음속 풍경을 아주 솔직하게, 서정적으로 그린 시다. 모국어의 정한과 운율이 빈 하늘 하얀 여백에 먹의 농담(濃淡)이 수묵화 한 점으로 번져 가는 극서정 미학의 절창이다. 그 ‘빈 하늘’ 여백의 울림에서 어쩔 수 없이 절간의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듯 불교가 바탕에 깔린 시다.

지금은/ 가만한 응시의 시간입니다/ 별도 하늘도 땅도 사람도/ 새로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사랑, 행복, 슬픔, 인연/ 모두 새로 출발하는 시간입니다//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모두 가엾어 눈물 나는 시간입니다/ 무한 영원의 한 끝에서/ 제가 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허 시인이 지난가을 펴낸 연작시집 《마리아 막달라》에 실린 〈가만한 시간〉 전문이다. 창녀 출신으로 예수의 제자가 돼 마지막을 지켜본 그 여인의 서사를 빌어 시인의 원과 한을 펼친 연작시 27번째인 위 시에서 우리는 성경 속 여인이 아니라 생각에 잠긴 미륵반가사유상이나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을 보는 것 같다. 이처럼 허 시인의 시 중에는 우리 심성에 밴 불교를 모국어와 운율에 실어 서정화하고 있는 시편들이 많다.

김초혜‐인간적인 애증의 사랑굿, 그리움으로 이른 열반의 지경

   

김초혜 시인
(1943∼ )

꽃이거나/ 꽃이 아니거나// 바람이거나/ 바람도 아니거나// 지우거나/ 그려내거나// 천만 가지 마음의 형태다// 빛이거나/ 어둠이거나

김초혜 시인(1943∼ )의 시 〈마음의 형태〉 전문이다. 삼라만상은 다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를 드러낸 시다. 그것도 ‘이다, 아니다’로 상반된 관념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불교 특유의 문법으로.

동국대에서 서정주 시인한테 시를 배우며 196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김 시인의 시에는 불교가 배어 있다. 불교 교리나 관념, 문법이 아니라 살며 시 쓰며 겪은 마음앓이의 체험을 통해 쉽고 감동적으로.
1960년대 시인으로서 김 시인도 처음에는 시를 어렵게 썼다. 그러나 시인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것을 대충 어렵게 쓰는 것은 ‘가짜 시’임을 알고 시의 최고의 덕목인 감동의 소통으로 돌아와 〈사랑굿〉 연작시집 등을 공전의 베스트셀러로 만든 시인이 김 시인이다.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 김초혜 〈가을의 시〉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끼는 “적막 세계”야말로 불교 최고 경지인 적멸이며 열반 아니겠는가. 사랑과 증오, 몸과 마음 등 상반의 양쪽을 인간적으로 괴로워하며 김 시인이 시로써 이룬 경지다. 때문에 이 경지는 종교적, 초월적이기보다 “묵은 그리움이” “허둥대던 세월”이 나부끼는 늦가을의 정취, 인간적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꽃잎 하늘하늘 흩날리며 지지 않고 목채 뚝뚝 진 동백꽃을 보고 쓴 〈동백꽃 그리움〉 전문이다. ‘그리움’ 하나로 너와 나, 이승과 저승을 잇고 있는 시다.

아직 피어 있고, 이미 땅에 떨어져 누운 꽃은 다른가. 그대와 나는 다른가. 아니다. 서로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가 되기를 희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동백꽃도, 그대도, 그대를 바라보는 시인도 모두가 한 몸, 한마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시다.

애증의 마음앓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솔직히 보여주면서 그 아픔, 그 한계가 다시 그대와 합치되게 하는 힘은 그리움. 그 괴로움과 기쁨의 모순된 에너지가 충만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인간적인 사랑굿판을 펼치며 열반의 지경에 이르고 있는 시인이 김초혜 시인이다.

김지하‐이 땅에 극락정토를 이루려는 생명과 살림의 시

   

김지하 시인
(1941∼ )

대흥사 동백은/ 날 위해 피었는가// 대흥사 동백 위해/ 내 가슴속 피멍 여기 피었는가// 모든 것 다 잃었는데/ 사슬소리는 여전히 거느리고// 피안교 건너가는 내게/ 동백이 오네// 붉은 붉은 꽃사슬 두른/ 동백숲이 내게 오네// 아/ 맵디매운/ 동백꽃 떨기들/ 피안교 너머 내게로 밀려오네

김지하 시인(1941∼ )의 시 〈겨울 거울 3〉 전문이다. 1960, 70년대 민주화 투사 시인의 상징으로서 독재에 맞서 싸우고 그런 시를 발표하다 해남 대흥사로 숨어들어와 쓴 이 대목 참 처연하다. 오죽하면 붉고 찬란한 동백꽃 숲마저 몸을 옥죄는 사슬로 보며 그런 동백꽃과 한 몸이 돼가고 있겠는가.

1969년 《시인》을 통해 등단한 김 시인은 데뷔작 〈황톳길〉에서부터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중략)/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라며 독재에의 저항 의지를 불태웠다. 죽임의 세력에 대항해 만물을 살리는 길을 시와 행동으로 택한 것이다. 무속이나 동학 등 민족종교, 그리고 판소리 등의 민족예술 형식을 차용한 김 시인의 시 세계와 형식은 민중시와 민중예술로 확산해갔다.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붙잡혀 감옥 사형수 독방에 갇혔을 때 쓴 시 〈생명〉 전문이다. 건듯 바람에 솟구쳐 둥둥 떠다니던 민들레 홀씨가 감방 콘크리트 창틀에 뿌리내렸다. 캄캄 벼랑에 걸린 목숨의 마지막 자리. 그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생명을 김 시인은 보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생명의 기쁨도 슬픔도 모두 희망임을 민들레와 한 몸이 되어 깨닫고 있는 시다. 이렇게 김 시인의 시는 저항을 넘어 죽임의 세력까지도 껴안는 생명과 살림의 화엄세계로 나아간다.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 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이 땅을 화엄세계로 가꾸려 투쟁하고 살리고 껴안은 모든 것을 불가의 구도 그림인 ‘심우도(尋牛圖)’에 빗대 서정시화한 장편 연작시 〈애린〉 중에서 〈그 소, 애린 50〉 마지막 대목이다. 심우도에서도 찾아 나선 소가 바로 자기, 자신의 참된 마음이듯 투쟁 현장이며 거리거리를 헤매다 찾은 ‘애린’도 결국은 시인이며 본디의 마음이었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의 시 세계에 드러난 이런 생명과 살림의 불교적 화엄세상은 1970, 80년대 죽임의 독재정권에 맞선 민중시 세계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게 된다. ■

 

이경철 / 문학평론가 · 시인.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10년 《시와시학》(시) 등단.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등과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이 있다. 현대불교문학상(평론 부문),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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